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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남의 기적이 가장 중요한 기적이다

LNCK 2010. 5. 7. 22:44

 

 

◈거듭남의 기적이 가장 중요한 기적이다            요2:1~5          10.04.11.설교녹취

 

◑‘처음 표적’

 

▲‘처음 표적’이란 말의 뜻은, 시간적 처음이 아니라, 중요성에 있어서 처음이다.

예수께서 갈릴리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로 바꾸신 사건은

‘예수님의 처음 표적’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요2:11

 

여기서 ‘처음’이라는 말은, 반드시 시간적으로 처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사건(표적)의 ‘중요성의 차원’에서 처음이라는 뜻이다.

primary.. 가장 우선되는 기적이라는 뜻이다.                          (*표적과 기적은 같은 뜻)

 

우리가 무엇을 열거할 때, 중요한 순서대로 말하는 것처럼,

예를 들면, 신문 1면에 그 날에 가장 중요한 뉴스를 싣는 것처럼,

요한이 ‘처음 표적’이라고 말한 것은

그것이 가장 중요한 표적, 가장 주된 표적이라는 뜻으로 기록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요한복음의 표적은, 시간 순서대로(연대기적으로) 기록되지 않았다.

만약에 요한복음에 나오는 표적들이, 시간 순서대로 기록된 것이라면,

문제가 발생한다.

 

요2장의 가나 혼인잔치 기적 바로 다음에,   요2:1~11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 가셔서 성전을 정화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2:13~21

 

다른 복음서에 의하면, ‘성전청결사건’은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 주간에 일어난 일로 기록되어 있다.

 

(어떤 신학자는 이런 모순을 피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성전청결을 2번 단행하셨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요한복음 2장에서, 그러니까 공생애 시작 당시에 한 번,

또 마지막 수난을 당하시기 전에 한 번.. 이렇게 두 번으로 보기도 하는데..

 

그 보다는, 요한이 기적 사건을 시간순서로 배열한 것이 아니라,

사건의 중요도 순서로 배열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고 저/설교자는 본다.

더욱이 다른 복음서 3권이 모두 성전청결사건을

공생애 맨 뒤에 배치하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의 기록 순서가, (특히 표적의 기록순서가)

반드시 시간 순서대로 기록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사도요한의 관점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의 순서대로 기록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러므로 ‘처음 표적’이라는 말의 뜻은

(시간상 처음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표적이라는 뜻으로서 처음이라는 뜻이다.

 

만일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사건이,

시간적으로 가장 처음 행하신 일이었다고 본다면,

다른 복음서 저자들이, 그것을 절대로 놓쳤을 리가 없다.

반드시 4복음서에 4번 다 기록했을 것이다. 처음 표적이니까!

첫 번째는 늘 사람의 시선을 끌게 되어 있으니까 그렇다.

 

그러나 다른 복음서에 ‘처음’ 기록한 표적은

마가복음/누가복음은.. 귀신들린 자를 고치심  막1:23~28, 눅4:33~37

마태복음은.. 문둥병자를 고치심 등이다.  마8:1~4 

‘물을 포도주로 바꾼 사건’이, 다른 복음서에는 아예 등장하지도 않는다.

 

이 사실은.. 성경은 선별된 기록이라는 사실이다.

저자가 말하고 싶고, 강조하고 싶은 내용에 따라서

예수님의 공생애 사건들 중에서 포함되기도 하고, 빠지기도 했다는 것이다.

 

 

▲‘물로 포도주 변화’ 사건의 메시지는.. 거듭남

그렇다면 예수님이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사건을

처음 표적’으로 소개함으로써

요한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의 거듭남이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것처럼,

예수님이 우리 사람의 내면/본질을 완전히 새롭게 거듭나게 하신다

라는 메시지를.. 요한이 독자들에게 주고 싶은 것이다.

 

그것을 ‘처음 표적’으로 소개할 만큼

사람에게 있어서 거듭남이란,

표적 중의 표적이요, 기적 중의 기적이라는 메시지이다.   주1)

 

▲요2장과 요3장의 연속성

그래서 연이어서 본문의 다음 장, 요한복음 3장에 보면

예수님이 거듭남에 대해 니고데모에게 가르치시는 사건이 배치되어 있다.

 

‘네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라는 말씀이

2장의 가나 혼인잔치에 연이어 3장에 나오는 것은

전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여러분, 여기에서

요한의 천재성을 엿볼 수 있다.

그냥 '거듭남' 이라고 말하면, 대다수 사람들은 막연하게 생각한다.

처음 듣는 얘기니까, 니고데모처럼, 막연하게 생각한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의 거듭남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기 위해서

먼저 예수님이 ‘물로 포도주로 만드신 기적’부터 소개하는 것이다.

