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적 질서가 서 있는 신앙생활 살전5:12~22 04.11.07.설교스크랩
※‘도입 예화’ 와 ‘본문 구조 구분’이 특히 마음에 들어서, 스크랩 했습니다.
▲도입 예화 : 참 기쁨의 근원은.. 자신을 온전히 정복하는데서 옵니다.
『구차한 평안을 떨치고 구도의 길에 나서다』라는 성 프란시스의 전기에 보면,
레오라는 형제가 진눈깨비를 맞으며 힘겹게 걸어가는 모습을 본
프란시스가 그에게 말합니다.
“레오 형제, 우리가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귀머거리를 듣게 한다고 해도,
성경을 통째로 외우고, 신학자들의 학설을 모두 통달했다고 해도,
그 안에 진정한 기쁨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별들의 길을 모두 알고 온갖 생물의 특성을 전부 안다고 해도
그것은 절대로 온전한 기쁨의 근원이 아닙니다.”
길을 걸으면서 계속되는 프란시스의 말에
레오 형제가 걸음을 멈추고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온전한 기쁨의 근원은 무엇입니까?”
이때 성 프란시스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추위와 배고픔에 떨며 간신히 목적지에 도착하여 문을 두드렸을 때,
집주인이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라고 말해도,
우리를 도둑이나 부랑아 취급하며 모욕할 때도,
우리가 이런 일들까지 인내와 친절과 사랑으로 모두 참는다면
그제야 우리는 온전한 기쁨 언저리에 도달한 셈입니다.
이렇듯 자신을 정복하는 데 온전한 기쁨이 있습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마5:11~12
즉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어떤 환경이나 여건에서도 빼앗기거나 흔들릴 수 없으며
그 기쁨은 마음속에서 솟아난다는 것입니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사람에게서 오는 것이라고, 프란시스는 말합니다.
▲항상 기뻐하거나, 범사에 감사할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교인들이 가장 잘 암송하는 성경 구절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구절입니다.
그리고 성도의 가정에, 가장 눈에 많이 뛰는 성구가 바로 이 말씀입니다.
그러니 성도들이 가장 잘 알고 있는 말씀이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사도바울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이 편지를 쓸 때에는
그들의 환경이나 여건들이, 기뻐하거나 감사할 조건이 결코 못되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당한 환란을 나타내 보여주는 성경구절 보기 주1)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권면은
우리의 생활 여건이 어떻든 간에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야할 신앙적 덕목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1. 교회의 외적 질서 살전5:12~15
아래에 ◑2. 성도의 내면적 질서가 나옵니다.
그러나 본문에 보면, ‘성도의 내면적 질서’에 앞서
‘교회의 외적 질서’를 사도바울은 먼저 가르치고 있습니다.
▲12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교회 내에서 지도자가 맡고 있는 일을 세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수고하고’, ‘다스리고’, ‘권하는 일’입니다.
당시에는 이 일을 장로들이 맡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장로란 오늘날로 말하면 목회자를 말합니다.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을 ‘너희가 알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목회자의 가치를 바로 알고 그를 존경하라는 말입니다.
▲13절, 저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지도자를 어떻게 존경해야하는지를 말합니다.
①‘가장 귀히 여기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직역하면 ‘지나치도록 풍부하게보다 더 넘어서’입니다.
성도들에게 이와 같이 목회자를 존경할 것을 말합니다.
②‘사랑 안에서’ 귀히 여기라고 말합니다.
성도들이 목회자를 이렇게 대해야 하는 이유는,
목회자가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목회자가 하는 일 때문입니다.
③‘저의 역사로 말미암아’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말은 목회자가 하는 일 때문에, 목회자를 존경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13절b, 너희끼리 화목 하라
교회는 어떤 이유에서든지 분쟁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지도자를 존중하는 길은, 성도들끼리 화목하는 것입니다.
▲14절,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규묘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아라.
14절은 교우들 상호간의 관계에
믿음이 연약한 자에 대해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권계하라’고 말합니다.
권하고 깨닫게 해 주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누구를 권계해야 할까요?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규모 없는 자들’이란 신앙에 철이 덜 든 사람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마음이 약한 자들은 ‘안위하라’고 말합니다.
‘안위’는 위로하라는 말입니다.
즉 신앙이 쉽게 낙심되고 어려움을 잘 극복하지 못하는 자들을
위로하라고 말합니다.
이어서 ‘힘이 없는 자들’, 즉 믿음이 약한 사람들을 붙들어주라고 말합니다.
