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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보시기에 온전한 삶 2649

LNCK 2010. 9. 15. 15:16

◈하나님 보시기에 온전한 삶                      전6:1-6                          -출처보기, 정리-

                                                                                                          *원제목 : 완벽함과 위대함은 강 건너 불이 아니다   


▲김연아 선수의 피겨가 완벽한 이유 

“이제까지 피겨 스케이팅의 모든 역사를, 완전히 새로 갈아 치워버렸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역사상 한 번도 보지 못한 놀라운 피겨 스케이팅을 보고 계십니다.”

“빙상얼음과 하나가 되었고, 얼음 위에 날아서 다닙니다.”

“점수가 몇 점이건 간에, 저런 연기는 점수와 관련이 없습니다.”(점수를 매길 수 없을 정도다)


그 외에도,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김연아 선수에게 쏟아진 찬사는 부지기수입니다.

일일이 소개 안 해도, 여러분이 다 들어서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실 저는 피겨 스케이팅에 대해 전혀 몰라요.

저게 과연 잘 하는 것인지, 저게 과연 역대 세계 최고 정상인지..

그런데 김선수가 잘했다는 것을 제가 어떻게 아는가요?

신뢰할만한 해설자(전문가)와 언론이 잘 했다고 극찬을 하니까, 잘 한 줄 아는 것입니다.


(만약 그 비디오를, 피겨에 대해 전혀 문외한인 아프리카 원주민들에게 보여주면,

잘 한다는 것은 느껴도, 그게 세계최고요, 역사상 제일 잘 한 것인 줄은 모를 것입니다.

전문가들이나 아는 것이죠.)


그런데 문외한인 우리가 그 해설가/전문가들의 말을 듣고, 심판들의 점수가 나오고,

환호성이 질러지고, 그 점수(역사상 가장 높았다는 점수)의 의미를 설명해줍니다.

그러니까 그가 위대한 성적을 낸 줄 알지,

아무런 해설 없이 그저 ‘150점 받았다’ 그러면..

보통 사람들은 ‘잘 받은 건가? 200점에 많이 모자라네.’ 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생각해 봅니다.

    내 삶, 내 인생의 해설자가 누구신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을 올바로 평가해 주시고, ‘참 좋다’해 주실 때

    비로소 내 인생에 만족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설명드립니다.

‘내 인생의 위대함’이 어떻게 생성됩니까?

 

김연아 선수가 있는 힘을 다해 열심히 집중을 해서 연기를 했습니다.

그러나 피겨에 비전문가인 제가 볼 때는, 아무 것도 몰라요.

잘 한다는 것은 알겠지만, 그게 역대 세계최고라는 것은 모릅니다.


그런데 전문가가 해설을 해줍니다.

트리플 악셀, 러츠.. 하는데 저는 들어도 잘 모르겠어요.

그리고 심판들의 점수가 150.06으로 나왔을 때, (우리는 그 의미를 잘 모르죠.)

그러나 해설자가 그 점수의 의미를 설명해 줄 때,

우리는 그 선수에 대해 완전히 위대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문가의 해설이 없고, 심판의 점수가 없을 때는,

김연아의 연기 자체만 힐끔 힐끔 단편적으로 장면을 볼 때는

뭐가 잘하는 건지 사실 잘 모르겠어요. 별로 큰 감동도 없어요.


     무슨 뜻이냐 하면,

     해설자의 평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만약 내 인생에 대해, 하나님이,

     내 인생이 아무리 굴곡지고 환란이 많더라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토브)더라.’

     그러면 나는 완벽하고, 온전한 인생을 사는 것이고,


     만약 전문가 되신 하나님의 ‘토브 good’ 평가가 내려지지 않으면,

     내가 아무리 출세하고, 돈을 많이 벌어도... 실패한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전문가, 해설자(하나님)의 평가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세상 사람들이 위대하다고 하는 것, 이제 전문가 하나님의 해설을 들어봅시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돈 많이 번 게 위대합니다.

돌아가신 이병철 씨, 정주영 씨, 얼마나 위대합니까?

세상의 가치 기준을 따라 볼 때, 그들은 자수성가하고, 돈을 엄청나게 벌었습니다.


근데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 세상의 전문가이신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그분의 해설이 ‘위대하다’고 나오질 않는다는 얘기에요.

심판이신 분께서 점수를 주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위대함과 감동과 완벽함과 아름다움이 생성이 되지를 않더라는 겁니다.


