◈섬김 여러 설교문에서 스크랩
◑사람의 위대함은
무디(D. L. Moody)는
“사람의 위대함은 그가 얼마나 많은 종을 데리고 있느냐가 아니라
오히려 그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섬기는가에 따라 판가름난다.”고 말합니다.
섬기면 불행해 지는 것이 아닙니다. 손해 보는 것이 아닙니다.
섬기는 자가 오히려 크게 되고, 종이 되는 자가 오히려 으뜸이 된다는
역설적 진리를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자녀가 탈선하는 것은, 부모가 부모의 권위만 앞세우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남을 섬길 줄 모른다면 실패자입니다.
한 사람의 위대함은 많은 것을 성취했느냐에 달려 있지 않고
얼마나 많이 섬기며 살았느냐로 평가됩니다.
현대교육은 저마다 최고의 엘리트가 되라고만 강요합니다.
서로 라이벌로 여겨 미움과 증오뿐이며 사랑과 협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남을 배려하고, 섬길 줄 아는 자녀로 가르치는 것이야말로
자녀를 성공으로 인도하는 길이 됩니다.
◑「섬기는 부모가 자녀를 큰사람으로 키운다」
오바마 미국 행정부에서 보건부 보건담당 차관보에 고경주 박사,
국무부 법률고문에 고홍주 박사를 지명하자
두 아들을 키워낸
어머니 전혜성 박사의 교육법이 세간에 화제입니다.
그러나 그녀는「섬기는 부모가 자녀를 큰사람으로 키운다」라는 책을 통해
이미 자녀교육법을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그녀는 이화여대 2학년 때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사회학 박사와 인류학 박사 학위를 받고
교수로서 생활하면서 여섯 아이를 길렀습니다.
자녀들 모두 하버드대와 예일대를 졸업하고
미국 최고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미국무부 차관보,
매사추세츠 주 보건 후생부 장관,
하버드 대학 공공보건대학원 부학장,
예일대 법대 학장 등을 역임하고 있습니다.
모범적이고 성공적인 가정으로
미국 교육부가 동양계 미국인 가정교육 연구 대상으로 선정할 정도로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전박사는 자녀 교육의 비법을 <섬기는 리더십>으로 기를 것을 강조합니다.
자녀를 진정한 리더로 키우기 원한다면.. 부모가 먼저 섬기고,
서로를 섬기고, 자녀를 섬기며, 더 나아가 남을 섬기고 사회를 섬기라고 말합니다.
"남을 돕고 베푸는 과정에서, 아이 스스로 오히려 힘과 지혜를 얻게 되고,
부모가 먼저 남을 배려하고 봉사한다면
아이는 굳이 애쓰지 않아도 바르고 훌륭하게 자라날 것이다.
또한 섬기는 법을 아는 아이가 세상의 섬김을 받고,
섬기는 부모가 자녀를 큰사람으로 키운다" 라고 강조합니다.
◑만약 당신이 다시 살 수 있다면?
미국의 사회학자인 안토니 캠보로 박사가 95세 이상을 산 50명에게
설문을 보내서 연구조사를 했답니다. 그 질문은 이렇습니다.
“만일 당신이 다시 한 번 살 수 있다면, 어떻게 살 것입니까?”
이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음 세 가지로 대답했습니다.
아마 여러분의 답도 이 세 가지 중에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첫째, 늘 여유를 가지고 삶을 돌아보며 살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바쁘고 정신없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을 되돌아보면서, 보다 값진 삶을 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둘째, 좀 더 모험을 하며 살고 싶다고 했습니다.
현실 처리에만 급급한 것이 아니라
멀리 바라보고 좀 더 모험심을 가지고 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셋째, 죽은 뒤에도 이름을 남길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내 삶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은 다음에도 내가 한 일과 내가 살아왔던 삶이
남에게 도움과 모범이 되도록 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섬김과 봉사의 삶이야말로, 후회 없는 삶을 살게 합니다.
◑테레사 수녀의 소명 받은 계기
테레사 수녀가 인도에서 처음 20년 동안은 칼카타의
가장 부유층 자녀가 다니는 사립학교에서 가르치면서
자신의 일과 신앙생활이 부족하지 않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길을 가다가 한 여자의 비명을 듣게 됩니다.
즉시 병원 치료를 받지 않으면 위험한 환자였습니다.
첫 번째 병원에서는 돈이 없다고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 병원에서는 그녀의 계급이 낮아서 받을 수 없다고 거절당했습니다.
세 번째 병원으로 가는 도중, 이 여인은 테레사 수녀의 품에서 죽어갔습니다.