결국은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오래 참으라’고 말합니다.
그 누구도 실족시켜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15절,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오직 피차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좇으라.
성도 간에 서로가 지켜야할 질서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교회의 질서를 먼저 생각하는 교우들 되시기 바랍니다.
◑2. 성도의 내면적 질서가 더 중요합니다. 살전5:16~22
그런데 이런 교회생활에서, 외적인 질서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나의 신앙생활을 좌우하는 내면적 질서입니다.
고든 맥도날드 목사의『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성장』책에 보면
①<성공한 못난이> 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세상에서 아무리 성공했다 할지라도
내면세계의 질서가 서 있지 못한 사람은 결국은 성공한 못난이가 된다는 것입니다.
②내면세계질서가 서 있지 못한 사람을 <함몰 웅덩이>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아스팔트나 시멘트로 포장을 했는데,
비가 오면 푹 꺼져버린 상태를 말합니다.
③그리고 이 책에서
우리 주변에는 두 가지 부류의 사람이 있는데
‘뭔가에 쫓겨 다니는 사람’과 ‘부름 받은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쫓겨 다니는 사람’은 세상의 욕망을 붙들기 위하여 열심히 좇아가지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영적인 공간과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름 받은 사람’은
내면세계 질서가 바로 서 있어서
확고한 목적의식을 갖고 살면서, 서두르지 않습니다.
그 특징은, 자기 마음에 평안과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내면세계의 질서가 서 있는 성도의 신앙생활의 특징이 무엇인가 하면
아래 유명한 3가지 말씀입니다.
▲16절, 항상 기뻐하라
그러면 어떻게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주안에 있을 때’
‘성령 안에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빌4:4, 주 안에서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살전1:6,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도저히 기뻐할 수 없는 상황임에도
주님은, 우리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0년간 절망적인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 편지>를 50만 통이나 보내어
절망의 수렁에 빠진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글을 통해 희망의 빛을 보고
다시 일어나는 기적을 나타낸 분이 있습니다.
오규근 씨가 그 희망 편지의 주인공입니다.
그 역시 한때는 절망으로 세상을 포기하려 했지만,
예수를 믿고 오 아볼로라는 이름으로 바꾸면서
삶의 큰 전환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온몸의 뼈가 부러지는 희귀병으로,
혼자 일어설 수조차 없는 중증 장애인입니다.
목발은 고사하고 휠체어를 타고 다니기도 힘듭니다.
그래서 비록 그의 몸은 1m도 안 되지만, (휠체어 앉은 키)
그의 영혼의 키는 누구보다도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 아볼로 씨가, 자신의 망가지고 절망적인 인생을 바로 세우고,
타인의 절망까지 희망으로 바꾸었던 그 원동력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그의 고백에서 행복한 삶의 비결을 찾을 수 있습니다.
“제 몸은 이렇지만, 하나님 빽으로
정상인들을 도울 수 있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일생을 불평과 절망 속에 살아도 당연할 수 있는 삶이지만,
오 아볼로씨는 불평 대신 감사를 선택하였고,
그의 삶의 백그라운드를 하나님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는 오히려 행복하게, 항상 기뻐하며 살 수 있었습니다.
‘주 안에 있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바로 하나님을 빽(백그라운드)으로 삼았다는 말 아닙니까?
하나님을 빽(백그라운드)으로 삼은 자는, 항상 기쁨이 있는 줄 믿습니다.
▲17절, 쉬지 말고 기도하라.
왜?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할까요?
어느 샐러리맨의 간증입니다.
몇 년 전 제가 모 방송사 면접을 본 기억이 납니다.
심사위원 중 한분이 저에게
‘대학생활 중 가장 보람차고 기뻤던 일 한 가지를 말해보라’고 했습니다.
전 망설임 없이 ‘예수님을 만난 일’이라 대답했고
순간 분위기가 썰렁해졌습니다.
사람들은 ‘저 사람 바보가 아닌가?’ 쳐다봤지만
제 마음은 넘치는 기쁨과 감사로 뜨거웠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난) 지금 만약 누군가가
‘이제껏 살아오면서 가장 기뻤던 일은 무엇인가요?’ 라고 물어본다면,
저는 약간 주저하면서 ‘글쎄요 예수님을 만난일 같은데요?’ 라고 생각하니
참으로 가슴이 막막합니다.
