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새로운 삶 요13:34~35 05.12.30.설교스크랩
◑주 안에서 매일 새로운 삶을 사세요!
▶전도서 1장에 솔로몬이 해 아래 새 것이 없다고 말했지만
저는 어떤 의미에서 해 아래 새 것이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솔로몬이 말한 “해 아래”는 세상적인 것, 육적인 것, 물질적인 것을 말합니다.
그 해 아래는 당연히 새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말하는 “해 아래”는.. 신앙(영)적인 세계를 포함해서 볼 때,
실제로 우리 인생을 헛되게 하지 않을 새 것이 있습니다.
해 아래 새 것이 둘 있습니다.
▶1. 하나님이 늘 새로우십니다.
하나님은 제일 오래되셨는데 제일 새로우십니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이 있기 전에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우주가 있기 전에, 아담이 있기 전에 계셨고
하나님은 모든 것을 지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가장 오래된 분이시지만,
우리와 세대 차이를 느낄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최신식이십니다.
성경에는 ‘새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말씀했습니다. 계5:9, 14:3
무슨 새로 나온 찬송가가 ‘새 노래’가 아니라,
날마다 부르는 찬송이지만, 늘 그 느낌과 감동이 새롭다는 뜻입니다.
여러분도 매일 아침을 만나지만, 오늘은 ‘새 아침’이다,
매년 새해를 만나지만, 금년을 ‘새해’다... 그러시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천국에서 찬양을 부르는 것은.. 늘 새 노래가 되는 것입니다.
‘새 노래’와 연장해서 생각해 보면,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시오, 부활이시오, 생명이시오, 생명 자체이십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늙는 것이 없고, 피곤한 것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언제나 ‘새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신부 되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늘 새 신랑하고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영원히 새 신랑입니다.
예수님은 영원히 새롭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신부들은 영원히 행복을 보장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새롭습니다.
주님 보좌에 있는 그룹 천사들이, 스랍 천사들이
몇 천 년~몇 만 년을 주님의 얼굴을 보며 사는데
주님께 완전히 압도가 되어서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를
지금 몇 만 년째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천사가 만 년을 거룩하다고 외쳐도 하나님은 새로우십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새로운 분이십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영혼을 만족시킬 것은 세상에는 없습니다.
세상에는 새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새 차 사면 금방 헌 차 되고, 새 집 사면 금방 헌 집이 되니
세상이 주는 만족은 다 그때뿐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영원히 새로우시기 때문에, 주님께 초점을 맞추고, 주님을 구하고,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고,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늘 ‘새로운 하루’를 사는 비결입니다.
▶2. 해 아래 또 하나 새로운 것이 있는데 그것은 인간입니다.
인간의 몸은 후패하지만 인간의 영은 늘 새롭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처럼 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
하나님(의 형상)처럼 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졌기 때문에
인간의 영은 끊임없이 성장할 수 있고 변화될 수 있고 자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더 큰 은혜를 목말라하고 사모해야 됩니다.
인간의 영은 끊임없이 날마다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인간의 영이 날마다 새로워지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가능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5:17
타락한 사람을 새롭게 만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 안"입니다.
우리의 영이 날마다 새로워질 수 있는 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으면서, 성경을 많이 알면 새로워질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으면서, 기도를 많이 하면 새로워질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으면서, 노력을 많이 하면 새로워질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여기서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은, 무조건 세례교인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친밀한 생명의 생생한 교제를 나누는 관계를 뜻함)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만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예수님께 초점을 맞춰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초점을 맞출 때, 주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이때 우리의 삶은 ‘날로 새롭도다!’를 고백하게 됩니다.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고후4:16
◑신앙생활이란 무엇인가?
▶1. 신앙생활은.. 주님과 관계, 친밀해 지는 것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진짜 거룩한 자가, 진짜 변화된 새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주님의 임재 속에 들어가서 주님의 임재의 떡을 먹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영의 허기를, 배고픔을 채우는 것입니다.
사람이 배가 고프면 아무거나 다 먹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세상 것들이 예수님께 유혹이 됐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늘 하나님으로 만족하고 충족되어 있기 때문에
늘 행복하고 기쁘고 충만하기 때문에
세상 온갖 화려한 것들이 전혀 유혹이 되지 않았습니다.
진짜로 성령 충만한 것은
세상이 내게 대하여, 내가 세상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입니다.
세상이 내게 대해서 죽어버린 것입니다. 죽은 것에 누가 관심이 있겠습니까?
세상이 내게 대하여, 또한 내가 세상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은
주님의 임재 안에 거함으로써
주님의 임재의 떡을 충분히 먹음으로써, 우리 영이 충족될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신앙생활이 무엇입니까? 신앙생활은 주님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우리가 노력한다고 변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을 목적으로 추구하고, 주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내 영이 주님으로 채워지고 주님의 임재의 떡을 먹음으로
내 영에 만족감이 와야 합니다.
