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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세주를 기다린 사람들 2515

LNCK 2010. 6. 23. 11:56

◈구세주를 기다린 사람들                      눅2:25~40                          05.12.25.설교스크랩


 

※시므온과 안나가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만나는 본문은..

설교하기 어려운 본문 중 하나입니다. 뚜렷하게 할 말이 없는 본문인데요..



▶인생은.. 기다림의 연속입니다.

프라하에서 태어나 독일에서 활동했고, 장미 가시에 찔린 게 원인이 돼서 죽었던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작품 중에 <말테의 수기>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그가 이 작품을 쓰고 나서는, ‘이제 더 이상은 글을 안 써도 여한이 없다’고 말했을 만큼

본인도 스스로 무척이나 만족했었나 봅니다.


여러분께서도 오랫동안 마음속에 두고 좋아하는 싯구詩句나 문구가 있겠지만,

저 역시 일생을 두고 가슴에 간직하고 음미하는 구절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이 말테의 수기 끝 부분에 나오는 문장입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다.

그 기다림에 지쳐서 포기하고 등을 반쯤 돌렸을 때.. 그제야 갑자기 다가온다.

바로 그때다. 우리가 서두를 때는.”


이 말의 의미를 마음속으로 음미하며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릴케의 이 말은 아마 본인의 삶 속에서 경험되어진 것일 겁니다.

‘결코 기다리는 것을 포기하지 말라’는 뜻일 겁니다.


‘기다리는 일이 힘들지만, 완전히 접지는 말고 조금만 더 기다려라,

그러면 기다리는 것은.. 어느 순간 갑자기 다가올 것이다’ 그런 뜻일 거예요.


그렇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기다리며 삽니다.

그 기다림이란 게 끝이 있으면 좋겠지만.. 끝이 잘 안 보이지요?

또 기다리다 만나기도 하지만.. 기다리다 못 만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 인생은 기다림의 연속입니다.

그것을 끌어안고 가야 하는 게 우리들의 숙명입니다.  

그러므로 힘이 들지만, 기다리는 일에 익숙해져야 하고,

그래서 끝을 봐야 그 기다림은 의미가 있는 겁니다.

기다리면,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분명히 찾아옵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을 기다림으로.. 일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오랜 기다림 끝에, 그 기다렸던 것을 만난 두 노인을 대하고 있습니다.

이 두 노인 역시 ‘기다리던 것이 정말 올까?’ 막연하게 생각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면서 소망을 잃지 않고 기다려서,

결국엔 메시아로 오신 아기 예수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우리 주님 뵈올 것을 기다리면서 살고 있지요?

이 노인들이 만난 분과, 우리가 만날 다시 오실 예수님은 같은 분입니다.

당연히 기다리는 모습 또한 이 노인들과 같아야 되겠지요.


그래서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기다려야 할 지, 또 어떤 자세로 기다려야 할지

우리는 오늘 이 노인들에게서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기다리는 자세1. ‘믿음과 희망’


▶본문의 두 노인 시므온과 안나는 ‘믿음과 희망’을 가지고 기다렸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할 당시의 이스라엘의 시대적 상황은 절망적이었습니다.

다른 것은 둘째 치고라도 오늘 본문의 행간을 읽어보면,

무엇보다 이 백성들은,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뭔가 함께 하신다는 흔적을 찾았으면 좋겠는데, 그런 것을 찾을 수 없었어요.  

그래서 시므온은 주를 보기까지는, 자신의 마음속에 평화가 없었다고 말하지요. 눅2:29


안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주야로 금식하면서 탄식의 세월을 보낸 겁니다.     


먼저 시몬과 안나의 나이를 보세요.

이들의 나이는 적어도 100살은 넘었을 거라고 성경학자들은 추측합니다. 

나이가 들면 희망을 노래하기보다 포기하는 것에 점점 익숙해지는 법이지요? 

새로운 일을 하기 두렵고, 희망보다는 절망하기가 쉬운 겁니다. 


안나는 남편과 단 7년을 함께 살고 무려 84년이라는 시간을 홀로 살았어요.

