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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04~2005

요한 웨슬리의 3S

LNCK 2010. 6. 25. 11:58

 

 

www.youtube.com/watch?v=V3u1qMcMI9o

◈요한 웨슬리의 3S                               요1:47-51                                 05.06.26.설교스크랩

 

 

▶한 사람의 힘 (위 영상물에서는 맨 뒤에 배치했습니다) 

일본이 자랑하는 인물 중에 우찌무라 간죠라고 하는 세계적인 신학자가 있습니다.

이 분은 일본이 전쟁을 치루는 동안에도 다른 일은 하지 않고

자기 집의 여섯 평 짜리 다다미방에서 젊은 청년 몇 명 만을 데리고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의 제자들 가운데 동경대 총장 두 명과 유능한 수상 한 사람이 나왔고,

그 외 여러 분야의 지도자들이 배출돼서 전후(戰後) 일본을 재건했던 주역들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은 현대 일본을 살린 역사의 인물로 당당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언제나 그렇습니다만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

혼자의 힘으로 뭘 할 수 있겠냐 생각하지만, 한 사람이 전체를 물들일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영향력이 한 나라의 운명을 바꿀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죤 낙스가 '저에게 스코틀랜드를 주십시오. 아니면 죽음을 주십시오' 하고 기도했을 때, 

그 기도 때문에 영국여왕이 떨었고, 결국 스코틀랜드는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훌륭한 민족의 지도자들을 여럿 두었었습니다.

조만식 선생이라든가 주기철목사님, 손양원 목사님을 비롯해서

이름만 들어도 옷깃을 여밀 만큼, 시대의 등불이 되었던 지도자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그런 스승을 두고 있지 못합니다.

그래서 모든 면에서 혼란스러운 지금의 우리 조국에,

죤 낙스나 우찌무라 간죠, 조만식 선생 같은,

나라의 정신적 지주가 될 만한 사람이 나오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혼돈의 시대에 영국을 구한 한 사람, 요한 웨슬리

18세기의 영국은 광기와 혼돈의 시대였습니다.

(아니 유럽 전체가 그랬습니다. 왕정이 붕괴되고 시민의 정부가 들어서는 과도기였습니다.)

 

영국 전체가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는 총체적인 부패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때 복음의 깃발을 높이 들고 나온 사람이 웨슬리였습니다.

이 분은 단지 목사였을 뿐, 자기가 무슨 영국을 살리겠다고 나선 인물이 아닙니다.

그런데 결과는 영국을 살린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를 두고 영국의 수상이었던 로이드 죠지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죤 웨슬리는 앵글로색슨족이 낳은 최대의 지도자이다.

그의 신앙운동은 종교 개혁 이상의 영향을 끼쳤다.

웨슬리는 전 인류사회에 새로운 정신의 생명을 던져주었다"

 

그는 평생 복음전도자로만 살았지만, 그렇게 하나님을 위해 헌신한 것이

자기 조국에는 신앙과 안정이라는 선물을 가져다 준 결과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오늘 소망을 품고 이 자리에 섰습니다.

지금 우리는 조국을 떠나 있고,

나라가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그저 한숨 밖에 쉴 수 없지만,

 

어쩌면 이 조그만 자리에서 나 하나라도 깨어 산다면,

혹시 우리 중에 우찌무라 간죠나 존 웨슬리나,

손양원 목사님같은 분이 나올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제가 영국을 구했던 웨슬리 목사님의 이야기를 하려는 것입니다.

 

지금을 사는 기독교인들은 신앙을 너무 관념적으로 생각합니다.

행동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변화도 없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변화가 없으니까 그 사회도 변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받기는 했는데 거기서 그치고 마는 겁니다.

 

더 거룩의 길로 나가야 되고, 예수님이 사셨던 그 모습처럼 살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쳐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즉, 신앙생활에 총론은 있는데 각론이 없는 것입니다.

뭔가 자기 신앙생활의 행동강령이 있어야겠는데 그런 것이 없는 겁니다.

 

오히려 믿지 않는 사람은 뚜렷한 자기 삶의 양식(樣式)이 있는데

크리스천에겐 그런 것을 보기가 더 어렵습니다.

 

그런데 웨슬리 목사님의 생애를 보면,

그가 일생동안 원칙으로 삼았던 몇 가지 삶의 양식이 뚜렷하게 보입니다.

그것 때문에 그가 시작한 감리교는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이 시간 바로 그것을 알아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존 웨슬리는 평생을 3S 로 살았습니다.

(요즘 3S라고 하면 Speed, Screen, Sports를 말하는데)

그것은 Simplicity, Sincerity, Sacrifice입니다.