 

사람이 영적으로 거듭나는 것은,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물은 물이고, 포도주는 포도주다. 둘은 완전히 서로 다른 것이다.

물이 아무리 애를 써도, 저절로 포도주로 바뀌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아무리 애를 쓴다고 해도,

자기 스스로 거듭날 수 없다. 이것은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다.

 

※요2장 전반부에 '물로 포도주 만드신 표적'과

요3장 '니고데모에게 거듭남의 교훈 설명'사건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중간에 끼인 사건이 '성전 청결 사건'이다. (요2장 후반부) 

 

그러니까 문맥에 의하면, '성전청결사건'의 의미도 <거듭남>에 관한 교훈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거듭나려면, 성전 되신 예수님이 먼저 무너져야 하고(십자가에 죽으셔야 하고)

또한 사람의 자기 심령속에 있는 성전이, 먼저 청결하게 되어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고전6:19참조. 


 

◑형식 과 본질

 

▲1. 세례의 형식 과 본질

여러분, 물로 세례를 주는 일.. 그것도 중요하다.

그것을 폄하하는 뜻으로 말씀 드리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형식, 예식이다. 상징적인 행위이다.

 

모든 종교에는 상징/형식/예식이 있다.

상징, 겉 형식이 필요하다.

그러나 실체가 없는 상징, 겉형식은 무의미하다.

 

이런 형식이 쓸모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명시하는 실체가 뒤따라주지 않으면,

그 형식은 무의미한 종교행위 밖에 될 수 없다.

 

자세히 말하면, 사람에게 물로 세례를 줄 때 (형식, 상징)

그것은 성령으로 세례 받는 일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본질)

그것은 사람의 머리에, 그저 물을 뿌리는 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침례가, 물 뿌리는 것(세례)보다 낫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어떤 이들은, 성경적인 세례는, 물에 잠겼다 나오는 침례라고 주장한다.

사람이 물속에 완전히 들어갔다 나와야(죽었다가 살아나는 의미)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어차피 세례식이 하나의 ‘형식’이라면,

‘물속에 완전히 잠기는 것’이든, ‘물을 뿌리는 것’이든

큰 차이는 없다. 둘 다 같은 형식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세례의 형식/상징이 의미하는 바 그 본질/실체인데,

그것은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성령으로 세례 받는 일이다.

 

그 본질이 없는 가운데서,

아무리 사람이 100번을 반복해서 물에 잠기더라도

그 상징/형식 자체로는, 사람이 거듭날 수 없다.

(그렇다고 상징/형식을 무시한다는 뜻은 아님)

 

▲2. 안수기도의 형식 과 본질

또 목사가 기도해 줄 때, 누구에게 손을 얹고 안수기도할 때도 마찬가지다.

기도할 때, 안수는 상징, 형식이고,

중요한 것은 그 본질, 실체인데..

그것은 성령을 받는다든지, 병이 났는다 든지..

어떤 영적인 능력이 실제, 실체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것이 뒤따라주지 않는다면,

사람의 머리에 손을 얹느냐/ 안 얹느냐의 형식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어떤 성도는, 목사가, 그냥 기도해 주는 것과

목사가, 자기 머리나 어깨에 손을 얹어 안수 기도해 주는 것에.. 차이가 있다고 본다.

 

물론 그냥 기도해 줄 때보다

손을 얹고 안수해서 기도할 때,

목사가 더욱 간절히 기도하게 되는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나,

 

중요한 본질은, 그 목사가 평소에 갖고 있는 기도의 능력이다.

그 기도의 능력이 있는 사람은..

안수 하거나/안 하거나.. 그 형식의 차이는.. 별 차이가 없다고 본다.

(엘리사가 나아만 장군에게, 안수는커녕, 쳐다보지도 않고 요단강에 가서 씻으라고 했다.

안수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문둥병이 나았다.)

 

목사가 가운을 입는 것도 형식이고,

가톨릭에서 성수를 뿌리고, 성호를 긋는 것도 다 형식이다.

 

목사가 가운을 입을 때에

정말 하나님이 그의 허물을 가려주시고,

성령의 권능으로 그를 가운처럼 입혀주시지 않는다면,

그가 입은 가운은.., 그저 한낱 액세서리에 불과하다. 

그가 긋는 성호는... 한낱 연기에 불과하다.

 

여러분 우리는, 이처럼 종교적인 형식이나 외형을 넘어서

실체를 맛보기를 목말라 한다.