당시 과부들에게는 인간으로서 살아갈 어떤 대외적인 지위를 주지 않았습니다.

환경으로만 보면 오로지 절망 속에서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또 다 합해봐야 얼마 되지도 않는 유대는 여러 파벌로 갈갈이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권력/지도층인 사두개파는 이익을 위해 로마 권력층에 붙어 평민들을 박해하지요,

종교적 지도층인 바리새파는 자기들만 경건하다고 하면서 율법을 못 지키는 평민들을 정죄하고는

상종도 하지 않지요, 에세네파는 이것저것 보기 싫다면서 은둔생활에 들어가 버렸습니다.


역사적으로 봐도 말라기 선지자 이후 400년 간

희망의 메시지는 전혀 들려오지 않고 있었습니다.

어디를 봐도 희망은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암흑시대였던 겁니다. 


그러나 오늘 이 두 사람만은 희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결코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넬슨 만델라

      남아공화국의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은 27년 동안을 감옥에 있었습니다.

만델라 대통령이 감옥에 있을 때, 딸이 아이를 낳아 아버지에게 데리고 왔어요.

그리곤 “아버지! 이 아이의 이름을 지어 주세요.” 청합니다.

딸의 요청에 만델라는 아이의 이름을 ‘Hope’, 희망이라고 지었습니다.

“너는 희망이야. 감옥에 있는 동안 희망이 나를 떠난 적이 없었지.

그리고 앞으로도 희망은 나를 떠나지 않을 거야.”


그가 44세 때 종신형을 선고 받고 72세 때 풀려난 게 1993년도였습니다.

혹시 석방 당시 그를 본 분이 계시는지 모르겠는데 (저는 봤습니다),

전 세계의 메스컴들이 그를 보고 놀랐습니다.


27년 동안 감옥에 있었던 사람 같지가 않은 거예요.

얼굴이 너무나 평온한 거 있지요?

그것은 정말 참 자유인의 표정이었습니다.


그 다음 해에 그는 대통령이 되는데, 그 동안 얼마나 한이 많았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는 일체의 보복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모든 사람을 포용하고 용서하는 사람으로 세계인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가 그럴 수 있었던 이유가 뭐였을까요?

그의 마음속에는 단 한 번도 ‘희망’이란 단어가 떠난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소망을 하나님께 두는 사람은.. 결코 절망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 현실을 냉정히 바라보면.. 그다지 희망을 가질 일이 없는 게 사실입니다.

분단국가라는 게, 큰 일 때마다 우리의 발목을 붙잡습니다.

젊은이 중에 취업난으로 고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노년층이 점점 확대되고 있습니다.


개인적/사회적으로 어쩌면 표면적으로는 별 희망이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중에는, 미래를 암울하게 느끼시는 분들이 꽤 있을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절망을 부숴버리고 희망을 품어야 합니다.      


안나와 시므온을 보세요.

그들은 늙었습니다.

그러나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어요.


그들이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가 뭘까요?

그들은 그 희망을 세상에나 사람에게 두지 않고, 하나님께 두었습니다.


아무리 나이가 많고 늙었어도, 남편이 세상을 떠나 희망이 없다 할지라도,

여태껏 약속을 지키신 신실한 하나님께 소망을 두면서

희망 중에 하루하루를 살았던 겁니다.


자기 태에서 나온 자녀도 자기를 버리는 세상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를 자신의 손바닥에 새겼다고 하시면서 끝까지 붙드시는 우리 하나님 안에서

희망을 노래해야 하지 않겠어요?

그 희망은 우리 가슴에서부터 터져 나와야 합니다.


세상을 포기하고 싶은 사람들, 절망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먼저 우리 입술을 통해

희망은 전달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어두움을 향한 희망의 빛은 교회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소망을 ‘하나님의 약속’에 두십시오!

희망을 잃어버렸습니까? 희망을 어디에 두셨습니까?

신실하신 우리 하나님 앞에 다시 두시기 바랍니다. 


어둠을 보지 마세요! 내 환경을 보지 마세요! 나 자신을 보지 마세요!

