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세상(삶)의 양분화 마6:25~34 09.04.18.설교녹취
◑‘신앙’과 ‘세상’이 통합되었던 시절 - 중세시대
▲중세 시대에는 교회가 모든 것을 지배했다.
정치, 학문, 예술, 음악 분야 등
기독교신앙 속에.. 세상의 모든 것이 통합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 시대를 ‘믿음(신앙/종교)의 시대’라고 일컫는다.
기독교신앙과 정신이.. 인간의 영적인 분야에만 머무르지 않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 골고루 스며들어야 한다는 발상/사상은 좋았는데,
그것을 시행하는 사람이 ‘불완전한 인간’인지라,
신앙과 세속(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전 영역을 뜻함)의 통합사회는
오히려 종교라는 명목으로 인간을 억압하는 ‘암흑시대’로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한 마디로, 그 통합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역사의 증명이다.
▲그래서 계몽주의와 르네상스 운동 등 인간의 의식이 발달하면서,
이 신앙과 세속의 통합이 점점 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깨어진 분야가 <과학과 신앙의 조화>였다.
갈릴레오가 ‘지구가 태양 주변을 돈다’는 지동설을 발표했을 때,
교회는 그것을 가르치지 말라고 명령했다.
갈릴레오는 교회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재판정을 나와서는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말했던 에피소드가 전해져 내려온다.
문제는, 갈릴레오카 크리스천이 아니었던 게 아니었다는데 있다.
그는 아주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그러나 당시에 갈릴레오의 마음속에는
‘신앙은 신앙이고, 과학은 과학’이라는 양분이 불가피했다.
크리스천으로서 그는, 기독교 신앙에 충실했지만,
과학자로서 그는, 과학적 증거와 실험에 충실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가 말한 ‘그럼에도 지구는 돈다’는 말은
‘나는 크리스천이지만, 그럼에도 지구는 돈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신앙'과 '세상'의 양분화 사회 - 근세 이후
▲신앙과 세속이 꼭 통합될 필요는 없다.
신앙은 신앙이고, 세속은 세속이라는 .. 양분화(이분법) 사고가
르네상스 이후 점점 확산되기 시작했는데...
양분화兩分化 라는 말은
서로 다른 두 영역이 공존한다는 말이다.
신앙의 영역이 있고, 세속의 영역이 있는데,
둘이 꼭 하나로 통합될 필요 없이,
좌우의 양날개처럼, 공존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정치도, 하나의 예가 될 수 있다.
옛날 중세 시대에는 교회와 정치가 하나였다.
지금 이슬람 근본주의 국가가 추구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샤리아 법’ 즉 이슬람 율법에 의해서, 국가를 다스리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운동은,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것이고,
그 이후에 대부분의 나라는 <세속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세속주의란, 종교와 정치를 분리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나쁜 것이 아니다.
그래서 국가가 종교를 강요하지도 않지만, 방해하지도 않고,
신앙은 어디까지나 사람들에게 개인적인 영역으로 정해진다.
이와 같은 양분화는, 여러 가지 유익이 있다.
신앙은 신앙이고, 정치는 정치라는 생각은
사람을 자유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신앙인이기 때문에, 반드시 여당이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반드시 야당이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어떤 특정 정책을 반드시 지지해야 되는 것도 아니고, 반대해야 되는 것도 아니다.
같은 신앙을 가진 크리스천이지만,
자기 개인적 정치 성향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신앙이 반드시 어떤 특별한 정치노선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도, 예수님을 믿는 신앙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이 양분화는.. 유익한 생각이다.
※우리는 이제까지 ‘이분법’(양분화)을 너무 부정적인 측면에서 생각해 왔으나,
원래 이분법(양분화)가 가진 이점이 있다는 것이다.
▲특별히 요즘 종교 문제로
나라와 나라, 민족과 민족끼리 첨예하게 대립하는 이 시대에
종교가 우리 사회를 분열시키는 결과를 낳는다면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양분화는 오히려 신앙을 유지하는데, 도움을 줄 수도 있다.
만일 교회가, 크리스천은 어떤 특정한 노선으로만 생각해야 한다고 요구한다면,
예컨대, 크리스천은 모두 공화당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또는 크리스천은 모두 의료개혁을 지지해야 한다고 요구한다면,
그것이 기독교의 본질적 신앙고백에 위배되지 않는 이상.. 무리한 요구가 된다.
신앙과 세상을 별개로 생각하는 양분화가.. 전혀 나쁜 것만은 아니고,
어떤 점에서 유익이 있다는 것이다.
