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분류 없음/2010

교회란 무엇인가? 2593

LNCK 2010. 8. 10. 17:18

◈교회란 무엇인가?                         엡1:1~2                          10.07.11.설교스크랩, 편집 



◑서론 : 에베소 교회는 아시아의 희망


▶바울의 일생에 가장 의미 있는 사역은?

만일 우리가 바울사도에게

‘당신의 생애를 통해 가장 의미 있는 사역이 무엇이었느냐?’고 묻는 다면

그는 아마maybe 틀림없이 <두란노서원 사역>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두란도 사역이 무엇이었습니까? 행19:8~10을 먼저 읽도록 하겠습니다.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두란노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니라.


두해 동안 이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처음 에베소 회당에서 3개월, 그리고 두란노서원에서 2년여

모두 약 3년의 사역(제3차 선교 여행 기간, AD 53-57)을 펼쳤던 곳이

바로 에베소라는 도시였습니다.


당시 에베소는 소아시아의 중심도시였고

사역의 결과는 행19장의 증언처럼 ‘온 아시아에 복음적 영향을 끼쳤던’ 것입니다.

(실제로 계시록 2~3장의 7교회는, 에베소의 두란노 사역에서 배출된 지도자들이

세웠던 교회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에베소 사역이후 사도바울은 예루살렘으로 잠시 돌아갔다가, 체포됩니다.

   그러나 그는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의 가이사 황제에게 최종적인 재판을 받기 위해

   가아사랴 항구에서 압송되어 배편으로 로마로 오게 됩니다.


   AD60년대 초기 바울은 로마의 감옥(1차투옥, 가택연금)에 있었지만

   바울의 관심은 자신의 안위나 편안함이 아닌 에베소 교회에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에베소 교회가 굳게 서야, 아시아를 변화시키는 희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편지를 씁니다.

   그것이 바로 에베소서입니다.


에베소서의 핵심은 <교회론>입니다.

교회가 교회다울 때, 교회는 진정한 세상의 희망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는 아직도 어린 교회 에베소 교회를 향해, 교회가 도대체 무엇인가를 가르칩니다.


교회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우리는 에베소서의 서론인 1-2절에서

벌써부터 교회의 본질을 규명하는 정의를 만나게 됩니다.


*사도바울이 에베소서를 써서 가르치는 바, 교회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1. 교회는 성도들의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예수의 사도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엡1:1


▶1. 성도됨의 의미

여기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두 가지 별명을 사용합니다.

그들은 “성도”이며, 동시에 “신실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성도들과 신실한 자들의 공동체인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편지를 쓴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성도’와 ‘신실한 자’라는 표현은,

흔히 도덕적 특성을 묘사하는 단어로 오해되기 쉬운 단어들입니다.


‘성도’는 본래 영어로는 saints ‘도덕적인 성자’로도 번역되는 단어인데

그러나 본래 원어인 희랍어의 뜻은 ‘구별된 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특별하신 목적으로 사용하고자 구별한 사람들,

영어로 다시 풀어 말하면 ‘set apart, 따로 떼어 놓음’이란 의미입니다.


제가 가진 몇 벌의 양복 중에서, 오늘 저는 특별히 지금 입고 있는 이 옷을

구별하여(set apart) 오늘 입고 나왔습니다.

이것이 ‘성도, 구별된 자’의 본래 일차적 의미입니다.


우리들 그리스도인 모두는 이런 하나님의 구별에 의하여

하나님이 사용하실 목적으로 성도로 부르심을 받고,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바울 사도 자신이 1절에서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것’을 고백한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구별에 의해 거룩한 자(성도들)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성도됨의 의미입니다.


(특별히 거룩한 행실을 행함으로써, 성도가 된다는, 그런 도덕적인 의미는 일차적으로 아닙니다.

물론 성도는 변화를 받아서 이차적으로 거룩한 행실을 하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마는..)


▶2. 신실한 자들

‘성도’가 이 땅의 많은 사람들 중에, 하나님이 우리를 구별해 주신 면을 강조한다면,

‘신실한 자들’이란 단어는.. 인간 편에서 그 하나님을 믿은 자들이란 뜻입니다.


