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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그대로 믿었던 아브라함 2536

LNCK 2010. 7. 5. 20:01

◈말씀 그대로 믿었던 아브라함                       롬4:17~22                       10.05.30.설교녹취

                                                                                                                      *원제목: 믿음의 문법

 

◑‘재봉사’의 사명


▲디자이너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재봉사의 역할도 중요하다.

세계적인 패션 명품업계 <샤넬>의 수석 디자이너인 '칼 락펠러' 라는 사람이 있다.

패션 업계에서는 매우 유명한 사람이다.

그런데 패션업계 <샤넬>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상물을 보니까,

 

저는 디자이너가 직접 옷을 만드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옷을 만드는 사람은 재봉사였고,

칼 락펠러 같은 디자이너는.. 옷을 만드는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락펠러가 도화지에 옷에 대한 그림을 쓱쓱 그리고

그 위에 색을 칠하고

여백에다 지시사항을 갈겨쓰면.. 그것으로써 디자인 작업은 다 끝난 것이었다.


그 디자인을 재봉사들에게 전달하면,

재봉사들이 거기에 있는 그림대로 옷을 만들어야 된다.


그런데 때로는, 그림이 애매하거나

여백의 지시사항으로 적힌 글씨를.. 재봉사들이 이해하기 힘든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재봉사들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의논한다.

‘이게 뭐라고 쓴 걸까? 이런 뜻일까, 저런 뜻일까?’


그런데 락펠러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래픽 아티스트(디자이너)일 뿐이다. 내 책임은 여기까지다.’

(내가 옷까지 직접 만들 필요는 없다는 뜻)


   우리가 보면, 디자이너 그거 정말 쉬운 직업인 것 같다.

   옷 그림 몇 장 쓱쓱 그리고 나서, 엄청난 보수를 받으니까..

   그러나 그의 아이디어에 천재성이 있기 때문에,

   칼 락펠러는 그 자리를 계속 유지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샤넬>의 명품 패션이 나오기까지는

디자이너의 천재적인 역할도 있지만, 재봉사들의 역할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재봉사들이 그 디자인을 제대로 해석해서 옷을 만들어주지 않으면,

그 디자인만으로는 절대로 작품으로 탄생될 수 없다.


▲성경의 디자이너, 성경의 재봉사

우리가 성경을 공부할 때도 마찬가지다.

오늘날 우리는, 그 재봉사와 같은 입장에 있다는 것이다.


성경을 기록한 분들은, 즉 사도와 선지자들은,

성령의 영감을 받은 대로 그것을 기록한 것뿐인데, (디자이너에 비유)

이제 그것을 읽고, 해석하고, 적용할 책임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재봉사에 비유)


성경을 쓴 사람들이, 자기가 쓴 것을 좀 더 자세하게 설명 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볼 때도 있지만,

그들의 책임은 기록하는데서 끝났다. (마치 디자이너가 디자인 한 것으로 끝내듯이)


그러다 보니까

우리가 그 재봉사들처럼, 머리를 서로 맞대고,

‘이게 이런 뜻일까, 저런 뜻일까?’를 의논해야 될 때가 있다.


   여러분은 어떨지 모르지만, 저는 그렇게 느낄 때가 많다.

   어떤 때는 ‘왜 이렇게 애매하게 말씀하셨을까?’ 

   어떤 구절은 ‘왜 이게 어려울까?’ 라고 생각할 때가 종종 있다.


<샤넬>에는 훌륭한 디자이너만 있는 게 아니고, 훌륭한 재봉사들이 많이 있어서

그 아이디어를 가져다가 훌륭한 작품으로 완성하는 것처럼,

우리도 성경말씀을 읽고, 이해하고, 해석하고, 적용하는 책임이

우리에게도 있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디자이너의 사명은 끝났으나(성경 정경 완성), 재봉사의 사명(해석)은 여전히 남아있다.

