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의 얍복강 기도의 잘못된 적용 호12:1~8 10.04.18.설교일부녹취
▲얍복강의 야곱처럼 ‘결사적으로’ 주식투자를 하겠다는 분
어떤 분이 1988년도부터 주식에 투자하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지난 20년간 상당한 손해를 입으셨다고 한다.
그리고 이제야 자기가 망한 이유를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그 때는 예수를 잘 못 믿어서 그랬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 시점에서 도저히 물러설 수 없다고 했다.
‘야곱의 얍복강 씨름’에 관한 지난주일 설교를 듣고 나서,
자기는 바닥부터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끈기 있게 다시 일어서겠다는 것이다.
야곱처럼, 절대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기도 끝까지 씨름하는 각오로.. 다시 일어서겠다는.. 이런 간증을 나누어주셨다.
야곱이 끝까지 씨름해서 축복 받았듯이 말이다.
▲얍복강 기도는.. 무조건 결사적으로 기도해서 응답받았다..는 오해이다.
여러분, 기도의 본질은
뭘 구해서..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제, 하나님을 찬양, 높임이다.
기도로 간구를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들을 간구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간구하는 것이다.
내 소원을 구해서 응답받는 것은.. 기도에 있어서 아주 부차적인 일이다.
그런데 그런 기도의 본질을 깡그리 무시하고,
과거 샤머니즘 신앙의 기도처럼
자기 소원만.. 기도로써 성취하겠다는 것은,
그것도 얍복강 야곱처럼, 결사적으로 기도해서 자기 소원을 성취하겠다는 것은
‘야곱의 얍복강 기도’에 대해.. 대단히 큰 오해이다.
▲야곱의 소행을 본받은 북이스라엘
그런데 실제로 호세아서를 읽어보면,
당시 북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렇게 오해했다는 것이다.
야곱이 경쟁적으로 형의 발뒤꿈치를 잡은 것,
그리고 천사와 씨름해서 이긴 것을
호세아는 <야곱의 소행>으로 혹평하고 있다. 호12:2
야곱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에, 그 형과 다투었으며,
어른이 되어서는 하나님과 다투었다. 호12:3
야곱은 천사와 싸워 이겼으며, 복을 달라고 울며 빌었다. 호12:4
야곱이 얍복강에서 ‘열심히 결사적으로 기도’한 것은 문제가 없으나,
그 목적이 자기 기복적/경쟁심리적/이기적 기도라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런데 북이스라엘 사람들은
야곱의 기도의 장단점이 있는데
그 중에 단점만 본받아서
야곱처럼 이기적/기복적 목적으로 신앙생활 하고 있다고
본문 호세아서12장은 꾸짖고 있다.
그러니까 야곱이, 늘 다투면서 복을 받기를 간절히 바랬으나,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갖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호12장의 전체 문맥이다.)
그렇게 하나님은, 야곱의 후손들, 북이스라엘을 꾸짖으시는 것이다.
호세아서 당시는 북이스라엘 왕 여로보암2세의 치세인데,
백성들이 물질적으로는 매우 풍부했으나, 영적으로 아주 메말랐던.. 그런 시대였다.
야곱의 후손들인 북이스라엘이
자기 조상 야곱처럼
복만 받기를 다투듯이 바라면서도
(호세아서 당시) 정작 하나님과의 관계는 등한시하고 있다는.. 지적인 것이다.
정리하면, (야곱처럼 간절히 기도하는 것은 좋지만)
당시 북이스라엘이,
자기 기복적 소원을 성취하기 위한 기도,
남과 경쟁적 대결에서 승리를 쟁취하기 위한 기도..
이런 목적을 이루기 위한 간절한 기도는
조상 야곱의 잘못된 점을 본받았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장점과 단점이 있다. 야곱도 마찬가지로 단점이 있었다.
그 후손이, 그 단점만 본받았다는 것이다.)
▲야곱의 얍복강 기도가.. ‘야곱의 소행’으로 변질될 수도 있다.
북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는 아무 관심이 없고,
‘무조건 야곱처럼 결사적으로 기도해서, 내 소원을 기필코 응답받겠다.’
이런 기복주의적 신앙관을 가지는 것은.. 영적인 타락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상황이
호세아서 당시와 별로 다르지 않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위의 ‘주식투자가’처럼
하나님의 뜻/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는 아무 관심도 없이,
자기가 설정한 ‘자기 소원’ 하나를 딱 정해 놓고,
기도원에 올라가든지, 산기도를 가든지
집에서 밥도 안 하고, 기도에 전념한다고 돌아다닌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40일작정기도, 1백일작정기도.. 다 좋지만,
기도의 동기와 목적부터가 잘못 되었다.
