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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아름다운 성공담 2597

LNCK 2010. 8. 12. 17:05

◈어느 아름다운 성공담        살전1:1-1:10           -스크랩 글, 출처-

                                                                                                                      유승원교수

 

◑데살로니가 전서 배경  

 

-보시려면 여기 클릭- 

 

 

◑1. 인사말        살전1: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 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찌어다. 1:1

 

 

자세한 설명은 맨 아래 배치했음.  주1)


 

◑2. 감사의 글    살전1:2 (~10)

 

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함은 1:2

 

서신의 이 부분에서, 당대의 사람들은 일정한 패턴을 따라

대개 ‘마음의 기쁨’을 표현하는 말을, 편지의 서두에 포함시키는 문화였다.

그런데 바울의 편지들은, 이 서두 기쁨 부분을 '감사의 글'(Thanksgiving)로 바꾸어놓았다.

 

머리말 부분(1:1)에서 '문안'(카이레인)을

'은혜'(카리스)와 '평강'(에이레네)으로 바꾸어

편지 형식을 그리스도교화 했음을 보았다.

 

마찬가지로 세상에서 ‘인간의 기쁨’을 언급하는 곳에서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하기'를 끼워 넣어

또 다시 그리스도교화 된 편지를 만들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전서에서는 이 감사의 글이 단순한 형식을 넘어서

'넘치는 감사'의 분위기를 조성한다.

이 편지의 배경을 살펴보니, 그럴만한 이유가 충분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현존하는 그 어떤 바울의 편지에서보다도 더 진한 감사가 이 편지에서 넘친다.

 

흔히 1:2-10을 감사의 글로 보지만

사실 감사는 그 형식의 한계를 넘어서

편지의 중심본문 속으로까지 넉넉하게 흘러 넘쳐 파고 들어간다.

 

제2장에서도 바울이 그들과 함께 있었을 때의 사역의 모습을 통해

간접적인 자기변호를 하고 나서

2:13절에 이르러서는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함은..." 하면서

고마움의 마음을 다시 드러낸다.

 

그런가 하면 3:9에 가서 또 한 번 감사의 표현이 감탄으로 표출된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를 인하여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보답할꼬!

 

훈훈하다. 정말 고마워서 어쩔 줄 모르는 그런 분위기다.

 

그래서 다른 편지에서는 편지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감사의 글'이

데살로니가전서에서는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여

아예 본론(本論)을 이룬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1)

 

다짜고짜 자신의 사도적 권위의 진정성을 들어가며

변론 일변도로 시작하는 갈라디아서와 비교해 보라.

데살로니가전서는 사랑과 감사의 편지이다.

 

 

◑3.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교인들(로 인해 감사)           1:3

 

너희의 믿음의 역사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1:3

 

이러한 감사는 기본적으로 데살로니가 공동체의 모범 됨에 기인한다.

적어도 바울이 보기에는 데살로니가 교회가

괜찮은 정도를 넘어서 모범이 될 만한 공동체였다.

바울이 직접 개척한 교회들 중에서 고린도와 갈라디아를 생각하면

데살로니가는 정말 자부심을 가질 만한 모임이었다.

 

편지에 드러난 것만으로 판단하자면, 데살로니가 교회는 분명히 성공작이었다.

이 공동체에는 성공으로 평가할 만한 결과가 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무엇인가를 보여주어야 할 것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바울이 그들을 기억하여 기도할 때면, 그들이 보여주고 있는 열매들이 상기된다.

데살로니가를 생각하면 그들의 삶이 그림처럼 떠오른다.

 

편지 중에 그 내용이 무엇인가 계속 밝혀지겠지만

일단 여기서 바울은 그들의 모범적인 모습을

그리스도인의 삶의 고전적인 삼각대(三脚臺, tripod, 삼발이) 차원에서 요약해준다.

 

하나님의 은혜로 만들어진 사람들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 은혜의 결과로 말미암아 세 가지 중요한 덕성(德性)이 나타난다.

이른바 고린도전서 13:13을 통해 잘 알려져 있는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다.

바울은 이 덕성의 삼각대를 자신의 편지 여러 곳에서 언급하고 있다

(살전5:8, 갈5:5-6, 고전13:13, 골1:4-5).

 

▲1. 믿음의 역사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 세 가지 덕성의 표출로 요약된다.

우선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의 핵심은 믿음(피스티스)이다.

"믿음은 복음 메시지의 수용이며, 하나님과 예수에 대한 신뢰이고, 순종하는 열심이다." 2)

 

믿음은 이를 통해 중생한다는 차원에서 구원의 통로이며,

계속적인 하나님과의 교제를 이어주는 관계의 상태라는 차원에서, 경건 생활의 조건이다.