신앙과 세상은 양분화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사실 지금 많은 영역에서, 그렇게 양분화가 되어 있다.
지금 우리는 중세시대(신앙과 세상의 일치)를 살고 있지 않은 것이다.
신앙을 개인적인, 내면적인, 사적인, 영적인 영역에 담을 때
그 이외의 영역에 대해서는 (기독교의 본질과 관계된 것이 아니라면)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부담 없이 신앙을 가질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것은 당연한 얘기다.
◑그러나 양분화의 단점
그런데 여기에도 문제는 있다.
양분화가 많이 일어날수록, 신앙의 영향력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마치 솔로몬 왕이 죽은 다음에
르호보암이 이스라엘의 임금이 되었을 때
10지파가 떠나가서 별도의 나라(북이스라엘)를 세운 것과 같다.
원래 이스라엘은 12지파가 함께 세운 국가이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12명을 택하셨으며,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 나라의 상징적 숫자는 12이었다.
그런데 솔로몬 사후, 르호보암 때,
10지파가 여로보암을 따라서, 북이스라엘을 건국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북이스라엘은, 예루살렘의 종교적 지배를 받지 않았다.
그러면서 북이스라엘은 일찍 신앙을 떠나서 망하고 말았고,
두 지파만 남은 남유다도.. 10지파를 잃어버렸으니,
약하게 지내다가.. 결국 남유다마저 망하고 말았다.
신앙의 지배를 떠나서, 양분화 사회로 나아가서,
사회가 신앙으로부터 자유/분리하게 되었을 때,
그것은 그 사회의 약화와 멸망을 가져오더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기독교도, 과거(특히 중세)에는 막강한 영향력을 자랑했지만,
점점 양분화 과정을 통해서
신앙에 직접적으로 관련되지 않은 것들은, 떠나가고 있다.
신앙과 세속이 통합된 사회에서,
신앙(교권)이 너무 권력을 남용해서 문제가 있었지만,
신앙과 세속이 분리된 ‘양분화 사회’에서
신앙(교권)의 영향력이 줄어들면서, 사회도 점점 힘을 잃더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기독교국가 영국이 과거에는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을 자랑했는데,
기독교(개신교)신앙이 식으면서,
그 많던 식민지가 하나씩 독립한 것처럼
하나씩 하나씩 이런 저런 분야가
신앙의 지배를 떠나서 홀로서기를 계속해 오면서,
‘대영제국’은 퇴색하고.. 그 사회의 힘과 영향력도 함께 비례적으로 줄어들더라는 것이다.
◑양분화의 장점, 지혜
지금 우리가 깊이 생각을 안 해서 그렇지
양분화는 지금 우리 모두가 일상에서 깊이 경험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미 신앙과 세상(신앙을 제외한 모든 분야)의 양분화가 구분된 사회가 되었다.
▲예컨대 누가 병이 들었을 때
우리는 의학적인 부분과 신앙적인 부분을 별도로 생각한다.
그래서 의사가 ‘의학적으로 이 병이 나을 가능성이 없다’고 말할지라도
우리는 ‘신앙적인 차원에서 기적적 치료가 가능하다’는 것을 믿는다.
이것도 양분화이다.
의학을 부인하지 않지만,
의학으로 설명되지 않는 신앙적이 영역이 있다고 믿는 것이다.
만일 우리에게 이런 양분화적 사고가 없다면
아예 환자를 병원에 데려가지 않을 것이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다 고쳐주실 터인데, 왜 환자를 병원에 데려가야 하는가?’ 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것은 극단적이고 광신적인 신앙이다.
그러나 우리는 의학도 의지하고, 기도도 한다.
이것은 신앙이 세속에 타협한 것이 아니라,
양분화적 사고를 지혜롭게 사용하는 것이다.
▲자식이 수능시험을 보기 위해서, 그 부모가, 어느 누구도 기도만 하지 않는다.
초등학생 때부터 과외와 학원에 보내면서, 입시를 준비시킨다.
그러면서 동시에, 대학에 잘 들어가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지금 우리가 자연스럽게 양분화를 살고 있다는 것이다.
저는 교인들 중에 어느 누구도,
‘우리 아이는 공부를 잘 하기 때문에, 기도 따위는 안 해도 됩니다.’ 라고 말하는
부모를 본 적이 없다.
반대로 ‘나는 우리 아이를 위해서, 40일 금식기도를 했기 때문에
공부 안 해도, 우리 아이는 좋은 대학에 들어갈 것입니다.’ 라는 사람도 없다.
공부는 공부대로 하지만, 기도는 기도대로 하는 것이다.
