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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모세 그리고 우리 2499

LNCK 2010. 6. 14. 09:32

◈이스라엘, 모세 그리고 우리                 출1:12-22/정리              02.07.14.설교스크랩



모세의 3시대구분을, 개인적으로 볼 뿐만 아니라,

공동체적으로 본다는 점이 이채로워서 스크랩했습니다.

우리 가정/직장 공동체는.. 지금 어느 시대에 위치해 있나요?



▶모세의 3시대 구분

이스라엘 사람에게 있어서 모세는 사상 최대의 인물이었습니다.

그것은 모세 당시에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그는 노예였던 자기백성을 탈출시킨 훌륭한 지도자였고,

하나님만을 믿었던 백절불굴의 신앙인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들이 소중히 여기는 율법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이 모세의 삶을 돌아보면, 하나님께 우리가 어떻게 인도함을 받는지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인도함을 받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될 지도 알 수 있습니다.

모세가 우리 개인과 공동체의 삶에, 어떤 모델이 된다는 뜻입니다.


모세는 120년을 살았습니다.

학자들은 모세의 생애를 크게 세 시대로 나눕니다.

무디 목사님은 모세의 이 세 시대를 아주 재미있게 정리를 했습니다.


처음 40년은 바로의 궁중에서 자랐지요?

당시 애굽, 이집트는 세계 최강국이었습니다.

그 애굽의 관습과 교육을 받으면서 왕족으로서 아무 부족할 것이 없는 시기였습니다.

이때 모세 자신은 자기를 어떻게 인식했냐하면

"나는 굉장히 잘 난 사람이다"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두 번째 40년은 미디안 광야 시절인데, 애굽 사람을 죽인 게 들통이 나서

혼자 도망을 가서 이름 없는 여인과 결혼해서 양을 치고 있던 그 40년입니다.

이때의 자기인식은 "나는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다"라고 했을 거라는 겁니다.


그러나 마지막 40년 동안 모세는 어떤 사람이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즉 그때는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

그렇게 자기를 인식한 가운데서, 출애굽의 위대한 시대적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세계인류역사에, 4백년간 노예로 살았던 민족이,

독립을 하고, 또한 번영한 나라는.. 이스라엘 말고는 없습니다.


처음에 모세는 자기가 굉장한 사람이라고 생각을 했다가

결국 자기는 아무 것도 아닌 인생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여지는 자신을 주님 앞에 겸손히 드렸을 때,

하나님은 다시 그 다 늙은 모세를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구원의 도구로 쓰셨던 것입니다.


   사실 무디의 견해가 아니더라도 신앙의 길에 접어든 사람은

   누구나 이런 세 단계를 거쳐서야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는 모세처럼 인물이 아니라고요?

우리가 의심의 여지없이 믿어야 될 사실이 있습니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께 선택받았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잘 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에 흐르는 대 주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전제로 하나님의 구원사역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받은 나’에 대해서 의심이 없어야 합니다.

이 사실은 천지가 개벽해도 붙잡고 늘어져야 할 사실입니다.


   내가.. 모세와 다른 분야의 사명을 받았을 수는 있지만,

   내가.. 하나님께 선택받았고, 하나님은 뭔가 나를 통해

   이루기 원하시는 나의 시대적 사명이 있다는 것은.. 모세와 같습니다.


이런 전제를 바탕으로,

모세의 3시대구분이

내 개인적 인생이나

우리 공동체의 역사에도 똑같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세의 3시대 구분을 통해서,

역사의 교훈을 얻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세의 3시대 구분이,

내 삶에, 내가 속한 공동체의 역사에.. 그대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설교문 주제



◑1. 어느 개인, 민족에게든 번영의 시대가 있습니다.


야곱의 가족이 살던 이스라엘 땅에 흉년이 들자,

요셉의 권고로 그 가족은 모두 애굽으로 이민을 가게 됩니다.

이 70명이 애굽에서 430년을 살면서 엄청난 번영을 이룹니다.

당시 고센 땅에 살던 이스라엘의 인구가 얼마였냐 하면 장정만 60만이라고 했습니다.

여자와 아이들 숫자를 뺀, 남자들만 60만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한 가족 당 4명 정도만 쳐도

이스라엘의 전체 인구는 250만이나 되었다는 겁니다.


조선 초기에 우리나라의 인구는 수백만을 넘지 못했다고 하는데

그로부터 6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나라의 인구는 겨우 10배정도 늘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인구는 400년 만에 3만 배가 넘게 증가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출애굽기 1:7에 보면

이스라엘의 인구증가를 표현하면서 '번식'이라는 말을 썼는데

번식이라는 말은 원래 곤충이나 동물에게 쓰는 말입니다.


히브리 원어로 '샤라츠'라는 말인데

그것은 개구리나 물고기가 알을 낳아서 번식하는 상황을 묘사할 때 쓰는 말입니다.

개구리나 물고기가 한 번 알을 낳을 때 얼마나 많이 낳습니까?

이스라엘은.. 마치 물고기나 개구리가 번식하듯

그렇게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엄청난 번영이었습니다.


단지 인구수만 가지고 번영이랄 수 있느냐 물으실 수 있을 겁니다.

