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는 귀, 듣는 마음 잠언 21:13 -인터넷설교 스크랩-
◑귀를 막지 마시고 들으십시오.
▶속으로부터 차츰 썩는 사과처럼..
어느 날 사과가 맛있게 생겨서 먹기 위해 사방을 잘 깎았습니다.
그리고는 가운데를 자르고 나서 먹으려고 하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그 안이 썩기를 시작하여 마지막 직전까지 썩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상하게도 사과는 바깥으로부터 썩지 않고, 안에서 썩기 시작해서
다 썩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바깥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사과가 다 썩을 때까지 바깥에서는 알 수 없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이와 같은 현상들이 우리 주변에도 나타납니다.
한 주일이 지나서 교회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즐겁게 웃고 인사를 합니다.
겉으로는 웃고 명랑하게 이야기하는데, 그 사람의 속이 썩어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웃으면서 헤어진 후에, 다음 주에는 교회를 나올 수 없는 낙망에 빠진 사람이 있습니다.
안이 썩어 들어가는 것을 우리는 위기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위기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도움을 받고 삶의 용기를 얻는 교회는.. 희망이 있는 교회요,
위기가운데 좌절하여 마음이 썩고, 탄식하며, 고통을 받는 사람이 있어도..
살리지 못하고 방치하여 죽이고 마는 교회는.. 미래가 없는 곳입니다.
▶교회학교의 사명중 하나도, 바로 아이들의 탄식을 듣는 것이 출발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은 아이들이 무슨 위기냐 말씀하시겠지요.
우리 아이들이 한번 위기를 겪는지 한번 들어 볼까요?
십대들의 쪽지라는 잡지에 실린 어느 아이들의 고백입니다.
제목은 "제 마음을 보여 드려도 괜찮죠?”
"안녕하세요. 갈만한 곳도 없고 쉴만한 곳도 없네요.
터놓고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터놓고 이야기 할 상대가 없네요.
그냥 들어만 주었으면 좋겠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저는 참 힘들어요."
"전 제 환경을 미워해요. 아버지의 이유 없는 횡포, 거기에 지쳐 말라가는 엄마의 얼굴,
좋은 말과 웃음보단 욕설과 짜증이 오고가는 집.
이런 환경을 끊임없이 저주하는 내 자신까지도 너무 싫어요.
노력도 해 보았지만, 그래서 열심히 하려고 이만큼 쌓아놓으면
또 다시 아빠의 횡포와 거기에 반발하는 내 자신이 다 무너뜨려 버리고 말아요.
이런 것들이 반복 반복 또 반복되고 있어요. 진짜 미쳐 버릴 것 같아요."
"왜 이렇게 사는 것이 서글픈지 모르겠어요. 전 너무 결점투성이랍니다.
잘하는 일도 없고, 얼굴도 못생긴데다가, 머리까지 나쁘고, 멍청한데다가,
소극적이고, 자신도 없고, 당당하지 못하답니다.
그리고 얼마나 게으른지, 하루에 다짐은 수백번씩해도 늘 미루고 포기한답니다.
의지력까지 부족하답니다. 진짜 좋은 점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내가 왜 이렇게 미운지 모르겠어요."
"아빤 알코올 중독자예요. 칼로 가족들을 위협하기도 하는.
저희 엄마 정말 많이 맞았어요. 언니도 저도 동생도, 그릇 깨지는 소리, 던지는 소리, 욕설...
다른 집에 양자로 갔음 하는 생각을 많이 하면서 자랐어요."
▶위 이야기는, 그냥 보통 아이들의 이야기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많은 분들은 그것은 특별한 이야기라고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소리가 바로, 우리 곁에 웃으면서 서 있는 아이들의 마음에 있는
보통의 이야기입니다.
이 아이들은 6일 동안 이 위기의 현장에 있고,
우리는 주일날 단 하루 동안 이들을 만나서 가르칩니다.