 

▲3. 예배의 형식 과 본질

많은 성도들이, 예배가 형식으로 끝나지 않고,

신령과 진정으로, 본질적으로 예배드리기 원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예배 방법/형식에 그 열쇠가 있다고 생각해서

좀 더 신령한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음악을 더 새롭게, 많이 동원해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변화도 필요하겠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배자 각 사람의 심령 상태와 마음가짐이다. 즉, 본질이다.

 

그것이 없이는,

찬양과 경배도 또 하나의 형식이 될 것이고,

그 새로운 방법이, 어떤 결정적 변화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찬양과 경배가, 혹시 잠깐동안은, 새로운 예배 분위기를 가져온다 하더라도

시간이 경과하면

찬양과 경배의 형식 역시.. 과거처럼.. 무기력한 예배가 되고 말 것이다.

그것은 ‘형식’이기 때문이다. 주2)

 

 

▲방법론 과 성령의 역사

우리는 어떤 방법, 형식에 열쇠가 있다고 생각하고,

누가 어떤 방법을 사용해서 효과가 있었다는 소문이 나면,

나도 그 방법을 그대로 도입해서 시도해 보려고 애를 쓰는데, (예를 들면, 목적이 이끄는 삶 40일 등)

 

어떻게 보면, 그것은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시고,

그 성령의 기름부으심의 사역을 축소/무시할 수 있다.

그 방법론에 너무 의지할 때 그렇게 되기 쉽다.

 

제가 보기에는,

자기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역사, 성령의 기름부으심의 역사에 대해서

자신감이 없는 사람일수록,

남들이 시도하는 형식이나 방법론을 모방하는 쪽으로 더 치우치는 것 같다.

 

결국 성령은 모든 사람에게 각각 은사를 나눠주시고

자기 믿음의 분량을 나눠주시고

자기 믿음의 분량대로 예언하게 하시고,

자기가 받은 은사 대로 역사하게 하신다고 하셨는데,

 

여러분, 우리는 결국 나의 하나님,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내가 체험한 은혜라는 뜻) 

내게 주신 은혜, 내 믿음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그래야 (내 믿음이 내 믿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믿음을 심어줄 수 있고,

내게 주신 은혜가, 남들에게도 전달될 수도 있다. 

 

교회적으로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그 교회에 주신 고유의 은혜와, 믿음의 분량이 있다고 본다.

그것으로써 열심히 주님을 섬기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것이요, 가장 은혜스러운 방법론이 될 것이다.

 

자기에게 주신 은혜를 발견하지 못한 사람들이

자꾸 다른 사람/다른 교회가 받은 은혜를 모방하고자 하는데..

그 겉형식은 모방될 수 있을지 모르나, 그 속 내면/본질은 절대 모방할 수 없으며,

그에게 주신 은혜와, 내게 주신 은혜가 다르다는 것이다.

 

남을 모방하기 보다는, 자기의 고유한 성령의 은사를 찾아서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세례 와 성령세례

 

그런데 이와 같은 영적 실체의 역사는.. 오직 주님만 하실 수 있는 것이다.

성령으로 세례 주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이시다.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고, 성령으로 세례 주는 일은

예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이고,

그리고 예수님은 그 일을 하실 것이다.

 

막1: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

 

눅11: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우리가 성령의 은혜를 받기 바라는 마음보다도, 

주님이 그런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마음이

더 크다는 사실을.. 우리는 믿어야 한다.

 

▲요한이 ‘처음 표적’이라고 말한 이유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처럼 큰 기적이 없다.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에, 우선순위가 있다.

그래서 다른 어떤 기적/표적보다, 가장 중요한 표적은..

사람이 영적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왜 이것을 기적이라고 보느냐?

어렵기 때문이다.

사람이 거듭난다는 것은.. 어렵다.

아무나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수많은 기적을 행하신 이후에 한탄하셨다.

마11:20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때에 책망하시되

21  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22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실 정도로

사람이 회개하고,

정말 영적인 변화를 경험하는 것은,

그것은 어려운 일이고,

가장 아름답고 신기한 일이다.

-이것이 바로 사도요한이 말한 ‘첫 번째로 중요한 primary 기적’인 것이다.

 

여러분, 이것(거듭남)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영화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에 보면,

예수께서 헤롯 앞에 끌려갔을 때,

헤롯이 기적을 보고 싶어 했기 때문에

물을 한 잔 가져오라고 시키고는

예수님께 그것을 포도주로 바꿔보라고 명한다.

 

당연히 예수님은,

그런 상황에서 어떤 신기한 것을 보여주기 위한 기적은 행하시지 않는다.

이것이 불신자의 전형적인 예다.

그들은 기적을 원하지, 거듭나는 것에는 아무 관심이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물 백 잔이 포도주로 바뀌는 것보다,

사람 한 명이 영적으로 거듭나는 것이 중요하다.

