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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38장 1~8 히스기야 왕의 사적에 나타난 하나님의 주권

LNCK 2010. 9. 21. 14:37

 

◈히스기야 왕의 사적에 나타난 하나님의 주권         이사야 38장 1~8                출처

 

이사야 38~39장에는 히스기야 왕이 병들어 죽게 되었다가

기도로 살아난 유명한 사건이 기록되었습니다.

 

이 본문을 통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히스기야의 생명을 15년 연장해주신 것처럼

자신의 병을 고쳐주실 것을 기도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유명한 사건의 중요한 메시지를 찾아내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본문의 메시지는 ‘죽게 된 사람이라도 기도하면 살아날 것’이 아닙니다.

 

만약 본문의 메시지가 위와 같다면 아마 병들어 죽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

기도하면 모두 살아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기 전에 제가 이사야 38장과 39장을 연결, 비교해서 읽어봤습니다.

38장에서 히스기야는 병들어서 기도했고, 하나님의 응답을 통해 승리했습니다.

 

그러나 39장에서는 기도 없이 바벨론 사절단에게 무기고와 보물고를 열어서 보여주었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들었습니다.

 

따라서 본문은 ‘기도하면 성공이요, 기도하지 않으면 실패’라는 메시지를 전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이것도 본문이 가르치는 교훈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본문이 말씀하는 핵심적인 교리는 아닙니다.

 

▲성경의 핵심 교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제목이 ‘히스기야 왕의 사적에 나타난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초점을 맞추고 오늘 본문이 말씀하는 중요한 메시지를 찾아보고자 합니다.

 

인간 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사상들은 주권자가 누구인가에 대한 차이를 보여줍니다.

인간이 주권자면 인본주의가 되고, 물질이 주권자면 공산주의가 되며,

하나님께서 주권자시면 기독교가 됩니다.

 

히스기야 왕은 주전 727년에 25세의 나이로 왕위에 즉위해서 14년을 통치했습니다.

그런데 히스기야 왕 재위 14년, 즉 39세가 되던 해에 두 가지 큰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는 그가 병에 걸린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앗수르 왕 산헤립이 1차 침공을 감행한 것입니다.

 

히스기야가 앓았던 병은 피부암이었으리라고 추측합니다.

왜냐면 이사야 38 :21절에서 이사야 선지자가

“한 뭉치 무화과를 취하여 종처(환부)에 붙이면 왕이 나으리라”고 예언했기 때문입니다.

 

무화과를 종처에 붙이라는 말씀은 피부에 종양이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피부병으로 인해 죽을만한 병이라면 피부암 밖에는 없기 때문에

히스기야의 병을 피부암이라고 추측해본 것입니다.

 

이와 같은 질병 때문에 히스기야 왕은 벽을 향해 통곡하며 기도하였고,

결국 하나님의 응답을 받아 15년의 생명을 연장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본문 6절의 응답도 더불어 받습니다.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져내겠고 내가 또 이 성을 보호하리라.”

히스기야 왕이 39세에 만난 두 가지 큰 문제는 결국 하나님의 은혜로 모두 해결되었습니다.

 

히스기야가 왜 15년의 생명을 연장 받았을까요?

히스기야는 29년 동안 유다를 통치하고 54세에 죽었습니다.

그가 죽을 때 그의 아들 므낫세가 왕이 되었는데 열왕기하 21 :1절을 보면

“므낫세가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십 이세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만약 히스기야가 39세에 죽었다면 므낫세가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고,

히스기야가 아들 없이 죽었다면 다윗의 왕가가 끊어졌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의 생명을 연장해주셔서 3년 만에 아들을 낳게 하시고,

그 아들이 12세가 되어 왕위를 이을 수 있자 그를 데려가셨습니다.

 

다윗 왕가의 계승이라는 절대적인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15년의 생명을 연장해주시는 특별한 섭리를 베푸신 것입니다.

 

이런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오늘 본문이 증거하는 절대 진리는

하나님께서 주권자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성경 66권을 통틀어서 성경이 증거하는 진리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의 주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모르는 사람은 성경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주권자이심을 세 가지 측면에서 증거합니다.

 

 

◑1. 하나님은 인간의 살고 죽음(生死)을 주관하는 주권자이시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시면 저항할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본문 1절을 보면 “그 즈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니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나아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네 집에 유언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그런데 5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네 수한에 십 오년을 더하노라”

 

이것은 사람의 생명에 대한 주권이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전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죽고 살지 못하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심히 통곡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 눈물을 보시고 응답하셨습니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눈물을 뿌리며 부르짖어 보십시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통곡하며 우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중요한 무기가 됩니다.

