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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04~2005

너희는 우리의 면류관 2596

LNCK 2010. 8. 12. 11:49

◈너희는 우리의 면류관이 된 까닭                 살전2:1~20                       -출처보기-


※데살로니가전서의 개요/흐름을 볼 수 있는, 아주 좋은 (해외 선교지 신학교) 자료입니다.


 

바울을 통해 데살로니가에서 나타난 복음의 역사는

단순히 말의 향연으로 촉발된 몇 사람의 감화가 아니었다.

복음은 분명히 '유앙겔리온', 즉 '좋은 소식'으로서 말이다.


그러나 복음은 말로서 멈추지 않는다. 성령이 같이 하실 때 복음은 능력이 된다.

성령이 듣는 자들을 감동하지 않으면, 복음은 이해도 되지 않고 능력 발휘도 못한다.


데살로니가에서 분명히 복음은 성령의 큰 확신으로 쏟아 부어졌고(1:5),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결과는 복음이 그대로 하나님 말씀으로 듣는 사람들의 영혼 속에 역사하여

그 증거들이 분명하게 나타났다(2:13-16).


그런데 이렇게 되기까지는 그 복음을 전달하는 바울 쪽의

건강하고 아름다운 자세가 기여한 바 없지 않다.



◑1. 너희는 우리의 면류관            2:19-20


먼저 2:19-20의 고백을 생각해 본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인간은 역사적으로든 개인적으로든 종말을 맞게 되어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이다(히 9:27).


현재 육신의 장막을 입은 이 상태에서

지금의 은행 구좌를 갖고, 저녁이면 돌아갈 아파트를 거처 삼고,

직장과 집을 오가는 안락한 승용차를 즐기는 현존재가 영속되지 않는다.


우리 구주 예수께서 다시 오실 그 때, 또는 내가 주님 앞에 나아갔을 때

나의 소망, 나의 기쁨, 내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인가?


미처 다 쓰지 못하고 은행에 잔뜩 쌓아두고 온 정기예금이 아니다.

이력서 몇 장을 가득 채울 수 있는 그 많던 직함과 이력과 업적이

하나님 앞에서 내 면류관이 될 수 있을까?


바울도 그런 이력에 대해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만큼 만만치 않았다.

그런데 본문의 편지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바로 자신의 소망이며 기쁨이며 자랑스러운 면류관이라고 선언한다.

“여러분은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입니다!”(2:20).


누구를 두고 한 말인가?

자신을 통해 ‘그의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된 사람들’을 일컬어 하는 말이다(2:12).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는 자신을 통해 만들어진 사람(데살로니가 교인)을 내어놓고 있다.

사람 만들기에 그의 종말 포상(褒賞)의 모든 것을 걸고 있던 바울이었다.


이들은 이제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는 사람들이다. 예전에는 그렇지 못했다.

분명한 변화가 있었다. 이전에는 그렇지 못했는데 지금은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게 된 것’이다(1:9).


과거에는 다른 신을 섬기며 죄악된 길에서 방황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바울의 전도를 통해 이렇게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는 사람들'이 되었고,

그래서 그들이 바울에게는 기쁨과 영광이다.


바울은, 예수의 지상명령(마28:18-20)을 심각하게 삶의 소명으로 생각하고 살았다.

그래서 그들을 제자로 삼아 예수가 분부한 것을 가르쳐 지키게 만든 사람이었다.


그렇게 탁월하게 사명을 감당했던 것은, 무슨 비결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



◑2. 여건이 어렵다고 포기하지 않았다             살전2:1~2


'너희에게 간 것이 헛되지 않았다’는 뜻을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2:1).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 가운데 들어감이 헛되지 않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아나니


아마도 데살로니가에 들어가기 전에 마음속에 주저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무슨 좋은 일이든지, 실행하기 전에 한 두 번 정도는 주저하게 만드는 요인들이 있다.


내적으로 자신감이 없어서, 또는 부담을 짊어지기 싫어서 그런 경우도 있다.

이곳 저곳에서 반대가 일어나거나, 장애물이 가로놓인 것을 발견하면

'이 정도에서 그만두자' 하는 마음이 생기기 마련이다.

