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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론적 현실주의자의 열정

LNCK 2010. 8. 11. 21:05

◈종말론적 현실주의자의 열정                  살전3:1~4:18                          -출처보기-

 

※종말론적 현실주의자 : 바울의 현실적 권면, 신앙적 가르침은 모두 종말론적(재림의) 관점에서 나온 것이었음.

 

데살로니가전서의 문체를 보면, 이것은 거의 '극성'의 수준이다.

우아하게 문화적이면서 충분하게 점잖은 현대 종교인들의 눈에 비친 바울은

분명히 극성맞아 부담스러울 정도의 인물이었다.

 

화두를 2장의 말미(2:17)에 등장하는 ‘열정 ephithumia’에서 잡으면 적절하다.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2:17

 

 

그저 의무감 때문에 마지못해 하는 것이 아니었다.

돌아올 보수의 계산속에 갇혀 움직이는 것도 아니었다.

바울의 속에는 그를 충동하는 강렬한 힘의 분출이 있었다.

어쩔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의지를 복종케 하여 끌려가는 모양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데살로니가를 떠났다.

자신이 가야 할 길은 멀고 진척시켜야 할 일이 앞에 산더미같이 놓여있다.

그저 자신의 할 일을 다했다 생각하고

전방에 닥치는 일들에 몰두하는데도 시간이 부족할 지경이라면

보통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와 같은 경우를 골치 아픈 과거지사로 돌려버리고,

곧 잊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울이 자신의 사람들에 대해 갖는 애정의 강렬함은 분명히 남다르다.

그가 나중에 고린도전서에서 밝혔듯이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다"는(고전4:15) 생부모의 심정이

끈적끈적하게 묻어 나온다. 이렇게 아름다운 극성을 묵상해보자.

 

 

◑1. 아름다운 극성   3:1-10

 

▲1. 참지 못하여 (인내심의 한계)

바울은 두고 온 데살로니가 신자들에 대한 염려를 참아낼 수 없었다고 쓰고 있다.

'참다못하여' 디모데를 보내야 했다(3:1-2).

    이러므로 우리가 참다못하여 우리만 아덴에 머물기를 좋게 여겨

    우리 형제 곧 그리스도 복음의 하나님의 일군인 디모데를 보내노니

 

그들의 믿음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점검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3:5).

    이러므로 나도 참다못하여 너희 믿음을 알기 위하여 보내었노니,

    이는 혹 시험하는 자가 너희를 시험하여 우리 수고를 헛되게 할까 함일러니

 

바울에게 있어서 이 사랑의 열정은 억누르면 그 속에서 번민이 된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고후11:28

 

목회자라도 종종 골치 아픈 일은 회피하고자 한다.

그러나 오히려 골치 아픈 일을 향하여 해결하고자 하는 심정이

견디지 못할 정도로 극성인 것이 바울의 마음이다.

 

▲2. 사람이 좋아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자신의 양무리를 간절히 보기 원한다 했다(3:6).

지금은 디모데가 너희에게로부터 와서 너희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고

또 너희가 항상 우리를 장 생각하여 우리가 너희를 간절히 보고자 함과 같이

너희도 우리를 간절히 보고자 한다 하니

 

그는 사람 만나기를 좋아했다. 대부분 자신에게 어떤 필요가 있기 때문에

몰려드는 사람들을 귀찮아하는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바울의 고단한 심신을 더욱 고단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들을 향해

보고 싶어 하는 열정을 발산하여 더욱 그들을 향해 나아가려 한다.

 

3. 대신 누구라도 보내야

이러한 극성은 디모데를 그곳에 파견하게 만들었다(3:2).

우리 형제 곧 그리스도 복음의 하나님의 일군인 디모데를 보내노니

이는 너희를 굳게 하고 너희 믿음에 대하여 위로함으로

 

사람을 보내 점검과 대언(代言)이라도 하지 않고는 배겨낼 수 없을 만큼

그들에 대한 애정은 강렬했다.

그들에 대한 열정이 참을 수 없는 정도가 되었는데, 직접 갈 수가 없으니,

자신을 대표할 사람이라도 보내야겠다는 마음이었다.

