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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하는 자에게 주실 가장 좋은 것 2540

LNCK 2010. 7. 7. 22:26

◈구하는 자에게 주실 가장 좋은 것           눅11:9-13       05.05.08.설교스크랩



◑성령충만이 상실되면.. 허탈감에 빠진다.


▶영적 허탈감은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①지난 금요기도회 때, 창세기 15장을 공부했었는데,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아브람아 두려워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창15:1

그런데 왜 하나님은, 가만히 있는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느닷없이 이 얘기를 하셨을까요?

그 앞 장을 자세히 읽어보니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아브람이 큰 전쟁에 휘말려서 그 전쟁을 치룬 뒤였습니다.

물론 승리했지만, 큰 전쟁 뒤에 오는 허탈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한 번은 이겼지만 다시 적들이 쳐들어오면 그땐 어떻게 하나,

그리고 앞으로는 또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그런 영적인 허탈감이 그에게 갑자기 몰려온 거예요.

누구든지 큰 일을 한 번 치르고 나면, 큰 허탈감이 찾아옵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나타나신 것은, 그 영적인 침체와 피로를 풀어주시려고

   오셔서 그 말씀(창15:1)을 해 주신 겁니다.


②이것은 이방 선지자와 850:1의 싸움을 치룬 후에,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이세벨을 두려워하면서,

로뎀나무 아래서 "주여! 차라리 저를 죽여주시옵소서!" 기도했던

엘리야의 영적인 허탈감과 비슷한 거였습니다.


③심지어는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신앙인 마더 테레사도

‘영혼의 깊은 밤’을 보냈다고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오래 동안 기도도 제대로 힘 있게 나오지 않고,

영혼의 메마른 삶을 겨우 겨우 간신히 이어갔던 시절이 있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런 영적 허탈감과 피로감은

꼭 이런 대선지자나 신앙의 위인들에게만 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모두에게도 올 수 있습니다.


④그런데 요즘 제 자신을 바라보니

제가 바로 그런 영적인 피로를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도 아브람이나 엘리야는 무슨 큰 일이나 이뤄놓고 그런 피로감을 느끼는데,

저는 아무 것도 이룬 일이 없는데도 그런 피로감과 허탈감을 느끼고 있는 거예요.


매 주일 설교를 하고, 금요기도회 설교를 하고,

심지어 새벽마다 설교를 하고 새벽마다 기도하고, 심방도 하고,

그 외에 이런저런 일들을 하기 때문에

겉으로 보면 뭔가 있어 보일는지 모르겠는데,

제 속을 조금만 헤집고 들어가 보면,

제 자신이 너무나 많은 문제와 질병과 결핍을 안고 신음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 앞에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조그만 말에도 상처를 받고 분노합니다.

인내와 사랑은 점점 없어져 가는 것을 느낍니다.

기도시간이 점점 길어져야겠는데 그게 너무 힘이 듭니다.

빈자리를 보면 걱정을 해줘야 하는데 먼저 화부터 납니다.

목숨을 걸어도 될까말까 한 게 목회인데, 점점 더 목회를 편하게 하려고 합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⑤여러분은 어떠세요?

푸른 초장 맑은 물가로 나를 이끄시는 주님의 손길을 매일 느끼십니까?

예배시간이 기다려지고, 찬양하는 것이 기쁘고, 기도하는 것이 즐거우세요?

말씀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새로워지는 것을 느끼십니까?

그리고 내 마음의 양심은 여전히 살아서 의의 길로 가고 있는 것을 보시나요?


그러나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여러분 역시 지금 저와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마7: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사실 저는 오랫동안 이 말씀을 곡해曲解해 왔습니다.

이 부분을 어떻게 봐왔냐 하면, 간절한 기도의 필요성으로 해석해 왔습니다.

간절히 구하면 무엇이든 다 들어주시는,

주님의 기도 응답에 관한 말씀인줄 알았던 거예요.


물론 그것도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만 이해하면 이 말씀은 10%정도만 이해한 것입니다.

 

이제 병행구절인 눅11:13절을 읽어 보십시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그러니까 마7:11절도, 눅11:13절처럼

<성령을 간구하는 기도>도 해석해야 되는데,

저는 오래 동안 7:11절을 <간절한 기도의 필요성>

즉, ‘기도하면 구하는 자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해 주신다’는 의미로 이해(곡해) 해왔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영적인 허탈감은 성령충만 하지 못해서 찾아오는 것이며,

   성령충만을 상실한 이유는.. 우리가 그것을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충만은.. 구해야pray 합니다.


제가 학부 때, 진보적 장로교 신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때 학교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통성기도를 멀리했습니다.

‘기도를 꼭 소리 내서, 그렇게 요란 떨면서 기도해야 하느냐?’ 그겁니다.

