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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의미 2610

LNCK 2010. 8. 20. 11:26

◈자유의 의미            시23:1~6                -설교스크랩, 출처-



우리는 다시 8.15 기념일을 앞두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이 일제의 그 점령 아래서 자유를 얻은 것,

그것은 56년 전에 일어났던 사건입니다.

그때 우리는 이미 정치적 자유를 획득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56년 전에 얻은 자유가 아니라

오늘이라는 삶의 현장에서 살아가고 있는 여러분과 저에게

참된 자유의 삶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자유하게 살아가고 계십니까?


저는 이것이 크리스천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질문이라고 생각해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그는 우리를 자유케 하기 위해 오신 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바울 사도는 유명한 갈5:1절 이하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자, 우리가 정말 그 주님을 만나 그리스도 안에 자유를 얻었다면

우리가 다시 나 자신을 향해서 되물어야 할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나는 정말 자유한가?’ 라는 사실입니다.


아, 물론 성경이 말하는 자유는 세상에서 말하는 자유와 상당히 다릅니다.

보통 사회에서는 자유가 어떤 무책임, 무질서, 무도덕이라고 이해합니다만,

성경이 말하는 자유는 근본적으로 죄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죄로부터의 자유.

그런데 우리가 예수를 믿는 그 순간 우리는 죄 사함을 받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자유의 출발점이에요.


그래서 예수 믿고 우리가 죄를 사함 받았다. 이것이 우리가 자유의 출발점이에요.

그러나 우리가 이 죄사함을 받은 것은 사실이고

내가 예수 믿고 자유를 얻은 것은 사실이지만

‘내가 오늘의 삶의 현장에서 자유인답게 정말 자유하게 살고 있느냐?’

하는 이 질문에 대해서는, 그 대답이 그렇게 쉽지는 않습니다.


왜 대답이 쉽지가 않느냐? 우리가 죄로부터 용서함을 받은 것은 이미 사실이지만

죄가 초래해준, 죄가 가져다 준 어떤 결과에 대해서는

아직도 우리가 자유하지 못할 수가 있어요.  주1)



◑1. 욕망으로부터의 자유 (목자)


시편 23편은 ‘참된 자유의 삶은 욕망에서부터 자유한 삶’이라고 가르칩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 받는 그 순간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가오시면서 말씀하시는 한 가지 중요한 음성이 있습니다.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것이 뭔 줄 아십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하고 예수님 앞에 엎드려서

‘예수님 당신은 나의 주님이십니다.’ 라고 고백을 했다면

"그래? 그렇다면 내가 너의 주인이 되었다면 너는 말이야

이제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야! 너는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야"

이렇게 주님이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어보셨습니까?


우리가 예수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고 믿는다면,

또 그 그리스도가 내 삶에 주인이 되었고 그를 내 주님으로 고백한다면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다.

이 한 가지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쓰여진 신약성경에 책 한 권이 있어요.

그것이 골로새서입니다.


골로새서는 일반적인 그리스도의 주권을 강조하는 책입니다.

이 골로새서의 키워드가 하나 있어요. 아주 중요한 열쇠 단어가 있는데

그것은 ‘충만’이라는 단어입니다. 희랍어로는 "플레이로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충만이시다.

너희 안에는 이 그리스도가, 즉 하나님의 충만이 이제 거하신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너희가 예수를 주로 믿느냐? 그렇다면 모든 것이 되시는 예수님을

너희들이 소유했다면.. 너는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다.

나는 부족할 것이 없는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다.’ 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느껴 보셨습니까? 나는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다.

성령 충만할 때, 소위 우리가 은혜를 체험할 때는 그런 고백이 나올 거에요.

"아~ 정말 주님은 모든 것이 되시고요 저는 부족함이 없어요.

저는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에요"


우리가 이런 고백을 하는 순간 아마 여러분은

불청객이 여러분 곁을 다가와서 속삭이는 이런 음성을 동시에 들었을는지 모릅니다.

"부족함이 없다고? 웃기지 마라, 너 돈도 필요하잖아 돈,

그리고 넌 좋은 직장도 필요하고, 그리고 네 자식도 문제가 많잖아?

네 삶에 얼마나 필요한 것이 많은지 알아? 웃기지 마라"


여러분 이렇게 말하는 음성을, 이렇게 속살거리는 음성을 여러분 들어보셨습니까?

누가 하는 음성이에요 이게? 사탄이 하는 음성이에요.

우리의 대적 마귀인 사탄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음성.


만약 우리가 이 음성을 듣고 마귀에게 동의를 하면

그 순간부터 여러분과 저는 소위 욕망의 포로가 돼요. 자유가 없어집니다.

"그래 난 아직도 더 많이 소유해야 해"

그래서 소유의 길을 향해서 우리가 달려가게 됩니다.


