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숨바꼭질 잠언 25:2 -출처보기-
▶숨바꼭질은 참 재미있습니다.
이 놀이가 재미있는 이유는 스릴이 있는데다가 머리를 써야 하기 때문입니다.
숨는 사람은 처음에는 숨기 편한 곳을 찾아 숨습니다.
하지만 게임을 반복하면서 그런 곳에 있다가는 필경 들킨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경험이 붙을수록 가장 숨기 어려운 곳,
가장 숨을 수 없을 것 같은 곳을 찾아 숨습니다.
술래가 바로 옆을 지나가면서도, 자기를 보지 못할 때의 그 스릴은, 대단한 즐거움입니다.
◑1.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바로 숨바꼭질의 고수임을 아십니까?
오늘 읽어드린 솔로몬의 지혜가 이렇게 말합니다.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 잠25:2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은 숨어 계신 분이요, 숨어서 일하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자신을 숨겨서 드러나지 않게 일하시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좋게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드러내어 사람들을 위압시키고
영광과 찬양을 받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대신에 그분은 아무도 모르게 숨어있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그분은 아무도 모르게 일을 진행하시고 그대로 잊혀지는 것을 원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은 자신의 모습을 쉽게 알아챌 것 같은 곳에는 계시지 않습니다.
'아마도 저곳에는 하나님이 계실 거야'라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곳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곳에 계시면 쉽게 사람들에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계실 것 같지 않은 곳,
도저히 그럴듯하지 않은 그런 곳에 숨어 계십니다.
그분은 기본적으로 숨어있기를 좋아하시기 때문입니다.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 라는 구절의 뜻은,
그 숨겨진 하나님의 역사를
잘 헤아리고, 찾아내는 것이..
왕 같은 공동체의 지도자가 해야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2단락에서 설명함)
▶이 대목에서 우리는 엘리야의 이야기를 하나 기억합니다(왕상 19장).
엘리야가 하나님을 찾으려고 호렙 산에 섰습니다.
그리고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주목하면서 하나님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 때 갑자기 크고 강한 바람이 불어와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숴뜨렸습니다.
엘리야는 위대하신 하나님이라면, 그런 정도의 바람과 함께 오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바람 가운데를 응시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얼마 후에 천지가 진동하는 굉음과 함께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정도라면 정신을 잃고 도망했을 텐데,
엘리야는 하나님을 뵙겠다는 일념으로 그 지진을 지켜보았습니다.
혹시나 하나님께서 찬란한 위엄으로 자신을 계시하실지 모른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지진이 다 가라앉을 때까지 그는 하나님을 뵙지 못했습니다.
이번에도 실망이 컸습니다.
또 얼마가 지났을 때, 이번에는 큰 불이 일어났습니다.
참으로 견디기 어려웠지만, 엘리야는 이번에도 타버릴 것 같은 공포심을 억제하고
그 불의 가운데를 응시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그 불길은 화끈거리는 열기만을 남기고 사라져 버렸습니다.
아마도 이즈음에 엘리야는 탈진했을 것입니다.
더 이상 버티고 서 있을 힘이 없었을 것입니다.
온 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하나님을 찾으려는 열심도 식어버렸을 것입니다.
그 정도의 엄청난 일들을 경험했는데도 하나님을 찾지 못했다면,
영영 하나님을 만날 가망이 없어 보였습니다.
계속되는 이야기를 보면, 그 후에 엘리야는 동굴로 들어가 숨을 돌렸습니다.
동굴 안에서 땀을 씻으면서 허탈감에 한 숨을 내쉬며 숨을 돌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부드러운 바람이 지나가는 "미세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소리에 끌려 고개를 돌려볼 때 그의 마음의 눈이 뜨였고,
그곳에 계신 하나님을 목격하였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배운 대로 하나님은 위대하신 분이므로
크고 위대한 사건을 통해서나 뵐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런 큰 사건을 응시하면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하나님은 그런 곳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분은 연약한 풀잎의 흔들림 같이 사소한 사건 속에 계셨습니다.
엘리야는 이제야 비로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잘 알려 줍니다.
그분은 숨어 계시는 분이며, 숨어서 일하시는 분입니다.