우리말이나 한문에서 ‘신실’을 말할 때 이 단어의 핵심은 ‘믿을 신(信)’입니다.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선택은, 우리의 믿음으로 열매를 맺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실한 자가 된 것입니다.


▶3. 교회의 의미


교회는 본래 희랍어에서 ‘에클레시아’(ekklesia)라는 단어로 표기됩니다.

곧 <~부터>란 의미의 단어와                                  *ek/from

<부름을 받는다>라는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kaleo/call


그래서 세상으로부터,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세상에서 나와, 하나님께 속하게 된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에 ‘성도’와 ‘신실한 자’의 의미를 추가한다면

교회는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세상으로부터 구별(성도)된 믿는 백성(신실한 자)들의 공동체”라고 할 것입니다.

그것을 더 단순하고 쉽게 말하면 <성도들의 공동체>라고 할 것입니다.



◑2. 교회는 은혜의 공동체입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1:2


이 말씀은, 편지의 서두에 바울이 건네는 인사입니다.

그런데 여기 인사에 사용된 두 개의 단어에

교회의 본질을 설명하는 단어들이 등장합니다.

하나가 은혜이고, 또 하나가 평강입니다.


▶은혜와 평강

본래 은혜(karis)라는 단어는 헬라인들이 가장 중요시하고 사모하던 가치의 단어이었고

그래서 헬라인들의 인사에 사용되던 단어이었습니다.


반면 평강(shalom)은 히브리인들이 가장 중요시하고 사모하던 가치의 단어로서

그들의 인사에 사용되던 단어였습니다.

그런데 복음에는 헬라인들과 히브리인들이 갈망하던 것, 은혜와 평강둘 다 들어 있습니다.


▶무조건적인 은혜

은혜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베풀어지는 사랑이나 호의를 뜻하는 말입니다.


세상은 이런 은혜를 알지 못합니다.

세상은 모든 것이 조건과 흥정으로 경영되기 때문에

이런 조건 없는 사랑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장사와 흥정에 밝은 유대인들이

복음을 쉽게 수용하지 못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릅니다.


구약은 수많은 계약을 보여 줍니다. 구약은 조건적 계약의 책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이런 계약은 조건적입니다.

아브람과의 계약(창12:3-너를 축복하면 복을 내리고 저주하면 저주를 내리고)도 그렇고,

시내 산의 계약(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고)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신약의 은혜는 무조건적(계약)입니다. 이것이 엡2:8에서 복음으로 선포됩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선물에 조건이 따르면, 선물이 아니라 뇌물이지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조건 없는 구원의 선물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 곧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구원의 은혜를 입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또한 조건 없이, 이 사랑을 이웃들에게 베풀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교회는 바로 이런 은혜위에 세워진, 은혜의 공동체인 것입니다.

교회의 변질은, 이런 무조건적인 은혜의 감격을 상실할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고를 은총으로 바꾸시는 하나님  (광의적으로, 이런 은혜도 있습니다. 이 단락 펀 글)

등산을 좋아하고 탐험을 즐기는 어떤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 청년의 꿈은 알프스 산에 가서 등반 조난 구조대와 함께 마테호른 봉에 살면서

폭풍 때문에 갇혀 있는 사람들을 도와주러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그 청년에게는 등산이 인생의 전부였습니다.


그 청년은 꿈을 이루기 위해서 훈련을 받으려고 아프리카로 와서

사막을 거쳐서 6Km의 먼 등반을 해야 했습니다.

출발하던 날 그 청년은 몸의 컨디션이 썩 좋지 않아서

함께 다니던 남자 간호사에게 주사를 한 대 놓아 달라고 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일어나려고 하는데,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간호사가 엉뚱한 약병의 약을 사용해서 잘못된 주사를 놓았던 것이었습니다.

그날 이후로 그 청년은 평생 한쪽 다리가 마비된 채로 살아야 했습니다.

