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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박한 종말의식 2448

LNCK 2010. 5. 13. 16:15

◈임박한 종말의식                   고전7:29-31                  06.02.26.설교스크랩/축약/편집



▲예수님의 <임박한 종말의식>


막9:1,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와 있는 것을 볼 사람들도 있다."


마10:23절에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내보내어

전도하게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고을로 피하여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스라엘의 고을들을 다 다니기 전에, 인자가 올 것이다."


위 말씀에서 보듯, 예수님은 당신의 생애 안에

인류의 종말이 오리라고 믿었습니다.

 

마24장은, 예수님이 감람산에서, 제자들에게 '종말'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

그때도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언급하시면서,

종말이 매우 임박한 것처럼 가르치셨습니다.

먼 미래에 닥칠 사건으로, 그래서 지금은 안심해도 된다고...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부인하지 못할 사실은, 예수님은 마치,

당신이 돌아가시기 전에 종말이 오리라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었을 뿐 아니라, 그분은 그 믿음에 근거하여 사셨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아프리카의 성자로 유명한 알버트 슈바이처는 그의 저작 <예수 연구서>에서

예수님의 윤리를 '중간기 윤리'(interim ethics)라고 정의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윤리적 가르침은 모두 종말을 코앞에 둔 사람들이 취해야 할

삶의 자세를 가르치고 있다는 뜻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종말이 속히 오리라는 2천 년 전 당시 예수님의 가르침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처럼, 종말이 속히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예수님이 ‘종말은 지금부터 2천년이나 지나서

먼 미래에 올 것이다’ 라고 가르치셨다면.. 그것은 옳은 가르침이었을까요?


적어도 우리는

‘예수님은 임박한 종말의식을 갖고 사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시한부 종말론자’(종말의 때와 시간을 정하는 것)가 되어서는 안 되지만,

‘임박한 종말의식’(종말은 언제든지 임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기초한 삶)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오늘날 대부분 현대인들은, 종말이 먼 미래의 이야기처럼 살고 있습니다.

종말을 올 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사는 것은.. 성경적으로도 맞지 않습니다.

'인류의 종말'이 혹시 먼 미래라 할지라도, 우리 각자의 '개인적 종말'은 정말 임박해 있지 않습니까?


▲사도바울의 <임박한 종말의식>


바울 사도 역시 임박한 종말의식을 지니고 살았습니다.

고전7:29절에서 바울은,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여기서 말하는 '때'는 종말의 때, 재림의 때를 말합니다.


연이어서 "이제부터 아내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처럼 하라"는 말씀은, 고전7:29b

'종말 모드mode‘로 변경된 삶을 살아라는 것입니다.


살전4장에 보면, 바울 사도는 재림에 대해 설명하면서,

"주님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친히 내려오실 것이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다음에 살아남아 있는 우리가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이끌려 올라가서,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할 것입니다"(4:16~17)라고 말합니다.


또한 살전5:1~3절에도, ‘주의 날이 도적같이 갑자기 임할 것이다’라고 가르쳤습니다.


바울도 자기 생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기 생전에 재림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의 가르침은 모두 틀린 것이었을까요?

아닙니다. 바울은 <임박한 종말의식>으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틀린 사람은 <임박한 종말의식>이 없이, 그저 하루하루를 사는 사람들입니다.


▲성도의 마땅한 <임박한 종말의식>


예수님과 바울 사도가 ‘마지막 때’를 열망하고 동경하며

그 사건이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가지고

주어진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처럼 사셨듯이


오늘날 우리 성도들도

"오늘이 내 생애의 마지막 날이다"라는 자세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는 태도는.. 광신이 아니라, 성경적인 태도입니다.


    ‘오늘이 내 생애의 마지막 날이다’라는 의식이

    저절로 생기기 쉬운 곳이.. 아마 총탄이 머리 위로 날아다니는 전쟁터일 것입니다.

    전투에 투입되는 군인들은,

    ‘오늘이 내 생애의 마지막 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당연히 가질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오늘 치열한 영적전투의 최전선에 있다면

    ‘오늘이 내 생애의 마지막 날이다’는 생각을.. 당연히 하게 됩니다.