동시에 믿음은 사건을 만들어내는 하나님의 능력 행사의 수용 수단이기도 하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롬1:16).

믿음으로 살아간다(롬14:23).

믿음은 산을 옮기는 기적을 낳기도 한다(고전13:2).

 

그래서 믿음이 있으면, 그 결과로 '에르곤'(役事 work, '에너지'라는 말과 같은 어근)이 나타난다.

믿음이 있으면 반드시 역사, 즉 일이 발생한다.

믿음이 있는지의 여부는 역사의 유무에 의해 검증된다.

 

    서로 다른 우리 단어로 번역이 되었지만

    이곳에서의 '역사'나, 야고보서가 말하는 '행함'이나(약2:26)

    똑같이 헬라어로는 '에르곤'이다.

    야고보는 에르곤(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 했다.

    역사가 없는 믿음은 사실 믿음이 아니라는 말이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역사(에르곤/에너지)가 있었다고 바울이 간증한다.

그들은 산 믿음을 지녀서 그것을 보이고 있었다.

당신의 믿음에는 삶 속에 에너지를 발생시키는 '역사'가 있는가? 진정한 행함이 있는가?

 

▲2. 사랑의 수고

사랑은 영원 속으로 이어진다.

하나님의 날이 오면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인 믿음(히11:1b)은

굳이 덕목이 아니다. 눈에 다 보이기 때문이다.

더 이상 믿음을 가지라고 요구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소망하던 것이 이루어지는 그날에는

더 이상 소망을 덕목으로 강조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사랑은 그때도 계속되어 영원 속으로 이어진다(고전13:8a).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신 것은 사랑 때문이다. 삶의 본 모습은 사랑이어야 한다.

삶은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영원 속으로 이어지는 삶인 영생은

결국 계속되는 사랑을 위한 것이다. 이 사랑은 '수고'로 나타난다.

 

수고로 번역된 헬라어 '코포스'의 말뜻은 힘든 일(hard work), 노역(勞役, labor),

어려움(hardship), 곤란(trouble) 등이다.

 

사랑(의 수고)이란 무엇인가?

사랑은 곤란과 어려움을 마다하지 않는 힘든 노역을 수반한다.

육체와 정신의 긴장과 부담을 짊어지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관념이 아니고 실체적(material)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누가의 설명을 통해 도움을 얻어 본다. 이웃사랑이 무엇인지 설명하기 위해

예수께서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사용하셨다(눅10:25-37).

사랑은 자기가 하던 일을 중단하면서까지 시간을 들여 멈추어 서고,

죽어가는 사람에게 다가가 귀찮음을 무릅쓰고 상처를 치료하여 돌보아 주며,

자기 비용을 직접 들여 여관주인에게 돌보아줄 것을 부탁하고

장래의 약속까지 서슴지 않는 '코포스'(수고)이다.

 

사마리아인의 그 모든 수고가 이웃사랑이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눅10:37). 가서 수고하라는 말이다.

가서 이웃을 위해 곤란을 마다하지 말라는 뜻이다.

 

수고가 사랑이다. 곤란을 짊어지는 것이 아가페이다.

사랑은 힘듦과 곤란과 노역으로 검증된다.

사랑은 '코포스'가 있어야 진정한 사랑이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는

이렇게 '수고'로 그 증거를 보여주는 진정한 사랑이 있었던 모양이다.

사랑은 자기 착각에 빠져 혼자서만 흐뭇해 하다가

정작 몸을 움직이고 땀을 흘려야 할 때, 슬그머니 빠져나가는 감정의 유희가 아니다.

 

느낌을 가지고 사랑이라고 함부로 자신해서는 안 될 것 같다.

그 흔하게 쏟아져 나오는 사랑의 고백과 노래와 시구(詩句)는

얼마나 자주 허망한 느낌의 잔치로 종결되고 있는지...

 

이것이 십대들의 연애 감정을 위해서는 적절한 표현일지 모르나

한 생애를 마주보며 일생의 고역을 같이 짊어질 부부에게는

쉽게 내뱉기 전에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개념이다.

 

사랑은 느낌이기보다는 노력이다.

사랑은 땀이며 피며 눈물이다. "사랑하느냐"고 묻지 않으련다.

사랑한다고 말하는 나는 (사랑의) 수고하고 있는가?

 

▲3. 소망의 인내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희망이 남아있는 한 생명이다.

소망은 현재의 질곡과 미래의 완성 사이에 존재하는 괴리를 이어준다.

현재가 마냥 좋으면 굳이 소망을 이야기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현재가 어렵기 때문에 소망을 말한다.

