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분류 없음/2010

존재의 가벼움과 무거움

LNCK 2010. 8. 28. 11:21

 

 

◈존재의 가벼움과 무거움                이사야9:1~7                 -스크랩-

 

 

▶체코 작가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1984년인가 출간이 된 책인데, Time지가 1980년대 10대 도서로 선정합니다.

이 책 제목을 염두에 두면서,

내 존재를 가볍게 살아야 하나, 무겁게 살아야 하나.. 한 번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밀란 쿤데라의 이 작품은, 가벼움과 무거움의 문제를 주제로 삼고 있습니다.

생을 가볍게 살 것이냐, 무겁게 살 것이냐,

그리고 이 가벼움과 무거움의 문제를, 밀란 쿤데라는

아주 오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서 그리스의 철학자 파르메니데스의 질문을, 그대로 가져옵니다.

 

‘과연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태도가,

가벼움을 원하고 가벼움을 따라가고 가벼움을 추구하는 것만이 옳은 것이냐?

때로는 무거움에 순간들이 필요한 것이 아니겠느냐?’고 의문을 제기 합니다.

 

그래서 이 소설 속에는 가벼움과 무거움을 대표하는 두 여인이 등장합니다.

한 여자는 테레사요, 한 여자는 사비나입니다.

테레사는 호텔의 식당종업원이고, 사비나는 미술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비나는 가벼움을 추구하는 사람이에요,

어떤 식으로 가벼움을 추구하느냐, 모든 얽매임을 다 끊어버립니다, 배반을 통해서.

사비나는 남자친구건, 애인이건, 부모건, 조국이건,

자기 마음에 부담이 되도록 얽매이는 모든 관계를

배반함을 통해서 끊임없이 끊어내면서 가벼움을 지향합니다.

이 가벼움이라는 건 결국 자유로움이에요, 자유로움.

 

반면에 테레사는 무거움을 추구합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일편단심 민들레에요.

이성의 관계에서 그게 누구든지 상관없습니다.

누구든지 간에, 한 사람과 인연을 맺으면

오직 그 사람의 사랑만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서

이렇게 존재의 무거움을 지향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에요.

 

그러면서 이 작가의 주장은 이겁니다.

서구사회의 역사, 인류 역사가 가벼움을 지향해 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서구사회를 보면 핵가족이 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에티켓/예의 라고 하는 이런 모든 것들이

다 가벼움을 지향하는 거에요, 그리고 이혼이 쉬워집니다.

 

그리고 연애라고 하는 것, 이성과의 만남이라고 하는 건

그냥 연애로 끝나면 되는 겁니다.

그걸 가지고 뭐 당신과 내가 하룻밤 데이트를 했으니까

어떻게 이렇게 끝낼 수 가 있느냐? ... 그렇게 얘기하면 뭐라고 그래요?

‘아! 촌스럽다’ 이렇게 얘기를 해버립니다.

 

그런데 이제 밀란 쿤데라가 제기하는 의문은,

과연 그런 가벼움, 사비나처럼 모든 관계,

내 마음을 얽매게 하는 모든 관계를 다 끊어내서 가벼움의 삶을 이루어냈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것으로 끝나냐, 그 가벼움은 오히려 공허함으로 전락 되지 않겠느냐,

인생이 어떤 허무함으로 끝나버리지 않겠느냐,

그러므로 이 가벼움과 무거움의 문제를 어찌하면 좋겠는가? .. 그가 이런 말을 합니다.

 

    ‘짐(가족, 부모, 직업, 조국)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그래서 우리 삶이 지상에 무거워서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우리 삶은 보다 생생하고 진지해 진다.

 

    반면에 짐이 완전히 없다면, 인간존재는 공기보다 가벼워지고

    결국 날아가 버려서 지상적 존재로부터 멀어진다.

 

    그래서 기껏해야 인간 존재는, 자유롭다 못해 무의미해 지고 만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택할 것인가?

    묵직함인가, 아니면 가벼움인가?’ 이렇게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흔히 이 삶에서 발견할 수 있지요.

요새 우리 말하는 화려한 싱글,

‘연애는 자유롭게 해라, 그러나 결혼은 하지 마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결혼을 하면 묶여버린다, 얽매인다는 것입니다.

돌아온 싱글, ‘돌싱’이라고 그러죠, 이혼하고 싱글로 환원합니다.