이런 ‘신앙문화’가 한 때 한국에 유행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 이유는 ‘야곱의 얍복강 기도’에서 유래했다. (또한 눅18장의 과부의 강청하는 기도)
뭐든지 무조건 결사적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망하기 직전에
그들이 기도 안 한 것이 아니었다.
‘야곱처럼’ 열심히 기도를 드렸는데..
하나님은 그것을 ‘야곱의 소행’이라고 혹평하신다. 호12:2
무조건 ‘축복, 풍요, 소원성취’만 결사적으로 기도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식으로 기도하면, 우리도 기도하는 중에, 북이스라엘처럼 망할 수 있다.
그게 다 자기 정욕이요, 우상숭배이기 때문이다.
▲얍복강에서 간절히 기도하면서도, 속이기 잘하는 야곱
호12:3절에, 야곱이 어머니 뱃속부터 다투고, 나중에 하나님과 다투었다고 했고.
7절에, 저울을 속여 파는 장사꾼처럼, 백성을 속이기를 즐겨했다고 했다.
그 결과 8절에,
‘나는 부자다. 스스로 노력해서 부자가 되었으므로...’ 이렇게 자긍한다.
그러니까 북이스라엘은,
조상 야곱처럼 결사적으로 기도했지만,
그 행위는, 하나님 앞에 전혀 의롭지 못하고, 변한 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고도 오직 기도만 ‘다투듯이, 씨름하듯이’ 결사적으로 했다는 것이다.
아직도 우리나라에서, 전국의 크고 작은 교회들에서
이런 식의 신앙, 이런 식의 기도가 ‘신년 벽두’부터 시작되고 있다.
그 열기가 지금 많이 식기는 했지만,
아직도 하나님께 도움을 무조건 빌어서, 사업도 잘 되고, 자녀도 잘 키우겠다는 사람들이 많다.
▲이제 더 이상 기복적 기도는 그만 두어야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
‘장관이 되기 위해 어려서부터 기도해라, 그러면 못 되어도 군수는 될 것이다.’
이런 구절이나 기도들이,
야곱의 얍복강 기도와 더불어,
오늘날에도 여전히 '오용/남용'되고 있다.
그러다가 북이스라엘이 물질적으로 번성한 가운데 망했다는 것을..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한다.
▲알아서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
내가 울면서 간절히 기도하더라도,
거기에 영적인 것도 포함되어 있지만, 육적인 것이 너무 많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의 얍복강 기도’에 전부 다 응답해 주시지는 않는다.
우리 대부분은 그렇다.
우리 중에 10명이 ‘얍복강 기도’처럼 결사적으로 기도하더라도
하나님은 알아서, 당신의 지혜와 공의에 따라 응답해 주실 것이다.
10명 거의다, 응답을 못 받는다는 얘기다.
왜냐하면 느9:33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온다.
우리의 당한 일에, 주는 공의로우시니
우리는 악을 행하였사오나, 주는 진실히 행하셨습니다.
우리가 악을 행하면서, 악한 목적으로 기도해도,
하나님은 진실히 응답하신다는 말씀이다... 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우리는, 무조건 기도응답 받기 위해서, 하나님과 겨루겠다고 일사각오로 나오지만,
사실은 나의 악한 동기와 목적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나에게 진실히/성실히 다 알아서 잘 대해 주심으로써
내가 원하는 돈도/건강도/성공도 .. 응답해 주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게 장기적으로 봐서는, 내게 진짜 복이 된다.
그 무응답이.. 정말 하나님이 내게 진실히 대해 주시는 ‘기도 응답’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간혹 예외적으로, ‘나의 얍복강 기도’가 응답될 수도 있다.
야곱이 그랬던 것처럼.. 어쩌다가 한 두 번은, 하나님이 은혜로 봐 주신다.
그러나 야곱이 언제나 ‘얍복강 기도’로 일평생 일관한 것은 아니다.
그의 얍복강 기도가 응답된 것은.. 딱 한 번이었다.
하나님이 한 번 정도는.. (야곱처럼) 누구나 봐 주실 것이다.
그래서 그 악착같은 기도를.. 한 번 정도는 들어주실 것이다.
그러나 늘 그렇게 들어주시는 것은 아니다.
