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 너는 아느냐? 요21:1~19 10.04.18.설교스크랩
▲도입예화 : 늘 있던 것이 없어지면, 당황하게 됩니다.
중년 남성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음식이 곰국이라고 하지요?
아내가 곰국을 한솥 끓이기 시작하면 공포에 사로잡힌다고 합니다.
곰국이라는 게, 한번 끓여놓으면, 계속 데워서 먹기만 하면 되니까,
몇날 며칠이라도 먹을 수 있는 건데, 아내가 곰국을 끓인다는 건
그거 한솥 끓여놓고 친구들이랑 며칠 놀러가겠다는 거란 말입니다.
아내가 며칠 놀러가는 게 그렇게 무서울까요?
익숙한 것, 늘 그 자리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 갑자기 사라지면,
그 빈자리 때문에 사람이 당황하고 혼란스럽게 됩니다.
늘 같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아내가, 갑자기 며칠 자리를 비운다든지,
혹은 떠나가 버린다든지 하면,
그 상실감, 그 빈자리 때문에 두렵고 당황하게 된다는 겁니다.
늘 그 자리에 있어서 익숙한 사람,
언제까지나 거기 그대로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리면,
그걸 현실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기가 참 힘이 듭니다.
그냥 그 한 사람 없어졌다는 것 그 정도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자동차가 있는데, 어느 날 갑자기 핸들이 없어졌다,
혹은 바퀴 하나가 없어졌다고 하면,
그거 없어졌다는 정도가 아니라, 자동차가 움직일 수가 없게 됩니다.
자동차야 그 부품을 다시 사서 끼워 넣으면 되지만, 사람이야 어디 그렇습니까?
그동안 함께 있었던 시간이 있고, 함께 만들어 온 사연이 있는데 말입니다.
◑예수님을 상실하고 나서, 혼란스러운 제자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그때까지 제자들은 언제나 예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잠깐, 몇 시간 정도 떨어져있는 것도 견디지 못할 정도로.. 항상 붙어 다녔습니다.
제자들은 그동안 일방적으로 예수님의 사랑을 받으며 지냈습니다.
다 예수님이 해주셨지요. 해치려는 자들이 덤벼들어도 예수님이 막아주셨고,
어려운 일, 힘든 일 다 예수님이 해결해 주셨습니다.
파도를 만나서 배가 침몰할 지경이 되었을 때는
예수님이 물 위를 걸어서 오시기까지 하면서 제자들을 구해주셨습니다.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은.. 절대적이고 압도적인 것이었지만,
제자들은 어느 새 그걸 익숙하게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걸 당연한 걸로 생각하고, 언제까지나 그러고 있을 거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서 돌아가신 겁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떠나신 겁니다. 이제 예수님 없이 제자들만 남겨졌습니다.
제자들은 당황했습니다. 혼란스러웠습니다.
뭘 어떻게 해야 할 지 도무지 알 수 없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걸 직접 확인했지만,
그래도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계시지 않고 자꾸 어디론가 가십니다.
잠깐 나타나셨다가, 오래 사라지십니다.
제자들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저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이제 우리들만 남아서 뭘 해야 하나, 이대로 계속 있어야 하나,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하나? 집에 가면 받아주기나 할까?
다 버리고, 다 팽개치고 따라나선 길인데,
집에서는 없는 자식 취급할 텐데, 그래도 집에 돌아가야 하나?
▲특히 베드로는 더 그랬습니다.
그래도 그동안 예수님의 수제자 행세를 하고 다녔는데,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크게 한 자리 할 거라고 생각하기도 했고,
내가 내 손으로 예수님을 지켜드리겠다고 큰소리도 쳤었는데,
결정적인 순간에, 결정적으로 예수님을 배반하고 말았습니다.
다른 제자들 보기도 민망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일도.. 그냥 마음 편하기만 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던 베드로는, 더는 이런 상황을 견디지 못해서,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고기를 잡겠다고 나섭니다.