 

▲4. 당신들 때문에 산다. 

디모데가 돌아와 긍정적인 소식을 전하자, 그것이 바울에게는 곧바로 행복이었다.

고린도에서의 가난과 어려움도 만만치 않았다.

그런데 데살로니가로부터의 좋은 소식은, 그러한 고난을 위로하는 힘으로 구실한다(3:7).

이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

 

이어지는 고백은 가히 압권이라 아니할 수 없다(3:8).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바울의 삶은 데살로니가 신자들의 것이었다. 그들이 살아야 바울이 사는 것이다.

설사 바울이 죽는다 하더라도, 그들이 제대로 되면.. 바울은 사는 것이었다.

철저하게 사역지향적인 삶이다. 감탄을 자아내는 타자지향적 자아정체성이다.

너의 행복이 나의 삶이다. 감복할만한 극성이다.

 

이러한 극성은 어디서 오는가?

안 할 수 없어서 억지로 몰아붙이는 의무감에 연유한 것 같지는 않다.

인간에게 잘 보여, 자기 체면을 유지할 정도의 교인을 보전하려는

욕심 때문은 더욱 아니었다.

 

종말론적 확신 때문이었다.

바울은 현재 눈에 보이는 가시적 세계의 운행이,

인생과 역사의 모든 것이 아님을 잘 알았다.

 

그냥 추론한 것이 아니라 확신하였다.

마지막 때에 그들로 인해 주와 함께 누릴 기쁨을 생각하면 영광의 비전으로 충만했다(2:20).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주께서 강림하실 때, 데살로니가 신자들을 그분께 드려야 함을 염두에 두었다(3:13).

너희 마음을 굳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러한 종결을 바라보며 현재 하나님 앞에 갖는 충성이었다.

이러한 강한 확신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충성심이

그로 하여금 이토록 극성이게 만들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그의 열정은 종말론적 확신에서 오는 강렬한 신념에 기초해 있었고

   그 심령에 쏟아져 부어진 하나님의 성령의 불길이었다.

   주님, 내게도 이 극성/열정을 주소서.

 

 

◑2. 꼭 해주고 싶은 말들  3:11~4:12

 

이 극성이 지향하는 내용을 살펴보자.

그들을 향한 극성스런 열정의 눈길이 향하고 있는 내용들이 무엇인가?

 

1.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해 주고 싶다.          3:11-4:2

온종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여 그들을 대면하기 원하는 것은,

저들에게 더 보충해 주어야 할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이다.

자신과 크게 상관없는 남에게, 무엇이 좀 부족한 것이 있다 한들

그것이 별다르게 눈에 들어올 이유가 없다.

 

그러나 자식을 바라보는 아비의 눈에는, 항상 부족한 것이 보이고,

그것 때문에 노심초사한다.

저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어야 나가서 사람 구실을 할 터인데...

제대로 가르치고 구비(具備)를 시켜 놓아야 이 험한 세상에서 잘 살아나갈 터인데...

 

바울이 그들을 그렇게 간절히 만나고 싶어 하는 것은,

영적인 아비의 눈에 들어오는 자식들의 믿음의 부족한 부분을 보충해야만 한다는

열정 때문이었다(3:10).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의 부족함을 온전케 하려 함이라

 

이것은 싫어하는 이나 미워하는 사람의 결점과 흠이

자꾸만 눈에 거슬리게 부각되는 현상이 아니다. 그 영혼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존재의 완성도를 높여주고 싶어 하는 애정의 안달이리라.

 

보충해 주고 싶은 것은 사랑 과 성결 두 카테고리로 요약된다(3:12-13).

 

①토라에 입각한 유대인의 삶은

하나님을 향한 경건과 이웃을 향한 사랑의 두 범주로 수렴된다.1)

바울도 율법의 요약이라 할 수 있는 이 두 덕목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기준을 삼고자 했다.