아래 에피소드는, 요행이 두 번 일어나지 않는다는 내용을
실화를 통해, 우리에게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요행을 바라면 안 되요! (재미있습니다. 펀글)
여러분이 잘 믿지 못하시겠지만 제(어느 목회자)가 두 차례나 씨름선수로 뛴 적이 있습니다.
한번은 고등학교 2학년 때였는데, 교내체육대회 때 우리 반 대표선수로 나갔습니다.
아직도 기억하는데 그때 제 몸무게가 47kg 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을 어떻게 선수로 뽑았는지 의문이 가시지요?
당시에 다른 반은 단합이 잘 돼서 각 종목의 선수들을 정예멤버로 뽑았는데
우리 반은 너무 협조가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화가 난 반장이 선수명단을 어떻게 써 냈냐하면,
어떤 종목에 자원하는 친구들을 제외해 놓고는,
축구는 1번부터 11번까지, 농구는 12번부터 17번까지, 배구는 18번에서 23번까지...
이런 식으로 써낸 겁니다.
그때 제 번호가 오십 번이었는데, 운이 없게도 씨름에 걸린 거였습니다.
경기 당일이 됐습니다.
저랑 맞붙을 옆반 상대가 정해졌는데, 그 친구는 당시에 비만증을 앓고 있었던 친구로서
몸무게가 100kg에 육박하는 친구였습니다.
그때 그 친구는 유명한 친구였지만 저도 당시에 좀 별났었습니다.
제 별명이 쏘크라테스였는데, 선생님들까지도 제 별명을 다 알고 계실 정도였습니다.
"야! 하마랑 쏘크라가 붙는대!"
이 소문이 삽시간에 운동장에 퍼졌습니다.
그러니까 선생님들까지도 전부 씨름장으로 몰린 거예요.
보는 입장에선 얼마나 재미있겠어요. 몸무게가 곱이나 차이가 나니까요.
나중에 보니까 교장선생님과 재단이사장님까지 그 씨름을 구경하고 계셨더라구요.
경기가 시작됐는데, 몸무게 차이도 많이 나고 하니까
이 친구가 그냥 제 다리를 하나 톡 쳐서 넘어뜨리면 얼마나 간단했겠습니까?
그런데 이 친구가 또 얼마나 짖굿은지..
제 몸을 몇 번이나 들었다 놨다하고, 넘어뜨릴 듯하다가도 안 넘기고,
나중에는 몸을 번쩍 들어서 몇 바퀴씩 빙빙 돌리지를 않나...
그때마다 그 장면을 보는 사람들은 왜 그렇게 배꼽을 잡으면서 좋아들 하는지요.
그런데 여러분! 이 경기에서 누가 이겼겠어요?
(제가 졌다면 아마 이 얘기를 시작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이 친구가 이제는 끝내야 되겠다 생각하고 마지막으로 저를 번쩍 들더니
그냥 넘겨도 될 걸, 멋지게 넘어뜨리려고 했는지,
제 다리 한 짝을 걸어오는데, 제가 다리를 슬쩍 치웠습니다.
그랬더니 거꾸로 이 친구가 저를 안고 쿵 하고 바닥으로 쓰러진 거예요.
어떻게 됐겠습니까?
난리가 났지요. 우리반 친구들은 저를 몇 번이나 헹가래를 치고,
기마를 태워서 운동장을 한 바퀴 돌았습니다. 그 친구는 한동안 얼굴을 못들고 다녔습니다.
두 번째는 대학교 축제때 학과별 씨름대회에서였습니다.
저희 과엔 주로 여학생들만 있었기 때문에 제가 또 밀려서 나갔습니다.
전에 골리앗을 넘어뜨린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상대방을 보니까 또 덩치가 좋은 학생인 거예요.
속으로 생각했지요. "야! 또 한 번의 신화가 창조되겠구나.
이번엔 여학생들도 많은데... 또 한 건 하겠네.."
그리고 샅바를 잡고, 심판이 경기시작 휘슬을 불었는데...
갑자기 파란 하늘이 보이더라구요. 시작하자마자 일초만에 끝난 거예요.
얼마나 창피한 지... 그래서 그 다음 한 주일 동안은
우리 과 학생들이 있는 데는 얼씬도 안했습니다. 수업도 맨 뒷자리에서 받구요...
그때 제가 얻었던 교훈이 있습니다.
"아! 요행은 단 한번이구나!" "요행은 한번이면 족한 거구나!" ▣ 기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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