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상황에서도) 자포자기는 안 됩니다 렘29:4-14 05.08.07.설교스크랩
*원제목 : 나그네에게 슬퍼할 권리가 없는 이유
▶주제 요약
우리를 슬프게 하는 일들은, 우리가 사는 동안 항상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없는 순간이 별로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에서.. 우리들은 이 워싱턴에서..
슬픈 일, 괴로운 일, 힘든 일들은.. 어쨌든 계속 하나님의 섭리 속에 우리를 따라다닙니다.
그러나 가장 힘든 일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것 때문에, 자포자기 해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요,
그리고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바벨론에서의 자포자기)이, 큰 문제임을 깨달은 예레미야 선지자는
바벨론에 사는 유대인 포로들에게 편지(본문)를 보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있는 한, 결코 삶을 자포자기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끝까지 희망을 붙잡고 살아라는 것입니다.
▶착각하며 살 때는.. 나름 행복합니다.
1873년 이태리에서 태어나 1921년에 사망한 이탈리안 성악가 엔리코 카루소는
자신의 음성을 음반으로 남긴 최초의 음악가로
당대 다른 테너가수들은 도저히 낼 수 없는 높은 고음과 강한 소리로
미국과 유럽의 유명 오페라단을 순회하며
그 당시 가장 많은 출연료를 받으며 잘나가던 가수였습니다.
얼마나 그가 유명했는지 심지어 어린아이들까지
이 카루소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카루소 자신도, 세상 모든 사람이 자기 이름을 알고 있을 정도로
자신이 유명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한번은 그가 차를 운전하고 뉴욕 주의 시골을 달리다가 차가 고장이 났습니다.
자동차를 길에 세우고 가까운 농가에 들어가 도움을 청하게 되었는데,
렉카(비상 수리) 차가 올 때까지, 그 농가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자연스럽게 농부에게 자기 이름을 소개했습니다.
“제 이름은 엔리코 카루소입니다.”
그랬더니 그 농부가 반색을 하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카루소요?”
제 평생에 그 유명한 “로빈슨 크루소를 만나게 되다니 정말 반갑습니다.”
‘로빈슨 크루소’는 영국의 작가 다니엘 디포의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입니다.
이 농부는, ‘엔리코 카루소’와 ‘로빈슨 크루소’를 혼동한 것입니다.
엔리코 카루소는, 처음에는 ‘그 농부가 자기를 안다’고 생각했다가,
차츰 대화를 계속 나누는 중에, ‘그 농부가 자기를 모른다’는 판단이 서자,
혼동에 빠지게 됩니다.
그것은, 마치 무더운 한 여름에, 자기 등에 차가운 계곡물 한바가지를 붓는 것 같은
‘잠에서 확 깨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던 것입니다.
실상은 ‘자기는, 세상 모든 사람이 다 알만큼 유명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아마 ‘착각은 자유’라는 말이 생겼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착각하며 살아온 나날동안은.. 사실은 행복했습니다...
▶꿈을 깨고 나면.. 내 현실을 직시하면.. 괴로울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이렇게 착각하며 살 때도 있고
또 그 착각을 깨게 해주는 일들을 경험을 할 때도 있습니다.
정말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 자신의 본질을 확인하는 순간,
그 현실을 직시하는 순간.. 그것은 외면하고 싶고, 고개를 돌리고 싶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일상적인 건강검진check-up을 위해 병원에 갔다가
의사로부터 갑작스런 암 진단을 받을 때,
또는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만나는 돌발적인 사고,
예고 없이 갑작스런 감원으로 생기는 실직의 경험,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이나 가족의 죽음,
그리고 오랫동안 일하던 직장에서 은퇴하고 난 후 우리들은
모든 조건과 환경으로 우리들을 싸고 있던 나의 겉껍질이 떨어져 나간,
그래서 속사람만 남은 실제의 벌거벗은 나 자신을 만나게 됩니다.
▶욥처럼, 자기 겉껍질이 벗어지는 날도 있습니다.
아들 일곱과 딸 셋, 그리고 양 칠 천 마리 낙타 삼천 마리, 겨릿소 오 백 쌍,
암 나귀 오 백 마리를 하루아침에 잃어버린, 동방에 살던 부자 욥,
그의 껍질이 다 없어진 후, 고백한 그의 진짜모습이 이렇습니다.
“모태에서 빈손으로 태어났으니, 죽을 때에도 빈손으로 돌아 갈 것입니다.
