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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하시는 하나님

LNCK 2010. 9. 13. 09:13

◈심판하시는 하나님                                롬2:1-16                    류호준 목사님 설교 스크랩

                                                                                          

 

◑교회의 오래된 관심 : 최후의 심판


유럽 여행을 하다보면, 가는 곳 마다 미술관들이 얼마나 많은지 놀랍니다.

그리고 오늘의 설교의 주제와 관련이 있는 작품들이 얼마나 많은지

또한 수많은 세기에 걸쳐 유럽인들이

‘최후의 심판’이란 주제에 얼마나 많은 영향과 영감을 받았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심지어 그들이 얼마나 ‘최후의 심판’에 집착하고 몰두했는지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유럽의 미술관들에는 그리스도를 심판자로 묘사하고 있는 그림들이 수천 개가 있습니다.

이른바 ‘백보좌(白寶座) 심판대’의 그림들 안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일관되게 들어있습니다.


․ 재판장이신 그분의 오른 편에는 축복 받은 군중들이 있고

․ 심판자이신 그분의 왼 편에는 저주받은 불쌍한 영혼들이 있습니다.


축복 받은 사람들은 서로가 얼싸 앉고 즐거워하는 표정들이고

저주받은 사람들은 일그러진 얼굴로 고통하고 있습니다.

어떤 한 그림에는 저주받은 사람들이 서로를 뜯어 먹고 있는 장면이 있는데,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자신의 살을 뜯어 먹고 있습니다.


상당히 최근에 이르기까지 ‘최후의 심판’은 서구 예술가들에게

가장 심오한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중요한 주제들 중의 하나였습니다.


․ ‘최후의 심판’은 중세기의 문학에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된 주제이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단테의 신곡(神曲, Divine Comedy)에 나오는 지옥편 중 최후의 심판 장면을

  연상하면 될 것입니다.


․ 유럽의 몇몇 대성당 입구 위에는 ‘최후의 심판’ 장면을 돌로 깎아(浮彫) 만들어 장식해 놓았습니다.


‘최후의 심판’은 수많은 설교에도 반복적으로 다루어졌습니다.

북미 대륙에서 최후의 심판을 주제로 한 최상의 걸작 설교는

아마 미국 대 각성 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한 조나단 에드워즈의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있는 죄인들”이라는 설교입니다.


논란의 여지없이 미국 종교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설교일 것입니다.

(1741년 7월 8일 코네티컷 엔필드에서 행한 설교)


예일 대학교 총장을 지낸 조나단 에드워즈(1703-1758) 목사는

실제적으로는 아주 조용하고 유순한 설교자였으며

설교할 때는 머리를 숙여 원고를 보며 설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옥에서 고통 하는 광경을 너무도 생생하게 묘사하였기 때문에

그 설교를 듣던 청중들은 소리를 지르며 신음하였고

심지어 마룻바닥에 쓰러지며 나동그라지기 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후 세상은 많이 바뀌었습니다.

오늘날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교단이나 교회에서

‘최후의 심판’이란 주제에 설교 전체를 쏟아 바치는 목사는 매우 드뭅니다.

마치 이 주제는 많은 사람들이 금방 잊어버리게 되는 신화의 시대에 속한 주제나

되는 듯 생각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최후의 심판이란 주제는 중세의 신화에 속하는 전설이며

현대인들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원시적인 상상 정도로 생각합니다.


더욱이 사람의 감정을 매우 중요시하는 현대인들에게

‘최후의 심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거나 설교한다는 것은

꺼림칙하고 아주 어색한 주제라 생각합니다.


더더욱 초신자 사람들이나, 혹은 ‘현대적 구도자’(기독교에 호감 있는 불신자)

들에게는 매우 불친절한 주제일 것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좋으신 하나님

우리가 흔히 듣는 메시지는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은 현대 대한민국을 심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용서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마음씨 좋으신 분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문화는 하나님은 용서하시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슨 짓을 하든지, 우리가 무엇을 믿든지 상관없이,

우리를 축복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생각합니다.

너무 마음씨 좋으시고 관대하시고 관용적인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강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당연한 요구 권리가 된 것 같습니다,

달리 말해, 아무 것도 요구하시지 않는 마음씨 좋은nice 하나님,

모든 것을 주시는 하나님,

무차별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은혜와 복을 주시는 분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고방식 안에는 ‘최후의 심판’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런 문화 안에는 ‘최후의 심판’을 위한 자리는 없습니다.



◑심판하시는 하나님


▲정직한 입장에서 복음서를 읽어보면,

그러나 복음서를 주의 깊게 읽어보신 분이 있다면

이런 생각이 전혀 어울리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은 심판에 대해 누누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입에서 심판이란 말이 떨어지질 않습니다.