여러분들의 가르침이, 이러한 아이들의 마음을 읽지 않고 가능하겠습니까?
이들의 탄식하는 소리를 들어야 복음이 전달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본문 잠21:13절은
'귀를 막아 가난한 자의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면
자기의 부르짖을 때에도 들을 자가 없으리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본문은 원래 가난한 자들이 먹지 못해 부르짖어도
모르는 척 하는 부자들을 향한 경고입니다.
그러나 확대 적용하면,
지금 내가, 내 곁에서 탄식하는 자들의 소리를 듣지 않으면,
나중에 내가 어려움을 당할 때, 아무도 내 호소를 듣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조금이라도 더 있을 때에
부족한 자의 소리를 듣고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충고인 것입니다.
약자로 표현되는 자들의 탄식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에, '긍휼을 행하지 않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고 말합니다. 2:13
법대로 심판을 받으면 살아남을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은혜 없이 아무도 살아남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은혜를 얻기 위해
우리에게 맡겨진 자들의 탄식 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듣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남과 대화 할 때, 상대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할 말만 생각하고, 자기 할 말을 하는 것은.. 듣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이 서로 말을 주고받으면.. 듣는 것입니까? (아닐 수 있습니다.)
▶이솝 우화에 보면, 사람들이 어떻게 듣는지에 관한 우화가 있습니다.
어느 대장간에 살고 있는 개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대장간에 쇠를 치는 소리가 얼마나 시끄러운지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귀를 막고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그 시끄러운 와중에도, 그 대장간에 사는 개는
조용한 곳에 있는 것처럼 잠을 쿨쿨 잘도 잤습니다.
(자기와 관련 없는 이야기는, 소음이라도, 소음이 아닐 수도 있다는 뜻)
재미있는 것은 그 시끄러운 중에 식사 시간이 되어서
대장간 주인이 개를 부르기 위하여 아주 작은 종소리를 울리면
어느 사이에 잠자던 개가 뛰어와 음식을 먹을 준비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시끄러운 소리들 가운데에도 자기가 기억하는 밥 먹는 소리는
개가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남의 이야기를 들을 때에도, 남이 하는 이야기를 다 듣는 것은 아닙니다.
그중에 내가 관심 있는 이야기만 귀담아 듣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대화를 하지만, 대화가 겉도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의 관심사에 따라서 남의 이야기를 들으니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대화를 하면서.. 자신의 자존심을 세우라고 말합니다.
남자들끼리 모이면 그래도 나은데,
부부들끼리 모이면 이야기가 어려워집니다.
한 사람이 말하면.. 다른 사람은 그 말뜻을 곰곰이 생각합니다.
'이 말이 나에게 유리한 것인가, 아니면 해로운 것인가?'
몇 마디 주고받으면서 소리 없는 전쟁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나의 자존심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서로 암호 같은 말만 주고받다가 헤어지는 것이 일반입니다.
이것은 듣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대화가 겉돌고 마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된 들음은, 귀로만 아니라, 마음으로 들음이 필요합니다.
참된 들음 이전에 말하는 사람을 믿어 주어야 합니다.
특히나 우리가 매주 만나는 어린 학생들을 대할 때
아이들을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들을 수 있습니다.
상대방을 비판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듣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방을 상처를 치료하고, 약함을 세우고, 돕기 위해 애정을 가지고 듣는 것입니다.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들어야
생명을 변화시키는 기적을 나을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듣는 것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고,
마음을 통하여 상대방의 인격을 받아 주고 용납하게 됩니다.
듣는 가운데 인격과 인격의 만남이 있고,
잘 듣는 노력가운데 하나님의 기적이 만들어집니다.
▶2. 애정을 갖고서 귀담아 들어주십시오.
이렇게 말하면, 어떤 분은 너무 철학적이어서 어렵다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애정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으로써
아이들을 살리는 선생님이 되려면 누구든지 알아야 합니다.