그러니까 역시 막막해하던 다른 제자들도 같이 따라 나섭니다.
▲그물을 드리웠지만, 물고기 잡는 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물고기 잡아서 뭘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렇게라도 해야 잊을 것 같아서,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렇게라도 해야 이 답답한 상황을 벗어날 것 같아서,
그냥 배타고 고기 잡으러 나가자고 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고기가 잡히지를 않는 겁니다.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고기를 단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더 어색해졌지요.
잊어버리려고, 이 어색하고 숨 막히는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고기라도 잡아야겠다고 나선 건데,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으니, 얼마나 참담했겠습니까?
‘뭐 이렇게 되는 일이 없냐?’ 그렇게 생각했겠지요.
▲상실감 속으로 찾아와 주시는 예수님
그렇게 새벽이 되었습니다. 동 틀 무렵이 되어서,
사방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 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 바닷가에 오셨습니다.
아직 날이 다 밝지 않아서 분명하게 보이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여전히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저 ‘이 새벽에 누굴까?’ 라고 생각했겠지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뭘 좀 잡았소?’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못 잡았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물을 배 오른 쪽에 던져보시오. 그러면 고기가 좀 잡힐 거요.’
제자들은 어차피 고기 잡겠다고 나선 길도 아니니,
밑져야 본전이라고 생각하고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랬더니, 밤새도록 구경도 못했던 고기가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걸리는 겁니다.
얼마나 많은지, 그물을 끌어 올릴 수가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그제야 제자 가운데 하나가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그가 베드로에게, ‘주님이시다!’라고 말하자,
베드로는 확인하고 뭐고 할 겨를도 없이 바다로 뛰어듭니다.
고기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애당초 고기는 잡으나 못 잡으나 그만이었습니다.
베드로에게, 또 제자들에게 필요한 건 예수님이었습니다.
물고기가 아니라, 예수님이 필요했습니다.
이게 다 예수님이 함께 계시지 않아서 생긴 일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셨으니, 그걸로 충분했습니다. 다른 무엇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오셨는데, 고기를 챙기고, 그물을 챙기고 할 여유가 없었던 겁니다.
◑내 인생에 참으로 중요한 것은 -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아는 것
▲박노해라는 시인이 쓴 “젖은 등산화”라는 시가 있습니다.
언젠가 어떤 사진 한 장을 보고
얼어붙듯 묵상에 잠긴 적이 있었습니다.
등산화를 가슴에 꼬옥 끌어안고 얼어 죽은 등반대의
처절한 죽음을 기록한 한 장의 사진이었습니다.
(산사람들은 얼음 산정을 향해 오르다 텐트를 치고 잠을 잘 때
젖은 등산화를 가슴에 꼬옥 품고 잠을 청합니다.
그래야 다음날 아침 뽀송뽀송한 상태로, 또 걸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얼음산에서, 머리카락도 수염도 허옇게 얼어붙은 얼굴로
하나같이 등산화를 가슴에 꼭 끌어안고 나란히
얼어 죽어 간 등반대원들의 모습
장엄한 순교자의 모습으로 다가온 그 현장 보도사진 한 장이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문득 문득
떠오르곤 합니다.
지금 우리도 저마다 어딘가를 향해 오르고 있고
그 길에서 죽어갑니다
내일, 또 내일, 내일 아침이면 우리도 죽어 있을 것입니다.
나, 무엇을 가슴에 꼬옥 끌어안고 죽어 있을 텐가!
▲내 생의 마지막 순간에 가슴에 꼭 끌어안고 잠이 들 것이 있다면, 그게 무엇입니까?
베드로에게 그것은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동안 몰랐는데,
함께 있을 때는 예수님이 얼마나 소중한 분인지,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지 깨닫지 못했었는데,
막상 내 옆에 계시지 않으니까..