 

사실 알고 보면 웨슬리 뿐 아니라

역사를 이루어 온 모든 신앙의 위인들은 이 3S로 살았습니다...

 

 

◑웨슬리의 첫 번째 S는 simplicity, 단순성입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단순해야 합니다.

우리 믿음의 후예에게 우리 선배들이,

그리고 웨슬리가 첫 번째 요구하는 것은 simple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단순한 게 능력power입니다.

생각도 단순해야하고, 말도 단순해야 하고, 삶의 모습도 단순해야 하고,

예수 믿는 믿음도 단순해야 합니다.

 

현대사회는 모든 구조가 복잡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복잡함을 은근히 자랑하고 있습니다.

간단하면 우습게 압니다.

사실 복잡할수록 거기엔 비효율이 있고 쓸데없는 권위가 묻어 있습니다.

 

   여러분! 강한 힘과 복잡한 구조와 고도의 기술을 내세우는 high-tech가

   언제나 low-tech를 이기는 건 아닙니다.

   구조도 단순하고 힘도 약하고 기술도 뒤처지지만

   어떤 때는 첨단기술도 low-tech 앞에서는 무용지물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과거에 소련과 아프간이 전쟁할 때도,

   단순한 AK소총과 로켓포로 무장한 아프간 군이

   중무장한 소련군을 결국 물리쳤습니다.

 

골리앗을 보십시오.

당시로서는 중무장한 하이테크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물맷돌이라는 로테크에 무너졌습니다.

복잡하지 않고 단순한 게 힘입니다.

 

   오늘도 컴퓨터, 인터넷 이런 것을 알아야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단순성을 빼앗아간다면,

   차라리 ‘기계치’가 되는 것이 더 나을 수 있습니다.

   단순함에서 능력이 나오는데,

   현대 IT산업의 발달이, 우리의 단순성을 빼앗아가기 때문입니다.

 

▶단순했기 때문에, 많은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웨슬리 목사님은 살아생전 엄청나게 많은 일을 하셨습니다.

88년 동안 살면서 말을 타고 매년 평균 2천km 이상 전도 여행을 다녔고,

일생동안 4백 권 분량의 책을 썼으며 4만 회의 설교를 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서 쓸 데 없는 것들은 다 잘라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의 생활은 기도하고, 설교하고, 독서하는 일이 다였습니다.

 

 

하루에 2시간 이상 기도하고, 하루에 두 차례 이상 설교하고

(그때의 설교는 지금 같지 않아서, 한 번 설교에 서너 시간씩 걸리는 설교였습니다.)

5시간 이상 독서하고 일기를 썼습니다.

단순했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생활이 단순하니까 어느 새 자기 생활이 규칙적이 되었습니다.

감리교를 Methodist라고 하는데 그 뜻은 ‘규칙주의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질서정연하고, 조직적이고, 규칙적으로 사는 사람을 메쏘디스트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단순할 때만 가능한 일인 것입니다.

 

▶이순신 장군의 힘은 ‘단순성’에서 나왔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이순신 장군에 관한 관심이 다시 뜨거워지고 있습니다.

(2005년 경 당시에 ‘이순신 장군’에 관한 연속극이 있었음) 

 

물론 그가 왜구(倭寇)를 무찌르고, 죽으면서까지도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리지 말라’라고

말한 것만으로도 존경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세계 역사를 보면, 이순신 장군보다 더 장렬하게 죽은 사람도 찾아보면 꽤 있습니다.)

제가 이순신 장군을 존경해 왔지만, 자세한 이유를 모르고 존경해 왔던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최근에 저는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亂中日記>를 읽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제가 여러 번 반복해서 읽어봤습니다.

그 분의 일기가 아주 단순하게 기록되어 있었지만

행간에는 많은 얘기들이 숨어 있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당시 조정에서는 계속 공을 세우는 이순신을 제거하려고

이런저런 일로 엮어서 결국 관직을 박탈하고 옥에 가둡니다.

그러고 나서, 다시 전황이 위급해지자 그를 석방합니다.

그게 백의종군하던 1597년 5월 16일의 일인데,

그날 그의 일기는 '맑음. 오늘 옥문을 나왔다' 그렇게 시작됩니다.

 

그는 자신을 가두고 때리면서 사형의 빌미를 찾으려고 했던

정치권력의 정당성 여부와 그 원한에 관해서는.. 끝끝내 일언반구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일기 내내 제가 느낀 것은,

그의 내면은 무겁게 짓눌려 있었고 삼엄하게 통제되어 있었습니다.

그 통제된 내면의 힘으로 그는 무수한 아수라를 돌파한 거였습니다.

