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쌓아두신 은혜는.. 고통 중에 온다

LNCK 2010. 6. 28. 12:18

◈쌓아두신 은혜는.. 고통 중에 온다             시31:1~24               05.06.12.설교스크랩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두신 은혜,

곧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 지요" 시31:19

 

 

▲고통 중에 은혜를 깨달은 다윗

오늘 본문은 시편31편, 다윗의 시입니다.

다윗은 오늘의 말씀에서, 자기가 한 때 불같은 시험을 통과하면서

깨달은 은혜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그런 고통을 겪은 다음에 뭐라고 하냐 하면,

그 고통 때문에 손해 본 게 없다는 겁니다.

그 고통 때문에 자기가 불행해지지 않았다는 거예요.

 

게다가 고통 때문에 주어지는 특별 보너스도 있었다는 겁니다.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다윗의 고통을 보면서 현재 우리가 당하고 있는 고통,

마찬가지로 우리가 끌어안고 가야하는 그 고통의

시각을 새롭게 바꿔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소원입니다

 

 

그럼 다윗이 고통을 겪으면서 발견한 사실, 깨달은 은혜가 과연 뭘까요?

 

 

◑1. 고통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피하게 만듭니다. 이게 은혜입니다.

 

다윗이 시31 :1절에서 뭐라고 소리칩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로 영원히 부끄럽게 마시고 주의 의로 나를 건지소서"

 

여호와께로 피한다는 뜻이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는 뜻도 되고, 하나님을 믿고 의지했다는 말도 되고,

하나님을 경외했다는 말도 됩니다.

 

본문에 의하면, 다윗이 당했던 고통이 어떤 것이었을까요?

 

9절에 '내가 근심으로 눈과 혼과 몸이 쇠하였나이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너무 근심에 짓눌려서 온 몸이 말라간다는 뜻이 됩니다.

도무지 기운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침체되어 버린 거예요.

완전히 자포자기한 상태라는 겁니다.

(아마 이게 어떤 상태인지 여러분도 대략은 아실 겁니다.)

 

10절, '나의 죄악으로 약하며 나의 뼈가 쇠하도소이다.' 

자기가 지은 죄들을 생각하면,

그 죄악이 찌르는 가시가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자기 뼈가 쇠하여진다는 뜻입니다.

 

의학적으로 통증을 가장 심하게 느끼는 것이, 뼈로부터 오는 통증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다윗은 자기의 범죄에 대한 가책이 너무나 심해서

뼈가 마르는 것 같은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겁니다.

 

11절에 보면, '내가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자기를 죽이려고 달려드는 많은 대적들 때문에 욕을 당하기도 하고,

생사의 기로에서 헤매기도 한 겁니다.

계속 자기를 죽이려고 쫓아오는데.. 그 고단함에 얼마나 몸서리쳤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여러 가지 고통을 통해서 다윗이 무엇을 하게 됐습니까?

하나님을 원망했나요? 저주했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피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품으로 달려갔다는 거예요.

 

그러므로 14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  

     

사실, 이렇게 많은 고통에 시달리게 되면 사람의 본능은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을 믿던 사람도 '믿어도 소용없어. 하나님이 어디 있어?'

그러면서 오히려 하나님을 멀리하고 도망가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은 그 반응이 반대로 나옵니다.

견딜 수 없는 고통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을 향해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래도 이런 고통이 나를 괴롭히지만 하나님! 나는 주께 의지합니다.

하나님만이 나를 도우실 수 있는 분이라고 믿습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께 피하는 자의 자세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언제 하나님을 진지하게 찾게 되던가요?

언제 하나님을 어린 아이의 마음으로 부르게 되던가요?

형통할 때입니까, 곤고할 때입니까?

고통을 모를 때입니까, 고통을 알 때입니까?

대답은 여러분 스스로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많은 사람들에게 간증을 듣습니다.

그런데 그 간증의 내용이 어떤 거냐 하면, 열에 아홉은 거의 똑같은 말을 합니다. 

뭐냐 하면, "내가 당한 고통 때문에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내가 이러이러한 고통 때문에 교회를 나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이 고통 때문에 내가 예수믿고 구원받았으니 얼마나 감사한지요. 고맙습니다!"

이겁니다. 열에 아홉은 똑같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정말 언제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하나님을 진지하게 찾습니까?

형통할 때입니까, 곤고할 때입니까?

우리가 단 한 마디 말로 "아버지!" 하고 부를 때가 언제입니까?

그 한 마디의 부르짖는 소리에 모든 무게를 다 실어서

간절히 하나님을 찾을 때가 언제입니까?

형통할 때가 아니라, 곤고할 때입니다.

 

우리 영혼이 언제 맑아집니까? 우리 영혼이 언제 은혜로 풍성해 지던가요?