그 청년의 꿈은 하루아침에 산산조각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생각이 정리되기 시작하면서, 청년은 갑자기 속았다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배반당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주님께 헌신하려고 아프리카에까지 왔는데,

나는 눈보라 속에서 죽어 가고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헌신하고, 그들을 구조하기를 원했는데,

내가 그런 것들을 원했던 것이 잘못이었단 말인가?

도대체 이 비참하기 짝이 없는 꼬락서니가 무슨 말인가?


내가 섬기기를 원하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왜 내가 그분의 손길을 필요로 할 때에 손을 뻗쳐서 도와주시지 않았는가?

왜 하나님은 이처럼 간단한 일 때문에 생긴 어처구니없는 잘못에 개입해서

멈추게 하시지 않았는가? 왜 하나님은 나를 도와주시지 않았는가?

왜 하나님은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내버려두셨는가? 왜 하나님은, 왜…


 

미국 워싱턴 주 휘트워스 대학의 종교철학 교수인 제럴드 L. 싯처 역시

인생에서 엄청난 아픔의 경험을 했습니다.

어느 날 가족들과 함께 그 지역에 있는 인디언 모임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제럴드 싯처는 무사히 집에 도착하게 해달라고 기도한 후 차를 운전해 집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 차에는 제럴드 싯처와 아내, 어머니, 그리고 사랑스런 자녀 4명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속도로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큰 트럭이 싯처의 차를 덮쳤습니다.

그 사고로 제럴드 싯처의 어머니와 아내와 큰 딸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는 이 엄청난 삶의 경험을 하고난 후에 이 일을 생각했습니다.

‘왜 하나님은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셨는가? 내가 무엇을 잘못했다는 말인가?

내가 일평생 무슨 그렇게 큰 죄를 저질러서 이런 사고가 내게 생긴 것인가?

내가 아내와 결혼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는가?


하나님께서 내 자녀를 그렇게 거두어 가실 것이라면 왜 이 세상에 태어나게 했는가?

하나님을 제대로 믿었다고 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내가 하나님의 품안을 떠난 것도 아니었는데

하나님은 왜 내게 이렇게 대우하시는가?’


우리도 삶에서 이런 일을 겪을 수 있습니다. 우리도 역시 하나님께 질문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왜인가요? 도대체 왜인가요? 하나님 잘 믿어 보려고 했는데,

하나님 잘 믿어 왔는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합니까?’


아까 말씀드렸던 제럴드 싯처는 세 명의 가족의 장례식을 마친 후에

그 죽음에 대해서 깊이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그 고통을 이해하고 받아들인다고 하는 것이 너무 힘든 일이었지만,

그의 묵상은 그로 하여금 더 깊은 생각을 사람들과 함께 나눌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하나님의 뜻에 대해 생각하고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우리에게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이고, 지금 일어나는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또 우리는 어떤 길로 가야하는지에 대해, 구체적인 우리 현실의 문제에 대해

하나님은 성경에서 거의 말씀하지 않으신다.


대신 성경은 우리에게 함부로 넘겨짚어 염려하지 말 것을 경고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확인해 주며,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하나님의 뜻(성경의 계명들)을 지금 행하라고 명령한다.”


때로 인생길에 우리는 크고 작은 고난을 경험하게 됩니다.

제럴드 싯처처럼 교통사고를 당하거나 자녀를 갑자기 잃기도 합니다.

성실하게 일구어 온 사업이 무너지기도 하고 가정이 망가지기도 합니다.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문제에 갇혀 지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순간에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뿐이지, 하나님은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가지고

그 일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하나님께서 왜 그러셨는지 알 수 없다고 해서 그 일이 옳다 그르다,

하나님이 옳다 그르다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은 우리를 괴롭히고 우리를 슬프게 하고

우리를 못살게 굴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해하건 이해하지 못하건 선하신 분이시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며,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서두에, 알프스에서 구조대원이 되려고 하다가

장애인이 된 청년의 이야기는 이렇게 계속됩니다.


