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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에베소 교회를 향한 기대 2620

LNCK 2010. 8. 28. 09:02

◈바울의 에베소 교회를 향한 기대                     엡1:15-23                         10.07.25.설교스크랩



◑사도바울의 기도와 기대


이로 말미암아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1:15~16

 

교육 심리학에서 사용되는 말 중에 <피그말리온 효과 Pygmalion Effect>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피그말리온이라는 이름의 왕이 있었는데

그가 ‘여인 조각상’을 만들어 놓고 너무 너무 좋아하고 사랑한 나머지

이 조각상이 실제로 내 여인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소원하고 기대했더니

‘미의 신’ 아프로디테가 그 소원을 들어주어서

그 조각상을 실제로 아름다운 여인이 되게 했다는 데서 유래한 말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에 대해서 가지는 강력한 소원이나 기대는

실제로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이 스토리가 교육학습의 마당에 적용되어 <기대가 학습효과를 높인다>는 이론으로

사용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기대 강력한 소원만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 질수 있느냐?'

의문을 품고 출현한 또 하나의 교육이론이 있는데

<기대가치 이론 Expectancy-Value Theory>이라고 부릅니다.


어떤 일이 성공적으로 동기가 부여되고 성취되기 위해서는 <기대 +가치>,

다시 말하면 우리가 기대하고 추구하는 일이

그만큼 가치가 있는 일이라는 확신이 동시에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가치’의 확신이 없이 시작하면, 기대를 향한 노력이 하루아침에 무너지기도 하고, 기대가 이루어진대 해도..

결국은 후회로 끝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인생의 허무감이나 배신감은

우리가 추구했던 많은 일들이 결국은 헛되고 헛된 일,

가치가 없는 일이었다는데서 발생합니다.


구약 전도서는 유명한 솔로몬 왕의 고백은,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말로 시작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전도서의 기자는 전도서의 마지막 장에서

인생을 걸만한 그가 발견한 궁극적인 가치를 고백합니다.

전도서의 결론을 기억하십니까? “일의 결국은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전12:13)


오늘의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그가 사랑했던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향한

그의 기도와 그의 기대를 고백합니다.


아니 그의 기대를 기도로 말합니다. 성도들의 기대의 표현은 언제나 기도입니다.

자식들을 향한 기대가 있다면, 우리가 그것을 기도로 말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 바울사도의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위한 기도의 본문에서

우리는 그의 기대를 발견하게 됩니다.


본문에 나타난 이 기대는 실로 모든 시대의 성도들이

우리가 서로를 향하여 가져야 할 가장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기대를 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서로를 향하여 가져야 할, 가장 가치 있는 기대와 기도는 과연 무엇일까요?  ←문제 제기



◑1.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가기를 기대 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엡1:17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이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통하여

그를 알게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합니다.   주1)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영적 성숙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런 하나님을 알아가는 영적 성숙이 없이

삶의 진정한 만족도 충만도 없을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를 이해하는 열쇠 단어가 둘이 있는데 풍성(1:7,18)과 충만(1:23)입니다.

이 단어들을 계속되는 에베소서 강해를 통해서, 앞으로 계속 만날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이 풍성하고 충만한 삶입니까?


한마디로 우리의 창조자이신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 속에

그 분을 ‘알아가는(기노스코)’ 인생이 될 때, 풍성하고 충만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무엇으로 무한하시고 전능하시고 절대자이신 하나님을

깊이 알아갈 수 있습니까?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했습니다. 엡1:17


성령은 지혜의 영이시고, 계시의 영이십니다.

성령의 도움이 없이 우리는 그를 알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아감>은 단순한 지적 작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고전2:10을 보십시오.

“오직 하나님의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 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그래서 바울 사도는 우리가 하나님을 깊이 알기 위해서는

에베소서 5장에 가서 무엇보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엡5:18



◑둘째, 우리의 영적인 눈이 밝아지기를 기대 했습니다.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1:18


우리가 서로를 향하여 가져야 할 또 하나의 기대는

우리의 영적인 눈이 밝아지는 일입니다. 


바울은, 성도의 마음눈이 밝아지면, 3가지가 보인다고 말합니다.

이 세 가지가 보이면 우리의 인생은 어떤 상황, 어떤 환경 속에서도 당당해 질수가 있고,

풍성하고 충만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3가지가 무엇일까요?

“소망, 풍성, 능력”입니다.


1:18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19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이것들이 바로 우리 성도들을 위해 예비 된 것을 볼 수 만 있다면

우리는 주눅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을 보는 눈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좌절하고 절망하고 낙담하는 것입니다.


▶1. 소망

절망의 반대가 무엇일까요? 소망입니다.

사람들이 절망하는 것은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자살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살아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살아야 할 이유가 바로 소망이 아닙니까!


