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길이 아직도 많이 남았다 왕상19:1-18 10.06.20.설교스크랩
◑본문 설명 주1)
엘리야는 갈멜산의 승리 후에,
브엘세바→로뎀나무 아래→호렙산으로 피신을 가는데요...
◑엘리야의 진짜 문제
▲사람을 넘어뜨리는 것은 고통이나 실패가 아니라, 포기입니다.
엘리야는 자기가 실패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가 잘 했는데,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는데,
결국 참담하게 실패하고 말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만 끝내달라고 합니다. 엘리야는 하나님께,
더 잘할 수 있도록 새로운 힘과 용기와 소망을 달라고 하지 않고,
차라리 여기서 그만 끝내게 해달라고 합니다.
사람을 넘어뜨리는 것은 고통이나 실패가 아니라, 포기입니다.
외부에서 가해지는 힘이 사람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좌절하고 포기할 때 무너지는 겁니다. 지금 엘리야가 바로 그런 상태였습니다.
▲엘리야는 로뎀나무 아래에서 하나님께 기도하고서 잠이 들었습니다.
얼마나 잤을까요?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가 엘리야에게 일어나라고 합니다.
음식을 차려놓고, 먹으라는 겁니다.
엘리야는 천사가 차려놓은 음식을 먹고서 다시 잠이 듭니다. 바쁠 것도 없지요.
서두를 것도 없습니다. 어디 가야 하는 것도 아니고, 이제 다 포기한 마당에,
더 할 일도 없으니 잠이라도 자야겠지요.
똑같은 일이 다시 한 번 되풀이됩니다.
자고 있는 엘리야를 천사가 깨우면서, 이번에는 이런 말을 합니다.
“일어나서 먹어라. 갈 길이 아직도 많이 남았다.” 19:5, 7절
엘리야는 이제 그만 하겠다고 합니다. 좌절해서, 절망해서, 다 포기하고,
이제 다 그만두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직 갈 길이 많이 남았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포기하지 않으시는데, 왜 네 마음대로 끝났다고 하느냐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제 겨우 시작하셨는데, 누구 마음대로 끝났다고 하느냐고 하십니다.
나중에, 호렙산에서, 엘리야가 하나님을 만났을 때, *여정③ 호렙산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앞으로 할 일을 지시하십니다.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서 시리아의 왕으로 세워라.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라.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서 네 후계자로 삼아라.
하사엘의 칼을 피해서 도망하는 사람은 예후가 죽일 것이고,
예후의 칼을 피해서 도망하는 사람은 엘리사가 죽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스라엘에 칠천명을 남겨 놓을 터인데,
그들은 모두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입을 맞추지도 아니한 사람이다. 19:15~18
▲엘리야의 진짜 문제 - 자기중심주의 self-centeredness
엘리야는 자기 혼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자기 혼자 다 해왔다고 생각했습니다. 왕상19:10
아무도 남지 않았고, 아무도 같이 일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자기가 실패했으니, 다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게 바로 엘리야의 문제였습니다.
엘리야는 물론 위대한 예언자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 둘도 없는 큰 인물입니다.
하지만, 엘리야는 자기가 이룬 놀라운 업적들을 자기가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 아니면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자기가 막히니까, 실패하니까, 한 순간에 무너져 버렸습니다.
자기가 못하면 하나님도 못하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자기가 실패하면 하나님도 실패하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 나라의 한 부분
그러나 아니었습니다. 그렇지 않았습니다. 엘리야는 실패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것도 역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한 부분이었을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 한 사람만 보고, 그에게 목매고 계시지 않았습니다.
물론 엘리야가 위대한 예언자였고, 대단한 일을 이루어낸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도 역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한 부분일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다음, 그리고 그 다음의 일까지 다 계획해 놓으셨고,
이미 진행하고 계셨습니다.
엘리야가 아합과 이세벨을 이기지 못했지만,
그 다음에는 하사엘을, 그 다음에는 예후를,
그리고 그 다음에는 엘리사를 대기시켜 놓고 계셨습니다.