그리고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 중의 하나가 "성령충만을 받으라!" 였습니다.


(아마 제가 이런 얘기를 하면, 그 분들이 항의할지도 모르겠지만

제가 봐 온 것은 분명히 그랬습니다.)

성령에 관한 이야기만 나오면,

"아니,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 자체가 이미 성령받은 증거인데,

무슨 따로 또 성령을 받아야 합니까?" 그럽니다.


물론 이 말씀이 틀린 말은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된 것은 우리가 스스로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성령이 역사하셔서 믿음주시고 믿게 하신 것입니다. 옳습니다!

그래서 따로 성령 달라고 기도하지 않아도, 우리는 이미 성령 받은 것입니다.


또한 성령 자체가 하나의 인격이신데,

무슨 물건처럼 달라고 하거나, 선심 쓰듯이 주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 달라고 기도하면, 신학적으로 좀 유치한 것처럼 보는 풍토가

그들 내면에 깔려 있습니다.

저 역시도 과거에 그런 사람 중에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한 번 냉정히 성경을 상고해 보면,

   ‘성령충만을 구하라’고 하십니다.


   ①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눅11:13


   -불신자가 성령 받고, 예수 믿으라는 소리가 아니라, 신자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다른 구절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자들에게 성령충만을 받으라고 권고합니다.


   ②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엡5:18


   그렇습니다.

   성령충만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말씀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결혼하는 부부와 같습니다.

결혼을 한 것으로 그들은 모두가 인정하는 부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게 다입니까? 결혼한 자체가 끝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결혼을 했으면.. 이제는 한 가정을 이루면서 행복하게 사는 일이 남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그냥 되지 않습니다.

가정의 행복을 위해 서로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충만 받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보혜사를 보내 주셨습니다.

성령은 마가의 다락방에서 120성도에게 임하시고 지금 우리에게도 임하셨습니다.

지금 우리 마음에도 분명히 성령님이 계십니다. (내주하시는 성령)


그러나 성령이 내주하셨지만

우리 속에서 성령이 더 활동하실 수 있도록, 우리는 성령의 충만을 구해야 합니다.

  

즉 성령이 내 속에서 내 영혼을 지배하고, 내 인생 전체를 지배하도록

완전히 나를 성령 앞에 내어 던지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성령을 충만히 받아야 하는 이유


요즘 제가 느끼는 무력감의 문제와 해답을 성경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Spirit으로 되느니라. 스가랴4:6


목회를 하다보면.. 아무리 애써도 않 되는 영역이 너무 많더라고요.

별별 생각이 다 듭니다.

그런데 며칠 전에 우연히 이 말씀을 보고, 내 문제가 뭔지 깨달은 것입니다.

내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내 능력으로도 되지 않습니다.

오직 성령으로만 그 일이 가능합니다.


   목회만 그렇습니까?

   여러분이 하시는 일은 성령충만과 관계가 없습니까?

   여러분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대부분이 지금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공부도, 여러분이 아무리 해도 안 되는 영역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나 여러분이나 성령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힘strength으로도 안 되고, 능power으로도 안 되고

오직 나의 신my Spirit으로만 되는 일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은혜에 흠뻑 빠져야 할 이유는 이외에도 너무나 많습니다.

여러분! 혹 죄인줄 알면서도 어떤 죄를 계속 범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성령을 충만히 받아야만 합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해서 순종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성령을 충만히 받아야만 합니다.


예배가 지겹습니까? 찬양하고 감사하는 기쁨이 없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성령을 충만히 받아야만 합니다.


말씀듣기가 힘듭니까? 앉아서 듣기가 지겹습니까?

입이 무거워서 기도가 잘 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지금 성령을 충만히 받아야 합니다.


열심히 봉사하지만 심령이 답답하고 갈급하십니까?

성령받아야 합니다.


모임에 나오는 게 귀찮고, 교회 일에 점점 흥미를 잃어가고 있습니까?

성령받아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 앞에 백지를 한장 씩 내 주고

   가장 간절한 기도제목을 쓰라면, 뭐라고 쓰시겠습니까?

   저나 여러분이나 똑같이 "성령충만을 주옵소서!" 그것이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제 오늘 본문 눅11:9-13절을 보면서, 그 얘기를 함께 해 보십시다.


▲1.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가장 주고 싶어하는 선물이 - 성령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성령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요즘 기도하면서, 가장 절실하게 느끼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하나님이 가장 좋아하시는 기도도, 성령충만케 해 달라고 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이 기도를 참 좋아하세요.

저는 이 사실을 요즘 체험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2. 성령 안에 좋은 것이 다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좀 전에 우리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같은 부분을 비교해 보고 조합해 봤습니다.