 

우선 데살로니가 공동체가

상호간의 사랑으로 "더욱 많아 넘치게" 되기를 소망한다(3:12).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

 

②그리고 주 예수께서 강림하실 때, 그들이 경건에 있어 흠이 없기를 소원한다(4:13),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 사랑(경건/거룩함)과 이웃 사랑은, 즉 위에서 말한 2가지는,

복음서의 예수께서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응답으로 주신 것이기도 하다

(마22:37-40, 막12:30-31, 눅10:27).

인생은 경건과 사랑이다. 두 가지를 잘 점검하면 대개는 문제가 없다.

 

   이 두 가지를 아래 ▲2. 와 ▲3.에서 차례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2. 거룩해야 된다.       4:3-8

경건과 관련해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꼭 해 주고 싶은 말은

우선 그들의 성윤리(性倫理)의 정립이다(4:3-8).

하나님의 뜻이 '거룩'이라 하면서 첫 번째로 짚어주는 것이

'포르네이아'(성적 부도덕)를 버리라는 것이다(4: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포르네이아)

 

이 점에 있어서 문제가 있으면, 단지 사람에게 잘못하는 것이 아니다.

포르네이아는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이라 하여

경건의 손상으로 취급한다(4:8). 

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

 

즉, 하나님께 대한 경건은, 성적인 정결함으로 표현된다는 것이다. 

 

같은 논리에서 후에 고린도의 신앙공동체에 보내는 편지에서는 이렇게 쓴다.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음행(포르네이아)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전6:15-20

 

성령을 우리에게 주셨다. 그 몸을 성적 부도덕으로 더럽히는 것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불경의 죄라는 말씀이다.

 

①데살로니가의 성 풍속도

생각만 해 보아도 그토록 감사함이 우러나오게 해 주었던 신앙공동체에게

제 일성(一聲)으로 주는 도덕적 권면이 성적 순결의 요구라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뜻밖이라는 의아함의 느낌을 갖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당대 그레코-로마 세계의 성 풍속도를 조금만 살펴보면,

대놓고 언급하기에는 다소 쑥스러운 영역에

단도직입적으로 정면승부를 거는 바울의 우려를 이해할 수 있다.

 

생활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던 디오니수스, 아프로디테, 오시리스와 이시스 등의

제의(祭儀)는 성적인 방종을 조장했다.

이방 종교에 참여하면서, 방종한 성행위와 관련된 분위기에 익숙했던 데살로니가 인들은

바울이 소개한 새로운 종교가

굳이 새로운 성윤리의 정립을 요구한다고 생각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종교가 다 비슷한 면이 있으니까)

 

젊은이가 혼전에 갖는 성관계가 당시 사회적으로 용인된 관행이었다.

데살로니가에서 머물었던 적이 있었던 키케로도

이런 행위가 자신이나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그로부터 오는 쾌락을 취할 자유가 있다고 옹호했다(Pro Caelio 18.42).  2)

 

수세기 전의 글이지만 데모스테네스의 생각은 여전히 1세기의 데살로니가를 지배했다.

우리는 쾌락을 위하여 정부(情婦)를 소유하며

인간으로서의 존재를 매일 돌보기 위해 첩을 두지만,

우리의 합법적 자녀를 출산하고 집을 충실하게 관리하기 위해 아내를 갖는다.’ (Demosthenes 59.122).  3)

당시는 이렇게 정부(情婦)의 소유를 용인하던 문화였다. 

 

②성윤리의 재정립

이와 같은 환경에 둘러싸인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바울이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쫓지 말라’고 권면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살전4:5).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좇지 말고

 

위에 인용한 고전6:15-20처럼,

신자의 몸은 거룩한 하나님의 영이 거하는 성전이니

이를 거룩하고 존귀하게 잘 관리해야 된다는 생각이다(4:4).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취할 줄을 알고

 

바울은 전에 그들과 함께 있을 때 이미 이러한 가르침을 베풀었었다.

이런 새 생활의 윤리는 주변의 풍습과 차별성을 가지며

‘주 예수로 말미암아’ 준 계명이었다고 상기시킨다(4:2).

