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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10

나는 나거든 2537

LNCK 2010. 7. 6. 11:54

◈나는 나거든                                    출3:1~14                            -인터넷설교스크랩, 출처-

                                                                                                                      


◑혼돈의 시대, 광야의 시대


▲우리는 매우 혼란스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묵시론적 시대입니다.

광야와 사막의 시대입니다.

옛적 사고방식이 새로운 사고방식으로 대체되고 있는 전환기에 살고 있습니다.


수면 아래의 해류가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급속하게 흐르는 시대입니다.

대규모 지각 변동이 일어나고 있는 시대입니다.

오래된 기초들이 지진을 만난 듯 심하게 요동치는 시대입니다.


물론 이전에도 이런 시대는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14세기가 그런 시대 중 하나였습니다.

『아득한 거울:재난의 14세기』"A Distant Mirror: The Calamitous 14th Century" 1978

라는 책을 쓴 바바라 터크맨(Barbara Tuchman, 1912-1989)은 말하기를

14세기는.. 지금 우리 세기가 겪고 있는 비슷한 혼란과 사회적 격변을 겪었다고 합니다.


세기적인 흑사병, 백년 전쟁, 형편없는 정부들, 각종 민중봉기들,

그리고 교황청내의 분열과 반목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터크맨은 그녀의 책 제목을『아득한 거울』이라고 붙였던 것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20세기를 잘 이해하려면 14세기의 거울을 들여다보라는 것입니다.

지금 세기는 14세기처럼 격렬하게 휘몰아치고 당황스럽고 예측불허의 시대이며

고통하며 산산조각이 나는 세기라는 것입니다.

마치 계시록의 네 명의 마병들의 말발굽 소리들과 자국들이 온통 뒤덮여있다는 것입니다.


대낮과 황혼녘

역사 안에는 두 가지 종류의 기간들이 있습니다.

대낮과 같은 기간과 황혼녘과 같은 기간들입니다.


      · 대낮과 같은 시대에는 사람들은 별 문제없이 잘 삽니다.

        상대적으로 안전하고 편안하게 사는 시대입니다.


      · 대낮의 시대에, 사람들은 표면적으로, 피상적으로 삽니다.

        따라서 깊고 고된 질문을 묻지는 않습니다.

        역사란 그 자체 안에서 잘 설명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대낮 기간은 황혼녘 기간과 교차alternative됩니다.

한번은 대낮기간, 다른 한번은 황혼녘 기간이 됩니다.


      · 황혼녘 기간들은 엄청난 격동과 변혁이 일어나 사람들을 깨웁니다.

        그들의 안전을 빼앗아가고 정신적 혼돈과 혼란이 생깁니다.


      · 황혼녘 기간들에는 대낮 기간들 동안에는 보이지 않았던 깊음 들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지금 우리는 황혼녘 기간에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두려워하고 혼란스러워 합니다.

사람들은 무엇엔가 불확실한 느낌을 갖고 삽니다. 늘 불안하고 걱정스럽습니다.

이런 느낌은 교회의 삶에서도 나타납니다.


교회들 역시 그들의 미래에 대해 불확실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교회는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한 때는 분명하고 고정적이었던 것이 이제는 불분명하고 유동적이 되었습니다.


전에는 분명한 경계선들이었던 것이, 지금에 와서는 온통 불투명한 선들이 되었습니다.

교단에 대한 충성도들 역시 점점 약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신앙적 정체성 역시 흐릿해져 갑니다.


▲새로운 시대를 내다본 Patrick Henry

1774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제1회 미 대륙 국회>에서

패트릭 헨리가 이런 연설을 하게 된 부분을 읽게 되었습니다.

1776년이 미국 독립의 해, 2년 전에 일어났던 이야기입니다.


“대륙 전체를 통해 정부는 붕괴되어가고 있습니다. 경계지석들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도대체 여러분들의 경계선들은 어디입니까? 어디에 여러분들의 지경들이 있습니까?

더 이상 버지니아인, 펜실베이니아 사람, 뉴욕 사람, 뉴잉글랜드 사람은 없습니다.

나는 버지니아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미국인입니다!”

(지금 유럽이 이렇게 소리 소문 안 나게 통합의 길로 나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주)

 

43명의 대표자들이 넋을 잃은 듯 앉아 있었습니다.

방금 귀로 듣고 있는 바에 그들은 정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미국인이라? 도대체 이게 뭔가?’ 아직 미국이라는 것이 태어나기 전에

그는 미합중국의 태동을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헨리의 말은 옳았습니다.