주신 분도 주님이시오, 가져가신 분도 주님이시니, 주님의 이름을 찬양할 뿐입니다.”
▶사람은 다 나그네 인생입니다.
창47:9절에 야곱은 바로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야곱이 바로에게 대답하였다. ‘이 세상을 떠돌아다닌 햇수가 130년입니다.
저의 조상들이 세상을 떠돌던 햇수에 비하면, 제가 누린 햇수는 얼마 되지 않지만,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야곱이 조금 과장을 하고 있다고 생각을 해봅니다.
야곱만큼 복을 받은 사람 성경에 많지 않습니다.
수많은 가축들과 12명의 아들들과, 특별히 그 인생 마지막에 그의 아들 요셉은
그 당시 가장 강했던 이집트의 바로, 왕의 총리대신 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야곱의 말이 옳습니다.
야곱이 본 자기 인생이 한마디로 ‘떠돌이의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그가 살면서 좋은 것, 귀한 것을 많이 경험했음에도,
130세 장수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험악한 세월이, 기억할만한 좋은 시간들보다, 더 많았다는 것입니다.
욥과 야곱만 나그네입니까? 욥과 야곱 같은 부자들만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세상 모든 사람들
저와 여러분 모두 다 나그네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 전서 1장 1절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베드로가, 본도와 갈라디아와 갑바도기아와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져 사는 나그네들인, 택하심을 입은 이들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우리들의 인생의 문제는,
그리고 우리가 찾고자 원하는 인생의 비밀은
바로 우리들의 매일 매일 매 순간이 바로 나그네의 삶인 것,
그러나 우리 인생 나그네 길을 우리들 각자가 걷기는 하지만
우리들 혼자 걷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고 걸어가는 것을 깨닫는데 있습니다.
▶‘나그네 삶’을 실감하고 있는 중국 조선족 동포들
지난 7월 저는 두 주간 중국을 방문하고 돌아왔습니다.
아직 길이 다 닦이질 않아 먼지 나는 비포장 시골길을 한 시간 정도 달려
마을 앞뒤로 산이 있고 개울이 흐르는
마치 제가 초등학교 때 방학만 되면 내려가던 경기도 강화 같은
그림 같은 마을에 사는 나그네들을 만나고 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인생길은 그림 같지는 않았습니다.
이번에 저희들이 방문한 중국 마을의 조선족 동포들을 보면서 마음이 아팠던 것은
지금이라는 현재의 생활에 대한 불만족 그것이었습니다.
한국에 가서 일하면, 또는 미국에 가면
빠른 시간 안에 잘 살 수 있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몇 십 년 벌어야 할 만큼의 돈을 빚을 지고 돈을 빌려
한국으로, 또는 동남아로, 또는 미국으로 어디든 나가고자 애쓰는 것을 보았습니다.
심지어 어린 젖먹이 자기 자녀들을 나이 드신 부모에게 맡기고
일할 수 있는 모든 젊은이들이 떠나 버리고 난 마을에는
예외 없이 두통과 고혈압, 당뇨, 신경통으로 고생하는
연세 드신 부모들과 그들이 떼어놓듯 남기고 간 어린아이들뿐이었습니다.
한 할머니는, 제게 와서, 자기 손녀가 작년에 이어 두 번째 온 저를 보고는
저를 마치 어릴 때 자기를 버리고 떠난 자기 아빠를 만난 것처럼 기뻐하더라는
그 말을 듣고 가슴이 아팠습니다.
오늘도 한국에서, 혹은 외국에 가서 돌아오지 않는 그 돈 벌러 간 자식들은,
나이든 부모가 손자를 키우면서 문 열어 놓고 기다리고 있는 이 가슴 아픈 장면을
얼마나 심각하게 생각하며 살고 있을까요?
(물론 한국에서도, 그들은 중국에 두고 온 자녀들을 무척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아빠 엄마 없이 할머니 할아버지의 손에 자라 가는 조그만 아이들은,
밤에 자다가 깨면 돌아오지 않는 아빠 엄마를 부르며 울고 있습니다.
또한 그 땅에 남아 있는 (좀 더 큰) 중, 고등학교 학생들,
그들의 가슴속에는 가난한 농촌에 살기 때문에
큰 도시, 좋은 학교는 돈이 없어서 갈 수 없다는 자포자기, 자신에 대한 열등감,
꿈 없는 그 미래는 누가 책임질 것인가? 이런 안타까움이 있었습니다.