이것이 저것을 부인하지 않고,
저것이 이것을 불필요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것이 양분화적인 (지혜로운) 삶이다.
우리 모두에게 양분화는 어느 정도는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신앙을 위해서도 불가피하며,
현실의 삶을 위해서도 불가피하다.
누구든지 이 양분화를 무시하고, 신앙적 영역에만 극단적으로 매달려 산다면,
(예를 들어, 병원에 절대 안 가고, 기도로만 고치려 한다면)
그는 이상한 광신자fanatic 취급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신앙에 변명이 되는 양분화가 있을 수 있다. (양분화의 단점)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듣다가
‘이 말씀은 너무 어렵다’ 하면서 진리를 밀쳐버린다든지
‘이 말씀은 현실에 맞지 않는다’ 하면서 거부한다든지
‘이것은 내 생각과 다르다’ 하면서 진리를 배제시킨다든지
‘이것은 하나님은 도와줄 수없다’라고 생각한다든가
‘나는 이것은 믿지 않겠다’라고 거부한다든가
‘이것은 하나님이 간섭할 수 없는, 내 고유의 영역이다’라고 단정 지을 때
이러한 양분화가 우리의 신앙을 변질시키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만일 정치인이,
‘신앙은 신앙이고, 정치는 정치다’라고 생각하고,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서, 전혀 비신앙적이고, 비성경적인 방법으로 정치활동을 한다면,
그것은 양분화가 아니고, 이중성이다. 이중인격자인 것이다.
만일 직장인이 ‘현실은 현실이고, 신앙은 신앙이다’라면서 (소위 양분화 사상을 남용해서)
그의 신앙을 전혀 직장생활에 적용하지 않는다면
그것 역시 ‘양분화’가 아니라, ‘이중성’이 될 것이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 주님, 우리 주인이라고 부를 때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주되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만약 모든 영역의 주님이 아니시라면, 주님은 우리 주님이 아니신 것이다.
주님이 내 삶에 전부가 되지 않으신다면, 주님은 내 주님이 아니신 것이다.
우리가 신앙과 세속의 양분화를 지혜롭게 사용해야 하지만,
그 양분화(이분법)를 남용해서, 요리조리 피해가면서, 자기 이득만 취하려 하면 안 된다.
◑‘양분화’에 관한 예수님의 교훈 - 신앙을 먼저 구하라
▲본문 마6:33절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라고 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이 ‘양분화’로 생각하시는 것을 엿볼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 와 '이 모든 (세상) 것' 2개를 구분해서 말씀하신다.
그런데 주님의 관심사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다.
반대로 이방인들과 심지어 믿는 사람조차도
평소에 그들의 일반적 관심사는 ‘무엇을 먹을까/마실까/입을까’ 이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무슨 과외를 시킬까, 무슨 메이커 옷을 사 입을까, 여행을 어디로 갈까’
이런 관심을 대다수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크게 관심을 갖고 산다.
여기서 예수님의 관심사와, 일반 사람들의 관심사가 분명하게 대비되고 있다.
분명하게 양분화되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양보 없는 말씀을 하셨다.
‘너희는 이방인들처럼 생각하지 말아라. 6:32
이방인들은 ‘무엇을 먹을까/마실까/입을까’ 염려하나(골몰하나) 6:31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6:33
예수님은 양보 없이, 우리 관심사를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에 먼저 집중할 것을 요구하신다.
▲이것은 어려운 말씀, 어려운 주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만일 우리가 이 말씀을 어렵게 생각하고, 거절하면
우리 생각 속에 어떤 양분화가 생기는데
‘주님의 관심사는 주님의 관심사이고, 내 관심사는 내 관심사다’ 하고
아예 (신앙과 세상의) 둘 사이에 담을 쌓을 수 있다는 것이다.
주님은 주님이고, 나는 나다
나는 땅에 살고,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주님의 말씀을 온전히 따르는 것은, 어차피 현실에서 불가능하고
주님은.. 내가 원하고, 내가 갖고 싶은 나의 관심사에 대해서
주님은 일체 관심이 없으시다.
그러므로 나는 나대로 살겠다.
이렇게 아예 주님의 뜻을 포기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여러분 꼭 그렇지는 않더라도,
지금 교인들 중에 이런 사람이 꽤 많다는 것이다.
양극화의 시대조류를 아전인수 격으로 받아들여서
‘신앙은 신앙, 나는 나’ 하면서.. 아예 담을 쌓아버린다.
(이런 '이분법적 신앙'을 타파하자고, 일각에서 아주 열을 올려서 외치고 있다.)