가장 좋은 것을 주시겠다는 말씀은, 곧 성령을 주시겠다는 말씀과 같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성령 안에 좋은 것이 다 들어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령충만하면

평소에 달라고 하던 것들을.. 달라고 할 필요가 없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평소에 "주님 답답해 죽겠습니다. 제 마음에 기쁨을 주옵소서.

왜 제 마음이 시원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기도하던 사람이 성령의 은혜만 받으면 그 기도가 사라집니다.

성령이 오셔서 그 마음에 기쁨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에 막혔던 것을 뻥 뚫어 주시니까 기도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령 안에 좋은 것이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 안에 기도의 응답이 다 들어 있습니다.

성령충만하면 우리의 기도가 참 단순해집니다.

복잡하던 기도가 단순해집니다.

 

왜냐하면 내가 복잡하다고 생각하던 것들이, 다 해결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모두 성령충만한 생활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성령충만은 아무에게나 주시는 것이 아니라, 구하는 자에게만 주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충만은 우리가 가만히 있어도, 하나님이 알아서 주시는 게 아니라,

반드시 우리가 구할 때만 주신다는 겁니다.


오늘 우리가 앞에 있는 말씀은 읽지를 않았는데,

이 본문 전에 어떤 말씀이 나오냐 하면,

밤늦게 친구 집을 두드리면서 떡 세덩이를 빌리려고 하는 사람의 얘기가 나옵니다.

밤에 자고 있는데 떡을 빌려달라고 문을 두드리니 얼마나 귀찮고 성가십니까?

그냥 가라고 해도, 안 빌려주면 안 가겠다고 하는 거예요.


어떻게 합니까?

"에이! 네가 내 친구라서 빌려주는 게 아니라 귀찮아서 빌려준다!"

그러면서 빌려준다는 거예요.


오늘 눅11:8절 말씀에 보면 '강청(强請)'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씀을 헬라어 원어사전에서 찾아봤더니 그 진짜 뜻은

'끈질김', '낯두꺼움', '몰염치함' 그런 뜻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남의 사정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 '뻔뻔함' 그 자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 비유는 누가 하신 겁니까?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의 의도가 뭘까요?

한 마디로 성령충만 달라고 떼를 쓰라는 거예요.

뻔뻔하게, 끈질기게, 낯두껍게, 몰염치하게라도 구해서 어떻게든 받아내라는 겁니다.

 

누가가 이 얘기를 쓴 것은 무엇이든 기도하면 얻을 수 있다는 내용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최우선으로 받아야 될 게, 성령이라는 말씀입니다.

결론 눅11:13절에 그렇게 쓰고 있습니다.


▶그래도 끈질기게 구하는 청년이 좋더라!

교회의 목사님들은 청년들의 결혼 주례 때문에 항상 골치를 썩는다고 합니다.

일정 자체도 워낙 바쁘지만, 누군 해주고 누군 안 해주고 할 수 없어서

대부분 부목사님들께 맡긴다는 거예요.


그런데 개중에는 목사님이 아니면 안된다고 조르면서

결혼 날짜를 그 담임 목사님의 일정에 맞추겠다고 하는 신랑신부들이 있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주례를 서 주는 경우가 있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들이 이구동성으로 하시는 얘기가 뭔지 아십니까?

주례를 부탁하러 온 신랑신부에게

"아! 참 미안합니다! 지금 보시는 것처럼 제가 워낙 일정이 바빠서요.

도저히 안 되겠습니다" 이렇게 얘기할 때


어떤 사람들은

"아 그러세요! 그러면 할 수 없죠 뭐! 저희들이 목사님 안 봐드리면 누가 봐 드리겠어요!"

그러면서 그냥 돌아간답니다.

그런 커플을 보면 목사님들이 굉장히 고마워 할 줄 알지요?

그런데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오히려 떼를 쓰고, '목사님 주례 아니면, 저 결혼 안 할래요' 그렇게 위협하는 사람을 좋아한다는 겁니다.


우리의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하나님을 귀찮게 하면 하나님도 불편하실 테니까

딱 한번만 기도해 보고 응답이 없으시면, 하나님이 안 주시는 걸로 알겠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렇게 기도하고, 그 기도를 다시 안 한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성령충만을 강청하세요.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주님은 우리더러

"내가 귀찮도록 달라고 해라. 특별히 성령에 대하서는 더 그렇게 해라" 그러십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얌전을 떱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그러는 겁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봐 주는 겁니까?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왜 그렇게 얌전을 떱니까?

구해야 합니다.

성령충만 달라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하는 말씀도 있는데,

이것은 3가지 스타일의 기도를 하라는 게 아닙니다.

강청하는 기도를 세 번 반복하라는 것으로 해석해야 옳습니다.


