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분류 없음/2002~2003

창조적 포기 2481

LNCK 2010. 6. 3. 13:24

◈창조적 포기                               창12:1-5, 히 11:8-10                          02.09.15.설교스크랩,축약

                                                                                                *원제목 : 미래를 향한 우리의 모습은


더 나은 나의 미래를 위해서는,

내가 뭘 좀 더 가져야 하고, 보태야 하는 게 아니라,

뭘 좀 더 창조적으로 포기하느냐.. 에 달려있다는 주제의 설교문


 

◑스펜서 존슨의「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라는 책 이야기를 아시지요?


생쥐 두 마리와, 꼬마인간인

미로 속에서 치즈를 찾아다니는 줄거리입니다.


어느 방이든 늘 치즈가 있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이 치즈가 없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꼬마인간 허와 헴은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하고 계속 불평만 합니다.


그런데 둘 중에

이렇게 불평만 해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치즈를 찾아 나섭니다.

도중에 실망과 좌절을 겪지만 결국 새 치즈를 찾아냅니다.


그리고는 아직도 과거에 대한 집착과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망설이고 있는

어서 용기를 내서 새 치즈를 찾아 나서기를 바란다는 얘기입니다.


▲이 책이 던지는 교훈 한 가지는.. <창조적 포기>를 잘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새 미래를 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꼬마인간 허가 새로운 치즈창고를 찾아다니면서

그때그때 자기의 경험을 짧은 격언으로 벽에다 적어 놓습니다.

그 중 몇 가지를 보면.. (창조적 미래를 위해서, 지난 과거를 포기하라는 내용입니다.)


“사라져버린 치즈에 대한 미련을 빨리 버릴수록, 새 치즈를 빨리 찾을 수 있다.”

“빈창고에서 기다리는 것보다, 불확실한 미로 속에서 찾아다니는 것이 더 안전하다.”


“변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과거의 사고방식은, 우리를 치즈가 있는 곳으로 인도하지 않는다.

새로운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이, 새 치즈를 찾는데 도움이 된다.”


“치즈냄새를 자주 맡아보면, 치즈가 상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등입니다.


여기서 치즈란.. 우리가 생활 속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아우르는 개념입니다.

우리가 얻고자 하는 직업, 인간관계, 재물, 명예, 근사한 자동차,

자유, 건강, 명예 이런 것들입니다.


이 작가가 하고 싶었던 얘기가 뭘까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 나름대로의 ‘치즈’를 마음속에 두고

그것을 추구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 치즈가 사라져 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얻는 것에 집착하고,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서는 그저 고통과 슬픔을 맛보면서

미로를 헤매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땅의 창고에서 발견한 치즈에 <집착>하고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이 사라져 버린 다음에도 <미련>을 안고 탄식하며 애통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자는 이런 말로 이야기의 끝을 맺었습니다.

는 변화에 대한 감지 속도가 늦을수록 타격이 크다는 사실을,

또 과거에 집착하고 미련을 두는 것은

또 다른 변화를 알아차릴 수 없는 과오를 남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를 수용하는 데 있어 가장 큰 방해물은

자신의 마음속에 있으며,

자신이 먼저 변하지 않으면 다른 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이 책을 신앙적으로 적용하면,

   우리는 이 땅의 창고에 쌓인 치즈들의 변화(상하고, 옮겨짐)를 빨리 눈치 채고

   하늘나라에 있는 치즈를 찾아서 탐험에 나서야 할 것입니다.



◑포기를 잘 한 아브라함


히11:8절을 보면,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거기에 순종해서

장차 자기가 기업으로 받을 땅을 향해 나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갈 곳이 어딘지도 모르고 떠났습니다.


물론 창12장에서 하나님은 그를 통해서 큰 민족을 이루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증표인 아들도 없었습니다.


가려는 땅이 어딘지도 모르고, 그 약속의 말씀도 지켜질지 어떨지도 잘 모르면서,

자기의 본토 친척을 떠난 것입니다.

미래에 대한 무슨 계획도 없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무작정 안정된 고향 땅을 떠난 것입니다.

참으로 무모한 계획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열심>이란 책에 보면,

아브라함의 삶에 있어서 독특한 견해가 나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란 말만 들어도 보통 사람은 야코가 죽는데

사실은 아브라함이 그렇게 대단한 인물이 아니라, 우리와 비슷한 사람이었다는 겁니다.


특히 본토 친척을 떠난 것에 대해서도

그것이 믿음으로라기보다는

어쩔 수 없이 뭔가에 떠밀려서 떠났다고 해석을 했습니다.