데살로니가에 들어가기 전에 바울에게도 그러한 저지의 내외적 움직임이 있었다.


▲1. 빌립보에서의 후유증을 딛고

마게도니아 지방의 첫 도시 빌립보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말하고 있다(2:2).

너희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말하였노라


그가 겪었던 외적 고난과 내적인 능욕감의 상황을 이해하자면

행16:11-40에서 빌립보 사역의 이야기를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들이 바울의 옷을 찢어서 벗긴 뒤 매로 맨살을 많이 때렸다 했다(행16:22).

이런 매를 맞아본 적이 있는가?

저/설교자는 20대 초에 어쩌다가 서너 명에게 약 20분간 몰매를 맞았던 적이 있었다.

어금니 하나가 없어지고 며칠간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끔 기운이 소진하고

한 동안 생활의 의욕을 잃었었다.


몸이 겪었던 고통의 기억이 잘 떠나지 않고

피해를 가한 사람들에 대한 증오심도 만만치 않은 병이었다.


옷을 벗긴 채 맨살로 맞았다면 그 후 바울은 거의 초죽음이 된 느낌이었을 것이다.

이 정도면 웬만한 보통 사람들은 절망하여 한숨만 쉬고 있었을 것이다.

복음 전하는 내가 보상을 받지는 못할망정 이게 웬 봉변인가.

나 같았으면 아마 매 맞은 상처가 아물고 정서적으로 안정이 될 때까지

몇 개월은 그냥 휴가 기간에 들어갔으면 했을 것이다.


▲2. 안간 힘을 다해서

그런데 바울은 빌립보에서 밀려나와, (즉시로) 데살로니가로 옮겨가서도

여전히 유대인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했던 것이다(행17:1-3).

사도행전에는 그의 마음 상태에 대한 설명이 없다.


그러나 앞서 기술한 정황을 참작해 보건대

마음의 주저함이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

너희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말하였노라  살전2:2


데살로니가 사역을 뒤로 미루거나 건너뛰고 싶었던 마음이 없지 않았던 것이다.

빌립보에서의 고통이 아직 육체적으로도 남아있는 상태였다.

안간힘을 썼음에 틀림없다.

안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과 위로가 없었으면 되지 않을 일이었다.


그렇게 마음을 다져서 들어가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2:2)’ 복음을 전하였더니

역시 그것이 ‘헛되지 않았다’(2:1)는 말이었다.


여건과 상관없이 해야 할 일이면 하는 것이 옳다.

특히 하나님께서 하라 하시면 하는 것이 마땅하다.

순종할 때 우리의 예상과 기대를 넘어서는 효력이 발생한다.


앞으로 향한 발길을 잡아당기는 어려움이 뒤따랐지만.. 그대로 계속했다.

그리고 현재의 결과를 보니 역시 중단하지 않고 전진하기를 잘한 것이었다.


이 원리를 깨달은 바울이 나중에 디모데에게 이렇게 권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딤후4:2


그렇다. 복음을 전해야 할 때는 그것이 기회처럼 보이던/그렇지 않아 보이던 간에

해야만 되는 것이 사역자의 마땅히 따를 바이다.

안 될 것 같아도 말씀에 의지해서 하면, 내 상식으로 예측하지 못했던 고기가 잡힌다(눅5:5-6).



◑3. 순전한 소명감으로 했으며, 흑심이 없이 진실했다          2:3~5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넓은 의미의 권면(勸勉, 파라클레시스)이다.

인간적인 커뮤니케이션으로 보자면 상대방이 이쪽의 말을 받아들이도록 권하는 설득이다.


사람들이 상대방을 설득할 때는 나름대로의 목적이 있다.

사업상의 설득에서는 어떻게 해서든 조금이라도 이익을 남기려고 애를 쓰기 마련이다.

피차간에 이기성을 당연시하는 설득이다.

이 경우 적당한 수준에서 서로 주고받는 호혜적인 결정을 내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반면에 사기꾼의 설득이 있다.