가볍게 살기 위해서 결혼 안 합니다.

 

외로움을 탑니다마는 외로움의 순간을 다른 방법으로 해소합니다.

술을 마시고 뭐 심지어는 극단적인 경우 마약을 한다든지

그러면서 얽매이는 겻은 싫어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사실래요?

존재의 가벼움으로, 아니면 무거움으로?

 

          ▶ 정리하면,

          메시아를 우리 마음 속에 영접하는 역사로 인해

          무겁고 어둡던 우리 인생이 가벼워진다.. 이 말씀을 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작가 밀란 쿤데라가 질문을 던집니다.

          '인생을 가볍게 살아야 되나요, 무겁게 살아야 되나요?'

 

          성경은,  메시아를 영접함을 통해, 가볍게 살 것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단 ‘가볍다’는 의미는, 위에서 말한 ‘무절제한 자유’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본문 설명

 

이사야는, 현실에 짓눌려서 무겁게 살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메시아의 출현을 통해, 가벼워지는 삶으로 변하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역사가, 소외 받던 지역이었던 변방인

납달리, 스불론, 갈릴리 지역에서 부터 시작된다고 하는데요..  

 

▶본문 사9장은,

남유다가, 북왕국과 아람의 연합군에 의해서 위협을 받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예언을 진척시키다가

이제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의 선민의 멸절을 예언하게 됩니다.

 

근데 그 와중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빛이, 

이방에 근접한 스블론과 납달리,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선민생활의 중심권에서 벗어나 버린

그러한 변방을 향하여 구원의 빛이 비추어지고

그 어두움의 땅에 빛이 비춘다고 하는 내용과 맞물려서

메시아의 탄생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사9:1~2, 마4:14~16

 

메시아가 탄생하면,

그 동안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 바깥에 어둠 속에 머물고 있던 변방의 땅에 

은혜가 임하게 되고 구원의 축복이 임하게 되는데

그 내용을 뭐라고 본문이 얘기합니까?

멍에가 부서지고, 채찍이 끊어지고, 압제자의 막대기가 부러질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이는 그들이 무겁게 멘 멍에와 그들의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사9:4

 

기드온이 300명을 가지고 모래알처럼 많은 미디안 군대를 다 쳐 버렸던

그 횃불을 들고 꽹과리로 소리를 내면서, 미디안 군대를 멸절시켰던 것처럼

그렇게 생의 멍에와 채찍과 압제자의 막대기를 끊어버릴 것이다,

그리고 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메시아가 오셔서 그런 일이 일어나고 나면 추수 때의 기쁨 얼마나 기쁘겠어요?

추수 때 굉장히 기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전쟁에서 전리품을 쟁취해 가지고 그 전리품을 나눌 때의

그런 기쁨의 삶이 주어진다는 겁니다.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사9:3

 

▶그러면 기독교가 말하는 ‘가벼움’이라는 게 도대체 뭐냐 이겁니다.

위 본문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이 어둠의 무거운 땅에, 메시아가 임하셔서 구원의 빛을 발하신다. 

그래서 그 무거운 땅에서의 삶이, 가벼워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 하셨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주님께서는 이 세상을 사는 사람들에게서 멍에를 벗겨 버리십니다.

마음의 부담을 제거해 버리십니다, 가볍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럼 도대체 기독교가 원하는 이 땅에 메시아가 오셔서 가볍게 되기를 원하시는,

그 가벼움의 내용이 도대체 무엇이냐 이겁니다.

 

가벼움과 무거움의 문제, 이 문제를 기독교는 이렇게 다루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 드리면,

하나님에 대해서는 무겁게 살고, 이 세상에 대해서는 가볍게 살라는 것이에요.

 

메시아가 오시면서 우리에게 허락 하시는 첫 번째 은혜는

세상에서 가벼워지는 것입니다. 가볍게 살아야 됩니다. 세상의 얽매임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메시아가 오셔서 하시는 일은

세상에 대해서 가볍게 해주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서 무겁게 진지하게 얽매이도록 하십니다.

이것이 메시아가 오셔서 하시는 구원의 역사의 핵심입니다.

 

사비나처럼 이 세상에 대해서 가볍게 살되,

무겁게 얽매일 곳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는

(정말 작가 밀란 쿤데라의 염려처럼) 허무함으로 빠질 수가 있지요,

공허함으로 빠질 수가 있지요.