그들만이 아니라,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고 입 맞추지 않은 용사
칠천 명을 준비해놓고 계셨습니다.
▲내가 모르고 있다고, 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없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내가 실패했다고 하나님도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건 잘못입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하나님은 일하고 계십니다.
내가 실패했어도, 그 실패까지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는데 사용하십니다.
▲엘리야의 진짜 문제 - 자기중심주의 self-centeredness (재차 반복 설명)
실컷 잠을 자고, 천사가 차려준 음식을 먹은 엘리야는 힘을 얻어서,
천사의 인도를 따라, 하나님의 산인 호렙산에 도착합니다.
호렙산은 시내산과 같은 산이라고 하는데, 모세가 처음 하나님을 만난 곳이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계명을 주신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거기는 하나님이 계신 곳이고, 하나님이 사람을 만나시는 곳입니다.
거기서 엘리야도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물으십니다. “엘리야야, 너는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19:9
엘리야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이제까지 주 만군의 하나님만 열정적으로 섬겼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주님과 맺은 언약을 버리고, 주님의 제단을 헐었으며,
주님의 예언자들을 칼로 쳐서 죽였습니다.
이제 나만 홀로 남아 있는데, 그들은 내 목숨마저도 없애려고 찾고 있습니다.” 19:10
이게 엘리야의 문제였습니다.
그는 자기가 하나님을 위해 얼마나 열심히 살아왔는지,
자기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해왔는지 알아달라고 합니다.
자기는 열심히 했는데, 자기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는데,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더 이상 할 일도 없고, 하기도 싫다고 합니다.
엘리야는 정말 열심히,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일을 했습니다.
자기를 위해서 한 것도 아니고, 거기서 무슨 명예나 이익을 얻으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위해서 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엘리야는 자기가 했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19:10
내가 했고, 이제 나 혼자 남았다고 합니다.
◑'사역'보다 중요한 것은 관계, 또는 존재 ←주제 단락
▲관계를 회복시키시는 하나님
그런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으시고,
다만 엘리야의 앞을 지나가겠다고 하십니다. 19:11
하나님은 왜 이세벨을 처벌하지 않고, 엘리야를 불러 하나님 앞에 세우셨을까요?
왜 엘리야의 원망 섞인 하소연에.. 별다른 위로도, 설명도 하지 않으시고,
그냥 그 앞을 지나가기만 하신 것일까요?
엘리야에게 가장 큰 문제는,
그가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이상하지요? 지금까지 누구보다 열심히, 생명을 걸고 하나님의 일을 해왔는데,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다니요?
물론 엘리야는 지금 자기가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생각했지,
하나님이 자기를 통해 일을 하신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던 것 같습니다.)
그 엘리야 자신이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생각했지,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을 하고 계신다고 생각하지 못했던 겁니다.
그는 아합과 이세벨과 맞서서, 그들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갔지만,
막상 자기가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것,
언제나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는 것은 잊고 있었습니다. (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하는 사역보다, 내 존재를 더 귀하게 보신다.
엘리야에게 있어서도, 그리고 우리에게 있어서도, 정말 중요한 것은,
나는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사람이요,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어떤 자리에 있고, 무엇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느냐는..
하나님 앞에서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내가 한 일, 내가 이룬 업적을 보시지 않고, '내 존재'를 보십니다.
하나님은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일을, 얼마나 잘해냈는가를 보시지 않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나'를 보고 계십니다.
어쩌면 우리가 하고 있는 가장 큰 실패는, 하나님을 잊고 사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기적, 다 알지만,
정작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는 잊고 사는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이 나를 아시고, 하나님이 나를 보고 계시며,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 말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서 있고, 또 서 있어야 한다는 사실 말입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나를 만드시고,
나를 사랑하시는 나의 아버지이시라는 것인데 말입니다.
▲부모에게는 자녀의 성과/성적보다, 존재가 더 소중하다.