 

▲솔로몬이 발견한 인생의 통찰력

전도서 6장 본문에서 ‘행복’이라는 말이 두 번 나오는데, (3절, 6절)


6:3, 사람이 비록 백 명의 자녀를 낳고 또 장수하여 사는 날이 많을지라도

그의 영혼은 그러한 행복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위 밑줄 친 말에서 ‘행복’의 단어 뜻이 히브리어로 ‘토브’인데,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토브, good)’

할 때 쓰인 단어와 똑같습니다.

 

즉, 전도서의 ‘행복’이라는 단어가, 창세기의 ‘좋았더라’ 단어입니다.

이 좋았더라고 하는 단어 토브의 뜻이 뭡니까?

(사전에 보면) 즐거움, 기뻐함, 좋음good, 최고excellent.. 이런 뜻들이 있습니다.


전6:6, 그가 비록 천 년의 갑절을 산다 할지라도 행복을 보지 못하면

마침내 다 한 곳으로 돌아가는 것뿐이 아니냐


‘천년의 갑절을 산다’ ... 즉 2천년을 장수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만족해야죠. 히브리어로 ‘토브 / 좋다, 좋았더라’ 해야죠.

그런데 ‘행복을 보지 못한다’니 무슨 말입니까?


장수long living가 ‘좋은 것/토브’가 되려면,

전문가이신 하나님이 그의 삶을 보시고, ‘좋았더라’고 인정해 주실 때만,

그게 우리 삶에도 좋은 것입니다.


그런 ‘전문가’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천년의 갑절을 산다 한들.. 그것은 ‘좋은 것/토브’이 아닙니다.

 

이 세상이 정한 완전함, 위대함

그것들이 내게 다 있는데도, 내가 행복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내 삶은, 오직 전문가/하나님께 인정을 받을 때만 ‘좋았더라/토브’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사도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서 섭니다.

두 사람중에 누가 더 위대합니까?

물론 왕이 위대합니다.

 

누가 더 완벽합니까?

왕이 완벽합니다. 이 세상에서 볼 때…


누가 아름답습니까?

사도바울은 묶여 있는 거지입니다. 행색은 왕이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이 말합니다.

이 세상 삶에 대해 전문가이시고 심판이신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십자가를 붙잡고 날마다 죽으며,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 사랑에 목숨을 걸고 있고,

 

내가 시키는 바를 위하여 온갖 고난을 무릅쓰고 말씀을 전하고 있으니

내가 보기에 ‘너는 완벽하다’ 라고 감탄하시는

해설자 되시는 하나님 말씀이 사도바울을 담대하게 해 줍니다.


그리고 왕 앞에서 하는 소리가, “왕이시여! 나처럼 되기를 바랍니다.”

 

이거 정신병자지요. 감히 누구 앞에서 나처럼 되기를?

지금 묶여 있는 거지꼴입니다. 죄수의 형색입니다. 왕보고 나처럼 되라는 겁니다.


이게 바로 만족이라는 것이에요. 이럴 수가 있나요?

 

집도 없습니다.

우리만큼의 돈도 없어요. 사도바울이… 아무 것도 없어요.

그러나 왕 앞에서 '나와 같이 되라' 얘기합니다.

(괜히 한 말이 아니에요. 객기 부리려고 한 말이 아닙니다.)

 

왜요?

하나님께서 바울(자기)에게 향하여,

'내가 보기에 너는 아름답다, 너는 완벽하다, 너는 위대하다’ 라는 말씀을 해주신다는 겁니다.

 

그럴 때 내 마음에 감동이 오고 만족이 오고 행복이 온다는 것이지요.

 

▲욥의 온전함

하루는 하나님이 사탄에게 말합니다.

“내 종 욥을 보았느냐?” 무슨 말입니까?

‘저렇게 정직하고 순전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를 보았느냐?’라는 뜻입니다.


해설자가 말하는 거예요. '아, 대단합니다. 굉장합니다.' 하듯이요. 

하늘의 회의석상에서 언급되는 거예요.


토브.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라는 토브.

(하나님이 욥을 보시고 '토브'라고 하시진 않았지만, 비슷한 등급의 평가로 '순전하다'하셨습니다.) 주1)

하나님이 그걸 느끼시고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다, 보시기에 완벽하다,

욥이 그런 인정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극심한 시련을 다 이겼을 것입니다.