이것은 상대방을 속여서 심각한 피해를 주더라도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몽땅 갈취해 내려는 설득이다.


▲1. 순수함이 설득의 능력이다.  2:3

당시에도 종교적 기적을 약속하거나, 또는 위대한 철학 스승을 자처하며

돌아다니면서 그럴듯하게 사람들을 속여 돈을 갈취하거나

부도덕한 쾌락을 추구하는 사기꾼 ‘방랑철학자’들이 적지 않았다.


선교사 바울도 그런 부류의 사람으로 오인될 수 있는 소지가 많았다.

바울은 자신이 그런 사기파 종교인/철학자들과 어떻게 달랐나를 밝히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 바울은 그런 사기꾼들이 보이는 특성 세 가지를 부정한다(2:3).

우리의 권면은 간사에서나 부정에서 난 것도 아니요 궤계에 있는 것도 아니라


①그의 복음의 권면은 간사(奸詐, 플라네 = 잘못, 속임, 기만)에서 난 것이 아니다.

자신의 말은 왜곡이 아니고 진실이었다는 주장이다.


②내용 뿐 아니라 그것을 전달하는 동기 또한 불순하지 않았다.

부정(不淨, 아카싸르시아 = 부도덕, 불순함)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전달자가 복음의 내용과 다른 마음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말이다.


전하는 내용이 곧 바울의 마음의 확신이었고

그에 정서적 동감이 무게로 실려있었다는 뜻이다.


③전달 방식에 있어서도 꾸밈이 없다고 했다.

그의 복음의 권면이 궤계(詭計, 돌로스/속임수, 사기술)를 사용하지 않았던 것으로 단언한다.

속임수를 쓰지 않았다.

내용 전달의 효과를 위해 불필요한 조작을 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모든 과정에 눈가림이 없고 순전하고 투명했다는 진솔함의 표방이다.

이 세 가지를 한 마디로 하자면, 그의 복음의 권면이 '순수했다'는 것이다.


우리의 복음 전파는 '순수'해야 된다. 순수하면 역사한다.

불순물이 끼어들면 망가지기 시작하는 것이 복음 사역이다.

언제부터인가 강사비가 자꾸 계산되기 시작하면 계기 점검이 필요하다.


영혼에 대한 애정보다는,

그 영혼을 차지하려는 내 면모와 인기에 신경이 더 많이 가기 시작했으면

내 동기의 찌꺼기를 걸러내는 양심의 필터를 교체해야 될 것이다.


순수해야 된다. 조금 어눌하거나 투박해도 순수하면 결국 그것이 최고의 효력이다.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시51:6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시51:10


▲2. 소명에 몰두하기 2:4


오직 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 전할 부탁을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2:4


바울의 순수함은 한 가지 사실로 모아진다.

그가 하는 권면의 내용과 동기와 방법은 모두 상천하지(上天下地)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다.

하나님께서 시켜서 하는 일이고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니니까 순수하다.


사람에게 잘 보이려는 것이 아니라 했다(4절).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했다. ↑


인간에게 잘 보이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한다.

자기 사람 만들고 그 숫자를 늘여 대중 지배의 즐거움을 누리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하나님께서 자기를 일꾼으로 인정하여 복음 전하는 일을 맡겼기 때문에

그것을 수행하려는 일심으로 움직였다는 고백이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

우리를 만드시고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에게 은혜 주시는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기 위해

그분의 소명에 충성을 다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3. 그래서 '아첨의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2:5

‘아첨의 말’이란, 사람들 귀에만 듣기 좋은 수사(修辭)들이다.

말을 듣는 상대방에게 듣기 좋은 말을 해 주는 것은 장려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임기응변과 수단에 지나지 않아 돌아서자마자 대번에 딴 말을 하는,

그래서 진실성이 없는 말은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친절하고 따뜻하며 상대방의 처지에 민감한 목자의 심성을 가져야 하지만

그저 마음에도 없는 말을 버터 바르듯이 번지르르하게 하면

듣는 사람도 웬만한 사오정이 아닌 한 알 것은 안다.