숨어 계신다는 말은.. 이 세상에서 떠나갔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분은 이 세상에 아니 계신 곳이 없습니다.
오늘 찬송가 뒤편의 교독문에서 읽은 시편 139편은
이 우주에서 하나님을 피할 곳은 아무 데도 없다는 것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아니 계신 곳이 없으신 하나님, 그분은 드러나지 않는 방식으로 계십니다.
자신의 모습을 철저히 감추고 숨어 계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일을 숨어 있는 채로 이루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간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뿐 아니라, 알고 보면 이 세상의 모든 일이 숨어 계시는 하나님의 일인데,
우리는 그것을 ‘스스로 그렇게 된 것"(自然)’이라고 하거나,
혹은 ‘자기 자신이 이룬 일’이라고 착각을 합니다.
자기가 한 일도 아닌 것을 가지고, 자신의 공로로 내세웁니다.
다 하나님이 하신 일인데,
설마 그런 일에 하나님이 참여하셨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는 우리 인간들은,
그것을 나의 일로 여기고 자랑하고 떠듭니다.
오히려 숨어서 일하신 하나님은 아무 공도 주장하지 않고 그냥 계시는데,
실제로 별 일도 하지 않은 우리가 나서서 공을 자랑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숨어 계시며, 숨어서 일하신다는 이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아니 계신 곳이 없지만, 또한 자신을 분명히 드러내시는 곳도 없습니다.
그분은 그렇게 숨어 있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그것을 당신의 가장 큰 영광으로 생각하십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있습니다. 앞에서 엘리야의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우리 인간은 우리의 육안으로 보고, 우리의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질 수 있어야만
'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다섯 가지 감각으로 확인되지 않는 것은 모두 거짓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간절히 찾아다니면서,
엘리야처럼 위대한 사건들에만 집중하거나
혹은 우리의 오감五感을 만져 주기를 기대합니다.
숨어 계신 하나님은 그런 대단한 사건에 계시지 않습니다.
또한 영이신 하나님은 우리의 오감으로 느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은 영원히 하나님을 찾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숨바꼭질에서 평생 술래를 면하지 못하고 맙니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과 교제를 나눌 때
진정한 성공과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인생은 다만 껍데기가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구원은 하나님을 찾고 그분을 만나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꼭꼭 숨어 계시고, 우리 인간은 그분을 찾을 길이 없으니,
인간의 불행의 뿌리는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찾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①첫째는 우리의 마음의 눈을 떠야 합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우리의 감각 기관으로 더듬어 알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알아볼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영적 능력이 잠재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을 한 데 모아 집중하면 영이신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찾되 '전심'으로 찾으라고 권고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②둘째는 하나님이 계신 곳을 제대로 보아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아니 계신 곳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숨어 계신 하나님을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아무도 그분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 그런 곳으로 눈을 돌려야 합니다.
메시야가 태어날 곳으로 베들레헴을 생각한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렇게 초라한 동네에서 메시야가 태어나리라고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외양간에서 태어난 그 아이가
메시야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도 별로 없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사형 당한 그 죄수가 참된 구원자라고 생각한 사람은
더 더욱 별로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많은 사람들이 메시야를 보고도 지나쳐 갔습니다.
메시야는 분명히 더 위대하고 귀한 곳에 있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찾기 위해서 어디를 보고 계십니까?
어떤 일을 만났을 때 여러분은 하나님의 임재를 기대하십니까?
혹시 우리도 엘리야처럼 크고 위대한 어떤 일들 속에서나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믿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지극히 사소하고 작은 일들을 주의 깊게 보면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을 뵐 수 있다는 것을, 진정으로 알고 계십니까?
오늘의 말씀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 잠25:2
하나님은 숨어 계시고 숨어서 일하시는 것을 즐기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주의 깊게 살필 때
하나님을 뵐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 일을 경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지 아십니까?
◑2.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
▶‘일을 살피는 것’, 즉 숨어계신 하나님을 찾아내는 것이
바로 인간의 영광이라는 솔로몬의 말은, 참으로 진리입니다.
그것을 발견하는 것이 신앙의 맛이요 인생의 맛입니다.
