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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정죄가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다

LNCK 2010. 4. 30. 01:56

 

 

나는 정죄가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다               요3:17               모두 스크랩 글 

 

 

◑나는 정죄가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다

 

어떤 형제님께서 요즘 고민이 하나 생겼습니다.

직장 동료 중의 한 명이 자신을 너무나도 힘들게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는 일에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것은 물론,

평상시에 하는 행동도 얼마나 얄미운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는 자주 교회당에 가서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했지요.

 

“주님, 제발 그 사람이 제 앞에 나타나지 않게 해주십시오.

이 사람 때문에 도저히 살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가지고 계속해서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아무런 응답을 하시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자기를 힘들게 하는 그 사람이 변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여전히 자기와 맞지 않았고 자신을 힘들게 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응답하시지 않는 주님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고,

그는 주님께 따지듯이 불평불만을 던졌지요.

 

“주님, 왜 저의 기도에는 아무런 응답을 해주시지 않습니까?

저 사람 때문에 제가 이렇게 힘들어 하는데 그냥 가만히만 계실 겁니까?”

 

바로 그 순간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얘야. 이번에 나는 너의 기도에..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으려고 한단다.”

 

“아니, 왜 그렇습니까? 주님께서는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면

다 들어주신다고 했잖아요.”

 

이에 주님께서는 웃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그래도 그 사람이 있으니.. 네가 이렇게 무릎 꿇고 내게 기도하고 있지 않니?”

 

내게 없어야 할 것 같은 그 사람도

사실은 내게 유익한 사람일 수 있다는 것이지요.

즉, 나를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이끌어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우선 부정적인 모습만을 보고,

부정적인 생각만을 하려고 할 때가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없어서는 안 될 분을

오히려 제발 내 앞에서 사라지길 기도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주님께서는 복음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주님. 그래서 우리를 심판하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얼마나 많은 판단과 단죄를 했었는지 모릅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님의 모습을 기억하면서

이제는 이웃의 부정적인 모습보다는, 긍정적인 모습을 보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나는 이 세상을 정죄하러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왔다."

 

오늘 저는, 내일이면 우리를 떠날 두 아이와 함께 하루를 보냈습니다.

(※청소년 갱생시설에서, 보호기간을 마치고 떠나는 것을 의미함)

 

"어딜 가고 싶냐?"는 제 물음에, 둘 중에 한 아이가 기특하게도

"취직 나가기 전에, 몇 년 전부터 큰집(?)에 머물고 계시는

아버지 면회를 가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작별 선물로, 아버지 면회를 시켜주기로 했습니다.

 

강변도로를 따라 신나게 달리던 저는

우연히 두 아이가 나누는 대화를 엿듣고 너무도 가슴이 아팠습니다.

 

"우리 아버지 잘 하면 올 연말에 나올 수 있다고 하던데...

이번에 나오면 더 이상 별일이 없어야 될 텐데...",

 

"야! 그래도 너는 좋겠다. 비록 큰집에 계시지만

그나마 찾아뵐 아버지라도 있잖아?"

 

면회실 안에서 거의 1년 만에 만난 두 부자의 모습은

더욱 제 마음을 안쓰럽게 만들었습니다.

손이라도 서로 마주 잡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두꺼운 투명칸막이는 그것조차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두 부자 그간 하고 싶었던 말이 많을 텐데, 막상 얼굴을 대면하고 나니

할 말들을 잃은 듯 했습니다. 계속 했던 말들만을 되풀이했습니다.

 

"건강하기만 해, 아빠!",

"그래 너도 건강하구"(어색한 침묵),

 

"편지 자주 할게",

"그래 취직하면 전화번호랑 주소랑 정확하게 적어서 편지해라"(서로 눈길을 피함),

 

"내 이번에 나가면 정말 열심히 할 거다",

"그래 내가 빨리 벌어서 아빠랑 살 방 하나 마련해 놓을께"...등등.

 

그러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저나 경비교도관이나

둘 다 그 안타깝고 슬픈 상황을 지켜보느라고 혼났습니다.

고통스런 현실 앞에 눈물밖에 흘릴 수 없는 두 부자의 모습에

연민의 마음을 지니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나는 이 세상을 단죄하러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왔다"

말씀하십니다.

나 역시 예수님처럼,

이웃을 ‘정죄’condemn하는 일이 아니라, ‘구원’하는 일에 쓰임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사명자로 여기면 가정생활이 힘들지 않다

 

남편과 결혼 생활을 15년을 지낸 어떤 여집사님이

하루는 목사님께

‘자기 남편과 이혼을 결심했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자기가 신자이니까,

이혼이란 큰 사건을 다 처리하고 나서,

교회에 ‘이혼 했다’고 말을 꺼내기가 겁이 나서

 

거의 이혼 결정 막바지에 이르러서

담임 목사님께 통보 조로,

와서 미리 말씀을 드리는 것이었다.

 

‘저를 잘 찾아오셨습니다.