만약에 사람이 거듭나지 않는다면,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기적이 100번이나 일어나더라도

아무 소용없다.

 

이 모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거듭남/회심의 중요성에 대해 깊이 인식하고

우리로 하여금 거듭남에 이르게 하도록, '물로 포도주 변화의 표적'을 보이신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모든 기록, 표적이,

우리로 하여금 믿음이 더하도록 기록된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성령으로 거듭나는 이것은 영적인 변화, 질적인 변화,

내면적인 변화, 소속의 변화, 법적인 변화, 실제적 변화이다.

이것은 당사자가 확인할 수 있다.

 

저/설교자는 어렸을 때부터 교회에 다녔지만,

정식으로 예수님을 영접한 것은 17살 때 였다.

제가 그때 거듭났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면

 

그 이후부터, 이전과는 달리

-거룩함을 사모하는 마음이 생겼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소원이 생겼고

-또한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마음이 생겼다는 것이다.

 

이것들은, 그 이전에 제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닌데, 저절로 제 안에 이런 변화가 일어났다.

 

이건 일시적/감정적으로 변화되었다가, 다시 옛날로 돌아가버린 것이 아니었다.

그 변화는, 그 때로부터 지금까지, 점차적으로 계속 더 확대, 발전되고 있다.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요한의 세례 단계’

즉 ‘물세례 단계’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제가 깨달았다.

 

세례요한은 자기가 베푸는 물세례와

예수님이 베푸시는 성령세례를 구분했다.

 

여기에는 뭔가 차이가 있다.

사람들이 세례요한에게 받은 '물세례'도 진지한 것이었지만,

이것은 그들의 진심에서 우러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거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처럼 오늘날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 중에도,

신앙에 관심도 있고, 마음도 열려 있고, 자기 죄를 인정하고,

자기 죄를 어떤 형식으로든지 회개까지 했고,

죄사함까지 얻었지만,

 

그러나 아직 성령으로 세례를 받지 못한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사람의 공통점은

그저 짧은 시간에 회개가 아니라,

며칠에서 길게는 몇 달까지.. 긴 기간에 걸쳐.. 통회 자복하는 일이 (보통) 있다.

철저한 회개를 거친다. 형식적인 회개가 아니라.


물론 요한의 물세례를 받는 것도

아무나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도 대단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불완전한 회심이다.

진정한 회심은, 죄를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는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것처럼,

내면적인, 영적인, 어떤 본질적인 변화를 자기가 체험한다.

이것이 영적으로 말하면,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이라고 본다.  주3)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수 있을까?

구하면 된다. 구하라, 그리하면 주신다고 하셨듯이, 성령을 구해야 한다.

 

눅11: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가나의 혼인잔치에 보면,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예수님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구하였듯이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분/거듭나게 하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이시다.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 뿐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그것을 구하시라!

 

주1)  ▲거듭남은, 기독교 신앙의 유일성, 독특성

많은 사람들이 거듭남의 중요성까지 인정한다.

그래서 요즘은 사회에서도 ‘거듭남’이란 말을 심심찮게 쓴다.

정치인들이 ‘무슨 정당으로 새롭게 거듭나겠습니다.’ 하거나

기업인들이 ‘최고 일류 기업으로 거듭나겠습니다. ’ 라고 말한다.

 

그것은 모두가 자기 힘으로 거듭나겠다는 뜻이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이 말하는 거듭남은, 자기 힘으로 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마치 자기 의지로, 자기 노력으로 거듭날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데,

인간의 거듭남은 영적인 것이며, 사람의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차별성, 예수님의 유일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한 일이.. 바로 이것이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그 분은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리라 요1:26, 33참조.

 

이 세례요한의 말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차별성,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

기독교 신앙의 차별성,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는 이유,

사람이 구원을 받는 다고 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다 엿볼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성령으로 세례 주는/받는 일’이다.

 

주2)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실 때,

그 당시에 무슨 오케스트라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밴드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CCM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CCM: contemporary Christian Music 

 

초대교회 예배는, 오디오 시스템도, 빔 프로젝트도 없었고, 물론 전기불도 없었다.

찬송가도 제대로 없었을 것이다.

그런 것이 없이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얼마든지 사람들이 은혜 받고 거듭날 수 있었다.

 

주3)

질문) 그럼 구원받는 것은, 물세례만으로는 부족한가요?

편집자의 답)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 아십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있습니다.

다만, ‘성령의 인 치심’이란 표현이 성경에 등장합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은.. 인을 친 것처럼.. 구원이 매우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 거듭남, 회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