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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과 믿음의 역설관계 2661

LNCK 2010. 9. 24. 23:45

www.youtube.com/watch?v=PHZrwKX0Nsc&feature=youtu.be

◈질문과 믿음의 역설관계               수3:4             10.08.15.설교녹취

 

 

아래 1단락은 ‘신앙에 대해서 질문을 던져라’

2단락은 ‘신앙에 대해서 믿음을 가져라’ 하면서

이 둘은 서로 역설적 명제이지만, 둘 다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1. 신앙생활에는 질문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가급적 질문하지 말라고 배웠다.

예로부터 우리 문화가 그랬다.

질문하는 것은, 불손한 것이고, 이것은 자칫하면 말대답하는 것이고,

또 윗사람께 반항처럼 보일 수도 있다고 배웠다.

(그러나 유대식 교육은, 질문을 중요시한다. 질문에서 배움이 시작된다고 본다.)

 

이것은 권위주의 교육의 산물이다.

그러다보니까 학교에서도 질문을 잘 하지 않고 자랐고,

더욱이 신앙의 문제에 대해서는.. 별로/전혀 질문을 하려 들지 않는다.

 

▲그러나 질문이 없는 진짜 이유는..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앙에 대해 질문을 많이/깊이 하지 않는다는 말은,

우리의 문화적 환경이 권위주의적 교육의 영향을 받아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진짜 이유는,

신앙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뜻이고,

신앙을 여러분의 삶에 적용해보지 않았다는 뜻이고,

또한 영생의 문제에 대해, 깊은 생각이 없었다는 뜻도 된다.

 

▲예수님은 질문을 통해 가르치셨다.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같은 철학자들은, ‘질문과 대답’식으로 철학적 지식을 전달했다.

물론 예수님이 그들의 대화식 교육 방식을 그대로 본받으신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도 같은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질문하셨고, 

또한 사람들의 질문에 답변 하시는 방식으로.. 진리를 가르치셨다.

 

예수님의 가장 위대한 가르침 중에는

사람들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써 하신 말씀들이 많다.

예컨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 보면,

“누가 내 이웃이니이까?” 라는 질문에 대해서, 그 답변차원으로 하신 가르침이고, 

 

너희가 거듭나야 된다는 말씀도,

이어지는 요3: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이 말씀도

니고데모의 질문에 대답하시는 차원에서 주신 가르침이었다.

 

   우리가 어떤 질문을 하든,

   만약 하나님이 우리 질문에 대해서 기분 나쁘게 생각하시든가,

   불편해 하신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잘못 이해하는 것이다.

 

여러분, 질문을 금하는 종교의 대표적 예가 이슬람교이다.

이슬람은 권위주의의 극치요, 안 믿을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다.

이슬람은, 나라의 법으로써, 믿는 것을 강요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슬람 국가에서, 처음부터 이슬람이었던 사람이

다른 종교를 믿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이슬람으로 태어난 사람이, 이슬람 신앙을 저버리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처음부터 유대교나 콥틱 등 타종교인 사람은, 허용하는 면이 있다고 한다.)

 

이슬람교를 안 믿을 자유를, 허락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질문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이슬람 신앙의 방식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은, 열린 사회, 민주주의, 자유, 그리고 기독교이다.

이슬람교는 매우 율법주의적으로 엄격한 종교이기 때문일 것이다.

 

기독교 사상이 이슬람 사람들에게 들어올 때,

그것이 이슬람 율법주의와 얼마나 대비가 될 것인지 알기 때문에,

그들은 기독교를 제일 두려워하고, 제일 적대시하고,

기독교 선교를 절대적으로 가로막으려 한다.

 

▲정리하면, 신앙생활에 있어서, 질문은, 내 영적 성장에 아주 중요하다.

여러분, 아마 저는 제 스스로도 질문을 많이 하는 기독교인에 속한다.

저는 목사로서 여러분에게 대답을 잘 드리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제 스스로의 영적인 성장을 위해서도,

성경에 대해서, 신앙의 삶에 대해서, 많이 질문해 본다.

 

때로는 그 대답을

서적에서 찾기도 하고, 기도 중에 찾기도 하고,

또 믿음의 선배들의 조언을 통해서 얻기도 한다.

 

여러분, 우리가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첫째, 내 삶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게 남의 삶이라면, 대충 넘어가도 된다.

그러나 내 신앙, 내 영혼, 내 영생, 내 미래이기 때문에

당연히 진지하게 물어봐야한다.

 

    요즘 TV에 임플란트(치아 이식) 광고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큰돈 들여서 하는 건데, 아무 거나 할 수 있나요?’ 하면서,

    치과 의자에 누워있던 환자가 벌떡 일어나, 임플란트 재질을 의사에게 물어본다.