알버트 슈바이처는
“삶의 비극은,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도
우리 내면에서 죽어 가는 것이 있다는 점이다”라고 말했고
조지 허버트는 “꿈을 상실 할 때 인간은 죽어가기 시작한다”라고 말했습니다.
미국에서 간 우리 봉사단이 그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그들을 부자로 만들어주는 것도, 만병통치약을 주는 것도 아닌,
우리들도 똑같은 나그네라는 것과,
우리 봉사단을 변화시키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래서 우리가 진정 구해야 하는 희망, 우리의 기쁨은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인 것을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본문 설명 - 한 마디로 ‘자포자기 하지 말라. 자포자기 할 상황이지만, 거기에 적응해라!’
오늘 우리에게 주신 예레미야 선지자의 편지는
자신감을 잃어버리고 슬퍼하고 있는 나그네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하나님의 선택함을 받은 나그네임을 애써 외면하며
자기들의 자랑의 껍질들을 쌓던 사람들,
이 편지를 받게 된 이스라엘의 경우는
가축과 자녀들까지 모두 빼앗겨 버리고
이제 포로가 되어 모든 소망과 희망을 잃어버린,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
자기의 자존심을 완전히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띄우신, 하나님의 사랑의 편지입니다.
이제 다시는 고향 예루살렘으로 돌아 갈 수 없다는 좌절로,
‘이렇게 앉아서 포로로 죽기보다는 아니다! 다시 돌아 갈 수 있다!’ 라고 속이고 있는
하나님이 보내지 않은 거짓 선지자들의 선동으로
(바벨론에서) 반란을 음모하다가 벌써 여러 명이 죽음을 당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위해
예루살렘에 남아있던 예레미야는
바빌로니아 왕에게 조공을 가지고 들어간 엘리사와 그마랴의 손에
이 편지를 보냅니다. 그 편지 내용은 이렇습니다.
①바벨론에 집을 짓고 정착하라(29:5).
집은 자기 자신 뿐 아니라 가족들이 살아가는 가장 안전한 장소입니다.
마음이 쉼을 얻기 위해서는 고향집 같은 곳이 필요한 것을 예레미야는 알았습니다.
집을 지으라, 비가 새고 집을 지을 재료로는 짚밖에 없더라도
힘을 모아 마음이, 육체가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라고 말합니다.
비록 포로지만, 하나님이 보내신 그 곳에 정착하라는 것입니다.
②(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과수원도 만들고, 그 열매도 따먹어라(:5).
계절의 리듬, 계절의 변화에 맞추어 살라는 말입니다.
씨를 뿌릴 때 씨를 뿌리라는 말이요, 추수 때 나가서 부지런히 추수하고
거둔 것은 기쁨으로 먹으라는 네 마음을 즐겁게 하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삶의 시간표를 맞추어 그 시간표대로 살라는 말입니다.
③(하나님이 주신 상황을 받아들여서) 장가를 들어서 아들딸을 낳아라(:6).
공동체를 이루고, 혼자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녀를 낳으면 자녀를 가진 사람들과 대화가 통하는 것처럼
혼자 닫고 살지 말고, 열어 놓고 살라는 것이요,
마음을 열고 다른 사람들이 내 삶 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용납하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가장 힘들고 어려운 부탁을 하십니다. 그것은...
④너희 원수를 용서하라(:7).
바빌론을 (오늘날로 치면, 미국과 전쟁하는 이라크를)
즉, 내 아버지를 죽인 원수를 용서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복수의 칼을 갈고 있는 동안 그 사람에게 평안은 없습니다.
아직 하나님이 허락하신 기간 그 70년이 끝나지 않았는데
그 동안을 미움으로 죽어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미움은 생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샬롬(평안)이시며,
그리고 믿을 수 없게도 바빌로니아에도 샬롬의 하나님인 것을 선포하십니다.
⑤기도하라(:7, :12).
사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세상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나갔다고 생각하는 그 지점이
하나님과 가장 가까워 질 수 있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만나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기도를 들어주실 뿐 만나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먼저는, 사로잡혀간 그 땅의 평안을 위해서 기도하고(:7)
다음에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기도하라는 것입니다.(:12)
⑥나를 믿어라(:10~14).
하나님은, 하나님의 시간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스라엘을 완전히 회복시키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을 사로잡아간 당시 가장 강력한 나라 바빌로니아의 시간은
하나님께 이제 겨우 70년 밖에 남지 않은 것을 잊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부르고, 나에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의 호소를 들어주겠다.