우리 영혼이 언제 하나님으로만 기뻐하는 순수한 은혜의 경지를 맛봅니까?

형통할 때입니까, 곤고할 때입니까?

 

곤고할 때입니다. 고통을 맛 볼 때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고통은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고통 중에 은혜를 더 부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저 역시도 고통이 있었기에 하나님을 한 번이라도 더 찾을 수 있었습니다.

고통이 있었기에 한 번이라도 더 무릎 꿇을 수 있었습니다.

고통이 있었기에 한 번이라도 더 마음 문 열고, 주님이 저를 찾아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고통이라는 도구를 가지고 저를 빚어주셨습니다.

비단 저만의 얘기겠습니까?

 

바꾸어 말해서, 오늘 저와 여러분이 왜 이렇게 삶이 무료하고 허무합니까?

고통이 없기 때문입니다. (혹은 고통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행복해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이내 나태해지고, 삶이 한없이 무료함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가 고통이 없을 때에도,

간절히 하나님의 옷자락을 붙들고, 은혜를 간구해야 하는데,

그 경지에 이르기가 쉽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연단을 거친 사람들은,

나중에 고통이 없을 때에도

주님의 옷자락을 간절히 붙드는.. 그런 성숙한 경지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의 육신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혼입니다.

영혼이 잘 되는 것이 우리 하나님의 관심사입니다.

하나님의 지대한 관심은 우리의 겉사람이 아니고, 속사람입니다.

현세의 사람이 아니고, 내세에 자기와 함께 영원히 살 우리 자아를

더 깊이 마음에 두고 생각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어떤 분인지 아십니까?

하나님 당신이 원하는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고통주시는 것도 절대 마다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자라도 고통을 통해서 빚어야 되겠다고 생각하시면,

하나님은 눈 딱 감고 고통을 주셔서 그것을 통과시키십니다.

이것이 지옥 같은 고통을 통과한 많은 신앙의 선배들의 간증입니다.

 

 

◑2. 고통이 하나님께서 쌓아두신 은혜를 누릴 수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19절을 보시지요. 19절은 시편 31편의 핵심 말씀입니다.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두신 은혜      

곧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 지요"

 

하나님은 그런 당신의 자녀를 위해 은혜를 쌓아놓고 계신다는 겁니다.

어떤 은혜일까요?

 

7절 끝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주께서 나의 곤란을 감찰하사 환란 중에 있는 내 영혼을 아셨습니다."

 

다윗은 고통 가운데 하나님을 찾고 그에게 피했더니, 외롭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너무 잘 알아주신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고통을 당하고 환란 맞으면, 제일 먼저 나타나는 현상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내 주위를 떠나는 것입니다. 고독해집니다.

 

긴병에는 효자가 없다고 합니다.

부모 자식 사이지만, 고통을 오래 겪으면, 자식도 떠나는 것입니다. 혼자 남습니다.

아무도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다윗도 한 때는 뜨는 영웅이었습니다.

백성들이 뭐라고 환호했습니까?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그렇게 영웅 대접을 받았지만, 막상 그가 어려움과 곤고를 당하자 다 떠나버린 것입니다.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너무나 외롭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피하고, 하나님 앞에 가봤더니,

하나님이 자기 억울한 사정을 다 알고 계시고,

하나님은 자기를 모두 이해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또 20절 중간에, ‘하나님께서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가 형통할 때는 강한 사람들, 좋은 사람들이 주변에 많이 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려움을 당하면 (도와주는 경우도 있지만),

이상하게도 나를 짓밟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깁니다.

이것이 정말 험한 세상에서, 한 번씩 맛보는 쓴 잔입니다.

 

사람이 약해지면 더 도와줘야 되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그게 아니에요.

이 세상 사람들은 강자는 대우하지만, 약자는 짓밟습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약해지기 때문에, 내가 어려워지기 때문에,

나를 대적하는 사람이 벌떼와 같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에게 피하는 자를, 거기서 벗어나게 해 주십니다.

(내 고난을 통해서, 누가 나를 진정 사랑하는지, 옥석을 가리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중학교 때 이미 그런 어른들의 쓴 잔을 일찍부터 받아보았다고 합니다.

아버지 사업이 잘 되어서 학교에 기부금도 많이 내시고 할 때는

선생님들이 자기를 참 잘 대해 주셨답니다.

숙제를 안 해 가도, 자기 때문에, 다른 숙제 안 한 아이들까지 안 때리고 넘어갔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사업이 부도가 나고, 회사가 다른 사람한테 넘어간 후로는

선생님들이 아무 부담 없이 자기를 때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 친구 분 중에, 자기를 아주 귀여워해 주시는 분이 있었습니다.

집에도 자주 놀러 오셨어요. 아버지한테 술도 많이 얻어먹고,

좋은 데 가서 식사도 많이 얻어먹었던 분이셨는데....