 

    소중한 자기 치아를 임플란트 하는 것이니까, 제대로 된 제품인지 물어보는 것이다.

    만약 남의 일이라면, 그렇게 자세히 물어볼 필요가 굳이 없다.

 

마찬가지로,

내 신앙, 내 인생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당연히 물어봐야 한다.

물어보지 않는 것이 이상한 것이다.

그것은 영생에 대해, 관심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믿음이 아주 좋아서 그런 경우도 있지만...)

 

▲질문에서 좀 더 나아가면, 리스크risk도 감수해야 한다.

‘질문’이.. 이론적 영역이라면,

‘리스크’(위험부담 감수)는.. 실천적 영역이다.

 

신앙은 궁극적으로 삶의 실천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질문’은, 질문 차원에서 끝나지 않고,

한 번 내가 성경의 가르침대로 살아보는 데는.. 엄연히 리스크(위험부담)가 뒤따른다.

 

신앙에는, 즉 구도자의 길에는, 리스크가 반드시 있다.

그 리스크를 감수한 사람만이.. 진리와 영생의 길에 이른다.

어떤 면에서, 오늘날 성도들이, 리스크를 감수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신앙의 성숙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얕은 물가에서 자기 발목만 담그고 있는 것이다. 깊이 나아가려 하지 않는다.

 

모든 믿음에는 리스크가 있다.

다윗이 물매돌을 갖고 골리앗과 싸우러 나갈 때, 리스크가 있었다.

사람들이 놀란 이유는, 그 리스크에도 불구하고, 싸우러 나갔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는 것.. 당연히 큰 리스크였다.

오늘날 우리들이 놀라는 이유는, 그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그들이 위험부담risk을 감수하고 이루었다는데 있다.

어떻게 바닷물이 벽을 이루고 있는 그 사이로, 걸어 들어갈 수 있었을까?

(물이 함몰되어) 죽기를 각오하고 갔을 것이다.

 

그 이외에도,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믿음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공통적으로 위험부담을 감수했다.

 

더욱이 큰 리더로 쓰임 받은 사람들은 (일례로 엘리야, 다니엘)

그럴수록 남보다 더 큰 위험부담이 있었지만, 그것을 감내하였고, 돌파하였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신앙의 질문 차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리스크, 위험부담 차원으로 발걸음을 옮겨야 한다.

   그것을 뚫고 극복한 사람만,

   영적 성장의 경지, 또는 모세, 다윗, 엘리야, 다니엘 같은 지도자 반열에 오른다.

 

아브라함이 75세때 새로운 길을 떠난 것도 상당한 리스크를 감수한 것이었다.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 것도, 대단한 리스크를 감수한 것이었다.

 

 

◑2. 신앙생활에는 믿음이 중요하다.

 

▲그러기에 믿음이 요구된다.

믿음이라는 것은, (마치 안개처럼)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이기 때문에, 당연히 여기에는 위험이 있다.

그러기 때문에 믿음이 필요한 것이다.

 

믿음이란.. 얼핏 보면 이론적이고, 쉬운 것 같지만,

진짜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친 ‘믿음’ (이론, 관념이 아니라 실천이다)

여인이 옥합을 아낌없이 깨뜨린 ‘믿음’

자기 가족과 전토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쫓는 ‘믿음’ 등

믿음은.. (이론, 지적 동의가 아니라) ‘위험을 감수하는 행동’이다.

 

그러나 이런 위험부담을 감수하고도,

믿음의 길로 뛰어들어야 하는 이유는,

(앞서 위에서 말씀드렸지만)

내 영혼이, 내 영생이 그토록 중요하기 때문이며,

그렇기 때문에, 한 번 도전해 볼만한 리스크(위험부담)이라는 것이다.

 

내 영혼에 대한 것이니까

내 운명을 좌우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는 위험부담이 있지만,

우리는 당연히 그것을 감수하면서,

(발목이 아니라) 깊은 바다 속으로 나가 봐야 하는 것이다.

 

내 영혼을 위해

우리가 진지하게 물어봐야 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진지하게 내 발을 담그고, 한 발자국씩 나가봐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약간의 위험이 있더라도 말이다.

 

▲예를 들면, 천국에 대해서

어떤 젊은 학생이 목사님을 찾아가서 질문했다.

‘천국은 정말 있는 겁니까?’

아주 중요한 질문이었다.

 

우리도 이런 질문을 심각하게 해야 한다.

보통 사람들이 내세위주의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이것이 성경의 본질인데)

현실위주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그 이유는, 내세에 대해 심각하게 질문을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각종 신학적 이론을 거론하기 이전에

한 가지 명제 ‘천국이 정말 있느냐, 내세가 정말 있느냐?’