너희가 나를 찾으면, 나를 만날 것이다.
너희가 온전한 마음으로 나를 찾기만 하면 내가 너희를 만나주겠다. 나 주의 말이다.
내가 너희를 포로 생활에서 돌아오게 하겠다.
내가 너희를 쫓아 보냈던 세상의 모든 나라, 모든 지역에서 너희를 모아오겠다.
내가 너희를 포로로 보냈으나, 나는 너희를 그곳에서 너희의 고향으로 다시 데려오겠다.
나 주의 말이다” 렘29:12-14
(중략)
▶자포자기 하지 않고, 자기 현실을 극복한 사람
한 미국 목사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드리며 제 설교를 줄입니다.
(이 목사님의 친구 중에) 마샬 헤이머 Marshall Hamer라는 분의 이야기입니다.
4년 전에 돌아가신 분이십니다.
그는 B-17 폭격기의 소총수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서 임무를 수행하다
독일군에게 격추를 당해 17 슈타락 (Stalag 17)이라는 악명 높은 수용소에서
포로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 수용소에서는 잡혀온 미군 포로들에게, 매 주 우편엽서와 면도기를 지급했는데
대부분의 포로들은, 그것들을 받기가 무섭게 화를 내며 쓰레기통에 버렸습니다.
그들 모두 이 post card가 미국에 도착하기 전에 석방되기를 원했고
그 카드가 제대로 전달 될 지 의심했으며
언제 풀려 날 지 기약도 없고 보는 사람도 없는 포로수용소에서
면도를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미군 포로들은 그래서 일체의 운동도 하지 않고 지냈지만
마샬 헤이머는 달랐습니다.
그는 남들이 쓰레기통에 버린 우편엽서를 주워다가 사연을 적어
자기 고향에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고 자기가 아는 사람이 기억나지 않을 때는
심지어 자기가 가상의 주소를 만들어내서까지, 이 편지 쓰는 일을 계속 했습니다.
얼마 후 그가 보낸 우편엽서를 받은 사람들이 답장을 하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답장을 보내면서 담배와 다른 물품까지 보내주었습니다.
마샬 헤이머의 영혼은 수많은 사람들의 답장으로 살아났으며
담배와 다른 물건들은, 간수들에게 주는 뇌물로 요긴하게 사용했습니다.
그는 매일 운동을 했기 때문에 완벽한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2차 대전이 막바지로 접어들어 독일군들이 Stalag 17 수용소를 포기하고
베를린으로 철수하기 위해
운동장에 가지고 갈 수 없는 모든 물건들을 태우기 위해 불을 질렀습니다.
이때 이제 다시는 미국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판단한 세 명의 미국 포로들은,
건강이 약해져서 자기 발로 베를린까지 걸어가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는
자기 발로 불 속으로 뛰어들어 목숨을 끊었습니다.
반면에 마샬 헤이머는
자기가 먼저 보낸 그 편지에 응답한 사람들, 그 사람들을 통해 갖게 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으로
평소에 운동으로 단련된 두 어깨에, 두 명의 다른 동료를 부축한 채 베를린까지 걸어갔고
그리고 며칠 지나지 않아 그는 마침내 기다리던
아니, 이미 수용소에서 맛보고 있었던 자유를 찾게 되었습니다.
▶마치는 말
하나님은 오늘도 포로 된 이스라엘 백성들,
마샬 헤이머 같은 분, 또한 저와 여러분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어떠한 악조건 속에서도, 그것을 허락하신 주님의 섭리를 겸허히 수용하고,
그 주어진 여건 속에서, 자포자기 하지 않고, 최선을 다할 것을 바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에, 아직 우리는 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면 우리는 슬퍼할 수 없습니다.
인생은 어차피 나그네 길입니다.
그것을 다 늙어서가 아니라, 조금이라도 젊었을 때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나그네 길을 살 때, 아무리 자기가 잘 나가도, 결국은 '나그네'입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그 상황을 주신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 깨달음이 안 오면, 무조건 주님의 신실하심을 믿게 해 달라고, 믿음을 구하셔야 합니다.
억지로라도, 무식하게라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포자기 하지 않고, 주어진 하루 하루에 최선을 다할 때.. 거기서 주님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랄프 왈도 에머슨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This time, like all times, is a good one,
if we but knew what to do with it."
지금이라는 시간은 우리에게 좋은 시간이다,
단 그것을 어떻게 사용 할 줄 만 알고 있다면 안다면.