하여간 사장님! 사장님! 하면서 늘상 아버지의 기분을 맞추려고 했던 그런 분이,

 

회사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니까, 그 다음 날부터 아버지한테

"어이! 최씨!" 그렇게 불렀답니다.

뭐 사실 회사가 넘어갔으니까 그렇게 부르는 게 당연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좀 얼마간은 신경을 써줘야 되지 않나요?

 

 

한 일주일 쯤 지나니까, 자기 집에 발을 딱 끊었습니다.

길가에서 우연히 만나서 인사를 해도, 그냥 건성으로 받더라고요.

그러니까 그가 어린 마음에도 어떤 생각이 드냐 하면

‘아! 그 동안 나를 귀여워해 주신 것도 다 거짓이었구나. 참! 세상은 무서운 데로구나!’

그런 생각을 했답니다. 세상 살기가 싫어지더랍니다.

 

바로 이것이 세상의 법입니다.

힘이 없으면 모두들 떠나가고 오히려 짓밟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고통을 피해 자기에게로 오는 사람들을 위해, 주실 은혜를 쌓아놓고 계시는 분입니다.

 

21절, "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 견고한 성에서 그 기이한 인자를 내게 보이셨느니라"

하나님께 피했더니, 하나님께서 그 기이한 인자를 내게 보여주셨다고 합니다.

'기이한 인자'라는 말은 넘치는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Praise be to the LORD, for he showed his wonderful love to me when I was in a besieged city. NIV

 

세상 사람들은 나를 냉대하는데,

하나님은 너무너무 뜨거운 가슴으로 나를 안아주시는 것입니다.

 

 

22절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다같이)

"내가 경급한 중에 말하기를 주의 목전에서 끊어졌다 하였사오나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셨나이다"  

  

기도 응답을 받은 은혜를 맛 본 겁니다.

안 들으시는 것 같으나 다 듣고 계시는 하나님을 발견했습니다.

때가 되니 대적들도 다 굴복시켜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굴복시켜 주신 겁니다.

 

때가 되니 슬픔이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는 은혜를 맛보았습니다.

때가 되니 모든 죄를 다 용서하시고, 마음에 평안을 주시는 하나님을 그는 알았습니다.

놀라운 기도의 응답을 체험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고통당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 피하십시오.

하나님 앞에 가보면, 고통당하는 나를 위하여 쌓아놓으신 은혜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도 그것을 보면서 '주님의 은혜가 어찌 그리 큰 지요. 너무나 엄청나군요'

그렇게 고백할 때가 올 것입니다.

 

마치는 말

그러므로 아직도 여러분 가운데

지금이 너무나 힘겨운 고통의 자리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그러면 우리 선배들의 얘기를 들어보십시오.

그 분들에게 가장 잊지 못할 은혜의 자리가 어디였던가를 물어보세요.

그들의 대답은 한결 같이, 내가 엎드렸던 차가운 바닥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물어 보십시오. 모리아의 번제단을 가리킬 것입니다.

요셉에게 물어보세요. 차가운 감옥을 가리킬 겁니다.

모세에게 물어보세요. 생사의 고비를 넘긴 저 나일강을 가리킬 겁니다.

 

룻에게 물어보세요. 허리가 아프도록 이삭 줍던 밭을 가리킬 겁니다.

다윗에게 물어보세요. 그 아름다운 시들은 모두 절망적인 밤에 써졌다고 할 겁니다.

욥에게 물어보세요. 그 지옥같이 괴로운 가운데서 기왓장으로 헌데를 긁었던

그 때를 가리킬 겁니다.

 

베드로에게 물어보세요. 텅 빈 그물을 건져올렸던 저 갈릴리 바다를 가리킬 겁니다.

바울에게 물어보세요. 눈을 멀게 했던 다메섹 도상을 가리킬 겁니다.

 

한 분 더 우리 주 예수님께 물어보십시오.

그 분은 대답하실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 차가운 땅바닥에서 내가 왕권을 받았노라고!

 

그러므로 여러분도 겟세마네에서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도 그 쓴 잔을 마셔야 합니다. 그것이 면류관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외로운 시간은 곧 왕관으로 바뀌고, 절망스런 날들은 기쁨이 될 것이요,

바로 이곳 유럽에 있던 몇 년이

여러분 최대의 은혜의 시간이었다고 고백할 날이 반드시, 반드시 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직도 고통이 떠나지 않고

그 고통이 곁에 친구처럼 있는 분들은 이제 이렇게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받아야 할 은혜가 아직도 많은가보다!"

그럴 때 하나님은 여러분의 고백처럼 은혜를 베푸실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 하나하나를 어수룩하게 대하시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19절을 다 함께 읽습니다.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두신 은혜,                                   

곧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 지요" 아멘!

 

 최영식 목사 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