아마도 믿음의 조상이요, 모든 사람이 우러러 보는 신앙의 위인일지라도

우리가 넘볼 수 없는 정도는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떠났든, 아니면 다른 뭔가에 떠밀려서 떠났든

거기에 관계없이 분명한 사실은,

아브라함은 본토와 친척과 자기가 그동안 쌓아놓은 부와 명성을

모두 버리고 떠났다는 사실입니다.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 그는 지금까지의 안정된 삶을 모두 포기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안전이나 안정을 바랍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루아침에 그 안정을 스스로 버린 것입니다.

   그리곤 미래라는 신세계를 탐험하는 모험을 선택한 것입니다.


유명한 경영이론가이고, 닉슨 대통령 시절부터 미국 행정부의 자문위원으로 있는

하버드 대학교의 마이클 포터 교수는

기업의 경영에 있어서 금과옥조(金科玉條)같은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기업이 전략을 세우고자 할 때는, 흔히 무엇을 해야 성공할 수 있는가에 몰두한다.

그러나 전략이란.., 무엇을 할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포기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이 문장이 마음에 들어서, 이 설교문을 채택해서 이 블로그에 소개합니다/편집자주)


그렇게 말하면서 경쟁업체와 경쟁에 있어서,

앞으로 할 가능성이 있는 것도 물론 살펴야 하겠지만,

앞으로 ‘뭘 하지 않는 것’(창조적 포기)을 끊임없이 살피는 것이

오히려 성공가능성이 더 많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얘기는 기업 뿐 만이 아니라, 우리 개인적 삶의 영역에서도 고스란히 적용됩니다.

   미래를 탐험하기 위해서는.. 포기할 것을 포기하는 게 O순위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주신 미래가 있었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이 말씀을 붙잡은 것입니다.

 

그 대가는 본토 친척 아비집의 기득권을 포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길을 가기로 결단하고, 모험의 길을 선택한 겁니다.

 

'믿음의 조상'으로 불리는 아브라함의 위대한 믿음은,

그 첫 걸음이 '포기'였습니다. '포기'로부터 출발한 믿음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안락한 삶을 원하십니까? 아니면 사명의 삶/보람된 삶을 원하십니까?

   안정으로 사십니까? 아니면 사명으로 사십니까?

   여러분은 부유하고 안정된 삶보다는, 사명으로/보람있는 삶을 원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아브라함의 꿈이었고, 우리의 꿈이고, 하나님의 바라시는 미래입니다.

   그러려면 제일 먼저 해야 될 일, 첫 단추가.. 버리는 일인 것입니다.


창조적 포기의 모델 사도바울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자신의 모든 부와 지식과 명예와 안정된 삶을 포기하고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에 참여하고자, 그 목표를 향해 달려갔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난 후, 사도 바울은 자기가 전에 귀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13권이나 쓰면서, 그 사실을 후배들에게 알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후배들이여! 손을 놔 버려라. 그러면 가장 고귀한 하늘의 것들로 채워 질테니.

그 후엔 어떤 일을 하든지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야!”

그 말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꿈은 영원한 생명의 세계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포기하는 가운데 모든 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미래를 탐험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바로 안정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경제적 안정, 직업적 안정, 사역의 안정... 등


   안정을 포기하면, 험난한 모험과 탐험의 세계가 열릴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그 세계로 달려들기만 한다면

   여러분은 이전에 보지 못했던 흥분을 맛볼 것이고,

   가는 곳마다 흥미진진한 세계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마치는 말

조각을 하려면.. 자기가 생각했던 모양을 머리에 새겨놓고,

그 모양이 아닌 부분만 칼로 깎아내면 됩니다.

무엇을 외부에서 가져다가 붙이는 게 아닙니다.


가장 값나가는 가구는, 이음새가 없는 가구입니다.

이음새가 없으려면 하나의 원목으로 깎아내야 합니다.

붙이거나 잇는 게 아닙니다.


우리 역시 새로운 것을 가져다가 붙여야 될 일보다

우리 스스로 가진 것을 깎아내야 할 부분이 훨씬 더 많습니다.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완벽하신 작품입니다.

그렇기에 더 갖다 붙일 게 별로 없을 만큼 완벽한 존재입니다.

다만 우리가 그 잠재해 있는 위대한 것들을 발견하지 못할 뿐입니다.


깎아내고 포기해서, 끊임없이 새롭게 변해야 합니다.

그래야 (오늘 본문대로)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세우실 튼튼한 기초를 가진 도시,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성(城)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히1:10


오늘 아브라함의 이 결단과 선택이 여러분의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잠시 쾌락을 취하는 것보다, 영원한 새 나라를 보면서

모든 안정적인 것들을 포기하시고

새롭게 변화하는 모험의 길로 나아가는, '아브라함', '사도바울'이 되시기 바랍니다.