이를 곰곰이 묵상해 보니
제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성실하게 기도하지 않기 때문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은
직장도 그만두고 산에 들어가 하루 종일 기도하는 그런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설교를 들으면서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딴 생각이 자꾸 올라와서 설교에 집중하지 못하게 만드는데
설교 듣는데 집중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버스를 타고 갈 때, 혹은 차를 운전 할 때 기도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만나서 대화할 때에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설거지를 하면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눈을 감지 않아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은 끊임없이 하나님과 대화하는 자세를 말합니다.
이것이 내면세계의 질서가 서 있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18절, 범사에 감사하라.
여기서 사도 바울이 ‘그냥 감사하라’고 하지 않고,
‘어떤 처지에서든지(범사에) 감사하라’고 한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웃긴다. 내 돈 떼어먹고 달아난 그 사기꾼보고, 어떻게 감사할 수 있어?’
성경은 그 사기꾼에게 감사하라고 이르지 않았습니다.
그 사건 보고 감사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분명 그 사건 너머의 하나님을 향해 감사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참새 한 마리 떨어지는 것도, 내 머리카락 까지고 세고 계시는 하나님이,
그 모든 사건의 배후에 섭리/역사/주관하고 계심을 보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 전능하신 지혜로, 결국은 합력해서 선을 이루십니다. 그냥 멘트가 아니고, 정말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은, 고난 중에도 감사하라는 말입니다.
인생살이처럼 복잡하고 미묘한 드라마는 없습니다.
목을 길게 빼고 지름길을 찾아간다지만
장애물을 피할 수도, 사고를 막을 수도 없습니다.
이때, 신앙인이라 자처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문제 앞에선
더욱 히스테리 해지는 것을 봅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겪는 갖가지 고난은
오히려 우리가 삶을 유지하는데 꼭 필요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사실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는 아픔은 그 부위에 이상이 생겼으니
빨리 치료하라는 일종의 신호입니다.
예를 들어,
피부에 와 닿는 날카로운 물건에 대해서 아무런 아픔을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의 몸은 온통 상처투성이가 될 것입니다.
통증이 없으니 주의도 하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치료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가볍고 흔한 고통도
사실은 생명을 유지하도록 보내 주신 하느님의 은혜입니다.
이것은 정신적인 고뇌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그래서 톨스토이는
“고통의 감각이 우리 육체를 유지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조건인 것 같이
고뇌 또한 우리의 인생이 끊임없이 향상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조건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상황이나 처지가 문제가 아니라,
그 상황이나 처지를, 내가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때로는 고통은 오히려 우리가 깨어나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대문호 셰익스피어의 시의 한 구절입니다.
“그대를 볼 때까지는 낮도 밤이요,
꿈에서라도 그대가 보이면 캄캄한 밤도 밝은 낮이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감사를 찾고 발견할 때까지는
아무리 부귀영화를 누리는 인생도 실상은 캄캄한 밤이요,
현실적으로 아무리 캄캄한 밤과 같은 인생이라도
감사를 발견하는 순간 해와 같이 밝은 인생,
풍성한 열매를 맺는 인생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저는 살전5:16~18절을 ‘신앙생활의 왈츠’라고 제목을 붙였습니다.
왈츠가 뭡니까? 4분의 3박자 춤이 아닙니까?
성도는 ‘성령의 춤을 추는 사람들’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내면세계의 질서가 잡혀 있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신앙생활에 왈츠가 있는 삶이라는 것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기독교 교육과 선교에 크게 이바지 한 김활란 박사의 묘소에 가 보면,
평토장한 무덤에 성경책 한 권을 돌로 만들어 놓았을 뿐,
그분의 약력이나 글귀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직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에 있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는 말씀만 볼 수 있습니다.
김 박사님은 바로 신앙생활의 왈츠가 있는 삶을 살다간 사람임을 말합니다.
그럼 신앙생활에 왈츠가 있는 삶을 유지하기 위하여
우리가 힘써야 할 일이 있습니다. ↓
▲19절, 성령을 소멸치 말라고 합니다.
왜 성령을 소멸치 말라고 합니까?
기쁨과 기도와 감사의 근원은 성령님이기 때문입니다.
본래 ‘소멸하다’는 말은 ‘불을 끄다’라는 뜻입니다.
성경의 갈라디아교회는 성령의 불을 꺼버림으로써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게 된 예입니다
불이 꺼지면 춤이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기쁨도 기도도 감사도 그 근원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20절, 예언을 멸시치 말아야 합니다.