이제 비로소 예수님이 얼마나 소중한 분이었는지 깨닫게 되었고,
예수님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이 예수님에게로 가서 보니,
예수님은 숯불을 피워놓고 생선을 굽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방금 잡은 생선도 숯불에 올려놓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유명한 장면,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세 번 같은 질문을 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3번씩이나 물으신 이유는.. ‘내가 너를 그토록 사랑한다는 뜻’
아침을 먹은 후에,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지요.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똑같은 질문을 3번씩이나 하시니까, 베드로는 불안해졌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못 믿으시나? 내 대답이 시원치 않았나? 내 사랑이 부족한가?’
베드로는 다시 강조해서 대답합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말이 못 미더워서 3번씩이나 물어보신 것일까요?
아니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3번 모른다고 부인해서,
그거 벌충하느라고 3번 물으신 걸까요?
그런데, 사실 예수님의 질문의 의도는 그게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몰라서 3번씩이나 확인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의 말처럼,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아시고,
베드로가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면, 뭐하러 예수님은 똑같은 질문을 3번씩이나 되풀이하신 것일까요?
아내가 남편에게 물어봅니다. ‘여보, 나 사랑해? 나 얼마나 사랑해?’
그러면 남편은 대답하지요. ‘뭐 그런 걸 물어보고 그래? 그걸 꼭 말해야 알아?’
그런데, 이게 정말로 나를 사랑하는지 확인하기 위한 질문일까요? 아닐 겁니다.
이건 당신이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어보는 게 아니라,
내가 당신 사랑하는 거 당신이 알고 있느냐고 물어보는 걸 겁니다.
‘여보, 나 사랑해?’ 하고 물어보는 건,
‘여보, 내가 당신을 사랑해. 그거 알고 있어?’ 하고 물어보는 거란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엄마가 아이에게 물어봅니다. ‘아가야, 너 엄마 사랑하지?’
그때 엄마의 마음은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아이야. 엄마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고 있니?
온 세상을 다 준다고 해도 너하고는 바꾸지 않아.
너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내 아이니까.’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것도 세 번씩이나 똑같이 물어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물으신 것은,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하느냐’가 아니었던 겁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걸 네가 알고 있느냐?’는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네가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고, 심지어 나를 저주까지 했다는 거 알고 있다.
나를 버리고 도망가 버린 것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너를 사랑한다.
네가 그보다 더한 일을 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너 그거 알고 있니?’
예수님은 베드로가 자기를 사랑하는지 알고 싶으셨던 게 아니었습니다.
거꾸로, 예수님이 베드로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베드로가 알기를 원하셨던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베드로를, 또 다른 제자들을 사랑하는지
그들이 알고는 있었을까요?
베드로는 자기가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했지만,
예수님의 마음을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요?
저와 여러분은, 이런 예수님의 마음을 아십니까?
‘나를 그토록, 가슴 시리도록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아십니까?’
▲예수님의 심정을 잘 비유한 글
어느 간호사가 쓴 <어머니의 손가락>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몇 년 전 간호사로 일할 때였다.
아침에 내가 출근해 보니 아직 진료가 시작되기 전 이른 시간이었지만
모녀로 보이는 25세쯤 되어 보이는 젊은 아가씨와
흰 머리가 희끗희끗한 아주머니가
서로 두 손을 꼭 마주잡고 병원 문 앞에 서 있었다.
업무시작 준비를 하는 동안에도 두 모녀는
맞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작은 소리로 얘기를 주고받기도 했고
엄마는 연신 딸의 손을 쓰다듬고 있었다.
다소 긴장된, 그러나 따뜻한 미소를 보내며 위로하고 있었다.
잠시 후 원장 선생님이 오시고, 나는 두 모녀를 진료실로 안내했다.
진료실로 들어온 아주머니는 원장님께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얘가 제 딸아이예요. 옛날에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외가에 놀러갔다가
농기구에 다쳐서 왼손 손가락이 모두 잘렸어요.