원래 거기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희망은 하나님의 신실하심 속에 있습니다.

변치 않는 하나님의 약속 속에 있습니다.


세상 끝날까지 고아와 과부처럼 버려두지 않겠다던 그 약속을 붙드십시오!

그러면 우리의 삶은 새롭게 변화될 것이고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반드시 찾아 올 것입니다.          *관련글 제게 약속하신 것을 기억해 주십시오!



기다리는 자세2. ‘맞이할 준비를 하면서 기다림’


▶안나와 시몬은 언제든지 메시야를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하며 살았습니다.


현실이 너무 암울하니까 그 당시에 이 두 사람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메시야를 기다려 왔습니다.

그러나 아기 예수를 메시야인줄 알아본 사람은 이 두 사람뿐이었습니다.

‘시므온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눅2:25


오실 메시아를 위해 시몬은 율법을 지켰습니다. 의롭고 경건했습니다.

자신의 삶을 예쁘게 가꾼 거예요.

언제 주님이 오셔도 맞이할 수 있도록 살았다는 것이지요.


안나도 금식하며 기다렸을 뿐만 아니라, 기도로 섬기는 일을 지속적으로 해왔다고 증거합니다.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37


희망이 없다던 시대에 시몬과 안나는 주님께서 보내실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막연하게 기다린 것이 아니라,

맞이할 자세를 갖추면서 기다린 것입니다.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삶을 대하는 사람들의 자세는 어떻던가요?

흐트러지게 마련이지요?

환자들은 대체적으로 처음엔 희망을 가져보다가

더 이상 살수 없다는 선고를 받으면.. 자포자기 한다고 합니다.


벧후3:3절에도 ‘말세에 재림이 늦어지면 자기 정욕대로 행하는 사람이 많아진다’

했습니다.


정신과 의사였던 폴 트루니에는 현대인들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현대 신앙인들의 비극 중에 하나는 구도의 정신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무슨 말일까요?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을 말하긴 합니다.

그러나 실제 삶 속에서는 거기에 대비한 진지한 고민을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삶이 그렇지 않습니까?


▶유익한 예화

독일 퓌쎈에 가보신 분들은 들어 보셨겠지만, 정신병으로 끝이 안 좋았던

바바리아의 루드비히 왕에게는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고 괴롭히는 그의 포악한 성품 때문에

성 안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했고 싫어했습니다. 


어느 날 그가 사냥을 나갔다가 숲 속의 한 작은 예배당에 들어가게 되지요.

제단 앞에서 오랜만에 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예배당 벽에 무슨 글씨가 쓰이는 것입니다.


순식간에 보였다가 사라져서 앞부분만 기억이 나는 거예요.

“3”이라는 숫자였는데 그게 삼 일인지, 석 달인지, 삼 년인지

아무튼 그 3 안에 무서운 심판이 있을 거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제껏 죄를 많이 지었던 루드비히는 나름대로 해석하기를,

‘내가 3일 안에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3일 동안 아내와 부하들에게 잘 해줬어요.

하나님 심판대 앞에 설 생각을 하면서, 3일째 되던 날 높은 탑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어요.


그는 다시 생각했습니다.

‘3일이 아니라, 석 달이었구나.’

그래서 석 달 동안 가족과 백성들에게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세 달이 지나도, 그가 죽지 않는 거예요.


그는 이제야 확신을 가졌습니다.

‘아하! 내가 본 글자가 삼년이었구나.!’

그래서 그 3년 동안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나팔소리와 함께 독일 왕실에서 사절단이 왔습니다.

당시 그는 공작이었는데 바로 그 루드비히 공작을

독일의 황제로 모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삼일, 삼 개월, 삼 년을 하나님 심판대 앞에 설 것을 생각하며

하루하루 열심히 살았던 공작의 소문이.. 전 독일에 퍼져있었던 것입니다.


공작이 독일 황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그의 선행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공작의 선행을 가능하게 한 것은 ‘기다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린 것이 그의 삶을 바꾸어 놓았던 겁니다.


