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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탓, 내 탓 2477

LNCK 2010. 6. 1. 13:19

◈네 탓, 내 탓                                  요나3:3~6                            08.02.10.설교대강녹취, 정리 

                                                                                                              *원제목 : 무서운 암탉


◑네 탓이요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옛 속담이 있는데..

이런 비슷한 속담이 한국에만 있지 않고, 중국과 일본에도 있다고 한다.

또한 전 세계에 공통적으로, 이와 비슷한 ‘여성 비하’ 속담이 있다고 하는데...


예를 들면, 인도차이나 반도에서는, 남자들이 코끼리를 사냥해서 밧줄로 묶는데,

(※인도차이나 반도 : 인도와 China 사이의 반도, 태국, 베트남, 캄보디아 등)

간혹 코끼리가 밧줄을 풀고 도망가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그러면 남자들은 ‘집에 남아있는 여자들 중에, 누군가 머리카락을 잘랐다’고 믿는다.

그 부정이 타서, 다 잡은 코끼리를 놓쳤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냥꾼들이 집에 돌아오면, 애꿎은 여자들을 구박한다는 것이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거나

   ‘코끼리 사냥 실패를 아내들 탓으로 돌리는 것’의 심리를 엄밀히 따지고 보면,

   사람들은 뭔가 안 좋은 일이 생기면, 희생양을 찾는 심리이다.

   내가 아니라, <그 사람 때문에 망했다. 그 사람 때문에 일을 망쳤다>는 심리다.


   거기에는 인간의 타락한 죄성이 교묘하게 숨어 있다.

   자기는 전혀 잘못이 없고, 지금 사태가 잘못된 것은 분명히 남 탓이라는 논리다.


   그렇게 ‘잘못된 결과의 원인을 남에게 전가하는 죄성’이

   문화로 발전해서

   속담으로까지 회자하게 되었다. 거기에 희생양은 힘없는 여성이었다.


▲누구를 탓하는 것은 일종의 신앙(우상)과 같다.

사람이 누구를 탓하는 것은.. 그의 막강한 힘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막강한 힘을 느낄 분은, 오직 하나님이신데.. 그래서 우상숭배가 된다.


내가 사기꾼을 만나서, 사기를 당해서, 그로 인해 불행해졌다고 사기꾼을 탓한다.

그것은 내가, 사기꾼의 존재에 대해서, 막강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믿고 사는 신자들에게 있어서

누군가를 탓하는 것은

하나님이 내 생사화복을 주관하신다는 섭리를.. 믿지 않거나, 반항하는 꼴이 된다.

그래서 사기꾼에 대해, 필요이상의 깊은 원한을 품는 것이다.


하나님이 내 머리카락을 세시듯이 나를 세밀히 이끌어 가시는 데,

혹시 내가 사기를 당하더라도,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섭리’로 이해해야 하는데,

(일례로 요셉이 애굽 종살이를 그렇게 해석했다.)


내가 사기꾼만 미워하고, 그를 저주만 하고 있으면,

‘그가 내게 막강한 존재라는 것을 내 스스로 인정한다/믿는다’는 것이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섭리를 내가 믿지 않는다’는 뜻이 된다.


▲우리가 살면서 가장 남 탓을 많이 하는 대상은.. 다름 아닌 가족이다.

그만큼 만만한 대상이.. 가족 말고는 없기 때문이다.


‘내가 이 남자/여자랑 결혼해서, 그 때문에 내 신세 조졌다.(망했다)’

‘누가 우리 집에 며느리로 들어와서, 그 며느리 때문에 집안이 쫄딱 망했다.’


물론 며느리/사위가 잘못 들어오면, 집안이 휘청거리고 어수선해지는 수도 있다.

그러나 시아버지, 시어머니, 남편이 얼마든지

그런 불행한 결과를 사전에 미리 조율해서 막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태를 수수방관하든지,

아니면 오히려 자신도 똑같이 며느리/사위와 싸워서.. 사태를 더 악화시켰음에도..

모든 나쁜 결과를 며느리/사위 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그것은 인간의 타락한 죄성이다.

 

   주님은 그 며느리/사위를 통해서, 내 회개치 않는 모습을 깨달으라는데..

   자신이 주님 앞에서 회개해야 할 모습들은 깡그리 못 보고,

   남 탓만 하는 동안에는.. 그것을 허락하신 섭리를 깨닫지 못한다.


   그렇게 일평생을 살다가는.. 자기 삶에 아무런 진전(발전)이 없다.

   그래서 남 탓하는 사람은.. 자기가 진정으로 회개하기 전까지는.. 일평생 남 탓만 하며 산다.

 

▲종종 자녀들은, 부모를 원망한다.

‘아버지가 내 이러 이러한 장래의 길을 막았다’


이게 모두 불신앙이라는 것이다.

