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아의 리더십 이사야 42:1~4, 44:28 07.12.16.설교스크랩/축약
▲나의 목자 고레스
본문은 선지자 이사야가 살던 시대에 장차 오실 메시야를 예언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예언은 소위 이중적 의미를 갖고 등장합니다.
①궁극적으로 우리의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면서
②동시에 이 예언이 베풀어지던 당시의 역사적 정황에서
메시아적 리더십을 발휘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바벨론의 포로에서 구원할
사회적 지도자(고레스)를 의미하는 일에 이 ‘목자’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본문 이사야 44:28을 다시 읽어 보실까요?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내 목자라, 그가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네 기초가 놓여지리라 하는 자니라”
선지자 이사야는..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주1)
메시아의 리더십을 예표하는 것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사야가 예언한 ‘메시아 리더십’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1. 정의의 리더십입니다.
▲메시아는 정의를 세우는 종
이사야 40~55장 사이에는 네 편의 ‘종의 노래’가 등장하는데
42:1-4절이 첫 번째 노래입니다.
여기서 선지자는 하나님이 예비하사 보내실 종을 소개하며 그를 찬미하는데..
몇 구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42:1
그는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라” 42:3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42:4
이와 같이 ‘그는 무엇보다 정의를 세우는 종’이 될 것이라고 예언한 것입니다.
▲여기서 ‘정의’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가요?
당시 고레스 왕으로 돌아가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왕이 되었을 때, 그가 시행한 가장 중요한 정의는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이방에 노예가 되어 있던 이스라엘에게 자유를 베푸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가 베푼 정의의 리더십은
백성을 ‘자유하게 하는 정의’였던 것입니다.
정의라는 가치가 매우 중요하지만
그것이 우리를 자유로 인도하지 못하고 오히려 우리의 자유를 위축하고 제한한다면
결과적으로 그것은 정의일 수 없습니다.
과거에 이 땅에 살던 우리의 선배들 중 적지 않은 지식인들이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의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상당한 수의 지식인들은 분배와 평등의 정의를 강조하는 공산주의가
민중에게 더 나은 정의를 제공할 것이라고 판단한 나머지
북으로 가는 길을 선택한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분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물음들이 있었습니다.
그것들은 <도대체 누가 이 분배를 결정하는가? 이 분배를 어떻게 시행할 것인가?
이 분배의 과정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등의 질문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일당 독재의 불행한 전제국가를 낳아
이 땅의 절반은 자유를 잃어버린 동토의 땅에 살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시는 ‘나의 목자’(지도자)는.. 사회를 자유롭게 합니다.
우리 사회를 궁극적으로 자유롭게 하는가?
아니면 결과적으로 우리의 자유를 위축시킬 것인가를 신중하게 분별하여
우리는 ‘사회를 자유롭게 인도하는 지도자가 세워지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자유는.. 하나님 나라에서도 가장 중요한 상위 가치에 속합니다.
바울 사도는 갈5:1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메시아의 리더십은 자유하게 하는 정의의 리더십입니다.
자유의 가치가 우리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더욱 신장되는
그런 정의가 실현되도록 기도하십시다.
19세기는 자유가 가치의 기준이었습니다. 자유를 위해서 몸부림을 치던 시대였습니다.
20세기는 평등을 가치의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그래 평등을 외치다가 안 되니까, 폭력으로 평등을 얻어 보려고 애쓰다가
공산주의를 만들었고, 평등을 이루지도 못하고 더 어려운 지경에 빠졌습니다.
세계는 이렇게 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21세기는 어떻게 될까요?
21세기의 지향하는 가치는 박애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서로 싸워서는 안 되고, 그럼 다 죽으니까,
서로 존중하는 박애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살아가는 세대가 올 것이라고 예측합니다.
(박애는.. 아래의 긍휼의 리더십과 비슷합니다.)
◑2. 긍휼의 리더십입니다.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며” 사42:2~3
▲위 말씀의 이미지를 종합하는 한 단어는 ‘긍휼’입니다.
메시아의 리더십(우리가 배워야 할 사회적 리더십)은 긍휼의 리더십인 것입니다.
마태는 마12:17-21에서 이 예언이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병든 자들을 치유하시는 예수님을 통해서
정확하게 실현되었다고 선포합니다.
예수님의 리더십이야말로 진실로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고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아니하는” 마12:20
긍휼의 리더십의 전형입니다.
▲그러면 긍휼의 리더십의 반대가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이 바로 ‘정죄의 리더십’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말로하면 네가티브 리더십입니다.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리더십으로는, 건강한 새 사회를 이루어 내지 못한다는 것이
역사의 레슨입니다. 네가티브 캠페인을 많이 하는 사람은 절대 좋은 지도자가 아닙니다.
물론 네가티브가 필요한 상황도 있습니다.
지도자 주변에서 창조적인 비판을 하는 참모들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지도자는 균형 잡힌 판단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도자 자신은 네가티브 해서는 안 됩니다.
▲‘네가티브’에는 중독성이 있습니다. *여기서 부정적/비판적인 시각을 뜻함
늘 사물을 부정적으로만 바라보는 사람은
그의 판단과 시선이 부정적으로 고착되어 위험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비판을 조심하라’고 산상수훈에서 가르치신 것입니다.