    만약 그런 생각을, 내가 미처 해 보지 않고 살고 있다면,

    나는 그 영적전쟁에, 아직 투입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내가 마귀와의 치열한 그 영적전쟁에 아직 투입되지 않았다면,

    그러면 그런 영적전쟁이 지금 없습니까? 휴전상태입니까?

    아닙니다. 내 영혼이 아직 졸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정리하면, 깨어있는 성도는

    ‘오늘이 마지막 날일지도 모른다’는 종말의식을 당연히 갖고 살게 됩니다.


이 무시무시한 영적전쟁의 한 가운데서,

담대한 십자가의 군병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밀고 밀리는 치열한 전쟁터의 한 복판에서

    그 분대를 수색작전에 투입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적군이 어디서 매복하고 있는지 모르고,

    총탄이 어디서 날아올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그 병사는 초조한 마음으로 군화 끈을 맸습니다.

    머뭇거리며 총을 둘러매었습니다.

    (전쟁터에서 지휘관의 명령에 불복하거나 후퇴하면, 즉결처분입니다.)

    미적거리며 따라나서는 그 병사에게

    고참 분대장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게, 살겠다는 희망을 버리게, 그러면 마음이 한결 편할 걸세’


    사람은 언젠가는 다 죽습니다.

    일찍 죽느냐/늦게 죽느냐의 차이는 있어도.. ‘한 번 죽는 것은 다 똑같습니다.’

    이왕 죽는 것이라면, 십자가의 군병으로서,

    마귀와의 영적전쟁을 치열하게 치르고, 장렬하게 죽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살겠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매우 복잡해지지만,

    이왕 죽는 것이 인생이니, 내가 죽겠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단순해집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하신 것은,

    자기 죽음을 각오하고, 즉, 임박한 종말의식을 갖고서.. 나를 따르라는 뜻입니다.


▲<임박한 종말의식>은 광신자의 태도가 아닙니다.


이것은 삶의 비밀을 제대로 아는 사람의 태도라 할 수 있습니다.

인생이 마냥 지속될 것으로 착각하고,

아무 긴장감 없이, 영적인 잠 속에 깊이 빠져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말씀도, 바울 사도의 말씀도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합니다.


여기서 대두되는 큰 질문은 이것입니다. "누가 잘못된 것이냐?

예수님과 바울이 잘못된 것이냐, 아니면 우리가 잘못된 것이냐?"하는 것입니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우리가 잘못된 것입니다.

길어봐야 100년도 안 되는 인생을 살면서도

마치 천 년, 만 년을 살 것처럼 살아가는 우리의 사고방식이 문제입니다.


인류의 역사에 시작점이 있듯, 마침점도 있음을 인정하지 못하고,

이 인류의 역사는 웬만하면 이대로 영속적으로 반복되고 순환되리라고 믿는

우리가 문제입니다.


그러니 나는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오늘 이 하루가 나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사는 것이... 최상의 방책입니다.

바로 그것이 예수님이 사셨던 방법이고, 바울이 사셨던 방법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가르침도, 바울의 가르침도 (광신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여전히 귀중한 교훈입니다.


▲일화

며칠 전에 (재미교포 성도) 한 가정이 권총강도의 위협 앞에 섰던 적이 있었습니다.

경찰을 가장하고 집으로 침입한 두 명의 강도에게

3시간 정도 인질로 잡힌 채, 공포에 떨어야 했습니다.

(제/설교자가 그 댁에 심방 가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 성도님께 허락을 받고 이 이야기를 여러분과 나눕니다.)


그분은, 경찰이라고 해서 마음 놓고 문을 열어 주었는데,

갑자기 총을 꺼내들고 몰아치는데 정신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되돌아보니,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답니다.


갑작스럽게 총을 마주하고 나니,

당황스럽고 떨리고 맥이 빠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이렇게 죽는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담담함이 느껴지더라는 것입니다.


그 덕분에 이성을 완전히 잃을 정도로 두려움에 압도되지 않았고,

정신을 차려서 사태를 수습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돌아보면서, "무엇이 나를 그렇게 반응하도록 만들어 주었나?"하고 자문해 보았습니다.

그분의 결론에 따르면, 이유는 두 가지였습니다.


①하나는 신앙이었습니다.

그 성도님은 강도들의 요구에 따라주는 일에 정신이 팔려 있다가,

문득 한 쪽 방에서 간절하게 기도하는 아내를 보게 되었고,

그 순간 "아, 그래, 내가 믿는 사람이지"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 생각이 자신의 마음을 붙들어준 하나의 기둥이었다고 고백했습니다.