-배후에 하나님의 섭리를 믿지 않는 불신앙이요,

-그 아버지의 존재를, 하나님보다 더 막강한 존재로 여기는.. 우상숭배이다.


아버지의 뜻을 꺾고, 꼭 자기 뜻대로 일이 다 처리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내게 100% 행복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많은 경우, 아버지의 뜻이, 지나고 보면 더 옳았을 수 있다.

왜냐하면 제삼자가 객관적으로 보는 눈이 대개 더 정확하기 때문이다. 물론 예외 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모든 지금 현실의 불행의 탓을

너 때문이라고, 자기 가족에게 전가하는 것은

결국은 불신앙이다.


그 남 탓하는 습관을 회개하지 않으면,

같은 불행이 내 일생에 계속 반복될 것이요,

나는 죽을 때까지 ‘남 탓하며 사는 인생’으로 초지일관할 것이다.

(실제로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 중에 상당수가.. 이렇게 살아간다.)


▲신혼부부들은, 자신들이 지금 불행한 이유가, 부모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부모가 뭐 재산을 많이 물려주지 못해서..

부모가 결혼 초기 비용을 좀 넉넉하게 대 줬더라면..

친정부모가 혼수를 많이 해줘서 시집보냈더라면... (10명 중에 9명은 아마 이랬다.)

자기가 한결 잘 살았을 것처럼..


이렇게 사람들은, 끊임없이 남의 탓을 돌리며 살아가는 못된 습성이 있다는 것이다.


부모가 아무리 자식에게 결혼 초기 비용을 많이 대어주어도,

역시 사람에게는 만족이 없다.

자기보다 더 받은 사람이 옆에 보이기 때문이다.


자기보다 더 비싼 집을 사서, 신혼을 출발하는 사람이.. 반드시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모를 탓하는데...


그리고 부모가 아무리 결혼초기 비용을 많이 대주어도,

그것으로 딛고 일어선 사람도 있지만, 그것을 다 까먹은 사람도 많다.

(다 까먹은 사람은, 차라리 부모가 초기자금을 대주지 않았으면 까먹지도 않았을 것을..

이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사람은, 항상 불만이요, 남 탓을 돌린다는 사실을 지금 설명 드리는 것이다.

이래도 불만, 저래도 남 탓이다.


   자기가 겪는 모든 불행의 궁극적 원인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섭리요, 잘못이 있다면 자기 잘못인 것인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일평생 ‘자기 불행은 가족 탓’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만만한 게 가족이기 때문이다. (한양 가서 뺨맞고, 고향 와서 분풀이하는 심리다) 


그것은 인간의 죄성이요, 불신앙밖에 안 된다.

그러나 10년 이상 교회를 다녔으면서도, 그러면 안 된다.



◑내 탓이요


진짜 거듭나고, 진짜 회개한 사람은,

자기 자신과 자기 주위의 모든 불행의 원인을 ‘내 탓이요!’ 이렇게 나온다.


▲요나의 ‘내 탓이요’ 신앙

요나가 니느웨로 가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다시스로 가다가, 큰 풍랑을 만나게 된다.

이때 요나는 ‘나 때문에 풍랑이 일어났으니, 나를 바다에 던지라’고 말한다.


따지고 보면, 성경은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의 연속이다.

공동체의 모든 잘못을, 자기 잘못으로 돌려서, 자기가 나서서 회개하는 사람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잘못했을 때, 자기를 죽여 달라고 간구한 모세,  출32:32 

자기가 회개할 자인 것처럼 회개한 느헤미야   느1:4~11

자기가 회개할 자인 것처럼 회개한 다니엘   단9:3~20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서는, 자기는 멸망 받아도 좋다는 사도바울 등,   롬9:3


굳이 요셉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그런 예는 성경에 무수히 많다.

성경의 모든 위대한 종들은.. 모두 ‘내 탓이요!’하고 살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이렇게 한 번 생각해 보자.

오늘날 어떤 개척교회 목사님이

‘한국교회의 잘못은 제 탓이오니, 하나님,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만약 공개적으로 이렇게 기도했다고 했을 때,

그것을 들은 주위 사람들은, 도리어 그를 핀잔 줄 것이다.


‘한국에 대표적인 큰 교회, 대표적인 목회자라면 몰라도,

그런 교회가 회개하는 것은.. 좀 영향력이 있겠지만,

성도도 몇 명 안 되는 미미한 개척교회와 그 목회자가

한국교회 잘못을, 마치 자기 잘못처럼 뒤집어쓰고 회개하는 것은

그것도 자기 의를 드러내는 것이요, 교만하게 보인다’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여러분, (물론 자기 의를 드러낼 때는 그렇지만) 성령이 임하시면.. 그렇지 않다.

   성경에 하나님께 쓰임 받아서, 그 시대를 움직인 많은 사람들은,

   실제로 그 시대의 주류보다는, 비주류가 훨씬 더 많다.