그 어려운 결정하시느라, 얼마나 힘드셨습니까.’

목사님은, 일단 이런 격려의 말로, 그 여집사의 불안한 마음을 추스려 주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을 이어갔다.

 

‘이왕에 목사를 찾아와 주셨으니까,

그래도 성도를 목회하는 목사 입장에서,

제 부탁을 하나만 들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어렵지 않은 거라면, 한 번 들어드릴 수도 있지요.’

 

‘그렇다면, 목사의 부탁인데,

이혼하기 전에, 남편과 딱 1달만 더 살아 주십시오.

그런데 이번에는,

교회가 당신의 가정에 파송한 가정 선교사로서

1달만 더 살아주시고,

그 다음에 이혼하시려면.. 그때 하십시오.’

 

여집사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제까지 불한당 같은 남편과 15년이나 참고, 같이 살아왔는데,

1달 정도야 더 같이 못 살겠나.. 싶어서,

그렇게 하겠다고, 1달만 더 살고 나서 이혼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목회자는, 그 여집사를

‘가정 선교사로 파송하는 기도’를 즉석에서 해 드리고,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 여집사는, 목회자가 시키는 대로

자기는 이미 이혼했다고 생각하고,

이제는 그의 아내라고 생각하지 않고,

이제는 목사가 파송한 가정 선교사로서, 1달만 섬기기로 했다.

 

남편은 여전히, 밤늦게 고주망태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술주정으로 기물을 깨뜨리는가 하면,

아내인 자기에게 손찌검을 할 때도 있었다.

제사를 지내야 된다면서.. 아내를 닦달하고 괴롭혔다.

그리고 시어머니는 태생적으로 언제나 자기 아들 편이었다.

 

그런데, 그런 남편을 바라보는 눈이,

이 여집사에게서 바뀌어버렸다.

 

예전에, 아내의 눈으로 남편을 바라볼 때는..

남편이 너무 밉고, 너무 불만족스러워.. 도저히 같이 살 수 없었는데..

자기 인생이 남편 잘못 만난 것 때문에 다 망쳐버린 것 같았는데..

 

이제 (이혼했다 치고) 선교사/전도자의 눈으로 남편을 바라보니까..

남이라고 생각하니, 그렇게 애 터지도록 밉지는 않았다.

그리고 늘 술독에 붙잡혀서 사는 영혼이.. 가엽게 보이는 것이었다.

 

예전처럼 남편이 때려도

속으로 자기는 ‘핍박을 받는 선교사다’ 라고 여기며 꾹 눌러 참았다고 한다.

남편과 같이 치고 박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선교사처럼, 한 번 저 영혼을 구원해 봐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구박하는 남편에 대해.. 속으로 간절한 기도가 나오더라는 것이다.

 

한 달이 채 가기 전에,

하루는 남편이 자기에게 말을 걸어오더라는 것이다.

‘너 왜 그러냐?’

 

‘내가 이혼하기 전에, 한 달만 가정 선교사로서 한 번 지내보는 거다’

 

‘그래, 나도 교회 한 번 같이 나가보자’

 

그래서 해피엔딩으로 끝났다는 이야기...

 

여기서 생각해 볼 중요한 교훈은,

‘아내의 소명’이 먼저냐, 아니면 ‘선교사의 소명이 먼저냐?’ 하는 것이다.

  

주님과 만나서

주님으로부터 남편/가정으로 보내시는 선교의 소명이

먼저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가정이 편안해 진다.

 

보통 결혼해서 가정을 생각할 때,

‘내가 결혼 잘 해서 호강하며 살면 좋겠다’는 바램을 갖고 있다.

그러니까 현실이 더욱 지옥 같은 것이다. 바램이 너무 커서...

 

그러나 결혼해서 이루게 되는 가정을 ‘사명이요, 선교지’로 생각할 때,

여간 어려움이 와도, 꾸욱 참고 견디게 된다.

‘내 사명이고, 내 사역지이니까!’

 

가정생활에 있어도,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나와 남편과의 관계보다 앞세울 때

모든 게 원만해지고, 편안해진다.

 

 

◑상처의 진정한 치유는?

 

1995년 미국 오클라호마의 연방 정부 청사에 대한 폭탄 테러 사건은

수백 명의 사상자를 낸 커다란 참사였습니다.

이 사건의 범죄자는 곧 붙잡혀 사형 선고를 받고

희생자들 부모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처형되고 말았습니다.

 

많은 언론에서는 사형이 집행된 이후

이 장면을 지켜본 희생자들 부모들의 마음이 어떠했는지에 대한 인터뷰를 가졌습니다.

 

희생자들 부모와 가족들은 한결같이

무엇인가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느낌과 허무한 마음뿐이라고 대답했습니다.

피해를 당한 자기들 마음이 후련해질 것으로 기대했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상처의 가해자에 대한 공격이나 처벌이

자신이 받은 상처의 치유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상처의 진정한 치유는 오직 용서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에

비로소 상처가 치유되기 시작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