가시는 곳마다 그는 늘 심판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한 번은 예수님께서 도시 전체를 정죄하시고 저주를 퍼부으신 일이 있었습니다.

즉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고

그분의 설교를 거절하자 다음과 같이 책망하셨습니다.


재앙이 있을 것이로다. 고라신아

화가 있을 것이로다.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마11:20-22


예수님은 종종 바리새인들을 향해 독설을 내뱉었습니다.


이놈들아, 뱀 새끼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마23:33


그뿐 아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왕적 통치에 복종하지 않아, 저주를 받게 될

사람들에 대해 무서운 심판에 관한 이야기들을 수없이 들려주셨습니다.


하나만 예를 들면, 어떤 왕이 대 연회를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 가운데 예복을 입지 않은 손님들이 있는 것을 보자

그는 하인들에게 명을 내려 그 사람들의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던져버려 그곳에서 울며 이를 갈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왕적 통치에 복종하지 않아 저주를 받게 될 사람들에 대한

최후의 심판 비유 가운데 한 토막입니다.  마22:11-13


▲심판에서 면제되는 것은

 

․ 인간의 권리도 아니고

․ 인간이 누리는 당연한 권한도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고 바울은 로마서 2장에서 힘주어 말씀하고 있습니다.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2:9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2:28 등


하나님의 심판이 모든 사람에게 닥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 관련글 모음

             

▲괜찮은 사람들: “나는 아닌데…”

그런데 바울이 로마서 2장에서 말하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은 그런 심판에서 제외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누굽니까? 어떤 종류의 사람들입니까?


․ 이방인들을 우습게 여기는 유대인들이었습니다.

․ 그들은 높은 도덕적 기준을 갖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방인 사회의 도덕적 저하와 부패를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입니다.


․ 그들은 바울이 로마서 1장에서 지적하고 있는 죄들이

  자신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 우리는 도덕적으로 성적으로 문란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 저속한 정욕과 욕망에 끌려 다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 우리는 게이나 레즈비언들처럼 성적으로 문란하게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 우리는 질투와 시기와 살인과 분쟁과 속임으로 가득한 자들이 아닙니다.


․ 우리는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들도 아닙니다.

․ 우리는 자만하거나 뽐내는 사람들도 아닙니다.

․ 우리는 악을 만들어내는 사람도 아닙니다.

․ 우리는 사회의 도덕성을 지켜내는 수호자들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강한 어조로 말합니다.

“잘 들어보시오. 당신들은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도덕적으로 한 치 아래로 깔고 내려 보는 사람들보다 당신들이 나은 줄 아십니까?


천만에 말씀입니다. 실제로 당신들은 그들 보다 더 좋지 못합니다.

게이나 레즈비언이나 도덕적으로 불량한 사람들보다 당신들이 더 악하고 나쁩니다.

왜냐하면 당신들은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당신들은 ‘자기 의(義)’ (self-righteousness)가 강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의롭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좀 더 쉬운 말로 해서 자기들을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자기 의(義)’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이 갖고 있는 ‘자기 의’를 드러내기 위해,

즉 그들의 도덕적 자만(moral pride)이 얼마나 허상인지를 폭로하기 위해

그들에게 두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1. 바울의 첫 번째 질문: 교만에 관하여   롬2:1


바울이 던진 첫 번째 질문은 이렇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지적함으로써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당신들의 잘못들을 보지 못하시고

당신들을 심판하시지 못하시는 줄로 알고 있는데

그렇다면 여러분은 한참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롬2:1~3)


당신들이 깔보는 이방인들만, 비도덕적인 이방인들만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줄로 안다면.. 크게 오해하는 것이오.

잘 난 당신들, 스스로 괜찮다고 생각하는 당신들도

반드시 최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을 것입니다.” 고후5:10


▲교만이 더 무서운 죄

바울은 여기서 그들의 도덕적 우월성, 그들의 도덕적 교만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교만은 “가장 큰 죄악”이라고 C.S. 루이스가 말한 적이 있습니다.

가장 큰 죄악은 성적 문란이 아니라 교만이란 말입니다.


많은 크리스천들은 성도덕(性道德)을 기독교 도덕성의 중심부에 놓습니다.

기독교인들이 도덕성을 말할 때마다 기준으로 삼는 것은

그들이 성적으로 얼마나 정결하게 살고 있는지 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성적인 죄가 가장 큰 죄악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로마서 1장에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성적인 죄라고 생각합니다.


․ 자연스런 성적 관계를 부자연스런 성적 관계로 바꾸는 것

․ 서로 간에 불타오르는 성적 욕망

․ 남자가 남자를 향하여 수치스런 행위를 자행하는 것

․ 여자가 여자를 향해 부끄러운 짓을 하는 것

․ 음행과 간음


물론 이러한 성적(性的) 죄들은 말할 것도 없이 나쁜 일입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성적 죄들은 모든 죄들 가운데 덜 나쁜 죄입니다.