예언이란 바로 ‘하나님 말씀’을 말합니다.
왜 예언을 멸시치 말라고 하느냐 하면
역시 기쁨과 기도와 감사의 근원은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그 마음 속에 살아 있는 이상은
성도는 항상 기쁨과 감사가 넘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결론적으로
내가 감사의 삶을 살아가는데 제일 걸림돌이 무엇입니까?
▲21-22절,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좋은 것은 취하고 악한 것은 버리는 것이
기쁨과 감사의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비결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감사의 삶의 걸림돌은
①‘좋은 것을 헤아리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특히 인간관계에서 좋은 것을 헤아릴 줄 아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②‘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는 말과 같이
죄는 우리의 마음에 기쁨과 감사의 마음을 앗아가 버립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을 근심되게 하시기 때문에
성령의 춤이 우리의 삶에서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 세상 살면서 죄와 멀리한다면
주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는
항상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살아갈 줄 믿습니다. ▣영적성장
..........................................
주1) *데살로니가 교회가 당한 환란을 나타내 보여주는 구절
①또 너희는 많은 환란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로고스)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살전1:6
②형제들아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 되었으니, 저희가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너희도 너희 나라 사람들에게 동일한 것을 받았느니라. 살전2:14
③유대인은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우리를 쫓아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어 우리가 이방인에게 말하여 구원 얻게 함을 저희가 금하여
자기 죄를 항상 채우매 노하심이 끝까지 저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살전2:15-16
④… 우리로 이것을 당하게 세우신 줄을 너희가 친히 알리라. 살전3:3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장차 받을 환난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더니
과연 그렇게 된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살전3:4
⑤…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 살후1:5
⑥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괴악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케 하여 야손의 집에 달려들어 저희를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발견치 못하매 야손과 및 형제를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질러 가로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야손이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 행17:5-7
▲중략된 예화
매일 저녁, 12시 넘어서 들어오는 남편이 있었습니다.
그것도 술을 거나하게 먹고 들어오는데,
그 상태로 어떻게 집은 찾았는지
다행스럽게도 집 문 앞에까지 와서 쓰러져 버립니다.
더구나 토요일이 되면 더 늦게 들어와서
다음 날 낮 2-3시까지 잠에 취해 떨어져 버립니다.
그런 남편을 보면서 한심하기도 하고 너무 너무 미워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어느 날은 남편을 안방까지 들여다 놓고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는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아내는 그동안 참아왔던 분노를 하나님께 터뜨리면서
남편을 원망하는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이렇게 지독한 남편을 나와 결혼하게 해 주셨습니까?
이건 너무하지 않습니까?
내가 그렇게 기도해도 하나님은 왜 우리 남편을 변화시켜주지 않고
이렇게 나를 고생시키는 겁니까? 더 이상은 이렇게 못살겠습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아마 그런 남편에 대해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남편만 보면 울화가 치밀고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어찌 나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을 향해 분노를 터트리고 있을 때
갑자기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시는 말이 있었습니다.
‘김 집사야, 너의 남편이 멀리 큰길가에 쓰러져서 잠들지 않고
그래도 집까지 찾아와서 집 앞에 쓰러져 있는 게 고맙지 아니하냐?
거기에다가 토요일 날 늦게 와서, 주일날 아침에 자면서 집을 지켜주니
교회 오기 편해서 좋지 않냐?
다른 남편들 같이 교회 가는 것 방해하지 않는 것만 해도 감사하지 않냐?’
김 집사는 기도를 드리다가, 성령께서 ‘감사하라’고 해서
그날도 토요일 밤 늦게 만취되어 돌아온 남편의 가슴 위에
어쩔 수 없이 손을 앉고 (위의 생각 대로) 감사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감사기도를 하면서도 속에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어
기도하다가 웃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웃는 아내의 모습을.. 남편이 실눈을 뜨고 보더니,
“당신 갑자기 왜 그래? 이 여자가 미친 거야? 왜 갑자기 웃어?” 라고 말하더랍니다.
하기야 이제까지 술 먹고 올 때마다 분노를 터뜨리던 아내가
기도하다가 갑자기 웃었으니.. 남편이 오히려 놀랄만 하지 않겠습니까?
아내는 그제야 자초지종을 남편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이 남편이 감동을 받았는지
주일 날 아침, 일찍 일어나더니, 아내를 따라 나서더라는 것이다.
“당신이 믿는 하나님, 나도 한 번 믿어 보아야 하겠다”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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