▶성령충만이 감동을 줍니다.

요즘 목사님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설교의 어려움이 뭐냐?

성경의 진리를 잘 설명하고 하나님을 더 알아가도록 무진 애를 쓰고 있는데도

젊은이들의 반응은 한결같답니다.

"그래서 어쨌다는 것입니까?" 그런다는 거예요.


무슨 얘길까요?

마음에 감동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그것이 옳으냐/그르냐에는 별 흥미가 없습니다.

자기에게 강한 무엇이 다가오면 "아!"하고 반응하는 게 지금의 신세대라는 겁니다.


저도 여러분께 그것을 느낍니다.

여러분의 눈빛에서 제가 무엇을 읽는지 아십니까?

"아! 어떻게라도 좋으니 목사님! 우리를 좀 감동시켜 주세요. 정말 감동받고 싶어요!" 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마음속에 뭔가 꿈틀하는 것을 느끼고 싶어 합니다.

이제는 아는 것보다, 감성과 체험과 새로운 것을 여러분은 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목회뿐만 아니라, 앞으로 여러분이 나가서 뛰어야 할,

여러분의 Field에도 똑같이 적용될 것입니다.


그래서 얘긴데, 여러분과 저는 이제 더 이상 미룰 수 없습니다.

성령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 속에 성령이 없으면.. 우리는 감동을 줄 수도 받을 수도 없습니다.

  

   다음 주에 오지리Austria 교회와 성령강림절 예배가 있습니다.

   언젠가 제가 설교할 기회가 오면, 오지리 교인들에게도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들의 삶은 비교적 정직합니다. 그리고 순탄하게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 한 구석엔 분명히 응어리진 갈급함이 있습니다.

   그들도 성령을 충만히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들은 새로워지고, 복음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령충만이 중독을 이기게 합니다.

북극에 사는 에스키모인들이, 늑대를 잡는 방법은 그리 어렵지 않다고 합니다. 

면도칼처럼 날카로운 칼에 피를 흠뻑 묻힌 다음에 이것을 얼린답니다.

그리고 칼날은 위쪽으로 향하게 하고, 칼의 손잡이는 얼어붙은 땅속에 박아 놓는답니다.


그러면 피 냄새를 맡은 늑대들이 와서 칼날을 핥는답니다.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기 혓바닥에도 피가 나기 시작하겠지요?

그런데 그 추위에 혀를 내놓으니까, 어느 순간 그 혀도 얼어서 무감각해진답니다.


그러면서도 계속 날카로운 칼 끝을 핥는답니다.

자기 피를 흘리면서 그 피에 도취해서 계속 그 칼날을 핥는다는 거예요.

언제까지? 죽을 때까지 계속 그런답니다.


   이것은 현재 많은 젊은이들이 마약과 알코올의 덫에 빠져드는 것과 똑같습니다.

   마약과 알코올은 처음에는 사람들에게 쾌감을 줍니다. 금방 그 쾌감에 빠져들지요.

   그렇게 시작된 쾌락은, 점점 그들의 감각마저 잃게 만듭니다.

   그럴수록 마약의 효과는 점점 더 떨어지게 된다.

   결국 그들은 중독이라는 '낚시 바늘'에 꿰이게 됩니다.


우리가 믿음생활 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루하루 이대로 살다보면, 우리는 이 삶에 그냥 중독되어 버리고 맙니다.

아무 생각 없이, 몸과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살다보면 우리 삶은 그렇게 굳어지게 되고, 인생은 그냥 그렇게 끝나고 맙니다.


뭔가 이제는 서둘러야 합니다.

삶의 전환점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 길이 뭘까요?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다른 것 다 옆으로 제쳐놓고 성령을 구하십시다.

그래야 중독을 이길 수 있습니다.


▶중국영화에서 배운 교훈

어느 날 중국무술의 최고 고수가, 한 이방인의 도전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중국무술 하는 사람들이 워밍업을 얼마나 요란하게 합니까?


그런데 그 고수앞에 서 있는 이방인은 가만히 있다가,

그 고수가 막 달려오는 것을 보더니

품에서 권총을 꺼내더라고요.

빵 쏘니까 그냥 죽는 거예요.


그래서 얻은 교훈이 뭐냐?

제 아무리 무술을 잘 해도

권총가진 사람에겐 까불면 안 되겠구나 하는 거였습니다.


좀 유치한 예인지 모르나,

성령충만을 받는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은 상상할 수 없는 무한한 능력을 갖는 것입니다.

권총을 가진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무술을 잘 연마해도,

권총 가진 사람을 어떻게 이기겠습니까!


우리가 성령을 구하십시다.

하나님이 분명히 주실 줄 믿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하나님이 주시길 가장 기뻐하시는 선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 기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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