 

현재에 고난을 거쳐 가도록 되어있는 존재가 그리스도인들이다(일례로 막10:30).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논란이 많을 수 있는 명제이나)

바울에게 있어서 이 세계의 현존은 분명히 고난이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롬8:22

 

설사 내가 그럭저럭 어렵지 않게 살더라도

이웃이 신음하기 때문에, 나는 그 고난에 동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하는 것이 제대로 된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고전15:19) 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현재는 고난으로 특징지어진다.

 

그래도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기뻐해야’ 된다(살전5:16).

현재가 그다지 밝지 않은데 어떻게 기뻐하는가?

‘장차 올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롬5:2).

 

기다리면서 살되, 그것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에,

현재의 어려움과 상관없이 다가오는 그때의 지복(至福)을 생각하며

지금도 히죽히죽 웃을 수 있다는 말이다.

 

필자는 이것을, 현재 속으로 종말을 앞당겨 사는 삶이라고 정의한다.   3)

그래서 로마서에서는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기도 했다(롬8: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그렇다면 소망은 무엇으로 특징 되는가?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롬8:25

참음이 소망을 소망되게 한다.

 

소망이 있다면 현재를 견딜 수 있는 내구력을 지닌다.

내성(耐性)이 없으면 소망을 가진 자라 하지 않는다.

소망이 있는 사람은, 소망이 확실한 사람은

현재의 고난을 넉넉히 견디는 내성을 보인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소망의 인내를 가졌다 한다.

소망의 미덕은 인내로 검증된다. 견딤과 참음으로 소망이 있음이 확인된다.

소망을 가진 사람은 현재를 인내한다. 인내하니까 기쁘다. 견디니까 즐겁다.

내성을 가지니까 행복하다.

그렇다면 인내는 행복과 기쁨의 조건이다.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현재의 행복을 보장한다.

그리고 그 소망은 인내로 검증되며 강화된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을 앎이로다.   롬5:4

 

인내하여 행복한가? 당신은 그렇게 소망의 사람이다.

 

 

◑4. 하나님의 선택(으로 인해 감사)     1:4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1:4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이렇게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은

자신들의 공로가 아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선택으로 가능했던 일이었다.

 

저들에게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 모범적으로 균형 잡혀 있는 것을 보니

하나님께서 저들을 "택하심"을 알 수 있게 되었다 한다(4절).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라는 개념도 이러한 택하심의 또 다른 표현이다.

 

하나님 쪽에서의 선택의 결정, 즉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가 있기 전에는

'신자'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사랑의 부르심에 입각한 선택 없이는 '그리스도인'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나타난 외양은

결국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은혜의 증거일 뿐이다.

 

그렇다고 인간 쪽의 책임을 소홀히 여길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인간에게 순종과 믿음을 호소하시어, 책임을 물으시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궁극적으로 '선택'은 고백의 용어이다.             *예정론도 마찬가지 -클릭-

구원에 있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고백의 용어이다.

이루어진 개별적, 집합적 구원에 대한 찬양의 언어이다.

유일신 하나님에 대한 인정의 표현이다.

 

분명히 인간 쪽의 역할이 있음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 인간 쪽의 역할은, 주권자 하나님의 윤허가 없으면 아무런 기능도 하지 못한다(롬9:14-18).

인간은 단지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의 선택을 고백하여 찬양할 뿐이다.

 

따지고 보면 인간에게는 알량하고 우스꽝스러운

자기 자랑의 이야기를 할 진정한 근거가 없다.

광대한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그런 자랑은 무척이나 가소로운 짓이다.

 

역사를 붙들고 자신의 뜻대로 운행해 가시는 하나님의 큰 구도 속에서

하잘 것 없는 인간이 손짓발짓 해가며, 자신의 역할을 무용담으로 떠벌리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결국 바울이 그들의 덕성 발현에 대해, 인간적 기쁨의 표현을 하기 전에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이유도

결국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크신 섭리의 선택 안에 있다는 고백의 또 다른 표현이었던 셈이다.

그분의 선택이 없이는 현재의 우리가 없다.

 

 

◑5. 선택의 증거 - 믿음의 좋은 소문   1:6-10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의 선택 안에 있었다는 증거는

바울이 처음 데살로니가에 들어갔을 때 나타난 성공적인 복음사역과, 그 결과에서 발견된다.

 

환경이 좋았던 것이 아님에도 이와 같이 긍정적인 결과가 나온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는 암시이다.

 

쉽고 편안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많은 환난 가운데서"(1:6a),

즉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나타난 풍성한 수확이었다.

하나님 선택의 증거로 제시되는 이러한 결과는 세 가지 요소를 지니고 있다.