마치, 짚을 쌓아놓은 짚누리에서 지푸라기 한 가닥이 나풀거리는 것을 주목하고는
그 짚더미 속에 숨어 있는 사람을 찾아낸 술래의 그 기쁨!
그러한 기쁨이 있어야 숨바꼭질을 하는 재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마음을 모아
우리 주변의 낮고 하찮고 사소한 일들을 살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과 함께 살아갈 수 있습니다.
▶모름지기 이러한 마음, 이러한 눈길이 있어야 숨어 계신 하나님을 뵐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과 같이 수 만 가지로 갈라지고 찢어진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찾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눈길과 같이 어느 한 곳에 잠시 잠깐도 머물지 못하는 눈길로는
하나님을 찾을 수 없습니다.
크고, 높고, 화려한 것에만 이끌리는 우리의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찾을 수 없습니다.
혹시 찾는다 해도 다시 잃어버리기 십상입니다.
◑적용 및 마치는 말
▶그렇다면 이렇게 숨어 계신 하나님, 숨어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찾아내고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우리는 그분을 만나 사귐을 나누면서 그분을 닮아갑니다.
숨어 계신 하나님을 만나서 사귀고 그분을 닮아 숨어사는 기쁨을 경험하고 나면,
왜 그렇게 사는 것이 정말 좋은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숨어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만나 사귀다 보면,
그렇게 일하는 것이 정말 좋은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진정으로 체험한 사람은
하나님처럼 점점 자신을 숨기고 드러나지 않는 삶을 택하여 살게 됩니다.
▶지금 우리의 문화는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최고로 여깁니다.
어디 지금만 그랬으리요만, 이러한 경향은 요즈음 들어 더 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모두 한 번 '뜨고 싶어서' 정신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성공하는 것은 뜨는 것'이라는 등식이 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직장에서도, 학교에서도, 매스컴에서도 '뜨기 위한 전쟁'이 치열합니다.
드러나고 알려지는 것을 성공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젊은 아이들은 연예 프로의 영향 때문에 무엇으로든
한 번 튀어서 멋지게 떠보겠다는 꿈에 젖어서,
방을 걸어 잠그고 기괴한 '개인기' 연습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이 이렇게 허망한 꿈속에서 시간을 허비하고 있으니,
장차 이 나라가 어떻게 될지, 걱정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번 떠 본 사람들은 그것이 참된 행복의 조건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오히려 뜨고 나면,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 의해서 밀려다니게 되기 때문에 불행이 커질 뿐입니다.
칼릴 지브란이 "다른 사람에게 내가 이해 받는 것은
그 사람에게 소유 당하는 것"이라고 경계했듯이,
실제로 "드러나는 것은 대중에 의해서 소유 당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일단 뜨고 나면 그 사람 자신의 삶은 없어지고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뜨는 것이 찬란해 보일지는 몰라도,
그것이 진정한 인생의 행복은 아닙니다.
▶우리는 가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을 오랫동안 숨어서 하던 사람이
매스컴에 의해서 하루아침에 뜨는 경우를 봅니다.
이렇게 뜨고 나면, 사람들은 그렇게 말 합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파묻혀 있더니, 이제야 빛을보는군!"
하지만 그것이 진정으로 빛을 보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일단 뜨고 나면, 그는 더 이상 과거에 하던 그 의미 있는 일을 계속할 수 없게 됩니다.
그는 더 이상 자신에 충실할 수 없습니다.
그는 다른 일로 바빠져서 과거에 하던 일들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는
신기루 같은 인기를 좇아가는 불행에 빠져 버립니다.
그러므로 하루아침에 떠서 스타가 되는 사람을 보고
부러워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 사람의 화려한 미소 뒤에 감추어진 그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뜨는 데서 오는 그 유혹이 거부하기 어려운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에 빠져 버리면 우리는 불행에 빠져 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왜 숨어 계시며,
왜 그분이 숨어서 일하시면서 아무런 공을 자랑하시지 않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 앞에 내가 드러나는 일은 참으로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
어떤 일을 해 놓고 그 공에 사로잡히는 일도 경계해야 합니다.