 

▲삶이 (솔로몬처럼) 불만족한 진짜 이유 

내 마음에 만족함이 없어요. 기쁨이 없어요. 돈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식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남편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몸에 병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다 속는 것이에요.

 

심판되시고 해설자 되시고 전문가 되시는 하나님의 해설 속에

내게서 어떠한 위대함도 토브함도 발견하지 못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시고,

‘완벽하다. 토브하다, 보시기에 좋았더라!’ 얘기하실 때라야

내게 진정한 행복이 주어지는데..,


그래서 솔로몬이 말합니다.

“당신이 돈을 벌지라도, 자녀가 대학을 들어갈지라도, 건강이 있을지라도,

당신은 해설자이신 하나님께 토브하다 라는 말을 못 들을 것입니다.

이것이 제 경험담입니다.”

 

▲내 삶에서도 토브(온전함)이 발견되어져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사는 우리 삶의 모습. 여기서 위대함이 발견되어야 돼요.

 

김연아도 심판들의 점수가 150.06으로 사상 최대의 점수로 나오기 전까지는

아직 감격이 없습니다.

자기가 노력하고 연습했던 것을 다 보여줬다는 후회 없음이 있을 뿐이지.

근데 점수가 나왔을 때 감동하는 거예요. 전문가의 인정이 있을 때.


내가 이 세상에서 김연아처럼 연기하며 산다고 합시다.

자식을 기르는 것, 남편과 대화하고 아내와 대화하고, 한 가정을 꾸리고,

직장에서 생활하고, 형제와 형제가 만나고, 교회에서 신앙생활하고,

 

하나님이 보고 계세요. 심판이시자 전문가이신 그분께서 보고 계십니다.


거기서 하나님께서 하나님 보시기에 '토브'하다.(좋았더라)

하나님 보시기에 위대함이 있고 완벽함이 있고 아름다움이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야 내가 진짜 행복할 수 있다는 거예요.


세상 사람들(비전문가)이 아무리 위대하다,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존귀하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거예요.


사람들이 박수쳐 주니까 잠깐 기뻤다가 지나면 끝이에요.

김연아 선수 그렇게 감동적인 장면도 벌써 한 달 지나고 두 달 지나면서

조금씩 퇴색되어 버리고 말잖아요. 

그러므로 세상의 존귀함이 다 그렇다는 겁니다.

 

▲마치는 말

이 세상이 위대하다고 여길 수 있는 요소들

재물과, 부요와, 이 세상에서의 존경 받음과, 백 명의 자손들

이런 것을 다 가지는 사람이, 간혹 있기는 있는데,


그러나 전문가이시고 심판자이신 하나님께서 보실 때

그런 삶을 ‘좋았더라’라고 평가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부귀영화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솔로몬 자기가 겪어봐도, 그게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전문가이신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33년 밖에 못 살았습니다.

그것도 공생애는 고작 3년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전문가이신 하나님 보시기에, 그것은 정말 ‘토브’했습니다.


빌립보서 2장에 보면 죽기까지 순종하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을

‘만물 위에 그 이름을 높이사 만물로 하여금 주께 무릎 꿇게 만드셨다’고 합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인류 역사상 가장 비참한 그 모습 속에서

하나님은 가장 위대하고 가장 아름답고 가장 완벽한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셨던 겁니다.


여러분, 내가 주님의 십자가 붙잡고서야 ‘완전함’(히브리어로 토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향하여 ‘완벽하다’(토브) 선언하십니다.

‘아름답다, 좋았더라’ 선언하십니다.


그 십자가에 주님이 달리신 그것을 붙잡고 나가는 바울에게

‘훌륭하다, 온전하다’ 선언하십니다.


오늘날 우리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에

하나님의 입에서 비로소 ‘완벽하다 온전하다 (토브)’ 라는 말을 끌어냅니다.

그 하나님의 인정이 있고서야, 내 마음에 진정한 행복이 주어진다는 것이지요.

 

 

주1)

욥이 순전하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תָּם (tam)인데, 욥1:1, 1:8, 2:3절에서

하나님이 욥을 '순전하다tam'라고 인정해 주십니다. 말하자면 김연아 선수같은 점수를 받은 것이지요. 

그런데 빌닷은 '하나님은 순전tam한 사람을 버리지 않으신다'며, 욥의 순전함을 부정합니다. 욥8:20

그러자 욥은 '나는 순전tam한 사람'이라고 자신을 변호합니다. 욥9:21                 

                                                                                                                              ▣ 삶의 통찰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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