디자이너가 아무리 훌륭해도, 재봉사의 수고가 따라주지 않으면, 작품이 나오지 못하는 것처럼,

성경이 아무리 위대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도, 우리가 그것을 제대로 읽고, 이해하고,

해석하고, 적용하고, 순종하지 않으면... 그 말씀의 능력을 다 경험할 수 없게 된다.

 

우리는 성경말씀을 순종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데,

순종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을 제대로 읽어야 되고, 바르게 이해/해석해야 된다.


그래서 필요하면, 성경 원어도 연구해야 한다.

그래서 신학생 때부터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배운다.

이 성경을 보다 정확하게 그 의미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때로는 성경 원어까지 동원해서.. 정확한 의미를 해석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인간의 언어에도 능통해야 된다.

이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생각이,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즉, 완전하신 하나님의 생각이, 불완전한 인간의 언어로 다 완벽하게 담아지지 않기 때문에,

성경의 해석 작업은 불가피한 면이 있다.


◑내 선입견, 문화적 편견, 관념.. 모든 것을 배제하고 성경을 읽어야


▲성경을 정성들여 읽어야 한다.

사람들은 좀 이상하다. 만일 유언장을 작성하거나 읽는다고 할 때,

그것을 그냥 건성으로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것이 어떻게 작성되었느냐에 따라서.. 큰돈이 왔다/갔다하기 때문이다.


계약서를 작성할 때도 마찬가지다. 

글자 한 자, 표현 하나를 신경 써서 선택한다.

한미 FTA협상을 할 때도, 글자 하나하나에 따라서 국가 이익이 좌우되곤 한다.


그런데 성경말씀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건성으로 읽는 것 같다.

글자 하나 하나에 신경을 쓰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렇게 성경을 건성으로 읽다보면,

우리의 선입견을 가지고 성경을 읽게 되고,

그런 우리의 종교적인 선입견, 우리의 불신, 자격지심, 두려움, 죄의식, 의심,

이런 것을 가지고 성경을 읽다 보니,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는 것 보다는.. 내 생각이 거기에 반영되게 되는데...


▲성경 해석에, 내 생각이 반영되는 것을 피해야 한다.

이것은 너무나 중요한 원리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할 때에도, 그 사람의 말을 듣기 보다는,

내 생각에 따라서, 그의 말을 취사선택해서 듣는 습관이 누구에게나 있다.


그러기 때문에, 나중에 지나고 보면, 그 사람의 말을 왜곡하고,

잘못 이해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쉽게 말하면, 사람은 자기가 듣고 싶은 말만 골라서 듣는 습성이 있다는 것이다.

심한 경우는, 그의 말을 왜곡해서라도.. 내가 미리 내린 결론이나 정답에 맞춰버린다.


‘사람은 남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생각을, 그 사람의 말을 통해서 확인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성경 해석을 하려면.. 차라리 성경을 안 읽는 것이 더 낫다.  주1)

그런 연유로, 한 때 중세 교회가, 신자들이 성경을 읽는 것을 금한 적도 있었다.  

 

▲성경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면, 내 선입견을 배제해야 한다.

예를 들면,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아주 단순한 문장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구절을 어떻게 읽는가 하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어야 된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어라’ (명령법) 이렇게 왜곡해서 이해하고, 가르친다.

 

예수님은 결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어야 된다/되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냥 단순하게 직설법으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우리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어야 된다/ 또는 되어라.’

   라고 본문을 변형시켜 이해하는데, 그 이유는,

   자기의 자격지심 때문에 그렇다.


   ‘설마 내가 세상의 소금일리는 없을 거야, 나는 아직 그렇지 못해, 부족해, 

   아마 미래에 세상의 소금이 되라는 말씀이겠지..’

   이런 불신, 자격지심 때문에, 주님의 말씀을 우리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내 편견이나 관념도 배제해야 한다.