여기에 대한 확실한 답변을 얻을 수 있다면,

오늘 내 삶은 180도로 달라질 것이다.

 

천국이 정말 있으면,

내 인생 목적은, 그 내세천국에 집중하는 삶을 반드시 살게 되어 있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까지는 믿겠는데,

‘내세’ 라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일지..

모호하게 생각한다. 절감하지 않는다.

 

(그런데 사람들이 내세 천국에 대해 모호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런 이유도 있다.↙)

 

▲성경은 천국에 대해 설명 하고 있지만, 사실 많고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지는 않다.

그것은 우리가 천국에 가 본 다음에, 가서 보면 자연히 알게 되기 때문에,

예수님도 내세에 대해서 그렇게 많이 말씀하시지 않았고,

성경도 천국에 대해서 그렇게 많이 말하고 있지 않다.

 

이것은 하나님의 속성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가나안으로 가라 하실 때에도,

그것을 ‘약속의 땅’이라 부르시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부르셨지만,

더 이상은 구체적으로 말씀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가보면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전에 지나보지 못한 길.. 믿음으로 나아간다.

하나님께서는, 미리 우리에게 많은 것을 불필요하게 보여주시지 않고,

우리가 믿을 수 있는 만큼, 우리에게 필요한 만큼

하나님이 판단하시기에 필요한 만큼만 말씀하시고,

그 다음은 우리가 신뢰하고 따라오기를 원하신다.

 

본문에 여호수아가 말한다.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했음이라’ 수3:4

아주 중요한 말씀이다.

 

그들이 요단강을 앞에 두고, 요단강을 건너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는데,

사실 이전에 이 땅에 들어가 본 사람은, 정탐꾼으로서 여호수아와 갈렙 밖에 없었다.

그 이외 사람들은 한 번도 지나보지 못한 길을, 이제 가기 위하여 준비하고 있다.

그래서 그가 하는 말이 ‘너희가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니라’ 이었다.

 

우리 인생과 신앙에 대해서는, 우리가 한 번도 지나보지 못한 길이 분명히 있다.

여러분이나 저나, 천국에 가 본 적도 없고,

또 믿음을 우리 삶에 실천하는 부분에 있어서도

우리가 다 처음 시도해보는 것들이 많이 있다.

 

그런 면에서 내가 '과거에 한 번도 지나본 적이 없는 길'이다.

 

과거에 조상들은 가본 적이 있을 수 있지만, 나는 처음인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①teachable, 배울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자기가 해 본적이 없기 때문에, 배워야 된다.

나이 고하를 막론하고, 배우는 사람이 겸손한 사람이고, 온유한 사람이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공부하는 사람, 배울 수 있는 사람.., 그것이 중요하다.

 

 

②성령이 가르쳐 주신다. (전자가 인간의 영역이라면, 이것은 주님의 영역)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물었다.

‘사람이 나이가 들어서 어떻게 거듭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가서 거듭날 수 있겠습니까?’

(용감하게) 아주 중요한 질문을 했다.

 

그 때 예수님은,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너에게 거듭나야 하겠다는 말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말씀 하셨다.

 

왜냐하면 이것은 결국 우리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령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다.

이건 우리의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니다.

 

③거듭난 사람에게 믿음이 생긴다.

거듭남은, 물이 변해서 포도주가 되는 것처럼,

우리가 영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되는 것인데,

그 결과, 당연히

이전에 안 믿어지던 것들이, 다 믿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이해하고 믿을 것이냐’, ‘믿고 이해할 것이냐’를 논할 때

믿고 이해하는 것이 올바른 순서다.

만일 여러분이, 모든 것이 이해가 될 때까지 기다린다고 한다면

영원히 기다려도 모든 것을 다 이해하게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믿으면.. 다 이해된다.

 

그래서 성 어거스틴이 말했다. ‘내가 이해하기 위하여 믿는다’고!

믿으면 이해되는 부분이 많이 있고,

믿으면 더 이상 문제되지 않는 것들이 많이 있다.

 

옛날에는 이런 저런 질문을 많이 했는데,

믿고 나니까, 많은 질문들이 저절로 다 사라지는 것이다.

(먼저 반드시 거듭나야 한다.)

 

    정리하면,

    ◑1에서는, 신앙에 대해 질문하라, 회의를 품으라고 했다.

    그러나  ◑2에서는, 신앙에 대해 '믿으면 다 깨닫고, 알게 된다'는 식으로 설명 드렸다.

    이 둘은, 역설적paradox 명제이지만, 우리 신앙에 있어서 둘 다 필요하다.

    내 영생 문제는 정말 중요한 것이니까!                                                                     ▣ 기독교 사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