그 죽어가는 여인을 보면서
그날 밤 테레사 수녀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원하셔서
자신을 부르신다는 것을 깨닫고 순종했습니다.
대책은 없었습니다.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으니까요.
그냥 어려운 사람, 죽어가는 사람 옆에만 있어 주기로 하고 시작한 것이
테레사 수녀의 사역입니다.
그 순종이 그녀의 전 생애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국적을 초월하고, 아군/적군을 초월하여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았던 앙리 뒤낭 1800년대 중반에 스위스 출신의 실업가요 은행가인 한 사람이 더 많은 돈과 권력과 명예를 얻기 위해, 나폴레옹 3세가 있는 불란서로 갔습니다. 그의 야망은 나폴레옹 3세를 만나서 불란서와 스위스의 경제협력을 맺고서 유럽 대륙의 부의 중심부에 서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파리에 도착했을 때, 나폴레옹 황제는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위해 이미 이탈리아 북부로 떠난 뒤였습니다. 그가 나폴레옹을 따라 전선으로 나갔다가, 치열한 전투의 장에서 즐비한 양국군의 시체와 피 흘리는 부상병들의 참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며칠 후 그는 이 전장을 떠나면서 그 동안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던 새로운 꿈을 갖게 된 것입니다. ‘적군과 아군을 막론하고 부상당한 군인들을 치료하고 돌보는 일을 해야 되겠다.’ 나아가 그는 민족과 인종을 뛰어 넘는 진정한 화해와 평화를 이룰 방법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국제 적십자 운동이 탄생하게 된 배경으로 이 분이 바로 적십자 운동을 창시한 앙리 뒤낭(Jean Henri Dunant) 이었습니다. 원래는 돈벌이하러 갔다가 전장터의 비참한 부상당한 병사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그는 세계 적십자사를 만들어서 적군이나 아군의 구분 없이 사랑으로 돌보아주는 운동을 펼친 것입니다. ◑일본의 쉰들러, 스기하라 영사 1940년 여름 독일군이 폴란드를 점령했습니다. 그러자 폴란드에 살고 있던 많은 유태인들이 인접한 나라 리투아니아로 피난을 왔습니다. 그러나 그곳 역시 안전한 곳은 못되었습니다. 언제 독일군이 침공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리투아니아에 있는 각국 영사관에도 (전화를 피해) 이미 철수가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유태인들은 또 다시 다른 나라로 탈출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러려면 입국을 허락하는 나라의 비자가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비자를 발급하는 각국 영사관들은 이미 문을 닫은 뒤였고, 접촉이 가능한 곳은 일본 영사관뿐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서둘러 일본 영사관으로 몰려갔습니다. 그곳이 그들의 마지막 희망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일본 영사관의 스기하라 부영사는 이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대해 본국 정부에 문의 전보를 쳤습니다. 본국에서는 곧바로 회신을 보냈습니다. 비자를 발급하지 말라는 지시였습니다. 독일과 우호관계에 있던 일본으로서는, 독일의 비위를 건드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영사관 담장 밖에서 두려움에 떨며 기다리고 있는 수많은 유태인들을 바라보면서 스기하라 부영사는 다시 두 차례나 본국 정부에 비자발급 허락을 요청하는 전보를 쳤습니다. 하지만 회답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절대로 비자를 내주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틀 밤을 고민하던 스기하라는 마침내 본국 정부의 명령을 거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도저히 저 많은 사람들을 그냥 죽게 내버려 둘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영사관 문을 열고 유태인들을 들어오게 한 스기하라는 그날 이후 리투아니아에서 철수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잠과 식사를 거른 채 비자를 발급했습니다. (일본비자?) 그렇게 해서 그가 목숨을 구한 유태인 숫자는 무려 6천명이 넘었습니다. 스기하라는 얼마 후 독일군을 물리치고 새로 점령해 온 소련군에 포로로 붙잡혔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억류 상태에서 풀려난 스기하라는 곧바로 일본 정부에 복직 신청을 냈지만, 일본 정부는 그의 복직을 거부했습니다. 중요한 전시 상황에서 정부의 명령을 어기고 개인의 판단대로 행동했기 때문에 공직에 다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스기하라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에 대해서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세월이 흐른 뒤 리투아니아에서는 수도 한복판의 큰 거리를 <스기하라 거리>로 이름을 붙였고, 이스라엘 정부는 자기 나라에 <스기하라를 기념 공원>을 만들었습니다. 그의 인도적인 행동 덕분에 살아남은 유태인들은 뉴욕에 모여서 그를 추모하는 집회를 열기도 했습니다. 스기하라는 죽기 전에 아내에게 자신의 행동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가 그렇게 한 것은 후회 없는 삶을 살기 위해서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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