 

사가(史家)들에 의하면, 사실 그는 마지막 해전에서 살았어도

정치적 상황 때문에 살아남기 어려웠을 거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그의 일기는 그런 이전투구(泥田鬪狗)의 상황을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는 바다의 사실에만 입각해 있었습니다.

 

매일매일 바다 날씨의 미세한 변화들을 자세히 (난중일기에) 기록했습니다.

그는 건강하지 못해서 늘 병고에 신음했고,

그 역시 여느 사람처럼 슬픔과 기쁨에 몸을 적시는 그런 감정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슬플 때의 일기는 "나는 오늘 슬펐다" 라고 까지만 기록하는

통제된 슬픔이었습니다.

 

 

어느 날 일기는 보니까 "저녁 무렵에 동풍이 잠들고 날이 흐렸다.

부하 아무개가 거듭 군율 을 범하기로 베었다" 그렇게 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이순신 장군의 그 무섭도록 단순함에 놀랍니다.

그의 관심은 왜군과의 전쟁에 있었습니다.

꼭 이겨야 됐습니다. 그래야 나라가 살고 선량한 백성들을 보호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잡다한 것들은 잘라버린 거였습니다.

자기 스스로를 엄격하게 통제했습니다.

 

전쟁에 이기기 위해, 아니 어쩌면 결과가 어떻든

전쟁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간단하게 할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전쟁에 불필요한 정치인들의 농간엔 관심을 꺼버렸습니다.

전쟁에 불필요한 군사들은 목을 벴습니다.

 

전쟁에 불필요한 내면의 감정은 잘라냈습니다.

그리고 오직 전쟁에 필요한 바다의 날씨와, 군기rule에만 집중했던 것입니다.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도 잘라 버렸습니다.

 

바로 그 단순함이 무서운 힘으로 나타난 겁니다.

이제 제가 이순신 장군을 존경하게 되었다면,

그것은 인생의 치열한 승부를.. 단순함과 순결성으로 바꾼 그 힘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강조하신 단순성

단순한 것이 힘입니다. 단순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전도하러 내 보내실 때도,

짐과 생활을 단순하게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관련글 : 조각글 모음(33) 결코 쉽지 않은 길

 

여러분! 단순하라고 해서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생각을 조금하고 대충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물론 깊이 생각하고 다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 뒤에는.. 단순하게 정리하라는 겁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사실 복잡하게 생각해야 될 절차는

이미 우리 주님이 다 대신 거쳐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단순하게 생각하고/ 단순하게 믿고/ 단순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삶의 모든 행동양식이나 생각을 단순하게 하셔서,

그 단순함의 강한 힘을 소유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웨슬리의 두 번째 S는, 실실함 Sincerity입니다.

 

흔히들 '진실'이라고 번역을 하지만 그 한가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진실에다 성실과 정직, 이 모두를 다 합한 것이 Sincerity입니다.

크리스천에게 이것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다 무너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기도하고 열심히 교회 다니고 말씀을 많이 안다 해도

진실이 빠지면 그것은 바람 빠진 풍선과 같습니다.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수원 입북리에 제가 참 좋아하는 선배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이 목사님치고는 너무 달란트가 없으신 거예요.

이 목사님의 설교는 참 졸립니다. 아마도 그 교회 교인들도 많이 졸겁니다.

그렇다고 찬양을 잘 하시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글재주도 없으신 것 같고, 행정에 탁월한 능력이 있으신 것도 아니고,

일을 잘 꾸미시는 명석한 두뇌를 가지신 것도 아닙니다.

 

저 시골구석에서 목회를 하고 계시는데,

그런데도 그 교회 성도님들은 자기 목사님이라고 하면 껌뻑 죽습니다.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습니다.

 

이유를 알아 봤더니 그 교인들 얘기가 하나같이 똑같아요.

"우리 목사님은 진실하세요" 그 얘기였습니다.

 

성도님들 집에 심방을 오셔서 기도를 시작하시면 벌써 눈물부터 흘리신다는 거예요.

눈물은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가슴에 진실과 사랑이 들어갈 때만 나오는 겁니다.

 

참 부러웠습니다.

저도 그런 목사가 되고 싶습니다.

저 역시 성공한 목사보다는, 진실한 목사였다는 평을 듣고 싶습니다.

 

크리스챤은 진실이 다입니다.

그리고 진실은.. 다른 여러 약점을 다 싸주는 보자기입니다. 

 

    ※이 요한 웨슬리의 3S를, 제가 지금 율법처럼 강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성도는, 반드시 이 길로 인도받게 되어 있습니다.