이렇게 입바른 아첨의 말을 하는 경우에는

대개 다른 것을 목적하는 탐심(플레오넥시아)이 그 밑에 도사리고 있다(2:5).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의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거하시느니라.


개역성경의 '탐심의 탈'은 원문에서 '탐심의 가장(假裝)'이란 뜻이다.

속에는 탐심을 숨기고 있으면서 겉으로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우고 있는 상태다.


이미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바울은 그러한 이중적 자세를 취하지 않았다 했다.

이익을 취하거나 욕망을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전한 내용이나 그것을 전하는 마음의 동기가, 일관성이 있었다는 자신감의 회상이다.


종종 우리는, 전하는 텍스트를 좇아가지 못하는,

우리 마음의 동기의 미온(微溫)으로 인해 메시지의 파워를 손상한다.

바울은 이 점에 있어 문제가 없었던 것처럼 들린다.



◑4. 자기 영광을 구하지 않고 겸손하게 섬기는 사랑을 실천했다  2:6-9, 11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서 바울은 사도로 존중받을 자격이 있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보낸 사자이기 때문이다.

천지를 붙들고 계시는 주권자 하나님의 권위가, 바울에게 부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믿음을 갖게 되었으니

바울이 하나님의 사도로 존중을 받아도 크게 잘못된 것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않으려는 자세를 가졌다.


대신에, 섬기는 자세가 그에게 있었다.

예수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에서 가져야 할 자세에 대해 잘 알려주셨다.


지도자가 존중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마게도니아의 데살로니가도 그레코-로마 세계가 기초한 가부장적 위계질서 사회였다.


바울은 당연히 그들 위에 적당한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당시의 사회 질서를 뒤집어엎는, 예수의 리더십 모델을 따랐음에 틀림없다.


아마도 복음서의 전승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가 다른 편지에서도 자신의 사역의 원리와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를

철저하게 십자가의 대속적 희생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아(고후4:12, 빌2:5-11, 롬15;1-3)

초대교회의 섬김의 예수 전승(막10:42-45↓)을 몰랐다 보기 힘들다.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막10:42-45


이와 관련해 바울의 자세 세 가지가 특별나게 돋보인다.


▲1. 어머니 마음    2:7


오직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2:7


순수한 유모의 자세를 가졌다.  2)

바울은 초신자인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아직 젖을 먹는 어린아이처럼 사랑했다.


그렇다면 어머니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라.

아직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자식이 조금 이기적이고 철없이 군다 해서

'네가 이럴 수 있냐'고 계산기를 들이대며 따지는 어머니가 있다면

오히려 우스꽝스럽다.


대개는 아이가 아직 철이 없어서 그러니까 유순하게 잘 타이르면서,

또 답답하지만 요구하는 대로 들어주기도 하면서, 철이 들 때를 기다리기 마련이다.


그저 잘 자라도록 젖을 주고 음식을 먹일 것이다.

목자들의 발상 전환이 필요한 부분이다.

그저 내가 저들의 부모라고 생각하면

갈등의 많은 부분이 내 속에서 순조롭게 처리된다. 유모가 되자.


▲2. 애인의 열정    2:8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향하여 사랑하는 애인의 마음을 가졌다.

사기꾼이나 장사꾼은 무엇인가를 반대급부로 얻어내는 것이 관계의 주목적이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는 일은 기본적으로 주는 일이다.

보상은 하늘에서 받아야 할 것이다.


그것까지는 대단하게 범상하지 않을 것이 없다. 비교적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복음만이 아니라, 자기 생명까지 기꺼이 내어주고 싶었다는 말에 가서는

숙연하거나 또는 의아하지 않을 수가 없다.


개역성경의 표현을 그대로 옮겨보자.

우리 목숨까지 너희에게 주기를 즐겨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니라. 2:8b

여러 주석들이 아가페 사랑의 전형이라고 극찬을 한다.


이런 표현은 어쩌면 사랑하는 이성에게나 쓸 수 있는 애정의 언어이다.

너무 좋아서 잠시도 생각하기를 쉴 수 없는 애인에게나 할 수 있는 말이다.

'사랑하는 자'를 말뜻 그대로 읽는다면 애인(愛人)이다.