시23:1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다" 우리가 이 고백을 하는 것은 중요한 전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목자라는 말은.. 내가 양이라는 말이에요.


성경이 인간을 묘사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표현이 ‘양’입니다.

양은 문제가 많습니다. 우선 양은 자구책이 없어요.

자기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아주 연약한 존재죠.


깨끗해 보이지만 너무나 쉽게 더럽힘을 타는 존재입니다.

거기다 또 양은 방향감각이 없습니다. 갔다놓으면 어디로 가는지 몰라요.

집을 찾아오지 못해요. 자기의 먹을 것이 어디에 있는지도 분별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양의 이런 모든 문제는 딱 하나만 있으면 완벽하게 해결됩니다. 뭐에요?

목자만 있으면 돼요. 자, 목자가 곁에 있으면 보호해 주지 않겠습니까?

더럽히면 씻어주지 않겠습니까?

또 필요한 것 있으면 먹여주지 않겠습니까? 푸른 초장으로 인도해 주지 않아요?


그러니까 양에게 있어서 목자를 만났다, 이것은 굉장한 사건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서 하나님!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

만물을 붙들고 운행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되십니다.. 라고 고백을 하면

 

그 순간부터 목자 되신 하나님은

우리를 책임져 주시는 것이에요.

그가 책임져 주신다면 우리가 뭐가 더 필요한 것(부족함)이 있겠어요?


저는 제 인생을 돌이켜 볼 때, 결혼 직전이 심적으로 가장 힘들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때 너무 가난했습니다.

그런데 결혼을 해야겠는데 살길이 안 보여요.

그때 제가 전도사였는데, 그때 사례비가 만원이 안 되었어요. 8~9천원 받았어요.


그러니까 지금 결혼을 하려고 하는데, 가정을 먹여 살릴 방법이 없단 말이죠.

그래서 저는 ‘좀 천천히 하자!’고 하는데, 그때 아내가 그러더라고요.

"제가 기도해 보았는데요, 하나님이 말씀하셨어요.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대요."

제 눈에는 ‘엽기적인 그녀’로 보였습니다. 하하하.

 

그러면서 그녀 안에 있던 어떤 믿음이 나에게 전이되는 것을 느꼈어요.

‘그래 맞아! 그렇지!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다면 뭐가 걱정이야?’

제 마음에 어떤 믿음이 생기더라고요.

그런데 그 순간부터 자유가 오더라고요, 자유.


뭐, 그때부터 제가 지금 욕심이 없이 살아오고 있습니다.

‘완전히 욕심이 없다’ 그러면 그건 뭐 제가 사람이 아닐지도 모르고,

그것은 지나친 과장일지도 모르지만

저는 사실 그 때부터 상당히 자유해 졌어요. 물질에 관한한, 별로 관심이 없어요. 자유합니다.


뭐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니까 필요한 것 있으면 주시겠지 뭐,

뭐 안 주시면 하나님 판단에, 제게 안 필요하니까 안 주시는 것이고. 굉장히 자유를 느껴요.


23:2절과 3절에서 주어가 중요해요.

이 주어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2절에 보시면 "그가" 

원문에는 "그가" 라는 단어가 계속적으로 튀어나옵니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그가" 나를 쉴만한 물가로 인도 하시는도다.

3절에도 "그가"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그가"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  (개역엔 '그가'가 3번이나 생략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주인이 누구세요?

하나님이 그가 내 인생의 길에 목자가 되어주시고 나를 인도하신다면

그분이 책임져 주시다면 뭐가 더 필요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이 하나님을 목자로 신뢰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본질적으로 여러분과 저를

그 욕망의 늪 속으로부터 자유케 할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때 자유가 오는 거예요.

크리스천이 누리는 참된 자유는.. 욕망에서부터의 자유여야 합니다.



◑2.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 (동행자)


주2) 루즈벨트가 말한, 두려워할 것은 오직 두려움 뿐


그래서 인간의 마음속에는 두려움의 심리를 이용해서 발달하고 있는

가장 현대적인 산업 하나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보험업입니다.


자동차보험, 암보험, 건강보험, 치아보험, 주택보험, 산업재해보험,

노후보험, 교육보험, 여행자보험, 그 외에도 수두룩합니다. 하하하~


이런 두려움이란 것은 인생의 도상에서 피해 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길을 걸어가면서 결코 피해갈 수 없는 손님 하나를 만납니다.

그 손님이 바로 두려움입니다.

네, 오늘 본문에 보시면 시편 기자는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내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그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인생을 살다 보면 어느 날 우리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가요.