 

①복음이 말의 조합으로만 전달된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을 확신케 해 주는 기사와 능력과 강력한 확신의 감동들이 수반되었다(1:5a).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②복음의 전달자였던 바울과 동역자들의 헌신적인 자세와 모범적인 삶의 진실함이 있었다(1:5b, 2:1-12).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

 

이 둘이 결합되었기 때문에 2:13의 결과가 나왔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③이러한 역사를 통해 만들어진 데살로니가 신자들은 다른 사람들의 모범이 되었다(1:7-8).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는지라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진 고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이 세 가지에 대한 서술은 2:16까지 이어지며,

이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서의 만남을 기약하기로 한다.

 

▲(설교자의) 마치는 말

①성공할 것을 강요하는 이 세태 속에서 어떤 일에 성공하고 싶은가?

단 한번밖에 주어지지 않은 인생을, 무엇에 소진하는 것이 좋을까?

 

가끔 생활의 염려 때문에 내 마음을 휘어잡는 돈은 아닌 것 같다.

직장의 승진이 강요하는 허울뿐인 업적은 더욱 아니다.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하는 권력과 허명(虛名)이야 생각할 가치도 없다.

 

결국 삶은 사람 만들기가 아니던가?

특히 목회자라면 이 소명은 더욱 긴요하다.

바울이 마음에 품어 사랑하던

데살로니가 교인들과 같은 사람들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좋겠다.

 

숫자나 규모는 전혀 문제가 아닌 듯 싶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당시 가정 교회 수준)

그들을 생각하면서 '나의 기쁨, 나의 영광'이라 노래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있었으면 한다.

그네들을 위해서 나의 생명을 내놓을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을 주소서.

 

②그저 습관적으로 읊던 '삶의 삼각대'를 다시 진지하게 생각해 본다.

삶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다.

인생은 그것들로 표출되는 역사와 수고와 인내이다.

 

우리의 움직임은 실천과 노고(勞苦)와 내성(耐性)을 향해야 할 것이다.

오늘도 나를 멈추어 세우고, 이 삼각대에 걸린 거울에 영혼을 비추어 본다.

믿음으로 삶의 실천을 만들어내자.

 

사랑을 위하여 땀을 흘리고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라면

설사 결과가 눈에 보이지 않아도 상관이 없다.

역사 속에서, 그리고 역사를 넘어서

이 현존의 질곡과 모순과 부조리가 종결되는 소망의 단꿈을 꿀 수만 있다면

세상은 지금도 여전히 살맛이 나는 곳이다. 마라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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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인사말   살전1: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 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찌어다. 1:1

 

편지를 보내는 사람에는, 그곳을 다녀와 소식을 전해준, 디모데와 실라가 포함되어 있다.

'실루아노'는 사도행전에서 사용된 이름 '실라'의 라틴식 발음이다.

한편 실라는 히브리 이름 사울의 아람어 형태이다.

이들은 함께 데살로니가 교회를 개척했다. (위의 '배경' 보세요) 

 

바울 서신의 인사말에서 꼭 등장하는 '은혜와 평강'

그리스도인의 신분과 그에 입각한 그들의 현재 상태를 가리킨다.

 

은혜(카리스)는 그레코-로마 세계의 서신에서 거의 고정된 형식으로 인사말에 포함되는

'카이레인'(greetings)과 유사한 발음이면서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 되게 만든 하나님의 품성과 행위를 잘 표현하고 있어

인사말에는 아주 적절한 용어가 되어 준다.

 

평강(에이레네)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총체적 복지를 가리키는 말인 '샬롬'의 헬라어 표현이다.

물론 이 단어는 바울의 신학에서 하나님과의 화목을 암시하는 말이기도 하다.

 

또한 이 어구語句는 이스라엘의 제사장을 대표하는 아론의 축원의 요약판이기도 하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민6:24-26

 

그러니 바울이 그의 편지에서 거의 예외 없이 사용하는 이 '은혜와 평강'은

그리스도인의 인사말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하다.

이방인의 영적인 제사장으로서의 바울이(롬15:16)

새로운 이스라엘로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 교회에게 주는 축복이기도 하다.

 

이 말이 쓰여질 때 바울은 사랑하는 데살로니가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계속적인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간절히 바랐을 것이다.

그들과의 만남에서 시작하여 지금까지 이어져온 그 모든 역사의 내력을 회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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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래서 오브라이언은 아예 '감사의 글' 단락을 3:13까지로 본다.

P. T. O'Brien, Introductory Thanksgiving in the Letters of Paul, Novum Testamentum Sup. 49

(Leiden: Brill, 1977), 144.

 

2) I. Howard Marshall, 1 and 2 Thessalonians, 51.

 

3) 현재의 고난과 종말론적 승리 사이에서 여전히 행복을 누리며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종말 앞당겨 살기'로 정의했다.

이를 위해서, 유승원, "바울의 종말론과 인간복지의 가능성:

종말론적 복음과 인간의 현세적 행복추구의 긴장관계 풀기," 『지성과 창조』5 (2002): 127-151을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