공부도 잘하고, 모범생이고, 말도 잘 듣고, 뭐 하나 나무랄 데가 없는 아이가 있습니다.
부모에게는 큰 자랑이요 기쁨이겠지요.
그런데, 부모에게 있어서 정작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닐 겁니다.
그 아이가 몇 등이고, 어느 대학에 가고, 한 달에 얼마나 벌고, 그게 아닐 겁니다.
그 아이가 내 아이라는 것, 내가 낳아서, 내가 젖 먹여서 기른 내 아이라는 것,
한밤중에 열이 펄펄 나서,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하고 그 옆을 지키고 있다가,
열이 내리지 않으니까, 그 밤중에 아이를 들쳐 업고 병원 응급실로 뛰어갔던,
바로 그 아이라는 것,
아이가 아프면, 내 생명이라도 주어서 살려내고야 말, 내 아이라는 것,
내가 사랑하는 내 아이라는 것, 그걸 빼면 뭐가 남을까요?
그냥 공부 잘하고 말 잘 듣고, 돈 잘 벌고, 그거 때문에 기쁜 것이라면,
그걸 부모의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올해 초에 방송됐던 드라마 중에 <공부의 신>이라는 드라마가 있었지요.
거기서 김수로라는 배우가 문제아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으로 나왔는데,
자식들을 일류대학에 보내려고 애쓰는 부모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의 자녀에게 합격을 기대하지 마십시오.
그건 부모만이, 이 세상에서, 자식에게 합격을 기대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태어난 그 순간을 생각해 보십시오.
내 자식이 이 세상에 숨을 쉰다는 자체만으로도 벅찼던 그 순간 말입니다.
좋은 결과, 합격에 대한 조바심은 수험생과 교사들에게 맡겨 주십시오.
조급한 마음을 좀 누르시고, 자식을 묵묵히 지켜보는 겁니다.
결과에 상관없이 자식이 오로지 최선을 다하기만을 응원해 주는 것이
부모가 할 일입니다.”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원하시는 것은.. 그와의 관계, 그의 존재의 소중함
하나님이 엘리야를 보시면서, 한편으로는 '참 장하다, 참 잘한다. 참 훌륭하다',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겠지만, 그러나, 정작 하나님이 기대하신 건,
엘리야가 하나님 앞에 서서, 내가 뭘 해야 한다는 긴장을 풀고,
사랑하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항상 무엇인가 해야 한다고, 그것도 항상 잘해야 한다고 조급한 마음으로 서두르고,
항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려고 하고,
하나님을 위해 목숨이라도 걸려고 마음먹고 준비하고 서 있는, 그런 영웅 말고,
'내가 사랑하는, 그리고 나를 사랑하는 내 아들로 내 앞에 서는 것'.., 그것이었던 겁니다.
‘네가 하지 않아도 내 일은 계속된다. 그 일/사역은 별 거 아니다.
내 일이 지연될까봐 걱정하고, 내 일이 실패할까봐 겁을 내고, 난 그러지 않는다.
난 하나님 아니냐?
그보다 나에게 더 소중한 건 바로 너, 내 사랑하는 아들 너 자신이란다.
해도 해도 끝없는 일, 조금도 변하지 않는 이세벨,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서, 무력감을 느끼고,
무능하다고 자책하고, 그러지 마라. 그럴 필요 없다. 네가 못해도 상관없다.
그렇다고 내 일이 중단되는 것도 아니란다.
나는 이미 충분히 너에게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네가 참 장하고, 너를 보면 참 기쁘다.
네가 뭘 잘 해서, 많은 성과를 거둬서, 늘 1등을 해서, 돈을 많이 벌어서가 아니라,
네가 내 아들이라서, 네가 내 딸이라는.. 그 자체로 나는 기쁘다.
네가 나를 아빠라고 부를 때, 내 마음은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단다.
네가 웃으면 온 세상이 웃는 것 같고, 네가 울고 있으면, 세상이 끝날 것처럼 내가 슬프단다.’