그리고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편견이 있을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여기느냐 하면,

'매사에 이래라 저래라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분'으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부모님 또는 우리의 권위자들이 우리에게 그랬기 때문에..,

 부모님(선생님, 직장 상사 포함)은 늘 우리보고 ‘공부해라, 빨리 일어나라, 뭐 해라’

는 식으로 명령하는 분이었다.


그래서 우리에게 있어서 ‘권위자’는

모두 명령(꾸짖고, 야단침 포함)하는 분으로 생각한다. 그런 편견, 관념이 있다.


그러다보니까,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할 때도, 그런 방식으로 생각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은 다 우리를 야단치고, 꾸짖고, 명령하는 말씀일 것이다’

라고 지레 짐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는 말씀을

명령법으로 바꾸어서 이해하거나... ‘빛이 되어라’

훈계로 이해한다... ‘너희는 장차 빛이 되어야 해!’


▲성경의 진리, 예수님의 진의는 이것이다.

우리가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는 것은.. 우리 노력으로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노력으로 안 된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미 ‘우리가 세상의 소금/빛이라’고 선포하셨다.

이것이 복음의 영광이요, 하나님 자녀의 특권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빛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삶’이 아니라..

‘빛’인 자기 정체성을 인식하고, 세상에 빛을 나타내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고 해석할 때는

   내 편견/하나님에 대한 편견을 다 접고

   이 성경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순수하게 알아가기 시작해야 한다.

   필요하면, 다시 처음 시작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배워야 한다.


운동 중에 유도와 레슬링은 비슷한 점이 많다.

둘 다 상대방을 쓰러트리고, 넘어뜨리는 점에서 비슷하다.

그렇지만 엄연히 서로 다른 스포츠다.

그러므로 예컨대 유도선수가 레슬링으로 전향해서 시작한다고 할 때,

자기가 안다는 것을 버리고, 다시 배워야 한다.

그래야 제대로 그것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아마 우리가 성경해석을, 이렇게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할 필요도 있는 것 같다.

우리가 처음에 잘못 배운 선입견이 많기 때문이다.

 

▲또 예를 들면, ‘(하나님이)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실 때

‘아니에요 그럴 리 없어요, 나는 하나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어요.’

그런 말씀 하지 마시라.

그렇게 나온다면.. 그것은 내 관념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하는 식이 된다.


그럴 때는 내 자격이 어떠하든 간에,

‘아 나 같은 사람을 사랑하시니 감사합니다.’ 이렇게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여야지,

그게 아니고 ‘나는 그럴 자격 없으니까, 나에게 그런 말씀 마세요..’ 이건 바보 같은 사람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너를 깨끗하게 했다’고 말씀하시면,

내 경험이 어떻든지, 내 생각이 어떻든지,

‘아멘 하나님이 나를 깨끗하게 하신 것을 누가 더럽다고 하겠는가! 할렐루야!’

하며 받아들이고 믿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아닙니다. 저는 아직도 추합니다.’ 이렇게 나오면 안 된다.

그건 겸손이 아니고, 불신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하는 것이다.


▲다른 구절들도 마찬가지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5:17


이런 구절도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으면 좋겠네..’가 아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기를 원한다/ 되거라’ 도 아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니라..’ 선포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거저 주신 새신분이다. 놀랍지 않는가?

 

이와 같이 성경에

우리의 의로움, 우리의 구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신분에 대한 모든 말씀은,

희망사항도 아니고, 명령법도 아니고,

전부 직설법으로 선포하는 그런 문구로 되어있다. 예를 들면↓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8:1~2


이것은 문법상 문제만 아니고, 신학적인 문제이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우리가 해야 되는 공로/행위로 말미암지 않는다.


이 말은, 우리의 구원을 이루는 것은, 인간의 행위가 아니고,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라는 말이다. 

 

 

◑말씀을 있는 그대로 믿었던 아브라함


주님이 나에게 하시는 말씀과

내가 아는 나에 대한 참모습 사이에는.. 괴리가 엄연히 있다.