안정을 박차고,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모험의 신세계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또 하나의 복의 근원이 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변화를 요구하는 우리 주님의 음성에 이제는 답하게 하시고,

주님이 인도하시는, 모험의 새 여행을 갈 수 있도록 용기를 주옵소서.


과거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영원한 터전 위에 집을 세울 수 있도록,

우리의 구태를 벗어버리고 앞을 향해 모험하게 하옵소서.

일생 주님만 바라보며 천막생활을 두려워하지 않는 모험의 세계로

과감하게 떠날 수 있도록 믿음을 더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더 읽으실 분 ........................................


 

◈‘창조적 포기’가 있는 사람에게.. 신앙인격적 성숙이 시작됩니다.              10.04.25.설교스크랩 


‘창조적 포기’가 없으면.. 신앙인격적 성숙도 없습니다.

신약성경이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는 삶’은

‘창조적 포기’를 뜻합니다.


◑기독교는 변화의 종교


▲(외적으로) 감독이 바뀌어도, (내적으로) 변화가 안 일어날 수 있습니다.

스페인의 프로 축구팀에 ‘레알 마드리드’라는 팀이 있습니다.

세계의 좋은 선수란 선수는 다 끌어들이는 팀이지요.

물론 성적도 항상 상위권입니다.


그런데 이 축구팀의 악명 높은 게 한 가지는, 감독 목숨이 파리 목숨이라는 겁니다.

지난 22년 동안 무려 19명의 감독이 지나갔습니다.

그러니까 감독 평균 수명이 1년이 조금 넘습니다.


반면에 박지성 선수가 뛰고 있는 영국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팀의 알렉스 퍼거슨 감독은

지금까지 무려 25년 동안 혼자 감독직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두 팀의 성적은 어떨까요?

돈은 돈대로 들이고, 감독을 수시로 바꾸는 레알 마드리드는

지난 6~7년간 ‘챔피언스 리그’에서 죽을 쓰고 있습니다.

잘 올라가 봐야 16강, 8강입니다.

그런데 맨체스터는 늘 결승, 준결승에 올라갑니다.


감독을 바꾼다는 것은 변화를 위한 것이지요?

그런데 한쪽은 그렇게 변화를 주는데도 나아지질 않고,

또 한 쪽은 변화가 없는 것 같은데도, 항상 좋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건 무슨 얘기일까요?

   아무리 변화무쌍하더라도 그 변화가 외적인 변화에 그치고 만다면

   그건 진정한 의미에서 변화라고 할 수 없다는 겁니다.


   반면에 외적으로는 별 변화가 없는데도 계속 성장해 간다면

   거기엔 뭔가 남들이 알지 못하는 내적 변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얘깁니다.


▲변화가 없는 이유.. 결국은 자기 자아와, 세상을 포기하지 못 했기 때문/아직 다 거머쥐고 있기 때문입니다.

각 교회에서 해마다 선거를 해서 새로 일꾼을 뽑고,

팀에서 선수를 계속 바꾸고, 감독을 바꾸는 등등의 일은.. 모두 변화를 위해서입니다.


만약 변화가 없다면, 사람을 바꿀 이유가 없겠지요?

여자들이 비싼 옷을 사 입고, 새로 머리를 하고, 신발을 바꾸는 것도

변화를 위해서입니다.

교회에서 설교하고 양육하는 목적도 딱 하나.. 성도의 변화를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만약 계속해서 변화가 없다면 그건 무슨 얘길까요?

그건 생명력이 없는 것이고, 생명의 활동이 멈춘 것인데,

그 이유는, 아직도 '죽지 않아서' 입니다.

죽어야 새 생명으로 다시 사는데.. 전혀 죽지를 않았으니.. 새 생명으로 살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아가 죽은 사람, 세상에 대해 죽은 사람, 정욕을 포기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변화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새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예를 몇 가지만 들어볼까요?



◑자아가 죽은 사람에게 나타나는 내면적 변화


▲자아를 포기할 때.. 분노를 다스리는 성숙에 이릅니다. 

예를 들면, 우리 중 그 누구라도 다 분노가 날 수 있겠지요? 

운전하다보면, 짜증이 날 때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분노를, 운전석에서 고스란히 다 쏟아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유야 있지만, 그래도 아직 신앙인격이 성숙되지 못한 증거입니다.


신앙인격을 타고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다만 기도와 말씀을 통해, 자기 내적변화가 일어난 사람만.. 점점 성숙되어갑니다.


