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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본질, 긍휼 2651

LNCK 2010. 9. 16. 15:07

◈신앙의 본질, 긍휼                   마9:13               10.08.15.설교일부녹취

 

중요한 신학적 내용을 설명하고 있으므로, 천천히 주의 깊게 읽어보세요.



▲1. 번제(예배)의 본질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요, 인애이다.


호6:6, 나는 인애mercy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이 구절에서, '인애=하나님을 아는 것' 이라고 볼 수 있다.

아래에서 계속 '인애=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 설명하는 데, 그것은 곧 '인애=하나님을 아는 것'과 같다.

즉 '인애=하나님을 사랑하는 것=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연결된다.


※이 글에서 인애 / 긍휼 / 자비는 모두 같거나 비슷한 뜻이다. 영어로는 mercy이다.

성경에 ‘인애’ 와 ‘긍휼’ 과 ‘자비’ 또는 '인'으로 각기 다른 단어로 나오지만, 원래는 같은 단어.


너무나 유명하고, 잘 알려진 구절이다.

요즘 ‘예배의 회복’을 강조하는 교회들에서, 강조하는 구절이다.

하나님은 예배(제사)보다, 더 중요시 여기는 것이 긍휼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제사와 번제이다.


 

▲2. 중요한 것은, 이 구절을 예수님도 신약에서 2번 이상 인용하셨다는 것이다.

아마 이 사실을 아는 분은, 많지 않을 것이다.

주님도 많은 구약성경들 중에 호세아 6:6절을 대단히 강조하셨다는 것이다.


①마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리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워라.


예수님은, 호6:6절을, 위와 같이 약간 다른 표현으로 말씀하셨다.


신앙의 본질을 예수님은 단 한 단어로 요약하셨는데,

바로 그것은 <긍휼>이다.

하나님은 제사보다, 긍휼(호세아서는 인애)을 더 원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호6:6절을, 예수님이 재차 강조하신 것이다.


②마12:7, 나는 자비mercy/긍휼/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는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예수님은 이렇게 호6:6절을, 2번씩이나 반복적으로 인용해서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머리 속에 호6:6절이 얼마나 강조적으로 남아있는가를 엿보게 된다.

신앙생활에 예배가 너무 중요한데.. 그 예배보다 더 중요한 것이 '긍휼'이라는 사실이다.


 

▲3. 호6:6절이 간접적으로 나타난 구절

위 ①과 ②번 구절이, 호6:6절을 직접적으로 인용한 구절이라면,

③마22:37~40절은, 호6:6절을 간접적으로 인용한 구절이다.


    호세아6:6절은, 하나님은 제사보다 인애mercy를 원하시는데,

    그것은 마22:39절에서 말하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과

    (간접적으로) 같다.

    인애란.. 이웃을 긍휼히 여기는,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22:37~40

  

개역에 ‘강령’이라고 많이 의역을 했지만,

(새번역/ ‘이 두 계명에 온 율법과 예언서의 본 뜻이 달려 있다.’ hang on)

어쨌든 이 ‘강령’이란 말은,

성경에 다른 계명들이 수많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이 두 계명 아래에 다 종속된다는 뜻이다.

 

 

어떤 계명을 다 지켰다 할지라도

이 두 계명을 어기면,

안 지킨 것과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다른 계명들은 ‘강령’에 종속된 계명이니까.


※그래서 영어권에서는 이 구절을 The Great Commandment (대계명, 대명령)이라고

특별히 이름을 지어 부른다.

한국어 성경에 ‘강령(뼈대가 되는 명령)’이라고 번역한 것과 마찬가지다.



▲4. 바울도 호6:6절을 (간접적으로) 인용했다.

바울도 갈라디아서에서 복음의 핵심과 진수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호6:6절이 지금 21세기에서만 중요한 구절이 아니라,

2천 년 전에도 대단히 강조된 구절이었다는 뜻이다. 예수님, 사도바울이 다 강조했으니까.)


갈5:14절, 온 율법은 네 이웃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그런데 이 구절은, '강령'과 약간 다르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강령'보다 더 간단히 축약되어있다.


 

 

 

 

 

그런데 바울은, 갈5:14에서,

‘하나님 사랑’부분은 생략해 버리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자는, 온 율법을 지켰느니라’

이렇게 절반만 가르친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 부분을 생략했다.)

 

이게 바울이 이렇게 말했기 때문에 이단이 아니지,

만약 제가 이렇게 말했다면.. 이단이 될 것이다. 성경을 자기 마음대로 재단cut했다고

 

바울은 갈5:14에서, 신앙의 가장 중요한 본질 중에, 절반을

그것도 아주 중요한 부분을 고의적으로 생략하고 있다.