사고가 있은 지 삼십년이 지났습니다. 삼십년 후에 그 청년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잘못된 주사로 나의 다리가 마비되었으나, 이는 불운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은총이었습니다. 그 사고는 불행한 일임에 틀림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불행하고 불운한 사고를, 은총으로 바꾸어놓으셨던 것입니다.

나는 다리 하나를 못 쓰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산에 오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지프차를 타고 다니는 기상학자가 되었습니다.

나는 눈 속을 헤치며 걸어 다니는 대신 사막의 모래 위를 터벅터벅 걸어 다녔습니다.

눈 덮인 산 속에서 뛰노는 양 대신에 사막에서 뛰노는 염소를 보게 되었습니다.


삶이 하나의 광활하고도 개인적인 출애굽처럼 나에게 나타났습니다.

이제 나는 사막을 침묵과 기도를 위한 특별한 환경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불구가 된 내 다리는 내가 시련을 이겨내고 꿋꿋이 서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언제나 달리기만 하던 내가 이제는 서 있습니다.

언제나 두 가지를 한꺼번에 해 보려고 허둥대던 내가 이제는 서 있습니다.

마음 속 저 깊숙한 곳으로부터 ‘나는 속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다리 하나를 마비시켜 절름발이로 만든 그 사고는

삼십 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보면 불운한 일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고를 은총으로 바꾸실 수가 있었다는 것만을 나는 말하고자 합니다.”


어거스틴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악을 허락하시지만,

이는 그것을 더 큰 선으로 바꾸어 놓으시기 위함이다.”    (10.06.06.)



◑3. 교회는 평화의 공동체입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1:2


세상은 진정한 은혜를 알지 못하고, 진정한 평화도 알지 못합니다.

참된 은혜와 평화의 근원은, 오직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평화를 말하고 평화를 추구하고 평화를 흥정해 왔지만

평화를 우리에게 제공하지 못했습니다.


인류의 인류 평화를 향한 노력은, 박수 받을 만한 것이고, 고무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인위적인 추구로, 평화가 이 땅에 장착하리라는 허상에서

우리는 벗어나야 합니다.


왜 인류 평화의 노력이 제대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일까요?

탁월한 강해 설교가인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의 말을 빌리자면

평화를 상실한 원인은 ‘제대로 진단하지 못하고 있는 까닭’입니다.

그것(참 평화)은, 성경 외에서는 결코 답을 얻을 수 없다고 그는 말합니다.


   성경은 인류가 애당초 평화를 상실한 원인이 죄 때문이라고 가르칩니다.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불화하게 했고, 인간과 인간 사이를 낸 것입니다.

   죄가 들어오는 순간, 처음 사람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피하여 숨고

   그를 두려워하기 시작해했으며, 그의 임재를 피해 도망했습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는 서로를 불신하고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서로 비난하고 다투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평화를 상실한) 문제가 어떻게 해결될 수 있습니까?

엡2:13-14에서 우리는 그 해답을 발견합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는지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엡2:16을 보십시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그렇습니다. 십자가가 해답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써

인간은 하나님과 비로소 화해하는 평화를 경험하게 되었으며

이 중보자 예수를 받아드린 사람들은, 이 복음 안에서 한 몸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평화하고, 인간과도 평화하게 된 것입니다.


▶원색적 복음의 의미/이해가 약화될 때, 교회가 약해집니다.

교회는 바로 이 평화의 복음을 전하고, 평화를 나누는 공동체인 것입니다.

교회의 변질은 이 복음을 외면하고

다른 방식으로 공동체를 유지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교회 중에 일부는, 교인들의 친교를 증진하고

   주변 불신 이웃들도 교회에 오게 하고, 교회 수입을 획득하려는 목적으로

   교회에 모여서 ‘빙고 게임’을 하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복음이 아닌) 그런 오락적 시도가 성공하겠습니까? 될 리가 없지요.


그러나 아직도 순수한 십자가의 원색적인 복음이 선포되고

뜨거운 말씀의 교제가 있는 교회들에는, 온갖 사람들이 와서

교회의 영적 사귐 안에서 녹아지고 하나 되는, 부흥의 열매가 맺히고 있습니다.