 

그렇다고 또 테레사처럼 오직 토마스 라는 남자 하나를 만나서

그 남자와의 관계에 마음과 힘과 뜻을 다 퍼부어 버립니다.

이 세상의 인연에.. 즉 어머니, 자식, 사업, 비즈니스, 또 애인, 

 

이것에 온 마음과 뜻을 다 퍼부어 붓는 것,

오직 삶을 진지하게 대하는 것.. 이것도 기독교는 원치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한 진지함으로 하나님을 대하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 세상은 깃털처럼 가볍게 대하며 살라는 겁니다.

메시아가 오셔서 하시는 일 이 바로 이 일이라는 거에요.

 

 

◑메시아를 영접함을 통해 '가벼워진 삶'이란?

 

▶1. 정사

이 일이 어떻게 가능해 집니까?

한 아기가 태어났는데 그 아기의 이름이 희한해요,

그 아기의 이름이 ‘정사’입니다.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매었고… 6:6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어요,

정사라는 건 Government 즉 다스린다는 거에요, 행정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 생애에 메시아가 오시면,

이 지상의 삶에 대해서, 메시아께서 내 생애에서 통치자가 되시겠다는 겁니다.

혹은 내 생애의 회장님이 되시겠다는 겁니다.

 

▶2.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합치는 경우도 있어요. 기묘한 모사 wonderful counselor.

모사라는 건 counselor 이에요. 다시 말해서 기획실장이라는 겁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사9:6

 

기묘한 모사라는 건 뭐냐, 기획실장인데, 어떤 걸 기획 하느냐 하면,

도대체 인간의 능력과 인간의 지혜로는 따라잡을 수도/예측할 수 도 없는

정말 기기묘묘한 기가 막힌 계획들을 세워나간 다는 것이에요.

메시아가 이 땅에 오시면 내 삶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기획실장이 되신다 이겁니다.

 

▶3. 그 다음에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못 할 일이 없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마이더스 손을 갖고 있는 영업부장님 같은 것이에요.

내 생에 들어오셔서 행동대장, 행동대장 이시고 영업부장 같으신데,

만지는 것마다 돈이 되고 성공을 이루어 내는 그런 영업부장,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4. 그리고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여기서 아버지는 아니 아들 예수님이 태어나시는데

거기다 대고 이름이 ‘영존한 아버지다’

 

성부 성자 성령관계에서 아버지를 말하는 게 아니고,

아버지라고 하는 기능이 있지 않습니까? 그 기능이 뭐에요?

생명을 주고, 보호하고 그러는…

그러니까 너무 역할이 제한되기는 합니다마는

마치 보디가드처럼 나를 안전하게 지켜주시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나를 이끄시고 지켜주시는 분이... 메시아라는 겁니다.

 

▶5. 마지막에 ‘평강의 왕’

이 땅에서는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 평강,

예를 들어 스테반이 돌에 맞아 죽으면서 얼굴이 천사의 빛을 발하며

마음에 평강을 누린다. 도대체 이유가 설명이 안 돼요.

 

사도바울이 사울 시절에 살기가 등등해서

스테반을 죽이도록 분위기를 다 몰아놓고는 그걸 본 거에요,

돌에 맞아 죽는 자의 얼굴표정을 본거죠.

‘아니 어떻게 얼굴이 저렇게 평강할 수 있을까’

 

그것이 마음에 담겨져 있다가, 그 인상과 충격이 마음에 담겨져 있다가,

다메섹 상에서 깨져나갔다는 겁니다. 성경심리 학자들은 그렇게 또 이해를 해요.

 

도저히 주님이 주시는 평강은 이 세상에서는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는 거에요.

사업이 망했는데 웃고 있습니다. 주님이 평강을 쑤셔 넣어주시는 거죠,

그래 평강의 왕이라는 거에요.

 

그러니까 평강이라는 게 뭡니까, 여러분.

무슨 일이 일어나도 무겁지가 않아요,

진지하게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마음에 받아들여지지가 않는 거에요,

 

풍랑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주무십니다.

제자들은 그 풍랑 만난 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입니다. 무겁게 받아들이는 것이죠,

이 땅에서의 풍랑을…

그런데 주님은 주무세요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너무 진지하지 않으세요.