바울이 이렇게 말했기 때문에 이단이 아니지, 만약에 제가 이렇게 말했더라면

반드시 이단 소리를 들을 것이다.


왜 바울이 ‘하나님 사랑’ 부분을 고의적으로 생략했을까?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의 증거’라는 뜻이다.

그래서 ‘하나님 사랑’하는 것을 생략한 것이다.


이웃 사랑’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 사랑’이 그 속에 선결조건으로 전제되어있다는 뜻이다.


정리하면,

예수님의 머리 속에 있었던 호6:6절 인식이

바울의 머리 속에도 같은 인식으로 자리 잡고 있었는데,

그 내용인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인생의 유일한 목적인데,

그것이 실제 삶에 표현은, 이웃을 향한 긍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이웃에게 긍휼을 베풀지 않는 것은,

무슨 예배를 다 드리고, 온갖 신앙적 열심을 다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요한일서의 가르침과도 일치한다.

요일4:20,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아래 단락이 이 논지를 증명해 준다.)

 

▲5. 하나님 사랑 = 이웃사랑(긍휼)

마23:23절,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화있을진저,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면서도, 율법의 더 중요시 여기는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이 구절을 똑같이 인용한 누가복음 11:42절에 보면, (비교해 보세요)

눅11:42, 화 있을찐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공)의와 인과 신’을 버렸도다.  -마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버렸도다  -눅


두 구절을 비교하면,

마태복음의 인(애)mercy 과faith은 = 누가복음의 하나님께 대한 사랑 이다.           *의: justice


    바울이 갈5:14절에서 호6:6절을 인용하면서,

    ‘하나님 사랑’ 부분을 삭둑 잘라 없애버리고,

    ‘이웃 사랑’ 부분만 강조했는데, (만약 우리가 이러면 이단 소리를 듣는다고 했음)


    마23:23절과, 병행구절인 눅11:42절을 비교해 보니

    하나님께 대한 사랑(눅11:42)은 = 인애mercy(마23:23), 즉 이웃 사랑이요 =믿음(신) 이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갈5:14절에서, ‘하나님 사랑’ 부분을 생략해도

    당시 사람들의 이해에는, 전혀 어려움이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 사랑=이웃사랑=인애/자비/긍휼 이니까!

 

    그래서 유대인들은, 지금까지도 '구제와 자선'을 아주 중요한 신앙덕목으로 여기고 있다.

    그 문화가, 하나님 사랑=이웃에게 긍휼을 베푸는 것이고,

    이것은 성경의 강령이라는 것이다. 물론 긍휼이란 개념은, 구제와 자선보다 훨씬 더 범위가 넓지만..

 

 

▲적용/ 나의 고민

정리하면,

내가 상대방에게 긍휼의 마음을 잃어버리는  순간

내가 별 것을 다해도..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잃어버리는 것이 된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만큼 이웃에 대한 긍휼이.. 신앙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오늘 나에게 이웃에 대한 긍휼이 있습니까?

나에게 껄끄러운 사람에 대한 긍휼이 있습니까?

 

만약 없다면,

나는, 별 것을 다해도, 금식과 십일조와 모든 구제를 다해도,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요,

신앙의 본질에서 떠난 삶이요, 바리새인들의 행위라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에게는, 모든 신앙 외적 요소가 다 있었는데, 이 긍휼이 없었다.

 

이웃을 향하여 긍휼을 버리는 순간,

나는 하나님을 향하여, 신앙의 모든 것을 버린 것이 되는 셈이다.

그런 예배는, 하나님이 원치 않으신다는 것이다.


바울도 이웃을 사랑하는 자, 이웃에게 긍휼을 베푼 자는,

온 율법을 다 이루었다고 말하면서, 갈5:14 (온 율법이 결국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라는 것인데)

이렇게 우리에게 거침없이 우리에게 도전해 왔다.


사실 바울의 갈라디아5장을 읽으면서, 제 고민은 깊어갔다.

‘내게 이런 긍휼이 있는가?’


제가 처음 사역을 감당할 때는, 

정말 사람을 향한 긍휼을 갖고, 아버지의 마음을 갖고.. 그렇게 행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내가 이 진리를 잊어버렸다.


‘나는.. 긍휼에 토대해서,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토대해서

진실로 상대방이 잘 되기를 간절히 열망하는 마음으로

상대방 입장에 서서 생각하며, 내가 그를 섬기고 있는가?‘


이런 면을 보면, 내 모습이 절박해진다.

긍휼이 내 가운데 너무 없기 때문이었다.

물론 우리 교인들도 다 마찬가지다.


신앙의 본질에 서 있지 않는 우리 모습을 보면서

제 심정이 대단히 두려워지고, 절박해 지는 것이다... (겸손한 표현임)                    ▣ 복음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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