여러분은 알고 계십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이렇게 지나가고 있는 것을.
여러분은 알고 계십니까? 지나가는 시간 속에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고 계신 것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가능하십니다.
그 하나님은 당신의 의지와 힘을 다해 그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주님은 인생 나그네길을 가는 우리 모두에게도 동일한 초청을 하십니다.
너도 네 뜻을 다해 너의 힘을 다해 나를 따르겠느냐고.
기쁨 없는, 소망 없는, 슬픔과 낙심으로 마지막 남은 자존심마저 사라져 버린
포로 생활을 청산하는 길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그 길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바벨론 포로상황을
받아들이고, 현실을 인정하고,
그곳에서 집을 짓고, 과수원을 만들고, 자녀를 낳고, 원수를 용서하며,
기도하며, 하나님을 믿고 살아라. 자포자기하지 말고 열심히 살아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니까요!
(※실제로 바벨론의 유대인 포로들 디아스포라는, *벧전1:1의 흩어진 나그네
그곳에서 회당을 건설하며 여호와 하나님 신앙을 전파했고,
실제로 그 회당과 그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4세기가 지나 사도바울의 소아시아 선교 때,
아주 중요한 선교 거점의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마치 1937년에, 연해주의 동포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를 당한 것처럼 말입니다.)
.........................................더 읽으실 분..................................
▶(중략)된 부분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이 누리는 가장 큰 특권은
재물, 영화, 장수의 복을 넘어
중단 없이 계속되는 하나님과의 사귐, 그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은 우리 나그네를 살리는 힘이 있습니다.
이 편지를 받은 포로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속에
가득히 자라난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분노를 우리는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완전히 잃어버린 ‘하나님의 자녀’라는 그들의 예전의 자신감을 또한 짐작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샬롬, 평화의 편지로
그들이 잃어버린 자신감, 그것은 먼저 그들 자신에 대한,
그리고 하나님 당신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시기 원하십니다.
원망과 의심으로, 살 소망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낙심함으로 서서히 죽어 가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이스라엘을 살려 내십니다.
생명의 비밀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삽니다.
아모스 5:4~6절에 보면
“나 주가 이스라엘 가문에 선고한다. 너희는 나를 찾아라. 그러면 산다.
너희는 베델을 찾지 말고, 길갈로 들어가지 말고, 브엘세바로 넘어가지 말아라.
길갈 주민들은 반드시 사로잡혀 가고, 베델은 폐허가 될 것이다.”
너희는 주님을 찾아라. 그러면 산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께서
요셉의 집에 불같이 달려드시어 베델을 살라버리실 것이니,
그때에는 아무도 그 불을 끄지 못한 것이다.”
또한 호세아2:16~20절에는
“그 날에 너는 나를 ‘나의 남편’ 이라고 부르고, 다시는 ‘나의 주인’ 이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그 때에 나는 그의 입에서 바알 신들의 이름을 모두 없애고,
바알 신들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다시는 없도록 하겠다.
그날에는 내가 이스라엘 백성을 생각하고,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벌레와 언약을 맺고,
활과 칼을 꺾어 버리며 땅에서 전쟁을 없애어, 이스라엘 백성이 마음놓고 살 수 있게 하겠다.
그 때에 내가 너를 영원히 아내로 맞아들이고 너에게 정의와 공평으로 대하고,
너에게 변함없는 사랑과 긍휼을 보여주고, 너를 아내로 삼겠다.
내가 너에게 성실한 마음으로 너와 결혼하겠다. 그러면 너는 나 주를 바로 알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 모두를 위해 예비하고 계시는 모든 복을 받는 비결은
겸손히 순종함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 돌아와야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우리는 전혀 하나님을 알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에스겔33:10~11절입니다.
“그러므로 너 사람아,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전하여라.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의 온갖 허물과 우리의 모든 죄악이 우리를 짓눌러서,
우리가 그 속에서 기진하여 죽어가고 있는데, 어떻게 우리가 살 수 있는가? 하였다.
너는 그들에게 전하여라.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내가 내 삶을 두고 맹세한다.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한다. 너희는 돌이켜 떠나거라.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는 왜 죽으려고 하느냐?”
그렇습니다. 우리 나그네들은 슬퍼할 권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환경과 어떠한 일에도 그 하나님은 그 환경을 알고 계시고
그 일을 해결 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이 있으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예레미야의 편지는 우리에게 힘이 됩니다. ▣ 크리스천 리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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