    내 의지로 결연하게 다짐하자는 것이 아니라,

    이런 방향으로, 날마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나가자는 것입니다.

 

▶나다나엘을 통해 본 ‘진실함’

빌립이 자기 친구 나다나엘을 만나서, 예수님 만난 얘기를 하며 전도합니다.

그런 나다나엘을 보시고 예수님은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1:47-51  ←오늘 본문

 

나다나엘을 보십시오.

의심하면서도 빌립을 따라 예수님께로 갑니다.

"아마도 나사렛같은 데서는 큰 인물이 나오기 힘들거야, 메시야는 무슨 메시야?

그래도 빌립이 저렇게 성화를 하니 가보기는 해야지!"

그렇게 반신반의하면서 예수님께로 온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나다나엘을 가르쳐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마음에 간사함이 없다'고 하는 것은 진실하다는 말씀입니다. 정직하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바로 sincerity인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나다나엘이 그렇게 훌륭한 처신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편견에 사로잡혀 있고, 의심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가 반신반의 하면서도, 예수님께 나아왔을 때,

    예수님은 그를 '진실한 사람'으로 평가해 주셨습니다.

 

    (나다나엘이 '나무 아래 있었던 일'로 인해 '진실한 사람'으로 평가받았다는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만, 어쨌든) 

 

여러분! 죄가 없다는 것이 진실한 게 아니라,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그대로 가지고 주님 앞에 나오는 것이 진실이라는 겁니다.

의심없이 확고하게 믿는 것도 진실이지만,

의심을 가지고도 그저 나오는 게 진실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늘 남을 속이고, 사기치고, 마음으로 간음하고, 형제에게 욕하고,

그래서 구제불능의 모습이지만

그러나 그 모습을 갖고도 회개하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오는 용기가

진실이라는 겁니다.

 

 

경건하지 않으면서 경건한 척 하는 것은 위선이지만,

경건하지 않으면서도 그 모습 그대로 나오는 것을

주님은 진실로 인정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께서는 어떤 모습으로라도 주저할 게 없습니다.

내 있는 그대로 주님 앞에 나오면, 우리의 sincerity는 인정받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 하나하나도 또 한 사람의 나다나엘로 간주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나다나엘은 어떻게 됩니까? 결국 예수님의 열두제자 중 한 사람이 됩니다.

바돌로매라는 이름의 제자가 바로 나다나엘인 것입니다.

 

▶진실하지 못했으면, 감리교회는 성공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웨슬리 목사님이 영국 국교회에서 안수를 받고, 독자적인 노선으로 나갈 때

처음에는 많은 방해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영국 국교회도 끝까지 웨슬리를 방해하지는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신학사상에 어떤 오류도 없었을 뿐 아니라

그의 삶 자체가 너무나 진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어려움을 당하면, 많은 사람들이 그를 위해 기도하고 정부에 탄원했습니다.

 

진실은 어느 시대, 누구를 막론하고 통하는 법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진실과 세상의 이익을 사이에 두고 선택할 때가 있습니다.

기억하십시다.

진실을 향한 우리의 모든 행동은, 우리 주님께서 반드시 책임져 주십니다.

 

진실하십시다! (항상 내 결함을 갖고서, 주님 앞에 나아가서 내어놓고 회개합시다.)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나, 나 자신에게나 모두 진실하십시다.

그리고 자라나는 세대에게 다른 것보다 진실을 가르치십시다.

그게 안 되면 우리나라는 앞으로도 희망이 없습니다.

이 진실성을 가지고 진정한 크리스천의 삶을 살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웨슬리의 마지막 세 번째 S는 Sacrifice, 희생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중요해서 따로 떼어서 드려야 될 말씀입니다.

단순성이나 진실성이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이라면,

이 희생은 이웃과 하나님을 향한 것입니다.

 

 

기독교는 십자가의 신앙입니다. 예수님 삶 자체가 십자가 희생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밀알 하나가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어야만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요12:24-25

무슨 얘깁니까?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택하실 삶의 모습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어떻게 사는 것이, 제대로 사는 것이냐

하는 것을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삶이라고 하는 것은.. 오직 죽음으로써만 이룰 수 있다는 겁니다.

 

한 알의 밀을 안전하게 보존해 보십시오.

그 밀은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열매도 맺지 못합니다.

 

그 밀이 열매를 맺는 경우는 단 한 경우 밖에 없습니다.

차가운 땅에 떨어져서 무덤 속에 매장되는 것처럼, 그 곳에 묻힐 때입니다.

그래야만 싹이 나서 거기서 줄기가 올라오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뭐니뭐니해도 경쟁력에 관한 것일 겁니다.