 

이 세상의 삶에 대해서 주님이 진지하신 건 뭡니까?

땀에서 피가 섞이도록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수행하는데 진지했을 뿐입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기독교인 이라는 것이에요.

 

▶한번 예를 들어볼까요?

요셉이 떠돌이 히브리인, 유목민은 안 좋게 표현하면 떠돌이 족속입니다.

그 떠돌이 족속의 아들로서,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당시 애굽은 지금의 미국 같은 큰 대국입니다. 그 대국의 총리가 되었어요.

 

떠도는 사람의 아들이 미국 같은 나라의 총리가 되기 위해서는

어떠한 진지함을 갖고 이 세상을 살면

그런 떠돌이의 아들이 히브리 족속의 아들이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있겠습니까?

 

얼마나 생을 진지하게 살아야 되겠습니까? 아무리 진지해도 총리 못해요,

요셉은 총리라고 하는 자리를 비전으로 삼고

자기가 이루고 싶은 인생의 꿈으로 정하고 그것을 향해 나가 본적이 없어요.

 

물론 꿈을 꾸었지만, 그 꿈이 애굽의 총리가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고,

총리가 되기 위해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행동도 아무 것도 없었어요.

 

그러나 요셉이 한 것이 뭡니까? 형들에게 팔려서도 마지막 고백을 보면

형들과 재회할 때 그런 고백을 하잖아요

‘형들이 나를 팔았으므로 염려하지 마세요. 내가 복수할 까봐 염려하지 마세요.

형들이 판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미리 보내신 겁니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에 나오는 사비나처럼) 형들이 배반을 한 겁니다.

요셉은 배반을 당한 거에요. 배반을 당한 입장에서 얼마나 원통하고 분했겠습니까마는

그 사실을 하나님 앞에서 해석하고 하나님의 섭리로만 이해하고

하나님에 대한 관계에 대해서만 진지합니다.

 

감옥에 가서도 그렇고, 보디발의 집에 가서도 그렇고

내 앞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생각을 갖고, 하나님에 대한 태도만 진지하게 가졌습니다.

무겁게 가졌습니다. 감옥을 가던 어디를 가던 변명 한마디 안 합니다.

그냥 가볍게 다 지나갑니다, 세상일은…

 

그러더니 너무너무 가볍게..

꿈 한 번 해석했다고 감옥에 있던 죄수가 곧바로 총리로 뛰어 올라갑니다. 

세상일은 이렇게 살라는 거에요.

 

히브리인으로서 애굽의 총리가 되는 것은, 아무리 진지하게 세상살이를 맞이하고

세상살이에서 노력해도 되지 않을 일입니다. 그저 세상에 대해선 잊어버린 거에요,

나를 배반하면 배반당하고, 감옥에 집어넣으면 감옥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배반당한 상태에서 하나님만은 진지하게 찾았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감옥에서 총리자리로 뛰어오르게 만들었습니다.

(총리 다음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총리를 원하고 있었던 귀족들과 신하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진지하게 ‘내가 다음은 총리다’ 라고 벼르고 있었던 사람이 많았을 것이에요.)

 

그러나 뜻밖에도 감옥에 있던 자가 총리가 됩니다.

이 세상의 삶은 여러분이 대통령에 출마하더라도 가볍게 살라 이거에요,

장난처럼 살라 이겁니다, 장난처럼…

 

◑적용

 

▶그러나 진지할 것은, 지금 내가 한걸음 한걸음 걷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른 것인가?

하나님을 내가 잊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이것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이 (본문의) 메시아요, (신약의) 십자가 사건이라는 겁니다.

 

십자가 사건을 무조건 붙잡고 있어요. 아무것도 생각하지 마세요,

'내가 죽었다, 주님이 죽은 것뿐만 아니라 내가 같이 죽은 거다',

이 생각을 하고 세상에 대해서 죽었다고 자꾸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

하나님과의 관계는 점점 더 친해집니다.

 

마치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라는 소설에 나오는 테레사처럼

하나님 한 분에 모든 것을 all in 하게 됩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있으면, 하나님 한 분에 대해서는 살아납니다.

 

이 세상에 대해서는 다 죽어버리는 거에요,

 

그래서 세상의 멍에, 세상의 부담, 세상의 얽매임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집니다.