▲마치는 말
엘리야가 위대한 예언자이기는 했지만, 완전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위대한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은 아니었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순종하면서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와 하나님을 혼동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 내가 하는 일은 하나님의 일이다, 그러면서,
자기와 하나님을 혼동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야 역시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는 연약한 사람입니다.
때로는 자기의 업적에 마음을 빼앗겨 교만해지기도 하고,
일이 잘 안되면 실망하기도 하고, 자기가 다 한다고 생각하기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은 네가 하는 게 아니라, 내가 한다.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사람은 사람이다.
아무리 위대한 사람이라도, 아무리 위대한 일을 했더라도
사람이 하나님이 되지는 않는다. 너는 나의 일로 너무 걱정마라 '
그 반대도 마찬가지지요.
우리가 하는 일이 별 볼 일 없고, 눈에 잘 띄지도 않더라도,
우리가 하는 일이 실수투성이고 실패의 연속이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하나님을 섬기며 산다면,
우리 역시 엘리야와 같은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우리의 성공이.. 나의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공이듯이,
우리의 실패 역시.. 나의 실패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공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실패가 없으시니 말입니다.
중요한 건, 내가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관계를 친밀히 유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무슨 일을 잘해서가 아니라, 내가 하는 일이 큰일이어서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
그게 중요한 겁니다. 그게 전부인 겁니다.
우리가 실패해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십니다.
우리가 성공해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수고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완성하십니다.
우리의 노력, 우리의 수고가 쓸데없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수고를 기뻐하시고,
우리가 주님을 위해 흘리는 땀 한 방울로 감동하십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이며, 내 존재입니다.
내 존재가 때때로 실망하고, 때때로 좌절하고, 다 포기하고 주저앉아 있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내가 널 사랑하는데, 내가 널 얼마나 아끼는데,
왜 그렇게 실망하고, 왜 그렇게 슬퍼하느냐?
내가 너의 하나님인데, 내가 너의 아버지인데. 일어나라, 갈 길이 아직 많이 남았다.
자, 내 손잡고 일어나서 나하고 같이 가자.’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
주1) ◑본문 배경 설명
▲엘리야보다, 오히려 이세벨이 두려워 할 상황이었습니다...
엘리야가 바알의 선지자들과의 대결해서, 그들을 몰살시켜 버렸습니다. 왕상18:40
이세벨은 그 얘기를 듣고는 불같이 화를 냅니다.
이세벨은 엘리야를 향해서, 네가 예언자들을 죽였으니, 나도 너를 죽이겠다고
신에게 맹세까지 해가면서 선언을 합니다. 19:2
그런데 이상하지요? 엘리야가 승리했으면, 이세벨이 두려워해야 되는 것 아닐까요?
‘불똥이 나 이세벨에게까지 튀어서, 나도 죽을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해야 하지 아닙니까?
그런데 거꾸로 이세벨은 화를 내면서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하고,
오히려 엘리야가 두려워하고 있단 말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뭔가 거꾸로 된 것 같단 말이지요.
아마 이세벨도 두려웠겠지요.
그래서 엘리야를 빨리 죽여서, 일찍 화근을 자르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저를 가만히 뒀다가는, 다음엔 자기 목이 달아날 수도 있겠다고..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우상 숭배의 실상은.. 사람 숭배
바알 숭배는 당시 북이스라엘에서 왕실의 공식 종교처럼 되어 있었습니다.
바알의 제사장과 선지자들은, 왕실에서 왕과 왕비의 종교행사를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알의 이름으로 아합과 이세벨을 칭송하고,
그들이 듣기 좋아하는 소리만 하고,
그들의 앞날에 부귀영화가 보장되어 있다고 말하면서
그들을 신처럼 높여 주었습니다.
그들이 한 일은 공식적으로는 바알을 섬기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아합과 이세벨을 섬기고 있었던 겁니다.
바알 신앙도 그렇고, 다른 우상숭배도 마찬가집니다.