저도, 처음에는, 성숙하질 못해서, 분노를 있는 그대로 다 표출 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예수 안에서 점점 성숙해 가면서, 분노를 참을 줄도 알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분노하는 내 자아의 죽음을.. 끊임없이 내 스스로 기억하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포기할 때.. 돈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

돈이 여러분에게 너무 많이 주어지면.. 자칫 잘못하면 돈의 종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여러분께 돈을 많이 안 주시는 것을 아시죠?


돈을 잘 다스리기 시작하면, 하나님이 더 주실 수도 있습니다.

다스릴 수 있으니까 주시는 겁니다. 


적어도 우리는, 이런 평가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저 사람은 돈 가지고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아니야!”


그런데 반대로 어떤 사람은,

돈만 주면, 무슨 일이든 다 할 수 있는 사람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질 면에 있어서.. 아직 신앙의 성숙이 더 필요한 단계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단순하게 살아야 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단순하게 살면.. 돈이 많이 없어도 살 수 있습니다.   

   약간 불편할 터이지만.. 돈이 없어서 오히려 얻는 것도 많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삶은 여러 모양이 있는 게 아니라 딱 두 가지,

<다스리는 인생>과 <종노릇 하는 인생>, 둘 만 있을 뿐이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 종노릇 하는 인생이 아니라, 뭐든지 다스리는 인생이 되시기 바랍니다.


▲세상을 포기하고 천국을 바라볼 때.. 세상적 두려움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

분노와 돈을 예로 들었는데, 두려움도 마찬가지입니다.

살면서 정말 힘든 게 두려움입니다.

아마 여러분도 거기에서 자유로운 분이 별로 없을 겁니다.


두려움도.. 신앙의 성숙도와 비례하는 것 같습니다.

성숙한 성도는.. 큰 두려움도 잘 이깁니다.

아직 미숙한 성도는.. 작은 두려움도 크게 느낍니다.


아이를 서넛 낳아본 엄마가 또 출산을 두려워하지 않듯,

두려움도.. 신앙으로 이겨본 사람이.. 더 잘 견디는 것 같습니다.

 

   궁극적으로 기독교 신앙은, 본향을 지향(목적)합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살 동안에,

   못 먹고, 못 입고, 출세 못 하고.. 이런 것을 너무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현세를 지향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여러분, 여행지에 가서 야영을 할 때,

   텐트 크기로 자랑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텐트는 진짜 자기 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인생을 장막(텐트)생활로 비유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망가지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망가져봤자 텐트생활입니다.

   성경은, 영원한 천국에서 망가지지 않을 것을.. 두려워하라고 가르칩니다. 마10:28참조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성숙하기 위해서는 여러분의 내면을 채워야 합니다.

오늘날, 내면을 채우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외적으로 남들에게 보이는 일에, 너무 관심이 많습니다.

우리 문화가 그렇게 흘러가고 있는데, 문제는 교인들도 거기에 휩쓸리는 것입니다.


많은 성공했다는 사람들이 어느 날 보면

엉뚱한 일을 저질러서 세상을 놀라게 하는 일이 있습니다.

타이거 우즈 같은 사람들, 골프 황제로서 부와 명성을 동시에 가졌는데,

어느 날 말도 안 되는 스캔들로 사람들에게 실망을 주잖아요.


이유가 뭘까요?

속이 허해서 그렇습니다.


그가 누리고 있는 인기나 지명도는

50대의 성숙도를 가지고도 감당 못할 정도인데

그것을 이미 20대 때 누리기 시작한 겁니다.

반드시 문제가 됩니다.


우리나라에도 10대 말이나 20대 초에 뜨는 아이돌 스타들이 있습니다.

그 친구들도 속이 차지 않으면, 어느 순간엔가는 반드시 문제를 일으키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나이 30이 될 때까지

노예로서 수없이 많은 훈련을 시킨 이유가 뭐겠습니까?  

속(내면)이 꽉 차길 원하셨던 겁니다.

그래야 애굽의 총리가 돼도 흔들리지 않을 것 아닙니까?


그래서 여러분이 혹 남들보다 특출나다면, 그것 때문에라도 더 기도해야 됩니다.

내 자아가 죽는 연습을 매일 하고, 그 빈공간에 예수 그리스도로 가득 채워야 

우리 인생이 허무empty해지지 않습니다.           


▲이 시간, 한 번 자신을 돌아봅시다.

여러분의 껍데기에 비해서 내면의 세계는 어떻습니까?

꽉 차 있습니까?


공허해져 있다면 더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그 모든 ‘변화’의 출발은, 자기 자아를 포기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내 마음에 채움으로써만,

내 내면의 공허함/목마름/허무함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내적인 변화가 일어난 사람은,

   외적으로도 반드시 변화가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후략)                                         ▣ 복음 관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