그런데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예수를 믿는 순간

우리에게 어떤 경우에도 사라지지 않는 소망이 우리 안에서 태어난다고 말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것을 ‘산 소망’(Living Hope)이라고 말합니다.

죽을 수 없는 소망, 없어지지 않는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천국의 소망’이라고 말합니다.

이 천국의 소망은 막연하게 우리가 죽으면 천국 간다는 식의 소망만이 아니라,

우리가 목말라하며 추구하던 모든 가치들이 완벽하게 실현되는 영적 풍성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2. 풍성

그리고 오늘의 본문은 이런 ‘기업의 영광의 풍성’,

우리에게 상속주시고자 예비하신 부요함을

우리가 이 땅에서부터 풍성하게 누리고 살 수 있도록 하십니다.


▶3. 능력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던 부활의 능력으로

오늘의 우리와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소망, 이런 영적 풍성함, 이런 능력이 함께 한다는 것을

우리의 눈이 열려 볼 수만 있다면, 우리의 인생을 사는 자세는 얼마나 당당하겠습니까?


    여러분, 부활하신 예수님이 (성령님의 모습으로) 당신 속에 내주하고 계신 것을

    알고 계십니까? 확신하고 계십니까? 매일 묵상하고 계십니까?

    이 사실을 6개월만 매일 잠시라고 묵상해 보십시오.

    당신은 분명히 ‘부활의 능력’을 소유하게 되실 것입니다.

    물론 위에서 말한 ‘소망’과 ‘풍성’도 얻게 되실 것입니다.



◑셋째, 교회 사역의 영광을 깨닫기를 기대 했습니다.  


“또 만물을 그의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이니라” 1:22~23


▶1. 교회는 세상의 중심

이 말씀은, 이해가 쉽지 않은 말씀입니다.

에베소 성도들을 향한 기대를 모아 그들을 위해 기도하던 바울 사도가

여기서 갑자기 마지막 대목에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를 말한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이 부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유진 피터슨의 번역성경 <메시지>에서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교회는 세상의 변두리가 아니라, 세상의 중심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분은 교회 안에서 활동하시며

     교회를 통해 만물을 자신의 임재로 가득히 채우십니다.”


초대교회는 지금의 교회와 비교한다면

정말 한줌의 세력도 안 되는 미미한 공동체였습니다.

특별히 당대의 세상을 지배하던 로마의 권력과 비교하면

정말이지 교회는 초라한 핍박받는 공동체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교회가 세상의 변두리가 아닌, 세상의 중심이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 교회를 통해, 하나님은 만물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2. 교회의 영광

바로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예수께서 사용하시는 공동체의 한 지체로서 살아감이

얼마나 놀라운 영광스러운 특권인가를 일깨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에베소서 3장에서는 이 교회를 ‘하나님의 비밀’이라고,

5장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선포합니다.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함이라” 5:26~27


▶교회가 주님의 기대에 못 미칠 때

물론 지상의 교회는 끊임없이 그 연약함과 부족함을 노출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교회를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주님의 기대에 영 미치지 않으실 때

교회의 머리요 주인 되신 주님은 교회를 깨끗하게 하는 일을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의 개혁입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교회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교회는 유일한 세상의 소망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아니면 어디서 사람들이 구원의 복음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교회가 아니면 어디서 사람들이 영적 성숙을 경험하겠습니까?

그래서 에베소서의 쌍둥이 서신으로 일컬어지는 골1:24-25에서

그는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한 어떤 고난도 기꺼이 감수하고

교회를 기쁜 마음으로 섬기겠다고 고백합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내가 교회의 일꾼이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골1:24~25


이 하나님의 말씀 곧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영광스런 교회 사역을 위해

어떤 고난도 감수하고 기쁘게 섬기겠다는 것입니다.


주1)

    지금 바울은 에베소의 성도들이 하나님을 진정 알게 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의 ‘알다’(에피기노스코)란 피상적인 정보나 지식을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구약 히브리어로 표현하면 ‘야다’입니다.

예컨대 아담이 그 아내를 ‘알았다’고 말할 때

그것은 깊은 관계에 들어갔다는 의미입니다.


저는 미국 대통령 오바마를 알고 있습니다. 그에 대한 많은 정보를 갖고 있습니다.

그는 흑인 아버지와 백인 어머니사이에서 태어났고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고,

그의 아내의 이름은 미셀이고그러나 그것으로 제가 정말 오바마를 알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저는 한 번도 그를 만나본 적이 없고 대화를 한 적도 없습니다.

저는 그런 의미에서 아직도 오바마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제가 오바마와 어떤 관계를 맺으려면 그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그와의 개인적 만남과 지속적인 교제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 교회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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