다행이 네 손가락은 접합수술에 성공했지만
네 번째 손가락만은 그러질 못했어요.
다음 달에 우리 딸이 시집을 가게 됐어요.
사위될 녀석이 괜찮다고 하지만, 그래도 어디 그런가요?
이 못난 어미 때문에 어린 마음에 상처 많이 줬지만
그래도 결혼반지 끼울 손가락 주고 싶은 게, 이 못난 어미 바람이에요.
그래서 말인데, 늙고 못생긴 손이지만 제 손가락으로 접합수술이 가능할까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숨이 막히는 듯했다.
원장 선생님도 아무 말도 못하고 가만히 두 모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의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한참 후 원장 선생님은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못한 채 그렇게 대답했다.
“그럼요. 가능합니다. 예쁘게 수술할 수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모녀도 울었고 나도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내(예수님) 마음을 좀 알아다오!
이게 예수님의 마음일 겁니다. 다 주고, 또 주고, 그래도 부족해서 안타까운 마음.
손가락 하나가 없는 딸 앞에서,
내 다섯 손가락이 멀쩡한 게 한없이 미안하고 부끄러운 마음,
그게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그게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는데,
우리는 예수님을 위해 손가락하나 드리지 못하면서도
내가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떠들어댑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우리를 기특하게 보시고,
‘그래 고맙다. 네가 나를 사랑한다니 정말 고맙구나.
그런데, 너 그거 알고 있니?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거 말이다.
내가 너를 살리기 위해 죽었다는 거 말이다.
네가 나를 사랑한다니 정말 고맙구나.
그런데 그것보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걸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적용 : 내가 가슴에 꼬옥 끌어안고 살아갈 것은?
▲지금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같은 질문을 하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네가 알고 있니?’
우리가 때로는 예수님을 잊어버리고, 때로는 예수님을 떠나고,
때로는 예수님의 이름에 먹칠을 하고,
정말 봐줄 수가 없을 정도로 형편없는 모습으로 살아가지만,
그래도, 그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주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고린(곪은, 썩은) 동전 하나 내놓기도 아까워하는 우리지만,
주님을 위해 내 시간을 사용하는 걸 시간 빼앗긴다고 아까워하고,
주님을 위해 내 재능을 사용하는 걸 쓸데없는 일이라고 무시하고,
그렇게 예수님에게 매정하고 각박하게 굴지만,
그런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 사랑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서 생명을 바치신
예수님의 그 사랑을 우리가 알아주기를 바라십니다.
▲내가 무엇을 가슴에 꼬옥 품고 살아갈 것인가?
우리가 세상을 사는 동안, 그리고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 가슴에 꼭 품고 살아야 할 것,
우리 살아가는 데 다른 거 다 포기한다고 해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가장 귀하고 가장 소중한 것,
-그것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 위해 다 주시고 다 포기하신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너무 익숙해서, 그냥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러나 그것 없으면 우리가 단 한 순간도 살 수가 없는 것이
예수님의 사랑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부모님의 사랑도, 아내와 남편의 사랑도, 없어진다 해도
시간이 지나면 그 빈자리가 다른 무엇으로 채워지겠지만,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은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그것 아니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우리가 받고 있습니다.
그 사랑으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고,
그 사랑으로 예수님은 무덤을 뚫고 나오셨고,
그 사랑으로 우리는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 사랑을 알라고, 그 사랑을 받으라고 예수님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렇다면 참 고맙구나.
그런데, 너 알고 있니?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잊지 맙시다. 산악인이 젖은 등산화를 품에 안고 잠들 듯이,
우리 세상 사는 모든 날에, 그리고 우리 세상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주님의 사랑 우리 품 안에 품고 삽시다.
“주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내가 압니다. 나도 주님을 사랑합니다.”
날마다 고백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 사 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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