먼저 잘 듣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심리학적인 지식이 아닙니다.
유창한 말솜씨입니까? 유창한 말솜씨는 오히려 아이의 말을 가로 막습니다.
참된 대화, 참된 들음은,
아이들에게 힘을 주는 것이지, 지시적인 내용을 제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수두룩한 정보가 아닙니다.
아이들에게는 자신의 말을 인내로 들어주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 주는 애정인 것입니다.
잘 몰라도 됩니다. 그냥 아이들의 말을 사랑으로 들어주기만 하면
문제의 반은 해결 됩니다.
▶3. 먼저 신뢰관계가 형성된 후에라야, 내담자는 입을 엽니다.
우리가 가르치는 아이들은 표정으로 말하고, 행동으로 말하고,
입으로 말하고, 때로는 반항으로 말합니다.
귀로 듣고, 마음으로 듣지 않고서는.. 그들의 의사표현을 알아내기 어렵습니다.
심리학에서 상담을 할 때,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라포 관계가 형성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라포는 신뢰관계가 이루어진 것을 말합니다.
'말해도 비웃지 않고 진지하게 들어주느냐?'
'말하면 내 마음이 편안할까?'
'말하고 나면 나를 거부하지 않을까?'
상담자를 찾아 온 내담자는 이러한 질문을 합니다.
그래서 믿을만할 때가 될 때까지 말하지 않습니다.
나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비로소 말합니다.
그래서 선생님들이, 아이들의 잘 듣기 위해서는
먼저 아이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까를 늘 살펴야 합니다.
선생님은 아이들의 고민을 듣고 싶은데..
아이들이 자기를 찾아오지도 않고, 말을 털어놓지도 않을 수가 있겠지요.
선생님이 자기를 믿어 주지 않으니까 그렇습니다.
선생님이 공과 시간에 자기 자랑만 하고, 농담으로도 아이들을 막 깎아 내리고,
아이들이 어쩌다가 질문하면, 그 말을 잘 못 알아듣거나,
아이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면.. 아이들은 의욕을 잃게 됩니다.
아이들이 수업 중에 하는 말을 듣지 않는 선생님에게
아이들은 정을 느끼지 못합니다.
들음의 능력은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 가운데 갇혀 있는 아이와 함께 울고, 함께 기뻐 해 주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기뻐하는 시간에 기뻐하지 않고,
아이들이 울 때 울어 주지 않으면..
그 선생님에게 아이들이 찾아 올 리가 없습니다.
▶4. 믿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①문제아 전문가인 한 일본인 교사는, 문제아를 대하는 첫 번째 방법은
그들을 믿어 주는 것이랍니다.
문제아들의 대부분은 버림받은 경험이 있기에
그들을 치료하는 방법은 '무조건 믿어 주는 것'입니다.
그들의 행동이 옳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최선을 다해서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기에
그를 믿는 것입니다.
②이것은 하나님의 마음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드릴 때, 우리 기도제목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기도를 받으시는 하나님은,
우리 기도제목이 중요해서가 아니라,
우리(존재)를 중요하게 여기시기 때문에.. 우리 기도를 들어 주십니다.
도마가 주님의 못 자국을 만져야 예수님을 믿겠다고 했을 때
우리 같으면 '이 미련한 놈아, 넌 보지 않고 믿어야 복된 거야!' 하고 비난하지 않으시고,
'네가 정말 봐야 믿겠다면 보여주마. 그렇지만 다음부터는 보지 않고도 믿어라'
이렇게 하셨습니다.
도마를(우리를) 인격적으로 존중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③마찬가지로 아이들이 그 행동을 했다면, 그 행동이 옳아서가 아니라,
그 행동을 옳다고 여기는 아이(존재)가 소중하기에.. 그를 믿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전폭적으로 믿어 주는 사람에게, 아이들은 목숨도 바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무시하고, 상처 주는 사람은..