여기서 ‘음침하다’는 단어는, 사실은 그림자/그늘/shadow 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죽음 자체를 아직 경험 하지 않았지만

죽음을 예고해 주는 어떤 그림자들을 인생의 길을 걷다가 느끼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병 날 때,

또 어느 날 거울을 보면서 문득 느낍니다.

‘아 내가 늙어가고 있구나, 죽음이 가까이 오고 있구나!’

이게 죽음의 그림자들이에요.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비록 사망의 골짜기 그늘을 지날지라도 해 받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던 비밀은 도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님이 함께 동행하시기 때문이에요.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이 지팡이라는 것은 주로 방향 제시용으로 많이 쓰여지는 것이라고 그러고,

막대기는 어떤 야생동물이 짐승들이 공격할 때 적들을 쫓아버리는 보호용입니다.


하나님은 방향도 제시해 주시고, 보호도 해주시고 위로도 해주시고

뿐만 아니라 그는 원수에서 이렇게 우리를 지켜주시는

그 정도로 끝내는 것이 아니에요.


‘원수의 목전에서’, 그러니까 원수가 보는 앞에서 보란 듯,

풍성한 식탁을 베풀어 주시고 당당하게 우리의 잔을 넘치는 은혜로 채워주시는

그렇게 되도록 우리의 삶을 계속 인도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래서 크리스천의 삶이라는 것은, 그냥 예수 믿고 죄 용서 받고

그냥 가까스로 천국만 가는 그 정도의 삶이 아니라는 거죠.


우리가 요한복음 10장에 보시면 거기서도 예수님이 나는 선한 목자다

나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 이 말씀을 하시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요한복음 10장10절에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자, 두려움에서의 자유 그 자유의 비밀,

    그것은 하나님이 내 인생 길에 동행자가 되어주신다.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때 우리는 두려움에서 자유한 존재로 살아갈 것을 믿습니다.



◑3. 죽음에서의 자유 (영접해 주시는 자)


우리가 한세상을 살아가면서 이 세상 모든 것에서 자유 한다 해도

만약 죽음에서 자유하지 못하다면 우리는 아직도 자유한 존재가 아닐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 사망이라는 것이, 아담이후로,

지금까지 살고 있는 모든 사람 위에 죽음이 왕 노릇 한다.

로마서에 보면 그런 표현이 나오죠?

‘죽음이 왕 노릇 한다. 죽음은 가장 강력한 지배자다.’


여러 해 전에 미국에 한 코미디언이 그 말을 해 가지고

미국 사람들 가운데 그 말이 굉장히 유행했다고 그래요.

"여러분, 우리가 결코 피해갈수 없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세금 내는 것이고, 또 하나는 죽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얼마나 악착같이 세금을 거두어 내는지 그것을 풍자한 조크겠죠.)


우리가 결코 피할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죽음이죠.

아무도 죽음을 피해 갈 수는 없습니다.

아니, 죽음에 대한 두려움, 불안에 눌려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 어떻게 우리는 죽음의 속박에서 정말 자유할 수가 있을까요?

바울 사도는 그 대답을 이렇게 말합니다. 고후5:1절 이하에 보시면


"만일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손으로 지은 집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비하신 집이 있는 줄 안다"


죽음 앞에서, 두려움이 없었던 바울 사도의 고백의 비밀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뭐냐 하면 영원한 집을 예비해 두었다는 확신입니다. 영원한 집.


성경에서 죽음에 대한 여러 가지 다양한 설명이 나타납니다마는

탁월한 설명 가운데 하나는 ‘죽음은 (영원한 집에) 이사 가는 것과 같다.’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이 지금 새기 시작합니다. 벽이 흔들립니다. 금이 갑니다.

어떻게 해야 돼요? 수리 해야죠. 그러나 수리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은 새 집을 예비 할거에요.


그리고 드디어 준비해 두었던 새집으로 이사 가는 날

우리는 헌 집에 대한 어떤 연민, 향수, 헌집에 대한 집착은 있겠지만,

그러나 뭐 새 집으로 이사 가는 날

절망한다던지, 통곡한다던지, 그런 사람은 없지요?


오히려 새로운 집에 가서 살 것에 대한 어떤 설레임, 어떤 희망, 어떤 기다림이

오히려 그 마음을 흥분 시킬 수도 있습니다.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시편 23편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이미지에 대해서

성경학자들은 3가지 이미지가 있다고 말하는데

첫째는 목자(◑1), 둘째는 동행자(◑2), 그리고 세 번째는 ‘호스트’(◑3)입니다.

호스트host란, 영원한 집에서 우리를 영접해 주시는 집주인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은 목자가 되시고 우리 인생을 책임져 주시고 뿐만 아니라

인생의 길을 걸어가는 동안에 동행해 주시다가

인생의 길이 다할 때 마지막에 집을 준비해 놓으시는 우리의 호스트,


그 집에 들어서는 우리에게 "수고 많았지?"