그렇다면 다시 오실 메시아를 맞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것을 고민하는 것이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는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앞으로 몇 십 년 살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삼 일 뒤에, 삼 주 뒤에, 삼 년 뒤에 심판대 앞에 설 것이라 생각하고

하루하루 희망 가운데 절제하며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말기암환자.. 이런 분들은, 그렇게 산다고 합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반드시 옵니다.

그러나 그 기다림이 오기 위해서는.. 맞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이 시간 기다리던 것이 언제 오든 기쁘게 맞이할 수 있게 준비하시는,

21세기의 시므온과 안나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다리는 자세3. ‘만난 후에는 어떻게 살 것인가?’


오늘 시므온과 안나 두 노인에게서, 우리가 마지막으로 배워야 될 게 있습니다.

바로 기다리던 것을 만난 후에는 어떻게 살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난 후에.. 감사와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았습니다. 

매일 임재/내주하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우리도

그들처럼.. 감사와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시므온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예수님이 메시아인 것을 알아보았습니다.

예수님을 품에 안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만민 앞에 예비한 것이요 만민을 비추는 빛이라. 주의 백성이 이스라엘의 영광이라.’

증거합니다. :31~:32


안나 역시 아기 예수를 바라보고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이 구속되기를 바라는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38


중략..


▶두 노인은, 그 나이에, 주님을 증거 하는 선교사로서의 삶을 또 다시 시작했다는 거예요.

감사와 감격과 찬양이 있었음은 물론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백성입니다.

이 땅을 아무리 둘러보십시오.

거기에 희망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이 있기에

우리는 또 다시 희망을 노래할 수 있는 겁니다.

여러분은 이 시대의 시므온과 안나가 되는 비전을 품으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주님은 누구에게 임재하십니까?

이스라엘의 가장 기다리던 메시아는,

당시의 엘리트 그룹인 제사장이나 서기관들에게 오지 않았습니다.

왕궁이나 부잣집에 온 것도 아닙니다.

가장 힘없는 두 노인에게, 그리고 한 밤에 양치는 천한 목자들에게 찾아왔습니다.


이사야는 ‘남은 자 the remnant’들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다시 일으키리라 했는데,

그 ‘남은 자’들이란 힘 있고 권세 있고, 겉보기에 그럴듯 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힘없고 무명이고, 천대받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무 희망이 없어서 메시야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이들이었습니다.     

우리가 바로 현대의 ‘남은 자’들 아니겠습니까?


이미 오신 예수를 고백하고 증거하며,

오늘 임재하실 예수님을 사모하며,

종말에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그 기다림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기다리는 것은 갑자기 옵니다.

(개인적 종말도 마찬가지입니다. 별안간 뜻밖에 닥칩니다.)

그때 당황하지 않도록 침착하게 준비합시다.


아울러 그 큰 기다림 속에,

우리들 삶의 길목마다 필요한 작은 기다림은

끊임없이 다가올 것입니다.


조금만 더 기다리십시오.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반드시, 분명히, 꼭 올 것입니다.


이 아침에 기다리던 것이 아직 오지 않았더라도,

올 것을 희망하며 우리 주 하나님께

기쁨과 감격 속에, 미리 감사와 찬양을 올리는 저와 여러분의 성탄절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주님, 인생은 기다림의 연속이라 그랬습니다.

그리고 ‘기다리는 것은.. 반드시 오게 될 줄’ 믿습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을 기다리게 하소서.

내 인생에 쨍하고 해 뜰 날을 기다리기 이전에,

오늘 나에게 주님의 임재를 사모하게 하시고,

또한 역사의 마지막에 오실 주님의 재림을 간절히 기다리게 하소서.


넬슨 만델라와 같이, 믿음과 희망을 결코 버리지 말게 하시고,

기다리는 자로서 준비된 삶을 살게 하시고,

오늘 우리에게 임재하시는 주님을 증거하는.. 전도자로서 살게 하소서.


주여! 그 동안 우리 중에 희망과 기다리던 것을, 잃었던 사람이 있습니까?

주님 그들에게 임재하셔서, 예수 안에서 다시 새 힘과 용기를 되찾게 해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 종말, 내세, 심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