존경할 리 없고, 마음을 주지도 않습니다.
심리학적인 지식이 많아야 이것이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인내를 가지고 들어주는 것이 출발입니다.
작은 것도 가볍게 여기지 않는 마음만이, 이러한 신뢰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상담자는 마치 거울과 같습니다.
비록 해답을 주지 않아도, 아이들이 말하는 것을 다 들어주면,
아이들은 자신이 말한 것들을 통하여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상담자가 들어 주기만 하여도
아이들은 말을 통해 에너지를 발산하고, 스스로 방향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그 아이가 하는 말을 열심히 들어 주니까,
다 끝나고 나니까 아이가 이렇게 말합니다. "좋은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자신의 말을 들어 주니까 자기 혼자 말하면서도
아이가 생각하기에 '대화를 했다. 교훈을 들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의 말을 인내로 들어주면, 아이들이 나름대로 해결책을 가져가는 것입니다.
▶5. 조건 없이, 자존감을 높여주십시오.
애정을 가지고 들을 때 가장 유념하여야 하는 것은
아이들의 자존감을 높여 주는 것입니다.
의외로 낮은 자존감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한국 사회와 같은 교육 환경에서는, 낮은 자존감을 유발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과거에 제가 낮은 자존감 때문에 어둔 그늘가운데 살던 때를 생각하면
너무나 가슴이 아플 때가 있습니다.)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이 노랫말에 보면
'당신이 이 세상에 존재함으로써, 우리에게 얼마나 기쁨이 되는지' 라고 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 받기를 원합니다.
조건 없는 사랑을 받은 사람만이,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사랑 받고, 가치를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부모나 학교가 우리에게 주는 사랑은, 많은 경우 조건적입니다.
공부를 잘하면, 노래를 잘하면, 운동을 잘하면, 심부름을 잘하면.
이와 같이 사랑은 조건적인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한 아이가 존재하는 자체가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받을만한 일을 할 때만.. 사랑을 받는 현실입니다.
우리 존재 자체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행위에 따라서
우리는 사랑 받을 수도 있고, 사랑을 못 받을 수도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특히 어려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늘 마음속에 사랑 받지 못한 것에 대한 한이 있습니다.
사랑 받기 위하여 자신을 채찍질합니다.
못 받은 사랑을 보상하기 위하여 애를 씁니다.
조건적인 사랑에 익숙해지면, 늘 자신을 학대하면서 주위를 의식합니다.
◑주님은, 내 모습 그대로/ 내 존재를 사랑해 주십니다.
▶그런데 이러한 (조건적인 사랑) 문화가, 신앙의 형성에도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저도 어려서부터 완벽을 요구하시는 어머니 밑에서,
공부 잘하고, 착해야만 사랑 받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늘 사랑 받기 위하여, 무엇인가를 행하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역시 이 생각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내가 신앙인이 되려면 무엇인가를 하여야 하는구나' 하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구원자가 되고, 믿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해도
나는 이방인이었습니다.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이야기로 들렸습니다.
내속에서 나를 미워하는 깊은 상처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너는 죽어도 안 돼. 너는 항상 실패할 것이야. 야, 네가 뭐 잘 하는 것이 있냐?'
비웃는 그 소리 때문에 나는 끊임없이 나를 학대하며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려면, 무엇인가 조건을 채워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수련회 기간 동안,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OO아, 나는 너를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
너의 그 이상도 아니고, 그 이하도 아니고, 네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사랑한다."
그 사랑을 가슴으로 느끼는 순간, 저는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내가 실수하고 넘어지고 잘못해도
실수 때문이 아니라
실수에도 불구하고 내 모습 있는 그대로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지쳐있는 우리에게 다가 오셔서, 먼저 어떤 요구를 하시는 것이 아니라
'너 있는 그대로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사랑을 받아들일 때, 나의 인생은 새로 시작됩니다.