아마 놀라시는 분들이 있는 것 같은데 사실이 그러합니다.


모든 죄들 가운데 가장 끔찍하고 나쁜 죄가 있다면 ‘영적 죄들’(spiritual sins)입니다.

그리고 영적 죄들 가운데 죄질이 가장 무겁고 나쁜 죄가 ‘교만’(hubris)입니다.


․ 교만은 모든 죄들의 어머니입니다.

․ 교만은 모든 죄들을 부화하여 새끼를 치는 둥지입니다.

․ 교만은 왕초 죄입니다.

․ 교만은 비참의 주된 근원입니다.

․ 교만은 하나님을 반대하는 마음의 상태입니다.

․ 교만은 완전 ‘안티-하나님’(anti-God) 마음입니다.


“… 보다 더”

왜 그렇습니까? 본질적으로 교만은 비교적이기 때문입니다.


․ 교만은 자신이 똑똑하기 때문에 즐거워하지는 않습니다.

  교만은 자기가 누군가보다 더 똑똑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쾌락을 느낍니다.


․ 교만은 자신이 단순히 예쁘거나 잘났기 때문에 즐거움을 느끼지는 않습니다.

  교만은 다른 사람보다 더 예쁘거나 잘났기 때문에 즐거움을 느낍니다.


․ 교만은 단순히 성공했기 때문에 즐거워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만은 다른 사람보다 더 성공했다고 느끼기 때문에 즐거워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할 때 비로소 교만하게 됩니다.

․ 다른 사람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생각할 때 느끼는 쾌감

․ 다른 사람보다 더 예쁘고 똑똑하고 잘산다고 생각할 때 느끼는 즐거움

이런 것들이 교만입니다.


▲교만은 본질적으로 경쟁적이기 때문에


․ 항상 사람들을 떼어 놓거나 나눕니다.

․ 항상 파당과 분파를 만들어 냅니다.

․ 항상 적대감을 조성합니다.

․ 항상 지옥을 만듭니다.

․ 지옥이기에 항상 그의 마음을 타오릅니다.

․ 지옥이기에 항상 그의 마음은 차디찹니다.


교만할 때 우리는 누군가를 내려 깔고 봅니다.

마치 낙타의 내려 깐 눈(眼)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행동하는 동안

우리가 눈을 내려 깔고 누군가를 쳐다보는 동안


․ 우리는 결코 위를 쳐다 볼 수 없을 것입니다.

․ 우리는 여러분 보다 위에 계신 하나님을 올려다 볼 수 없습니다.


어거스틴은 그의 저서『고백록』Confessions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교만한 자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지닌 지식이 아무리 깊고 심오하다 하더라도,

심지어 하늘의 별들과 바다의 모래알들을 셀 수 있다 하더라도,

천체의 은하계와 행성과 항성과 유성의 길들을 측량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그렇습니다. 교만한 자는 결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자, 다시금 로마서 2:1을 읽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다른 사람을 판단할 때, 그 사람이 누구이든 상관없이,

그 사람은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함으로써(비교, 경쟁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정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도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으므로, 자기 자신을 판단하는 셈입니다.’


▲도덕성이 필요하지만 구원의 조건은 아닙니다.

기억하십시오.

 

․ 우리가 도덕적으로 우월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은 아닙니다.

․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은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 때문입니다.


시편의 한 성도는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당신께서 사람의 죄를 살피신다면

주여, 감당할 자 누구이리까?

그러나 용서하심이 당신께 있사오니

이에 당신을 경외(敬畏)하리이다.”  시130:3-4


그렇습니다.

- 우리가 세상을 향해 증언할 것은 “우리가 얼마나 도덕적인가를 보시오!”

   라는 것이 아닙니다.

- 세상을 향한 우리의 증거는 항상

   “하나님의 용서하심이 얼마나 크고 위대한지 보시오!”여야 할 것입니다.

 

▲2. 바울의 두 번째 질문: “싸구려 은혜”  롬2:3~4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롬2:4


바울이 로마서 2장에서 말하고 있는 대상은 도덕적으로 교만한 자들입니다.

다 스스로를 ‘그래도 괜찮은 사람들’이라고 자부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신들은 도덕적으로 그리 나쁘지 않은 사람들,

그나마도 올바른 삶을 살려고 무던히 애쓴 사람들이라고 자부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의 도덕적 자부심과 자만심의 허구를 드러내기 위해

바울은 두 번째 질문을 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은 친절하시고 마음씨 좋으신 분이기 때문에

당신이 그분의 낚시 바늘에서 벗어날 줄 아십니까?