제가 만나는 분들에게서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의 하나는 이런 것입니다.

“목사님, 도대체 건강한 교회, 이상적인 교회란 어떤 교회입니까?”


저는 한마디로 이렇게 대답하고 싶습니다.

“참된 은혜가 필요하십니까? 참된 평화가 필요하십니까?

그러면 우리 교회로 오십시오! - 라고 말할 수 있는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가 계속 그런 (은혜와 평화의 참된 복음을 선포하고 나누는)

교회로 머물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관련 예화) 어느 교회에 한 목사님이 파송되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부임하는 주간부터 시작하여, 매 주일 같은 내용의 설교를 했습니다.

그분의 설교 내용은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여러분, 이렇게 살면 장차 지옥에 가게 됩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교인들은 하나 둘씩 교회를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그 목사님은 메시지를 바꾸지 않았습니다.

교회가 거의 문 닫게 될 지경에

교회는 감독님에게 새로운 목사를 파송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교회를 딱하게 생각한 감독님은 다른 목사님을 파송했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도 부임하는 주일부터

주일마다 똑 같은 내용의 설교를 하는 겁니다.

“여러분, 이렇게 살면 장차 지옥에 가게 됩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흩어졌던 교인들이 다시 모여들고,

믿지 않던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교회는 크게 성장했고, 많은 전도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감독님이 그 교회를 방문하여 교인들에게 물었답니다.

“아니, 두 목사님이 동일한 내용의 설교를 했는데,

왜 먼저 목사님 때는 교회가 문 닫을 지경이 되더니,

지금은 이렇게 성장하는 겁니까?”


그랬더니 그 교회의 제직 회장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먼저 목사님은 미움으로 그 설교를 했고,

지금 목사님은 사랑으로 그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차이는 그것뿐입니다.”

 

(이런 식으로 평강을 줄 수도 있습니다.)

                                                                                                           ▣ 교회론      

......................

 

▶서두에 전략된 부분

제가 주의 부르심을 받고 복음 사역에 헌신한지 금년으로 40년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런데 누가 만일 이 40년의 세월 중 가장 의미 있게 기억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아마 저는 서슴없이 그중의 하나가 <코스타 사역>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제가 워싱톤 지구촌 교회에서 사역하던 당시 1986년만 해도

소위 미주내 유학생들의 유학생 촌에는 교회들이 별로 존재하지 않았고

존재하더라도 그들의 영적 필요를 공급해 주지 못하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다가


기도 중에 1년에 한번이라도 그들에게 영적 축제를 제공하여

그들에게 전도도 하고 믿는 이들에게 기독교적 가치관에 입각한

학문과 신앙의 통합의 비전을 제공하여 그들이 조국으로 돌아오게 한다면

굉장한 영적 시너지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워싱톤 지구촌 교회의 전적인 지원으로 시작한 사역이 바로

KOSTA(Korean Students in America)사역이었습니다.

이 사역이 이제는 전 세계 13개국에서 해마다 1만 명이상의 유학생들과

디아스포라 한인 청년들이 참여하는 사역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KOSTA의 의미도 이제는 Korean Students in All nations 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지난 2010년 7월 첫 주, 월요일부터 금요일 오전까지

이 코스타 25년을 기념하는 “복음/ 조국/ 땅끝”을 주제로 하는 축제(시카고 휘튼대학)에

강사로 섬기고 돌아왔습니다.


25년은 긴 시간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25년 동안에

코스타 시작 초기 모이기만 하면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안타깝게 기도하던 조국은 민주화되었고,

참으로 가난에 울어야 했던 조국은 선진국의 문턱에 도달하는 나라가 되었고,

복음을 받기만 하던 피선교국 한국은

전 세계에 미국 다음으로 많은 선교사를 보내는 선교 한국이 되었습니다.


미주 코스타는 지금은 대학원생 이상으로 모이는 모임과

대학생들의 모임으로 나누어 모이고 있는데

본래 미주 코스타 초기에는 주로 대학원생과 많은 연구원생(포스닥)들이 참여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