주님은 나를 소금이라고 그러시는데,

나는 아무리 봐도 짠 소금이 아니다. 나는 아무리 봐도 그런 자격이 없다.

이런 괴리 현상이 있다고 했다.


그 괴리 현상을, 아브라함도 우리와 똑같이 겪었다.

하나님은 자기에게 장차 하늘의 별처럼 많은 자식을 주리라고 말씀하셨고,

‘아브라함’이라는 이름 자체가, 많은 백성의 아버지라는 뜻이다.

그만큼 위대한 이름을 주셨다.


그런데 현실적 괴리는 너무나 컸다.

아브라함이 자기 자신을 보면, 자식이 하나도 없다.

나이는 백 살이나 되었고, 아내도 다 늙었고,

자기의 현실을 보면, 도저히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의 자격이 없다.


그런데 하나님이 자기를 아브라함이라고 부르시고,

많은 후사를 주리라고 약속하시니까, 아브라함의 마음속에 고민이 생겼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과 내 현실이 너무 차이가 많다...’

그런데 여기서, 이제 그의 진짜 믿음이 작용하게 되는데..


롬4: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바랄 수 있는 중에는.. 누구든지 믿을 수 있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는 것이.. 진짜 믿음이다.


:19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알고도’ ..  신앙은 현실을 무시하지 않는다.

아브라함은 현실을 잘 알았지만, 믿음으로 살았다.


: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2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진다.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이시니라” 롬4:17b


하나님은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면.. 있게 된다.

없던 게 있게 된다.


‘빛이 있으라’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니.. 정말 있었다.) 롬4:17b

‘나사로야 나오너라’ (죽은 자를 산 자처럼 부르시니.. 정말 나왔다.) 롬4:17b


우리가 불의하고, 추하고 (우리 스스로 다 안다.)

그런 우리를 주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그러시면

그러면 ‘없던 것이 있게’ 된다. ‘죽은 자가 산 자처럼’ 일어나게 된다. 그래서 빛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구원받는 길이 바로 이것이다.

   주님이 부르시면

   ‘너는 내 아들이라, 너는 이제 하나님의 백성이다. 긍휼을 받은 자니라.’

   이렇게 말씀하시면, 그 말씀대로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런 식으로 역사하시고,

   아브라함의 믿음이, 또한 마찬가지로 우리의 믿음이.. 이런 식으로 역사한다.

   이것을 믿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다.

 

아래 찬송은, 어린이들이 잘 부르지만, 참 신학적인 찬송이라서 좋아하며,

오늘 설교에도 꼭 맞는 찬송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니 물이 변하여 포도주 됐네

예수님 예수님 나에게도 말씀하셔서, 새롭게 새롭게 변화시켜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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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쉽게 말하면, 부자 되고 싶은 마음으로 보면, 성경이 온통 그렇게 보일 수 있다.

   심지어는 살인하고 싶은 마음으로 봐도, 성경에 그것을 정당화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런 예를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일례로, 비느하스가 범죄한 어느 족장을 찔러 죽인 구절을  민25:1~11

   얼마든지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해서 ‘정당한 살인의 이유’로 이끌어 낼 수 있다.

   그런 예가 얼마든지 더 있다.


   역사적으로 ‘정당한 전쟁just war’ 이론을 성경에서 끌어내기도 했고, (논란 있음)

   백인들은 노예제도를 찬성하는 논리를, 성경에서 끌어내었고,

   또 다른 사람들은, 노예제도를 반대하는 논리를, 똑같은 성경에서 끌어냈다.

  

   어쨌든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식으로

   자기 입장에 맞는 대로, 자기가 내린 결론에 성경을 끌어다 맞추는 그런 일은

   오늘날 내 현실에서도 너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므로.. 매우 조심해야 한다.                                          ▣ 말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