차라리 처음부터 “하나님은 친절하시고 좋으신 분이시다(kind)

그러나 그분은 나긋나긋하신 분은 아니다(soft)” 라고 생각했었더라면 더 좋았었을 것이오.


기억하십시오. 진정한 친절(헤세드)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친절하시기 때문에 그분은 우리를 그분의 손으로 꽉 잡고 계시는 것이며,

친절하시기 때문에 상상을 초월하는 새로운 삶 속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롬2:4절, 유진 피터슨의 번역).


바울이 말씀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 종종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 마음대로 생각합니다.

․ 종종 우리는 하나님의 친절하심과 오래 참으심을 우리 마음대로 해석합니다.

․ 종종 우리는 하나님은 친절하시고 오래 참으시고 용서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전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어느 정도는 눈 감아 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매번마다 이렇게 생각하거나 그에 따라 행동한다면,

달리 말해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 마음대로 갖고 논다면,

․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싸구려로 만드는 것입니다.

․ 우리는 값비싼 은혜를 값싼 은혜로 환원하고 축소시키는 것입니다.

․ 이것이 본회퍼가 말하는 ‘값싼 은혜’, (‘싸구려 은혜’, ‘짝퉁 은혜’) 입니다.


값싼 은혜란

․ 값을 지불하지 않는 은혜입니다.

․ 제자도가 뒤 따르지 않는 은혜입니다.

․ 십자가를 지지 않는 은혜입니다.


싸구려 은혜, 짝퉁 은혜는 말하기를,

․ 용서는 값싸게 얻을 수 있다.

․ 용서는 쉽게 주어진다.

․ 하나님의 친절하심을 남용하고 가볍게 여기며 가지고 놉니다.

․ “하나님은 마음씨 좋으신 분”이라는 사실을 자기 입맛에 맞게 우려먹습니다.

․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자신의 취향에 맞춥니다.


이러한 값싼 은혜, 싸구려 은혜, 짝퉁 은혜에 반(反)하여

복음은 값비싼 은혜를 말합니다. 복음이 말하는 값비싼 은혜란 무엇입니까?


값비싼 은혜란,

․ 값비싼 은혜란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의 생명을 내어주어야 했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엄청난 값을 치러야 했다면 우리에게도 결코 싸구려는 아닐 것입니다.


․ 값비싼 은혜란 들판의 땅 속에 숨겨진 보물입니다. 그 보물을 얻기 위해서

  사람들은 가서 기꺼이 자신들이 갖고 있는 모든 재산을 다 팔 것입니다.

  값비싼 은혜란 그런 것입니다.


․ 값비싼 은혜란 엄청나게 비싼 진주와 같습니다. 그 진주의 가치를 아는 보석상인은

  자신의 온 재산을 팔아 그 진주를 삽니다. 값비싼 은혜란 그런 것입니다.


․ 값비싼 은혜란 그리스도가 왕으로서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그분을 위해서

  사람들은 죄를 짓게 하는 눈을 기꺼이 뽑아낼 것입니다. 값비싼 은혜란 그런 것입니다.


․ 값비싼 은혜란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입니다. 그 부르심의 엄청난 가치

  때문에 제자들은 자신들의 그물과 배를 뒤로 하고 그분을 따랐습니다.

  값비싼 은혜란 그런 것입니다.


․ 값비싼 은혜란 다시금 찾고 또 찾아야할 복음입니다.

 

․ 값비싼 은혜란 “제발 저에게 주십시오!” 라고 구걸하고 또 구걸해야할 선물입니다.

 

․ 값비싼 은혜란 두드리고 또 두드려야할 문입니다.


그러한 은혜는 언제나 비쌉니다.

․ 왜냐하면 우리의 생명을 지불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 그리고 그것이 은혜인 것은 우리에게 단 하나의 참된 생명을 주기 때문입니다.

․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기의 아들을 내주어야했기 때문입니다.

․ 그리고 그것이 은혜인 것은 은혜는 죄인들을 의롭다 하기 때문입니다.

․ 그리고 그것이 은혜인 것은 은혜는 “아들아, 괜찮아! 괜찮아”,

   “딸아, 이젠 됐어! 울지 마! 눈물을 닦아!”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런 은혜가 값비싼 은혜인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위해 그의 아들의 생명을 대신 지불하시면서

그를 죽음에 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엄청난 값을 지불하셨는데, 어찌 그것이 우리에게 싸구려일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분은 그 마지막 순간에 입술을 꽉 깨무셨습니다.

차마 아들의 죽음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아들의 생명을 바쳐가며 우리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정말로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이것이 은혜의 복음입니다.

값비싼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마십시오. 고후6:1 아멘.                                           ▣ 죄, 복된 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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