내 영에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 만족, 행복, 기쁨이 와야 합니다.
그래야 진짜 거룩해질 수 있고, 변화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목적으로 추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제는 요한복음 4장의 수가성 여인이 했던 것처럼
여섯 번째 남자를 찾아 헤매지 말고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신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신앙은 어디서 예배드리느냐? 어느 산에서 예배드리느냐?
이런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예수님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신앙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으로,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오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요 1:12)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계 3:20)
신앙은 예수님을 내 영 속에 모셔 들임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신앙 성장은 성경 지식의 성장이 아닙니다.
기도 시간이 더 늘어나는 것이나, 은사가 더 온 것이나, 봉사를 더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 성장은 주님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예수님을 내 마음 속에 영접하고 그분과 사귀고 그분과 더 가까워지고 친밀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감. 이것이 전부입니다.
이 땅에서 제일 성공하는 것은 아브라함처럼, 모세처럼, 세례 요한처럼
주님의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과 친밀해지는 것입니다.
만왕의 왕과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이게 최고의 자리입니다.
여러분, 주님을 목적으로 추구하시고 주님과 친밀해지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친구가 되셔서, 가장 높은 사람 되시기 바랍니다.
▶2. 주님과 친밀해진 사람은.. 서로 사랑합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들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
예수님이 왜 새 계명을 주셨을까요? (※글 흐름이 새 하나님→새 피조물→새 계명)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인데,
왜 또 새 계명이 등장합니까?
십계명이 잘못된 것이 아닌데, 왜 새 계명을 주셨을까요?
하나님이 계명을 주신 것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서로 사랑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본질인 사랑하는 것은 지키지 않고,
자꾸 계율(율법)주의자들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거기다 유전도 만들고, 사람의 계명을 더하고, 다른 사람을 판단합니다.
원래 하나님이 계명을 주신 취지와는 상관없이 잘못 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새 계명을 주신 것이었습니다.
‘새 계명을 주노니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들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13:34~35)
▶마치는 말
사람들은, 예수를 진실로 믿지 않으면,
주님이 주시는 풍성한 영생의 삶을 누리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풍성한 삶요10:10을, ‘부자 되는 것’으로 이해하시면 곤란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풍성한 삶을 누리려면,
먼저 하나님이 날마다 ‘새로우신 하나님’이심을 우리가 체험해야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예수 안에서 변화된 내가 ‘새로운 사람’임을 확신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새로워진 사람은 ‘새 계명’을 지킵니다.
그것은 이웃을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그렇게 주님을 닮아 살면 우리 속에 천국이 있습니다. 그것이 영생입니다.
(영생은 천국가서 얻는 것이기 이전에, 지상에서 지금 우리가 누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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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글 :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이 시대에 "벗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인지
한번 생각해봤습니다.
물론 아직도 가끔씩 철길로 뛰어든 취객을 구하고 자신의 목숨을 잃는 의인들을 볼 수 있지만
그런 특별한 상황을 접한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와도 같지요.
그러나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벗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삶"이란
왠지 멀게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지요.
그런데 조금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조금만 더 의식하면서 살면
"벗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기회"가 일상 안에 의외로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모습으로든 이웃을 위해 우리 자신의 에너지를 소모시키는 일들은
다 벗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일입니다.
사람들이 돈 보스코 성인의 사무실을 노크할 때마다
한결같이 체험한 두 가지 상반된 느낌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 느낌은 찾아갈 때마다 돈 보스코는
마치 막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에서 빠져나온 듯한 사람 같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돈 보스코의 일상은, 깊이 있는 관상기도로 충만해있었다는 것입니다.
방문객들이 느꼈던 두 번째 체험은 자신이 받았던 극진한 예우, 진심 어린 환대였습니다.
대화를 나눌 때 돈 보스코는 진심으로 상대방의 말을 경청했습니다.
돈 보스코는 자신 앞에 있는 그 방문객과 대화하는 것을
마치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처럼 여겼습니다.
바로 지금 내 앞에 있는 상대가 그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이
깍듯이 예우를 갖춰 존중하고, 그의 말을 경청하며 성실히 대화에 임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오늘 이 시대 벗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일’입니다.
▶인생의 두 바퀴
인생은 한 번 살면 끝나는데,
인생이라는 수레가 잘 굴러 가기 위해서는
튼튼한 바퀴 2개가 보조를 잘 맞춰, 양쪽이 같이 돌아야 한다.
한쪽 바퀴는 나의 직장, 가정생활, 내 자녀를 양육하기 위한 시간이며,
다른 쪽 바퀴는 남을 위해서 사는 시간이다. <옥한흠 목사 ▣ 복음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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