겉으로는 사람이 신을 섬기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신의 이름으로
의뢰인client을 정당화하고, 기분 좋게 만들어주고, 대접받게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애굽의 바로도 신의 아들을 자처했고,
중국의 황제나 일본의 천황이나 다 종교를 이용해서
자기들을 신적인 존재로 섬기게 만들었던 것을 봅니다.
이스라엘에서 바알숭배 역시 그런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바알의 제사장과 선지자들이 대거 몰살당했으니,
이세벨은 그게 왕실에 대한 도전이고, 자기를 모욕하는 거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한 것이었습니다.
‘바알이 신이냐/아니냐?’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단 말이지요.
▲엘리야가 무너진 결정적 이유는.. 두려움보다는 좌절감
엘리야는 이세벨의 이런 반응을 예상하지 못했을까요?
이세벨의 태도에 대해서 엘리야가 보인 반응은 오히려 우리를 당황하게 만듭니다.
왕상19:3-4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두려워서 급히 일어나, 목숨을 살리려고 도망하여, 유다의 브엘세바로 갔다.
그 곳에 자기 시종을 남겨 두고, 자신은 홀로 광야로 들어가서,
하룻길을 더 걸어 어떤 로뎀 나무 아래로 가서,
거기에 앉아서, 죽기를 간청하며 기도하였다. "주님, 이제는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나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나는 내 조상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습니다."
이게 조금 전에 바알의 제사장들과 맞서 당당하게 싸우던 그 엘리야란 말입니까?
어떻게 이렇게 한 순간에 무너져 내릴 수 있을까요?
이세벨이 두려웠거나, 죽는 게 두려워서는 아니었을 겁니다.
엘리야가 그 정도는 아니니까요.
아마도 엘리야에게 결정적으로 작용한 건 좌절감이었을 겁니다.
아무리 해도 달라지지 않는 현실, 목숨 걸고 죽어라고 한 일이,
큰 성과를 거둔 줄 알았는데, 막상 본질적인 건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는 것 말입니다.
‘바알 제사장 백만 명을 죽이면 뭐하나?
바알 신앙의 근거지인 왕실이 조금도 변하지 않는 걸.
더 이상 해봐야 아무 소용없는 것 아닌가?
이제는 아무도 없고 나 하나 남았는데,
나 혼자서 더 싸워봐야, 더 버텨봐야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을 텐데..,
그만 두자. 이쯤에서 그만 하자...’
결국 엘리야는 이세벨에게 진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패배한 겁니다.
지치고 좌절했던 겁니다.
참고로, 성경에는 이렇게 나옵니다.
저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그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여... 19:3
(자기) 목숨을 살리려고 도망하여 19:4
▲엘리야는 브엘세바로 갑니다. 19:3 *여정① ‘브엘세바’
브엘세바는 아브라함이 단을 쌓아서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던 곳이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성지순례를 할 때 자주 찾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엘리야가 이세벨의 눈을 피해서 숨기 위해서 브엘세바로 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거기 있으면 금방 이세벨에게 발견될 것이니까 도망간 의미가 없었습니다.
엘리야는 이세벨을 피해 도망했다기 보다는,
하나님께로 가기 위해 거기로 간 것이었습니다.
엘리야는 브엘세바에서 하룻길을 더 광야로 들어가서, *여정② ‘로뎀나무’
어떤 로뎀나무 아래에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주님, 이제는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나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나는 내 조상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습니다.” 19:4
조상들이 이루지 못한 일, 이스라엘에서 바알을 몰아내는 일을 자기는 해낼 줄 알았는데,
그리고 바알의 제사장들과의 대결에서 완승을 거두면서 실제로 해낸 줄 알았는데,
결과는 전혀 그렇지 않더라는 거지요. 자기도 조상들처럼 실패했다는 겁니다. ▣ 리더쉽, 목회자
이제는 저들의 손에 죽게 되었으니,
그럴 바에는 차라리 하나님 손에 죽겠다고 하는 겁니다. 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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