고대사회의 힘은, 어떤 강력한 무기나 고난도의 제조기술이 아니었습니다.

그럴 만큼 산업이 발달하지 못했습니다.


한 나라의 힘은 다름 아닌 인구수에 있었습니다.

아직 의술이 발달하지 못한 사회였기 때문에, 평균수명이 50을 넘지 못했던 때입니다.

그러한 때에 인구가 는다는 것은.. 그만큼 잘 먹고, 의술이 발달하고,

사회제도가 잘 되어있었다는 증거가 됩니다. 그래서 인구수는 곧 국력이었던 겁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애굽 땅에서 그렇게 번영하게 하셨습니다.


모세 역시 처음 40년 동안은 번영을 누렸습니다.

애굽 공주의 아들로 살면서 애굽의 모든 좋은 것들을 누렸습니다.

당시 사료에 의하면, 애굽 왕은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공주의 아들을 후계자로 삼으려고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뭘까요? 모세는 왕가에서 실제 왕이 되는 훈련을 밟고 있었다는 겁니다.

모세 주변의 모든 게 최고였습니다.

먹는 것, 입는 것, 사는 것, 누리는 것, 만나는 사람들, 모두가 다 최고였다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자기를 잊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친부모님들께 히브리인으로서의 교육 역시 다 받은 것입니다.

자기의 겉은 애굽 사람이었지만, 자신의 내면은 여전히 히브리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처음 40년에 히브리 사람으로서의 자존감을 키워나갔던 것입니다.



◑2. 어느 개인, 민족에게든 고난의 시대가 있습니다.


그러나 민족에게든, 개인에게든 번영이 영원히 계속될 수는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400년간 너무도 잘 살아오고 있었는데

어느 때에 이르자 상황이 돌변합니다.

요셉을 모르는 왕이 애굽의 새 왕으로 즉위하게 됩니다.


그 새 왕조가, 이스라엘 백성을 보니까 너무 위협적인 거예요.

그 당시 전쟁이 많았는데, 만약 저 민족이 적과 내통해서 자기들의 배후를 친다면

그것은 보통 일이 아닌 겁니다.

즉시 조치를 취하지요.


목축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성과 신전을 짓는데 노예로 삼습니다.

하루 종일 벽돌을 굽고 성을 쌓는 일을 시킵니다.

백성들은 고통과 핍박의 회오리를 만나게 됩니다.

여태까지의 번영은 온데 간데 없고, 고통의 시간이 돌아 온 것입니다.


게다가 그들은 무서운 음모를 꾸밉니다. 산파들을 시켜서

여자아이를 낳거든 그냥 두고, 사내아이면 무조건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을 두려워 한 산파들 때문에.. 실패로 끝나고 맙니다.


그러자 그 다음 단계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령하기를

여자아이는 살려 주겠지만 남자아이를 낳았을 때는 즉시 강물에 버리라고 명령을 합니다.

정말 더 할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이 돌아 온 겁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고통이 오지요?

어느 날부터 다가 온 고통이 걷잡을 수 없을 때가 있지요?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통을 허락하실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고통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고통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은 얼핏 이해가 가지 않지요?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십시오.

만약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 땅에서 계속 번영을 누리고 살았다면

그들은 약속의 땅이요, 자기들이 가야할 땅 가나안은 영영 잊었을 겁니다.


그러나 고통을 받으니까 무슨 생각이 납니까? 조상들이 대대로 유언했던

"너희는 언젠가는 젖과 꿀이 흐르는 우리들의 본토로 돌아가야 해"

라고 말했던 유언을 기억하게 된 겁니다.


'하나님이 시온의 땅에서 다시 한 번 우리를 놀라운 백성으로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셨지'

그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해 낸 겁니다.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고통이 없고 번영의 세월이 영원히 계속된다면

우리는 과연 신앙을 지킬 수 있을까요? 그래도 천국에 대한 소망이 간절할까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지금이 너무 좋은데 가긴 어딜 갑니까?

지금이 더없이 편한데, 이곳보다 더 편한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고통을 당하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그래서 고통은 하나님 나라를 열망하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고통은 은혜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모세가 바로의 궁중을 떠나 미디안 광야로 쫓겨 나가게 되지요?

지금도 제가 잊지 못하는 영화의 한 장면이 있습니다.


<십계>라는 영화 가운데 주인공인 모세가(찰톤 헤스톤 분扮)

광야에서 양들을 풀어놓고, 멍청하게 초점도 없이 어딘가를 보는 모습입니다.


영화의 초입에, 신전 쌓는 일을 감독하던 위풍당당하던 모습은 없어지고,

거기엔 아주 힘없고 야심도 다 잃은 한 노인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닌 한 노인, 그게 고통 속의 모세의 모습이었습니다.


모세의 가장 큰 고통은 무엇이었을까요?

우선 자기 힘으론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데 있었습니다.

사는 것도 처가살이를 하면서 겨우 연명하고 있습니다.


괴로운 것은 자꾸만 영화(榮華)를 누렸던

바로궁중에서의 호화로운 생활이 생각나는 겁니다.