여러분, 이것은 삶의 실제적 문제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려고 씨름하다 보면,
어차피 하나님의 말씀은 내 사정, 나의 관심에 대해서
하나님은 무관심하시고,
나도 하나님의 관심사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다.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나는 나다
하나님은 내 삶에 무관하신 분이다.
심지어는 '나는 하나님께 구체적인/일상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다.'
이런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존재를 아예 안 믿는 사람보다는 (이런 사람은 소수이고)
하나님(신)은 계시지만 ‘하나님은 내 삶에 무관하시다..’
이렇게 믿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 중에 대다수이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이것이 잘못된 것임을 보여주는 성경구절이 마6;32절이다.
▲예수님은 내 실제 생활의 문제에도 관심이 있으시다.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의,식,주)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마6:32
‘없어도 될 줄 아시느니라’ 하지 않으시고
‘있어야 될 줄 아시느니라’ 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무소유를 가르치지 않으셨다.
만약에 무소유를 가르치셨다면 ‘없어도 된다’ 라고 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신다’ 라고 하셨다.
그리고 또
‘그리하면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면)
이 (의식주의)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고 하셨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극단적 양극화 신앙이 아니셨다.
오직 하나님 나라만 생각하시고,
인간의 의식주 문제에 대해서 담 쌓은 분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먼저' 생각하시지만,
인간의 의식주도 염려하신다는 것이다.
그 증거를 위에서 두 구절로 들었다.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신다.’ :32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3
그러니까 ‘양극화’ 라고 해서
신앙과 생활을 별개로 담을 쌓아서는 안 되며,
주님은 우리 생활의 모든 면에도, 반드시 주님이 되신다Lordship는 것이다.
(단, 이것은 중세시대 식의 신앙과 생활의 일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우선순위다. 먼저 해야 할 것을 먼저 해야 한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지혜로운 인간의 길을 찾을 수 있다.
어차피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노력해서 얻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면,
(다시 말해서) 내가 원하는 것들을, 내가 애를 써서 다 얻을 수 있다는 자신이 없다면,
차라리 나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고,
하나님이 세상 것들을 내게 보태주시도록 하는 것이.. 지혜로운 길이다.
하나님이 나를 대신해서 싸우시고,
하나님이 나를 대신해서 일하시도록 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이다.
어차피 내가 애쓴다고.. 내가 원하는 것을 다 얻는다는 보장도 없고
그렇게 하다가, 하나님의 나라와 의도 구하지 못하는...
즉 둘 다 잃어버리게 된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내가 주님의 말씀(마6:32~33)에 의지해서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함으로써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나에게 더해 주시도록 하는 것이.. 지혜로운 길이다.
하나님이 더해 주신다면 결코 실패할 일이 없을 것이다.
하나님이 나 대신 일하시도록 하는 것이.. 지혜로운 길이다.
(그러나 여기서, 오해하지 말 것은, 하나님은 우리 필요를 채우시지,
내 정욕과 욕심까지 다 채워주시지는 않는다.
그리고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도 .. 쉽지는 않다.
대충 대충 신앙생활 하다가는.. 그 모든 것이 더하여지지 않는다.
결사적으로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사람만.. 그 모든 것이 더하여질 것이다.)
▲C. S. 루이스는, 세상에는 결국 두 종류의 사람이 남는다고 말했다.
‘주님 뜻대로 하옵소서’ 하는 사람과
하나님이 ‘네 뜻대로 살아라’고 내버려 두시는 사람.. 두 종류가 남는다고 했다.
만약 주님이 ‘그래, 네 뜻대로 살아라’ 하시면서, 나를 내버려두신다면
그 얼마나 무서운 상황이 되겠는가?
우리는 주님 뜻대로, 즉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선비 문화에서는 선비는 일하지 않는다. 운동하지도 않는다.
임금님은 스스로 걷지도 않았다. 다 가마에 태워서 모시고 다녔다.
그래서 옛날에 임금님은 많이들 성인병에 걸려서 죽었다.
양반들도 임금님 흉내를 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지 않으시다.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셨다.
유교문화권에서는 높은 지위에 있을수록 일하지 않았으나,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실 때도, 6일 동안 일하시고, 7일째 쉬셨고,
인간을 구원하는 일에 있어서는, 하나님은 쉬지 않고, 이제껏 일하신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나를 위하여 일하시도록 해야 한다.
그것은, 내가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며 사는 길이요,
그러면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나를 위하여 더하시는 .. 그런 일을 바쁘게 하시게 된다.
그런 일이 내게 일어나야 한다. 이것이 지혜로운 삶이다. ▣ 기독교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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