우리가 주 예수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무슨 명령으로 준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확실히 복음은

기존의 풍습과 갈등을 일으키는 새로운 차원의 윤리를 요구할 때가 적지 않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는 별 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던 일들이

복음의 사도 바울에게는 심각한 죄악이었다.

그러니 그들에게 반복하여 강조하며, 주의를 환기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바울이 갖는 '극성스러운' 관심은 당연한 것이었다.

롬15:16에서 바울은 지난날의 이방인 사역을 회상하면서

자신의 역할을 흠과 점이 없는 제물을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제사장의 것에 비유했다.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   롬15:16

 

주 예수 다시 오실 때,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거룩하게 구별된 하나님의 제물과 같이, 흠이 없어야 할 것이다(살전3:13, 5:23).

그래서 가장 염려가 되는 부분에 대해 재차 강조를 하는 것이다.

 

실제로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이와 같은 옛 행습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4:6절에 언급하고 있는 일이 실제 상황일 수도 있다.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아니면 요즘 같은 환경에 자식 가진 부모가 염려를 놓지 못하고 그러하듯이

혹시나 하여 잔소리처럼 반복하는 주의일 수도 있다.

 

어쨌든 이 점에 있어서는 바울이 긴장을 풀고 안심하고 있을 수가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자지 말고 깨어 근신하라’고 권면한다.(5:6).

그러므로 너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지어다.

 

▲3. 형제 사랑은 너희가 잘 하고 있다   4:9-12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사랑에 대해서는

비교적 안심하여 신뢰하는 인상을 주고 있다.

 

(다만 거룩함에 대해서는 주변 환경 때문인지 많이 염려를 했다.)

하지만 이웃사랑에 대해서는 더 쓸 것이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4:9).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가 친히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데살로니가가 속해 있는 속주(屬州) 마게도냐에 있는 모든 신자들에게

구체적인 사랑의 행위를 많이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소문이 나 있었던 것 같다(4:10).

너희가 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를 대하여 과연 이것을 행하도다. 형제들아 권하노니 더 많이 하고

 

오히려 우려는, 풍성한 형제 사랑의 나눔 때문에 발생할 부작용을 향하고 있다.

사회주의 국가나 복지제도가 발달한 나라에서 흔히 발생하는 일이다.

사회적 혜택이 항시 준비되어 있다 보니

이러한 사랑의 수혜를 악용하는 사고구조가 형성되기 싶다.

사랑의 명령은, 언제나 사랑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의 위험을 감수해야 된다.

 

현명한 이기주의자가 되라고 외쳤던 요리후지 카츠히로 교수는,

상대를 가리지 않고 자기가 손해를 보면서도,

무조건 상대방을 위한 행동만 하는 이타주의자들을 '선심파'로 정의했고,

이러한 선심파가 많아지면 이들을 등쳐먹고 사는 '사기파'도 덩달아 많아지기 때문에

건강한 사회가 되지 못한다고 보았다.

 

틀리지 않은 말이다. 사랑이 삶의 규범으로 지배하는 사회에는

반드시 그 사랑을 악용하는 마음의 상태가 뒤따르기 마련이다.

 

바울은 이를 염려했던 것 같다.

아니, 이미 데살로니가를 중심으로 하여 마게도니아 그리스도인들 속에는

이러한 기생적 게으름뱅이들이 생겨났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종용하여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고 명한다(4:11).

 

잘못하면 사랑의 공동체가

오히려 남에게 의존하여 사는 버릇이 들어있는 게으름뱅이들의 집단으로

악명을 얻을 수도 있다.

 

외인(外人)들의 존경을 받을 수 있는 건강한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이렇게 우려하며 권고하는 것은

     외인을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도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4:12

 

 

◑3. 복음의 중심에 있는 파루시아    -보시려면 여기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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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 P. Sanders, Judaism: Practice & Belief, 63 bce - 66 ce (London and Philadelphia: SCM and Trinity Press International, 1992), 193.

 

2) Gene L. Green, The Letters to the Thessalonians (Grand Rapids: Eerdmans, 2002), 187에서 재인용.

 

3) Ibid., 187-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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