그런 것으로 인해서 인생에는 다툼이 생기고, 분노와 시기가 생깁니다.
우리 주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다른 사람에게 어떤 일을 해 줄 때,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마 6:3)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 말씀은 다른 사람에게 드러나지 않게 하라는 뜻입니다만,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기 자신도 그것이 선행이라고 의식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냥, 하나님께서 마음을 이끄시는 대로 행하고, 잊으라는 뜻입니다.
내가 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숨어 계시는 하나님께서 나의 마음을 통하여 하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없습니다. 나는 숨은 채로 아니 계신 곳이 없으신 하나님의 일부입니다.
나는 그분의 지팡이일뿐입니다. 시켜서 한 것뿐입니다.
그러니 하라는 대로 한 후에는 잊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닮아 살아가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그러니 우리, 이것 하나만은 오늘 마음에 새기고 가십시다.
숨어 계시는 하나님! 숨어서 일하시는 하나님!
우리는 모두 그 숨어 계시는 하나님의 술래입니다.
이제 그만큼 숨바꼭질을 했으면, 어디를 가야 그분을 찾을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그분을 찾을 수 있는지 알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숨어 계시는 하나님,
저희에게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마음과 눈길을 주소서.
그리하여 어느 때 어느 곳에 있든지
곁에 숨어 계시는 하나님을 보게 하여 주소서.
숨어 계시는 하나님,
드러내고 싶어 안달하는 저희의 마음을 고쳐 주소서.
저희도 묵묵히 숨어 살아갈 수 있게 하여 주소서.
숨어 일하시는 하나님,
저희가 하나님처럼 쉬지 않고 일하되
저희를 드러내고 싶어하는 마음을 버리게 해 주소서.
아무리 큰 일을 이루었어도
그것을 공으로 주장하지 말고
깨끗이 잊어버리게 하여 주소서.
모든 좋은 일은 숨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공이므로
저희는 다만 물러서서
또 다른 일을 위해서 힘쓰게 하여 주소서. ▣ 복음 관련
................................ 더 읽으실 분 .................................
▶시인 구상 선생께서 바로 이런 경험을 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무소부재 無所不在> 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아지랑이 핀 연못에
꿈나비 살포시 내려앉듯
그 고요로 계십니까
비 내리는 무주공산
어둠이 진 어스름한 안개 속에
심오하게 계십니까
산사 뜰 파초 그들에
한 포기 채송화 모양
애련스럽게 계십니까
휘영청 걸린 달 아래
장독대가 지은 그림자이듯
쓸쓸하게 계십니까
청산이 늘어서
병풍처럼 둘렀는데
높이 솟은 설봉인듯
어느 절정에 계십니까
해와 달이 마주하여
세월 없이 흐르는 긴 강이듯
유연(悠然)하게 계십니까
상강(霜降) 아침
나목 가지에 펼쳐 있는
서리 안에 계십니까
석양이 비낀
황금 들판에 넘실거리는
풍요 속에 계십니까
삼동(三冬)에 뒤져 놓은
열 식은 대지같이
태초의 침묵을 안고 계십니까
태풍 휘몰아오고
해일 일며
천둥 번개 치듯
엄위로서 계십니까
허허창창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무애(無涯)도 넘어
아득히 계십니까
일곱색깔 무지개 위에
성좌를 보석자리 삼아
동쪽 하늘의 일출마냥
휘황스레 계십니까
배꽃, 복숭아꽃 찬란한데
지저귀는 저 새들과
옥빛 강물 속에 노니는 고기떼들의
생래의 즐거움으로 계십니까
풀잎 뜯어 새김하며
먼 산 한 번, 구름 한 번 바라보는
산양의 무심으로 계십니까
저고리 섶을 연 젖무덤에 달려서
어미를 쳐다보는 아기의 눈빛같은
순수 속에 계십니까
저 신선도(神仙圖)
흰수염 드리운 그윽한 미소로
굽어살피고 계십니까
이러듯 형상으론 섬기지 못하고
붓 안 닿는 여백같이
시공을 채워 계심이여!
무소부재, 무소부재의
하나님!
(잘 사용되지 않는 한자어들을 약간 수정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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