②다른 하나는 그 부부가 얼마 전부터 죽음에 대해 생각하면서

나름대로의 물질적인, 그리고 정신적인 준비를 해 두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50을 갓 넘은 그 성도님은, 사건발생 1달 전에, 동생을 암으로 떠나보냈습니다.

동생의 장례식을 다녀 온 후, 이 부부는 죽음이 남의 일이 아니며,

자신들에게도 언제든지 닥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언제 있을지 모를 죽음에 대비해

자녀들을 위해 이런 저런 (아마 경제적인) 준비를 해 두고,

자녀들에게도 만약을 대비해 준비해 둔 내용을 알려 주었다고 합니다.

이러는 과정에서 죽음에 대해 정신적으로 준비되었던 것 같더라는 것입니다.


무의식의 깊은 곳에서,

"지금 죽어도 내 사랑하는 아이들에게는 큰 문제가 없을 거야.

그렇다면 최악의 경우는 피하는 거지"라는 생각이, 자기 마음을 잡아 주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성도님과의 대화를 통해

제가 오늘 전하려는 말씀의 구체적인 예를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언제라도 닥쳐올 마지막에 항상 준비되어 있는 삶!

바로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었고, 바울의 삶이었고,

모든 믿는 사람들의 삶이어야 합니다.


마지막에 대해 준비되어 있을 때, 현재가 제대로 보입니다.

마지막에 있을 일에 준비되어 있을 때,

비로소 현재의 삶을 제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마지막에 준비되어 있을 때,

현재에 당할 수 있는 모든 환난과 역경을 이겨낼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마지막을 당했을 때,

그 공포스러운 현실 앞에 의연히 설 수 있습니다.


▲두 가지 방면의 준비


그 성도 부부께서는 이 땅을 떠날 때를 대비해, 아주 잘 준비해 놓으신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에 대한 준비는 두 가지 면에서 준비되어야 합니다.


①하나는 ‘두고 떠나는 곳에 대한 준비’와

②다른 하나는 ‘내가 향해 갈 곳에 대한 준비’입니다.


둘 중 어느 하나가 빠지면 큰 낭패를 봅니다.

어떤 사람들은 ①번은 잘 준비하면서도, ②번은 준비가 소홀한 경우가 많습니다.


②번의 준비는,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오늘을 사는 우리가 매일 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즉 <임박한 종말의식>을 갖고서, 오늘도 주님을 섬기며 사는 것입니다.


▲인생의 진짜 끝은?


본문 고전7장에서 바울 사도는 마지막에 대해 준비된 사람의 사는 방법,

즉 '임박한 종말의식'의 예를 몇 가지 설명합니다.


"이제부터 아내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처럼 하라"고 말합니다.

아내를 사랑하되, 그 아내가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하라"고 말합니다.

슬픈 일을 만났을 때, 그것으로 세상이 끝난 것처럼 생각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기쁜 사람은 기쁘지 않은 사람처럼 하라"고 말합니다.

좋은 일이 생겼다고 해서,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교만해지지 말라는 뜻입니다.


"무엇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하라"고 말합니다.

물질에 사로잡혀 집착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처럼 하라"고 말합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을 전부로 여기지 말라는 뜻입니다.

결국 사라져 없어질 것이므로, 그에 맞게 처우하라는 뜻입니다.


위의 말씀은, 얼마든지 연장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갔을 때.. 마치 세상이 끝난 것처럼 생각하지 말라는 겁니다.

어떤 사고를 만났을 때.. 마치 인생이 끝장난 것처럼 생각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예기치 않은 질병이, 심각한 질병이 발견되었을 때,

마치 온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행동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강도의 총구를 마주했을 때, 그것으로 끝인 양 무너지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우리 인생의 끝이 아닙니다. 진정한 마지막은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그 모든 일들은, 제 아무리 고통스럽다 해도, 결국 지나갈 일입니다.


정말 관심을 가져야 할 일은 하나님 앞에 서는 마지막입니다.

그 마지막에 준비되어 있다면,

우리는 이 땅에서 만나는 고난과 환난 앞에서 의연하고 담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종말, 내세, 심판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