그리고 우리의 잔을 철철 넘치도록 은혜로 채워주시면서

"수고 많았어. 이제 푹 쉬어"

그리고 우리에게 안식을 예비하시는 그 분이십니다.


미국에서 어떤 소년이 암으로 죽어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부모가 여러 가지 말로 위로해 주지만, 그 위로의 한계가 있잖아요.

어머니가 너무 안쓰러운 마음이어서, 아들 곁에서 성경말씀을 읽어줍니다.


시편 23편을 읽어주면서, 사랑하는 아들아 이 말씀을 꼭 기억해야 돼,

네가 힘들 때 아파질 때 이 말씀을 생각하라,

‘여호와는 너의 목자시다!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되신다면, 그 하나님이 인도해 주신다면,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걱정할 필요가 없는 거야!’


그러면서 영어로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라는 말이 다섯 단어로 되어있어요.

The Lord is my shepherd.


‘네 다섯 손가락을 차례로 꼽으면서, 이 말씀을 꼭 기억하렴.’

그러면서 엄마는, 사랑하는 아들에게 반지 하나를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주면서


‘그런데 네 번째가 제일 중요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란다.

이것만 확신한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는 거야.’


어느 날, 아들이 아파하면서 잠자리에 들었어요.

그런데 새벽에 보니까, 아들이 세상을 떠났어요.

그런데 사랑하는 아들의 얼굴을 보고, 손을 보다가.. 엄마가 깜짝 놀랐답니다.


뜻밖에도 이 세상을 떠나간 어린 소년 아들은

오른손으로 자기 왼손에 엄마가 늘 짚어주던 손의 네 번째 손가락,

반지가 끼워진 그 손가락을 잡고, 숨을 멈추었던 것입니다.

"나의 목자시니, 나의 목자시니"


................................


주1)

우리가 요한복음 11장에 보시면 거기 기적을 체험한 사나이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인류 역사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그런 기적을 체험했던 사람, 어떤 사람입니까?

요한복음 11장에 '나사로'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입니다.


자, 이 나사로가 죽어서 나흘이 되었을 때

이 사림의 죽음이 완전히 입증된, 사망이 선고된 이 사람의 무덤 앞에서

예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이 부활의 진리를 선포하신 후에

그의 무덤 가까이 그가 접근하시면서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그때 나사로가 무덤에서 걸어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미 주께서 나사로야 나오너라 라고 선포하시는 그 순간

생명의 주인 되신 그 분이 선포하신 그 순간, 나사로는 새로운 생명을 얻은 것이에요.

그는 죽음에서 자유하게 된 것입니다.


새생명을 얻고 새로운 존재가 되어 지금 무덤에서 걸어 나오고 있어요.

그런데 무덤에서 나오고 있는 나사로의 모습은

그가 아직도 수족을 베로 동인 채, 얼굴은 수건이 싸 매여진 상태로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순간, 나사로는 자유를 얻었지만, 아직도 자유하지 못한 사람이에요.

풀어놓아 다니기까지는 아직 완전히 자유롭지 못해요.

이해가 되십니까 이 그림이?


네, 새로운 생명을 얻고 나오지만, 아직도 그는 결박되어 있었어요.

예수님이 그를 향해서 저 사람을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

그때 비로소 그는 완전히 자유를 얻습니다.


그가 그렇게 선포하기 까지, 그는 아직도 새로운 생명을 얻었지만

그는 베줄을 맨 결박된 상태 속에 있었던 모습을 우리가 바라봅니다.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느냐 하면

예수 믿고 우리가 죄 사함을 얻었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얻은 사람이라고 하지만

그러나 죄의 어떤 결과에서부터 우리는 어떤 자유하지 못한

내 삶의 모습을 볼 수가 있단 말이죠.


자,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우리가 온전히 자유하게 산다!’

그것이 어떤 삶일까요?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그 유명한 시편 23편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주2)

미국에 대 경제공황이 찾아왔을 때 당시에 유명한 미국 대통령이었던 루즈벨트는

국민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통해서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국민 여러분 우리가 이 순간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이 있다면, 두려움 하나뿐입니다.

두려움을 제외하고 두려워 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우리의 삶 그 자체, 또 우리가 걱정하고 있는 그 문제 그 자체라기보다도

우리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두려움이 더 두려워해야 할 것이란 말이죠.

왜냐하면 우리가 한번 두려움의 늪 속에 빠져 버리면,

이 두려움이란 것은 우리의 지성을 마비시키고

우리의 감성을 마비시키고

우리의 의지까지 다 마비시켜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두려워하게 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리에 서 버리게 돼요.

그러니까 두려움이란 것을 그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 크리스천 리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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