하기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바울에게는 애인이었다. 애인처럼 사랑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예수의 애정이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하나님의 애정을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5:8


상대방이 도덕적으로 볼 때 별 가치가 없는 죄인이라 하더라도

사랑하면 그를 위해 죽을 수도 있다. 요한복음의 예수는 이렇게 설명한 바 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요15:13-14


최고의 우정은 죽음도 불사한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사람들을 향하여 이런 예수의 우정을 모방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려는 사람에게 이런 예수의 우정을 가지면

그 사람이 어떻게 다른 곳으로 도망가겠는가?

아마 무서워서라도 항복하고 우리 품으로, 그리고 하나님 품으로 돌아올 것이다.


▲3. 조금도 누를 끼치지 않으려고   2:9

바울 자신이 '사랑의 수고'를 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칭찬한 내용 중의 하나가 '사랑의 수고'였다. 1:3


사랑은 상대방을 위한 노고(勞苦)로 검증된다.

아니면 말뿐이고 허울 좋은 가식일 수 있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을 아끼고 사랑했기 때문에

누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과 낮으로 일하면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했다 한다(2:9).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과 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였노라


후에 기록되는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자신이 자비량 선교를 하는 이유를

상 받기 위한 추가적 희생의 용어로 설명했다(고전9:15-18).

하지만 여기서는 그의 자비량 선교 관행을 데살로니가 교인들에 대한

사랑의 차원으로 연계한다.


바울이 저들을 정말로 극진하게 사랑했던 모양이다.

도대체 무엇인가 조금이라도 받으려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약간의 누라도 끼치지 않으려 했다. 일체의 짐이 되지 않으려 했다는 말이다.

복음 사역의 대가를 바라지 않았다.


그가 기대한 대가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영혼이었지

그들이 베푸는 물질적 보상이 아니었다.

물론 이렇게 할 때, 데살로니가 신자들도 바울에게

자발적인 사랑의 선물을 하기에 인색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4. 금상첨화 : 온전한 인격  2:10

바울이 이런 자세로 사역하고 여기에 적은 대로

그 자세를 흩트리지 않았다면 그는 거룩하고 흠 없이 행한 것이었다.


이어지는 10절의 언급은 받아주어도 괜찮은 장담이었다.

우리가 너희 믿는 자들을 향하여, 어떻게 거룩하고 옳고 흠 없이 행한 것에 대하여

너희가 증인이요, 하나님도 그러하시도다. 


이 대목에서 설교하는 나는 부끄럽다.

‘아, 주님! 저를 긍휼히 여겨주십시오.’ 제게도 이 정신을 주시옵소서.


만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사역자들이 이런 모습을 보일 수 있다면,

아니 약간 흉내만 낼 수 있더라도.. 사람들은 결국 예수를 믿게 될 것이다.

이것은 확실하다.


결국 사람들은 논리를 주워대는 말보다는

가슴으로 느껴지는 사랑과 순결의 삶에 의해 움직인다.

이런 인상을 심어주게 되면.. 지금 당장에는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예수를 믿을 것이다. 작은 예수가 되어야 할 것이다.



◑5. 말씀의 역사와 그 반대급부인 고난    2:13~16    

 

-중요한 내용입니다. 여기 클릭하셔서 꼭 읽어보세요-


                                                                                                                                 ▣ 교회론      

..............................

 

1) 필자(유승원 님)는 지난 8월말로 4년간 재직하던 나사렛대학교 교수직을 사임하고

미국 North Carolina 주의 Fayettteville에 소재한 훼잇빌한인장로교회의 동사목사로 섬기고 있다.


2) 개역성경에서 '유순한 자'로 번역된 단어는 사본에 따라 차이가 있다.

P65, B 등에서는 '네피오이'(어린아이)로, A와 기타 여러 곳에서는 '에피오이'(유순한)로 적혀있다.

외증상으로는 전자가 내용상으로는 후자가 자연스럽다. 그러나 뜻은 양자 모두 분명하다.

어느 쪽을 택해도 순전하고 유순한 어머니 같이 행동했다는 바울의 의도에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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