자유로워진다고 공허합니까? 하나님이 무겁게 무겁게 내 마음에 자리 잡습니다.

깊이 깊이 진진하게 진지하게 자리 잡습니다.

 

▶여러분, 집에 지금 어머니가 와 계십니다.

어머니가 보시는 드라마가 있는데 ‘동이’입니다.

숙종 때 이야기를 드라마로 엮어서, 장희빈이 나오고, 인현왕후가 쫓겨나고 합니다.

드라마 내용이 뭐 진지하기 이를 데 없어요.

 

근데 그날 낮에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TV에 ‘해피투게더’가 나와요.

거기서 그런 말이 나와요. 사회를 보는 유재석 씨가

“아 뭘 그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여요? 뭐 그렇게 안색이 그냥 변하면서 그래요?” 라고…

 

‘해피투게더’에서는 진지함이 금기사항입니다.

다 웃자고 하는 얘기라는 거에요.

그러나 사극 ‘동이’는 너무너무 진지합니다.

장희빈이 자기가 불리한 정치적 판국을 역전시키기 위해서

일부러 자작극으로 독물을 마시고 난리가 났어요. 진지함이 이를 데 없습니다.

무겁기가 이를 데가 없어요.

 

그러나 ‘해피투게더’에서는 진지한 얘기를 해선 안 돼요,

진지한 얘기를 하더라도 웃자고 하는 얘깁니다.

여기서 정답이 나오는 거에요.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으면 어떻게 삶이 변합니까?

하나님의 관계는 '사극 동이'로 변합니다. '동이'처럼 진지해 집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삶은 '코미디 해피투게더',

세상에 대해서 죽어야, 해피투게더 가 된다는 거에요.

 

사람들과 더불어 해피하게 살고 싶습니까?

추수 때의 기쁨을 가지고, 전쟁 때 노획물을 나누는 기쁨을 가지고 살고 싶습니까?

그러면 메시아 주님 되시는 그분의 십자가에 같이 매달려라 이겁니다.

날마다 그렇게 매달리다 보면 이 세상에 대해서 죽으면서

이 세상에 대해서 죽는데, 세상살이가 해피해 지기 시작 한다는 것입니다.

가벼워져야 해피해 집니다.

 

진지하고 무겁게 ‘내가 총장이 돼야지’, ‘내가 장관 돼야지’

‘우리 아들이 서울대 들어가야지’, ‘금년 말에는 수익을 어느 정도 까지 올려야지’,

이렇게 살지 마요, 이세상은 가볍게 게임하듯이 사는 겁니다.

 

▶지금 남아공 월드컵 시즌인데, 우리 국민들이 너무 진지하게 월드컵을 바라봐요.

다 즐겁게 살자고 하는 거에요, 너무 진지하게 그러지 마세요,

그저 이세상은 가볍게 세상에 대해서 죽어버려요,

 

밀란 쿤데라의 소설 얘기처럼, 그냥 공허하다 느껴질 정도로 가볍게 죽어버려요, 세상에 대해서는…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서만 진지한 마음을 유지합니다.

 

그러고 보면, 회장님(정사) 되시고, 기획실장님(기묘한 모사) 되시고.

마이더스 손과 같은 영업부장님(전능하신 하나님)되시고

아버지와 같은 마음으로 나를 지키시고(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을 쑤셔 넣어서라도 내게 행복을 허락 하시려는(평강의 왕)

메시아 그리스도가 내 안에 들어오셔서 내 삶을 살게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 아버지, 돈이 없다고 너무 무겁게 마음을 먹고 살았습니다.

몸이 불편하다고 너무 무겁게 살았습니다.

자녀문제로 너무 무겁게 살았고 결혼문제로 너무 무겁게 살았습니다.

주님 십자가에서 그 무거웠던 모든 멍에들이 다 깨어져 나가게 하여 주시옵시고

오직 진지함과 무거움이 하나님을 향한 마음만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이세상에서 한 없이 가볍게 해피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                                           

 

'분류 없음 > 2010'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태초의 신혼여행 2627  (0) 2010.09.01
자살 충동은 잠깐의 착각 2625  (0) 2010.09.01
바울의 에베소 교회를 향한 기대 2620  (0) 2010.08.28
제사장직과 그 승계 2618  (0) 2010.08.26
모략과 재능의 신  (0) 2010.0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