무엇이 경쟁에서 비교우위를 점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 필요한 것에 집중 투자하는 것을 봅니다.

학교를 휴학하고 어학연수를 떠나고, 배낭여행을 떠나고

또는 기업체에 인턴사원으로 들어가서 공짜로 몇 달씩 일해 줍니다.

 

그런데 지금의 그런 모습을 예상하면서

일찌감치 '경쟁은 아이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가짐에 있다'는 것을

가르치신 분이 있습니다.

 

거창고등학교의 설립자이신 전영창 선생이십니다.

아직 어린 고등학생들에게 그분이 가르쳤다는 '직업선택의 십계'를

다시 한 번 나누기를 원합니다.

 

첫째, 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

둘째,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 가라.

셋째, 승진의 기회가 없는 곳으로 가라.

넷째, 모든 조건이 갖추어진 곳은 피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할 황무지를 택하라.

다섯째, 앞다투어 모이는 곳은 피하고, 아무도 가지 않는 곳으로 가라.

 

 

여섯째, 장래성이 전혀 없는 곳, 그러나 기쁨으로 일할 수 있는 곳으로 가라.

일곱째, 사회적으로 부러움의 대상이 되지말고, 존경의 대상이 되라.

여덟째, 한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라.

아홉째, 주위사람들, 특히 가족이나 배우자가 반대하면 틀림없다. 그곳으로 가라.

열째,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 십자가가 있는 곳으로 가라.  

 

여러분! 한 번, 이 열 가지를 꽉 쥐어 짜보십시오. 거기에 뭐가 흐릅니까?

sacrifice! 희생이라는 물이 줄줄 흐릅니다.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 광야에서 40일 동안 계시면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성경은 마귀에게 시험을 당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내면의 싸움을 통해서 예수님 자신이 걸어야 할 삶의 모습을

스스로 정하신 기간이었습니다. 

 

주님은 당신이 걸어가야 할 삶의 모습을 세 가지로 결단하셨습니다.

 

첫째, 나는 사람들이 나를 따르도록 하기 위해서, 물질로 사람을 꾀지 않겠다!

둘째, 나는 나 자신을 위하여는, 절대로 하늘의 능력을 사용하지 않겠다!

셋째, 내가 가는 길에, 불의와/마귀와 타협이란 있을 수 없다.

 

이 세 가지를 또 쥐어 짜 보십시오. 뭐가 나옵니까?

십자가의 희생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길은 처음부터 십자가를 향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바, 여러분이 가지는 가장 큰 경쟁력은.. 희생입니다.

그 사실을 믿고, 그것으로 승부를 거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죽지만.. 결국 사는/부활하는 사람이 될 겁니다.

예수님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질 않습니까?

 

기독교는 역설의 종교입니다.

안될 것 같지만 결국 되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십자가 희생의 삶의 실천으로.. 사회를 구하다.

18세기의 영국은 너무나 부패한 사회였습니다.

회생의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극장마다 음란물이 판쳤고, 사회 전체가 도박장이었습니다.

 

거리는 닭싸움과 소싸움으로 어지러웠고,

한때 폭도들이 런던 전체를 점령하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나날이 포악해져갔습니다. 음주의 폐해는 전쟁보다도 심했습니다.

 

교계는 국교(성공회), 비국교(가톨릭, 청교도)를 막론하고 영력을 상실했습니다.

영향력 있는 교계의 지도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럴 때 웨슬리와 홀리 클럽의 멤버들이 한 일이 있었습니다.

불쌍한 사람들을 찾아가서 구제하고, 감옥에 가서 위로하며 전도했고,

노예나 하인들을 찾아다니면서 위로해주고 예배를 드려 주었습니다.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내 놓은 것은 물론, 시간과 몸으로 많은 봉사를 했습니다.

이 일들을 일회적이 아니라 정기적으로, 규칙적으로 했습니다.

그래서 메토디스트라는 별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 웨슬리 일행은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으면서 이 일을 해나갔습니다.

이러자 사회가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웨슬리의 설교를 듣기 위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습니다.

설교를 듣던 회중이 변하고, 사회가 변하고, 나아가서는 영국이 변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영국사람들은 아직도 죤 웨슬리를 영국을 구한 사람으로

역사에 기록해 두고 있는 것입니다.

웨슬리와 그의 홀리 클럽 멤버들이 영국을 살린 힘 역시 희생이었던 겁니다.    

 

▶예화 「내 잔이 넘치나이다」에 나오는 맹의순 이야기

 

단순하십시오.

진실하십시오.

희생하십시오.

 

여러분과 저의 이 3S를 통해서

무수히 많은 열매가 열리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 리더쉽, 목회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