그는 새로운 국가가 태어나고 있는 것을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도 격변의 시대

아마 이와 비슷한 일이 교회에서도 일어나고 있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경계선들이 점차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옛적부터 내려오던 구분들과 경계들이 흐려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한 때는 분명하고 고정되어 있었던 것처럼 보였던 것들이

이제는 유동적이고 움직여가고 있습니다. 이런 일 때문에

많은 고통이 따르는 것입니다. 마음에 통증과 괴로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스런 과정을 통하여 새로운 교회가 떠오르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광야에 있는, 지금은 홍해와 가나안 땅 사이에 있는,

새롭게 탄생하는 교회가 점점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사회적으로나, 교회적으로나.. 이 격동의 시기에

지금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문제 제기



◑본문 설명


▲당신의 이름을 뭐라고 말할까요?

어느 날 하나님께서 불타오르고 있는 가시덤불 가운데서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 나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다.

       ·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


그리고는 왜 모세에게 나타나셨는지 그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 내 백성의 비참한 상황을 보았다.

       ·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었다.

       · 그들의 고난과 고통을 안다.

       · 내가 내려가 그들을 구출하려 한다.

       ·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내 백성을 애굽에서 끌어내려 한다.


이 말씀을 하자 바로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중간에 끊고 대답합니다.

“제가 이스라엘인들에게 가서 ‘당신들의 조상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냈다’

고 하면 그들이 내게 ‘그의 이름이 뭐냐?, 그 신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을 텐데

제가 뭐라고 답할까요?”


그러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나다(히브리어로는 ‘예흐예 아쉐르 예흐예’).

나는 나거든!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냈다고 말하라.”

(대답이 모호하십니다. 무슨 뜻일까요?)

 

▲제발 당신의 이름을 말해주세요.

아주 오래 전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인들의 조상 야곱은

어느 날 밤새도록 어떤 사람과 씨름을 했습니다.

그 때 야곱도 똑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제발 당신의 이름을 말해주시오.”

그러나 그 사람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창32:29


       · 내 이름을 묻지 마!

       · 내 이름을 알려고 하지 마! 알면 다쳐!

       · 나를 마음대로 통제하려고 하는데 그러면 못써!

 

(야곱에게도, 하나님은 이름을 직접 가르쳐 주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모호한 이름, ‘나는 나다!’ 


이 이름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듣게 됩니다. ‘약속’과 ‘사라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1. “나는 나다”라는 ‘약속’을 가리킵니다. 약속을 담고 있는 이름입니다.

“나는 나다!”의 뜻은


       · 나는 내가 되려고 하는 나가 될 것이다.

       · 과거에 나였던 그 나가 될 것이다.

       ·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나님이었던 것처럼,

         나는 그와 같은 동일한 하나님이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 나는 시편 23장의 하나님이다.

       · 나는 너희와 함께 하는 하나님이다.

         심지어 너희가 어둡고 깜깜한 골짜기에 있을 때라도

         그곳에서 너희와 함께 하는 하나님이라는 약속입니다.


▲2. “나는 나다”라는 이름은 ‘사라짐’에 대해 말하는 이름입니다.

“나는 나거든!”의 뜻은


       · 나는 숨은 하나님이다. 나는 신비로운 하나님이다.

       · 나는 너희가 욥기에서 읽는 그런 하나님이다.

       · 나는 너희가 도저히 그 마음과 생각을 알 수 없는 그런 하나님이다.

       · 나는 너희가 도무지 따라가지 못할 지혜를 갖고 계신 그런 하나님이다.

       · 나는 생각이 하늘보다 더 높고 스올(무덤, 지하)보다 더 깊은 그런 하나님이다.


       · 나는 너희가 어디에 있든 바로 그곳에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 그곳이 어디든 나는 너희의 생각과 상상을 넘어서는 방식으로

         그곳에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 나는 절대 주권적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임의적이지는 않다.

       · 나는 신실하다. 그러나 너희가 예측할 수는 없다.


       · 나는 언제나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네 방식이 아니라

         항상 내 방식으로 그럴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을 쉽게 번역하자면, 크리스천들로서 혹은 교회로서 혹은 교단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편에 서 있다고 간주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항상 계시다는 뜻은


       · 하나님이 우리 편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편에 있다는 말입니다.

       · 우리가 정해 놓은 우리의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이 있다는 말입니다.

       · 내가 하나님의 약정서에 따르는 것이지

         내가 만들어 놓은 약정서에, 하나님이 따르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3. 그러므로 신뢰하라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 이삭과 리브가에게,

       · 야곱과 레아와 라헬에게 신실하게 대하셨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신실하고 성실하게 대하실 것을... 믿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신실하셨던 것처럼

       · 우리의 자녀들에게도 신실하게 대하실 것을 믿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 지난 9년여 세월 동안 우리의 교회에게 신실하셨던 것처럼

       · 앞으로 오는 세월에서도 우리 교회를 신실하게 대우하여 주실 것을

         믿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격변기, 황혼녘)에서 이렇게 믿고 신뢰하는 것을 배워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황량한 벌판과 광야야 말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어떻게 살 수 있을까 걱정하기에.. 최적의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황량한 벌판과 광야, 즉 내가 “나는 잊혀진 사람이야. 나는 버림받았어.