만일 최고지도자가 매사를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네가티브한 정책을 펼쳐갈 때, 그 단체/사회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냥 비판하고 혼내는 지도자가 아니라, 설득하고 기다리는 지도자
헨리 나우헨이 그의 ‘긍휼’이란 책에서 소개한 긍휼의 리더십 스토리입니다.
어떤 곳에 ‘바보들의 마을’이 있었는데
이 마을 한복판 밀밭에는 수박들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을사람들은 그 수박들을 괴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두려움’을 가지고 아무도 그 밭에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한 여행자가 이 마을을 지나다가 이 광경을 보고 기가 막혀
내가 이 어리석은 사람들을 교정하리라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미련한 사람들아 나를 보라”고 외치며
용감하게 밀밭으로 돌진하여 수박을 쪼개 먹어 보이며
“나를 따르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러나 마을사람들은 저 괴물까지 무참하게 살해한 자가
우리까지 살해할지 모른다고 생각하여
건초 갈퀴를 가지고 그에게 덤벼들어, 그를 마을에서 쫓아냅니다.
시간이 지나서 또 한 여행자가 이 마을에 들어와서는
이런 마을 사람들을 긍휼히 여긴 그는
시간을 두고 인내하며 마을사람들과 같이 살면서 설득하고 가르쳐
마침내 그들 자신의 손으로 이 수박을 먹게 한 것입니다.
헨리 나우헨은 이것이 바로 성육신하신 예수님의 리더십이었다고 말합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을.. 어리석다고 비판하지 않고,
그들이 계몽될 때까지, 기다리고, 설득해서
결국은 참된 목적을 성취하는 리더십.. 바로 예수님의 리더십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성육신하셔서, 우리를 설득하고 가르치시고 기다려주셨습니다.
◑3. 회복의 리더십입니다.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내 목자라, 그가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네 기초가 놓여지리라 하는 자니라” 사44:28
역사적으로 고레스가 직접적으로 예루살렘을 중건한다든지
성전을 다시 짓는 일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정책적 결단으로 이스라엘 민족이 시온의 땅으로 돌아오고
예루살렘 성이 중건되고 성전이 다시 지어지는 계기를 만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고레스의 리더십은 회복의 리더십이었습니다.
메시아의 리더십도 궁극적으로 회복의 리더십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타락한 인생, 무너진 인생을 회복시키기 위해 오셨습니다.
▲회복에는.. ‘시간을 두고 바라봄’이 필요합니다.
다시 한번 제가 좋아하는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로마의 바티칸 박물관에는 미켈란젤로의 걸작품 ‘피에타’(pieta)조각상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그 시체를 끌어안고 비탄에 잠긴 성모 마리아의 모습이지요.
그런데 여러해 전에 한 정신이상자가
이 인류의 위대한 보고인 조각상을 망치로 훼손한 사고를 일으킨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이 작품을 아끼는 전세계 미술애호가들에게 중대한 질문이 있었습니다.
‘과연 이 작품은 다시 한 번 원형 그대로 회복될 것인가?’ 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작품이 훼손된 후, 박물관에서는 즉각적으로 복구팀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들은 회의를 통해 한 가지 흥미 있는 합의를 했습니다.
그들은 곧바로 복구 작업에 들어가기보다
상당한 기간을 이 작품 앞에서 보내기로 했습니다.
그들은 매일 무너진 작품을 보고, 그리고 오리지널 그림을 보고..
무너진 작품의 슬픔을 느끼고
그리고 회복되어야 할 원형의 형상을 마음에 새기면서..
이렇게 오랜 시간을 보내고 난 후에
“이제 우리가 준비된 것 같다!”며
그들은 원형 복원작업을 착수했고,
이 작품을 멋지게 회복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오셔서 하신 일이셨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으나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범죄로 인해 파괴하고 무너뜨려졌습니다.
이런 무너진 인생의 슬픔을
성육신 하신 주님은, 이 땅에 계시면서 (오래) 공감하며 살아오시다가
어느 날 마침내 최후의 결단을 하십니다.
십자가를 지시기로! 복원을 결심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회복을 위해서였습니다.
자신이 죽음으로써 우리를 살리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의 리더십은 회복의 리더십이었습니다.
구원의 리더십이었습니다.
세우기는 어렵지만, 무너뜨리기는 쉬운 것입니다.
부정적인 언사로 누구를, 어느 집단을 무너뜨리는 일은.. 너무 쉽습니다.
그러나 회복시키고, 세우는 일은.. 너무 어렵습니다.
그 대가로 자신이 십자가를 져야하는 일입니다.
'리더십의 부재'라는 말이 회자되는 시대에
사회의 각계 각층에 포진되어 있는 우리 크리스천들이
이런 예수님의 리더십을 본받아.. 우리 공동체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나가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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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고레스 (Cyrus 영어로 사이러스)는 페르시아제국의 초대왕(BC 559-530)으로서
소위 메대 바사를 통일하고 바벨론을 정복했던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정복정책은 고대의 다른 지도자들과 달리
정복민족의 전통이나 종교를 존중하고 자율권을 허용한 선정을 베풀었던 왕이었습니다.
그는 이런 정책의 일환으로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소위 고레스 칙령(BC 538년)을 발표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유를 주어
그들의 조국으로 돌아가도록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입장에서 이런 해방령을 발표한 고레스가 곧 구세주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오늘의 이사야 본문에서 구세주의 모형으로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