주님의 사랑을 내가 받아들일 때에야
비로소 내가 나를 미워하지 않고 나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날 분명히 거듭났습니다. 주님을 받아 들였습니다.
얼마 전 버스를 탔는데 <여성시대>라는 프로에서
한 슬픈 여인의 편지사연을 듣게 되었습니다.
IMF시대에 직장을 잃은 가장이 자신감을 잃었습니다.
그리고는 죽음이 최선이라고 믿고, 죽을 방법을 찾다 마침내 자살을 하고 말았습니다.
이 소식을 접한 아내가 탄식을 하며 울부짖었습니다.
아내는 말하기를,
당신이 무엇을 벌지 않아도, 그저 내 곁에 있기만 해도 되는데, 왜 먼저 떠났느냐고.
그런 아내의 마음을 알지도 못하고, 남편은 자신이 돈을 벌지 못하니까,
더 이상 자신의 가치를 깨닫지 못하고, 죄책감을 느끼고 이 세상을 하직했습니다.
존재보다는 행위를 중요시 여기는 이 시대의 편견이, 그를 죽이고 말았습니다.
존재보다 가치 있는 행위를 요구하는 시대가
사람들에게 열등감을 부추기고, 좌절하다, 자기를 학대하다가
마침내 자살을 하게 만드는 시대인 것입니다.
▶그의 존재로 인해, 그를 인정해 주고, 사랑해 주십시오.
내가 나 자신을 대할 때는 물론이요, 이 시대를 사는 아이들에게도..
그들의 행위/업적/성취가 아니라,
자신이 이 세상에 존재함으로 가치 있고, 우리에게 기쁨임을 알게 해야 합니다.
오늘 집에 가시면 아이에게 말씀해 보십시오.
'얘야, 네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냥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나에게 기쁨이란다.'
부모의 욕심을 거두지 않고는, 이 말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말을 들으면 놀랄 것입니다. 낯빛이 환해 질 것입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들도 1등하고 멋있고, 노래 잘하는 아이만 칭찬하지 말고,
존재하는 것 자체가 축복이라고 아이들에게 말해 보십시오.
아이들의 눈빛이 달라 질 것입니다.
좌절하고, 상심한 이이가 힘을 얻을 것입니다.
1등을 포기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아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 줄 때,
아이들은 비로소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자리에 서는 것이고,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면, 평생 자신을 미워하면서 불행하게 살기에,
아이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이.. 그를 가장 잘 돕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신 것은, 잘난 사람만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누구든지, 모든 사람이 새로운 존재로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분이 대가를 치루셨습니다.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이 우리의 존재 자체가 복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온 축복임을 깨닫는 자만이
인생을 기쁨으로 시작을 할 수 있습니다.
이 시대의 경쟁논리에 상처 입은 영혼들이
오늘도 낮은 자존감으로 자기를 학대하며,
그리고 무조건적인 신앙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존재보다 행위를 중시하는 시대의 문화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합니다.
이 힘든 시대를 사는 아이들을 대할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있는 그대로의 사랑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애정 어린 우리의 들음을 통하여,
아이들이 자신의 존재 자체를 기뻐하며,
자신들의 인생을 극적으로 바꿀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수많은 프로그램의 홍수 속에 우리 선생님들이 잊어서는 안 될 일이 있습니다.
한 영혼을 만지시고, 들으시고, 치유하시는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생명은 이 세심한 들음에서부터 시작 됩니다. 아이들의 버팀목이 되어 주십시오.
아이들이 언제나 달려갈 수 있는 그곳에 계셔서,
아이들의 탄식을 들으시고, 함께 울고 함께 즐거워하는 대상이 되십시오.
그것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듣는 귀, 듣는 마음을 통하여, 그들의 존재가치를 인정해 주고, 사랑해 줄 때, ▣ 내적 치유
나와 우리의 운명 공동체가 하나님의 생명에 동참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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