아무도 나를 돌아보는 사람이 없어. 나는 혼자야. 너무 아득하고 막막해” 라고

생각하는 그곳이야 말로.. 우리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직면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4. 그러므로 기억하라!

이런 이유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반복해서 '기억하라'는 말씀을 듣게 됩니다.


       · 너희는 광야 시절을 기억하라.

       · 너희는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 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기억하라.

       · 너희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너를 위하여 단단한 반석에서 물을 내셨으며           

         만나를 광야에서 먹이셨는지를 기억하라(신 8장)


이스라엘은 항상 기억해야만 합니다.


       · 광야에서의 삶은 죽음의 문턱에서의 삶이었다는 사실을

       · 너희는 약하나 오직 하나님만이 강하시다는 사실을

       ·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눈동자처럼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고 보살피신다는 사실을.


이스라엘이 이것을 기억할 때 비로소 이스라엘에게는 희망이 회복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과거 지나온 세월 속에 하나님께서 하신 것을

앞으로 오는 세월 속에서도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나는 나다”라는 하나님의 이름의 뜻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이름을, 오늘날 우리의 상황에 맞게 바꾸어 말할 수 있을까요?

대답을 원하신다면 요한복음을 읽어보십시오.

“나는 나다” “나는 나거든!”이라는 말이 얼마나 자주 등장하는지 아마 놀라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나는 나다’

 

(예수님의 '나는 나다'라는 말은, 모세가 광야에서 들었던 하나님의 이름 '나는 나다'와 같은 뜻임.

개역에는 '나는 스스로 있는자'라고 번역해서 모호하게 이해할 수 있지만, 둘은 같은 뜻)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은 ‘나다!’이다”라고 하십니다. (개역엔 '나는 스스로 있는 자') 

요한복음서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은 ‘나다!’이다”라고 하십니다.


예수께서 “나는 나다!”라고 하실 때마다,

그분은 불타는 가시덤불의 하나님으로서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들어 보십시오.


        · 나는 생명의 떡이다(요한 6:35)

        ·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8:12)

        · 나는 문이다(요한 10:7)

        · 나는 선한 목자다(요한 10:11)


        ·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요한 11:23)

        ·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4)

        · 나는 참 포도나무다(요한 15;1)


이 말의 뜻은,


        · 내가 있는 곳이 하나님이 있는 곳이다.

        · 내가 있는 곳이 하나님께서 너를 먹이시는 곳이다.

        · 내가 있는 곳에서 하나님은 너를 인도하신다.

        · 내가 있는 곳에서 하나님은 너를 보호하시고 계신다.

        · 내가 있는 곳에서 하나님은 너를 죽음에서 일으키신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자신을 가시덤불의 하나님과 가장 극적으로 동일시 한 곳은, 요6:16-21입니다.


어느 저녁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가로질러

가버나움 지역으로 가려고 하였습니다.

밤은 어두웠고 예수님은 아직 그들에게로 오시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배를 저어서 가는데 바다 물결이 점점 거칠어갔습니다. 풍랑이 불기 시작한 것입니다.

약 5~6킬로 정도 노를 저어 가는데, 바다 위로 예수께서 걸어서 배를 향해 오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공포에 사로잡혀 혼비백산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그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나는) 나다! 두려워 말라.

        · (나는) 나다! 무서워 말라.


그러자 즉시 배가 해안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 바다를 가로질러 길을 내시는 분

        · 큰 파도와 물결을 가로질러 대로를 내시는 분

        · 지나간 그분의 발자국을 볼 수 없는 분


바로 그분이 두려워 떨고 있는 교회를 지켜 보호하고 계십니다.


▲마치는 말 : 오늘도 ‘나는 나다’가 되신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십니다.  

어둠가운데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들, 갑자기 들이닥치는 것들,

이런 것들에 두려워 떨기도 하고 무서워합니다.

그런 와중에 우리는 우리에게 오시고 계신 예수님을 못 봅니다.

어떤 분을 못 보고 있단 말입니까? 어떤 분입니까?


        · 우리를 지키시는 분,

        · 이 광야의 시절에 자기의 교회를 지키시는 분,

               - 그분은 졸지 않을 것입니다.

               - 그의 교회를 지키는 분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의 교회를 모든 악과 해에서 지키실 것입니다.

주님은 교회의 목숨을 지키실 것입니다.

그분의 예측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 복음 관련 

왜냐하면 그분의 이름은 “나는 나다!” “나는 나야!” “나는 나거든!” 이기 때문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