   적어도 하나님께 쓰임 받기 시작할 무렵에는..  오늘날의 개척교회 목회자처럼 당시에 거의 다 비주류였다.


오늘 본문의 요나도, 니느웨 성에 가기 전까지는, 별 볼일 없는 사람이었다.

요나서 말고는, 성경에 아무 기록도 거의 안 나온다. 미약한 사람이었다는 뜻인데...     주1)


▲그런데 요나는 (아직까지 무명임에도 불구하고) 사흘 길 니느웨 도시를, 하루만 돌면서 회개하라고 외쳤다.

 

니느웨는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하나님 앞에 큰 성읍이더라. 욘3:3


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욘3:4


그러니까 니느웨 도시의 2/3(66%) 사람들은, 요나의 외침을 듣지도 못했다.

사흘 동안 다니며 외쳐야 할 거리를, 요나는 단 하루만 외치고 다녔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니느웨 도시 전체가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왔다.


우리 공동체가 아주 작고,

우리의 외침이 아주 작은 외침이라 할지라도,

‘이렇게 나가서는 안 됩니다. 기독교 신앙의 방향을 올바르게 바꾸어 봅시다’라는

우리의 십자가 복음전파가..

서울이나 한국, 세계에서 미치는 점유율은.. 지금은 아주 크지는 않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요나의 전도에서, 큰 힘과 용기를 얻게 된다.

요나가 니느웨의 모든 거리, 모든 사람을 다 다니며, 메시지를 전파한 것은 아니지만,


요나는 단 하룻길만 다니며 전파했지만 

니느웨 성의 모든 사람들이, 회개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그 일이, 니느웨 조정cabinet에 까지 들렸다.

'그 일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 위에 앉으니라.' 욘3:6


   작은 불꽃 하나가, 큰 불을 일으킨 셈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작은 개척교회 목회자라고,

   내가 시골교회 목회자라고.. 그래서 아무 영향력이 없다는 것은.. 사실은 변명이다.

   사실은 나에게 성령이 임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명이 임하지 않아서.. 그렇다.


데이빗 윌커슨 목사는, 미국의 한참 시골에서 목회하던 작은 교회 목사였다.

그런데 그가 하루는, 대도시 뉴욕을 방문한 자리에서, (1960년대 히피운동 때)

뉴욕의 청년들이 범죄로, 마약으로, 타락하는 모습을 목격하고는

요나 선지자처럼, 뉴욕 거리에서 복음을 외쳤다.


그러자 윌커슨 목사를 칼로 찌르려고 가까이 다가왔던 그 청년이

결국은 그 칼을 떨구고, 회개하고, 복음전파자로 거듭났고,

니느웨 성의 회개와 같은.. 놀라운 역사가 뉴욕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십자가와 깡패」the cross & the switchblade를 참조하세요)  


▲지금 한국의 교회적 상황이 어렵고 힘들다고 한다.

그런데 사람들의 대화를 가만히 들어보면

두 부류로 나누어진다.


‘내 탓이요’라고 나오는 사람이 있고,

‘네 탓이요’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나는 개척교회요, 시골교회요, 성도도 작아요.. 하는 사람도

‘내 탓이요!’하고 하나님께 회개하고 나아가면,

사실 실제적인 부흥과 영적 갱신은

그런 비주류 사람을 통해서 일어났다는 것이다. 교회 역사가 언제나 그랬다.


위에서 요나의 예를 들었고,

데이빗 윌커슨 목사님의 예를 들었다.     David Wilkerson


교회 역사를 보면, 역설적이게도,

주류 교회에서 무슨 괄목할만한 영적 갱신의 역사가 일어난 적이.. 거의 없다.

그러나 앞으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겠지만, 다만 역사history가 그렇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눈은 항상, 택함 받은 자, 의인을 향하신다.

하나님의 눈은 죄인에게로 눈을 향하시기 보다는, 항상 의인에게로 향하신다.


이 사회는, 죄인들 때문에 망한다는 말도 되지만,

더 엄밀히 말하면, 의인이 없어서 망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의인이 되라고 말씀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만이라도, 아니 심지어는 나 한 사람만이라도

‘남은 자 the remnant’가 되며, ‘결렬된 틈을 막아서는 자’가 되면  렘5:1, 시106:23, 겔22:30 

하나님은 우리 공동체 모두를 불쌍히 여겨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절대로 남 탓 할 필요가 없으며,

우리 공동체의 기초가 흔들리고, 무너지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자녀들이 해야 할 일은 ‘내 탓이요’하면서

자기 죄를 회개하고, 자기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 작은 한 사람이

   전체 숲을 다 태울 수는 없지만,

   전체 숲을 다 태울 수 있는, 작은 불꽃 하나는

   얼마든지 되는 것이다.                                                                                        ▣ 리더쉽, 목회자  

 

 

주1) 요나서 이외에 요나가 언급되는 구약의 역사서 구절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종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보암(2세)이 이스라엘 영토를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   왕하1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