지금의 삶을 보면서 '이건 아니야!' 하면서 고개를 흔들었을 겁니다.


게다가 더 괴로운 건, 어릴 때부터 교육을 받았던 대로

여호와 하나님이 이제쯤은 나타나셔야 하는데, 하나님은 여전히 침묵하고 계시는 겁니다.


모세의 이 고통이.. 비단 모세의 것만입니까? 아니지요?

바로 우리들의 고통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견뎌야만 합니다. 모세 역시 그 암담한 기간을 견뎌 냈습니다.

일 년, 이 년도 아니고, 십 년 이십 년도 아니고 무려 40년을 기다렸습니다.


지금 고통스러우십니까?

그것은 또 우리를 연단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훈련시키시는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이 그제서야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그러면서 그 백성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시작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백성이 됩니다.


고통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지요? 모난 곳을 깎아 버리지요? 그리고 남을 이해하게 되지요?

그래서 고통은 하나님의 훈련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을 의지할 줄 모르는 사람, 하나님은 그런 사람은 절대로 쓰시지 않습니다.


저에게도 고통과 번영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번영의 시간은 극히 짧았고, 고통의 시간은 길었습니다.


여러분도 저와 같이 좋았던 시간, 고통의 시간이 있었을 것입니다.

또 저처럼 번영은 짧고, 고통은 긴, 그런 세월을 보내셨거나

지금 보내시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이 고통의 시간에 저와 여러분이 해야 될 일,

아니,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훈련> 받는 일입니다.


기도훈련, 인격훈련, 인내훈련, 말씀훈련, 생활훈련.. 등

우리가 하나님의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사명을 감당한 다음에도 교만해서 넘어지지 않도록..

하나님은 우리에게 각종 훈련을 시키십니다. 


   이 두 번째 단락의 제목이 고난의 시대인데,

   바꾸어 말하면 훈련/성숙의 시대입니다.          ※관련글: 광야 생활의 4가지 훈련



◑3. 어느 개인, 민족에게든 사명 감당의 시대가 있습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에게 이스라엘과 모세의 이야기로 많은 얘기를 드렸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결론은 소박하게 지으려고 합니다.

우리도 모세의 세 번째 단계처럼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처럼 겁 없이 애굽을 탈출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보이지 않는 광야에서

고개를 푹 꺾고 맥없이 있는 모세의 모습이.. 어쩌면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거기엔 아무도 없습니다. 찾아오는 사람도 없습니다. 지나가는 사람조차도 없습니다.


온 세상 천지에 자기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찾아 오셨습니다.

그때까지 모세는 기다렸습니다. 우리에게도 그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 기다림이 우리에게는 너무도 힘이 듭니다.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실 때까지 어떻게 기다리란 말이야?

그때까지의 고통은 어떻하라고? 말은 쉽지만 기약 없이 어떻게 버티라고?"

우리는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 신구약 전체를 통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의 말씀이 있습니다.

모든 고통과 모든 번영을 다 뭉뚱그려서,

일마다 순간마다 시대마다 하나님 뜻을 관통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로마서 8:28절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아멘.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의 마지막은 반드시 선이라는 겁니다.

이 말씀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고아처럼 두시지 않습니다. 고통을 한없이 겪도록 두시지 않습니다.

번영과 고통의 역사 속에서 결국은 우리들을 선한 데로 이끄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정말 당신은, 자기 사명을 알고 있나요?

내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그런 확실한 사명이 있습니까?


외국에서 박사학위를 공부하는 사람이.. 몇 번의 포기할만한 위기를 겪게 되는데,

그 파도를 넘어서 결국 박사를 취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론 넘지 못하고, 중도에 좌절하는 사람도 있고요.

그 차이는 <소명>입니다.

‘내가 박사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라는 사람은.. 끝까지 버팁니다.


해외선교사 중에도, 선교지에서 끝까지 버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강도를 맞아도, 비자를 거부당해도, 몸이 중병에 걸려도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배 째라는 식으로(유머) 끝까지 인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사명>이 있는 사람은, 죽어도 후퇴를 안 합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그 나라에서 뼈를 묻도록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표적으로 유진 피터슨 같은 분들이

자꾸 ‘일 좀 그만하고, 하늘을 쳐다보라’고 강조합니다.

자기 개인적/공동체적으로..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분명히 찾으라는 것이지요.


*관련글 : 경륜을 깨닫자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나님 나라에서, 오늘 우리 세대의 사명

     대부분 사람들이, 지금 우리 세대가 역사의 종말이라고 인식하고 있는데,

    종말에는 ‘물이 바다 넘침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온 세상에 가득하는’

    시대가 될 것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합2:14, 대저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리라 

  

    이사야 11:9,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성경은.. 종말에 반드시 그런 일(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온 세상에 충만할 것)이 있을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 일을 위해서,

    1. 은혜로 먼저 번영의 시대를 주시고,

    2. 광야를 통과하면서 훈련과 성숙을 거치게 한 후에                                 ▣ 삶의 통찰력  

    3.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온 세상에 가득하게.. 하나님은 택한 자들을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 세대가 감당해야 될, 하나님 나라에서 ‘시대적 사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