 

히스기야는 “가로되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주의 앞에서 진실과 전심으로 행하며

주의 목전에서 선하게 행한 것을 추억하옵소서” :3,

 

“나는 제비 같이, 학 같이 지저귀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울며 나의 눈이 쇠하도록 앙망하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압제를 받사오니 나의 중보가 되옵소서” 하며 기도했습니다. :14

 

영어성경에는 14절이 “I am troubled; O Lord, come to my aid!”

(오, 주님! 제가 곤란에 빠져있으니 오셔서 나의 도움이 되옵소서)

 

히스기야는 15년만 더 살게 해주시라고 기도한 것이 아니라

오셔서 나의 도움이 되어 주시라고 기도했음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는 신비하여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하나님의 손에 달린 문제입니다.

사도행전 12:장에 보면 초대교회에 일어난 핍박이 기록되었습니다.

헤롯왕이 사도들을 죽였습니다. 요한의 형제인 야고보는 이 때 칼로 죽임을 당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옥에 갇혀 있다가 천사를 통해 빠져 나오게 됩니다.

똑같은 사도인데, 야고보는 죽었지만 베드로는 살았습니다.

 

이 말씀을 볼 때, 왜 하나님께서 야고보를 죽게 내버려 두시고

베드로를 살리셨는지 궁금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둘 다 살리실 수도 있었고, 둘 다 죽이실 수도 있었습니다.

 

혹은 야고보를 살리시고 베드로를 내버려 두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왜 야고보를 죽이고 베드로를 살리셨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이요, 신비에 속한 일입니다.

야고보가 베드로보다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한 이력이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능력이 많아서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얼마든지 야고보에게도 그런 능력을 주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의 신비요, 주권에 속한 일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섣불리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중에는 사랑하는 가족을 먼저 하나님께 보낸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수명이 그 사람의 삶의 질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요인은 아닙니다.

 

짧은 생애를 산 사람 중에도 하나님께서 귀하게 인정하시는 인생이 있는가 하면,

오래 살면서도 악한 짓만 골라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악인이었던 김일성이 얼마나 장수했습니까?

반면에 미국 건국 초기에 인디안의 선교를 위해 헌신한 데이빗 브레이너드 같은 위인은

28세에 폐결핵에 걸려 29세에 짧은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또한 존 하바드라는 영국 사람은 28세에 미국에 건너가서 일 년 동안 목회를 하다가

폐병에 걸려 죽었습니다. 죽기 전에 그는 자신의 재산 절반과 도서관의 모든 책들을

다 기부하면서 목사를 양육하는 학교를 세워달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래서 생겨난 대학이 유명한 하바드 대학교입니다.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별명으로 널리 알려진 손양원 목사님도 48세에 공산당에게 순교하셨고,

19세기 초에 유명한 스코틀랜드의 목사였던 로버트 맥체인은 30세가 되기 전에

병이 들어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설교는 지금도 남아 있고 지금도 저는 맥체인의 설교를 보면서 감동을 받습니다.

 

또한 그의 죽음으로 스코틀랜드에 큰 각성 운동과 부흥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욥도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그 날을 정하셨고 그 달 수도 주께 있으므로

그 제한을 정하여 넘어가지 못하게 하셨사온즉”(욥 14 :5).

욥은 하나님께서 인간 삶의 시간을 정해놓으셨다고 믿었습니다.

 

왜 어떤 사람은 오래 살고 어떤 사람은 일찍 죽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신비요, 주권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중에 7~80세가 넘으신 분들은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십시오.

또한 일찍 가족을 잃었다고 해서 너무 섭섭해 하지 마십시오.

이는 다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히스기야에게 15년의 생명을 연장하시겠다고 말씀하신 후에

그에게 약의 처방을 주셨습니다.

“한 뭉치 무화과를 취하여 종처에 붙이면 왕이 나으리라”(사 38:21).

 

히스기야는 이 말씀에 순종해서 무화과를 종처에 발라서 나았습니다.

사실 무화과는 약이 아니라 먹는 과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치유 방법이기 때문에 히스기야가 순종한 것입니다.

 

만약 히스기야가 순종하지 않았다면 죽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때가 되면 먹고, 자고, 건강을 관리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은 모두 해야 합니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운명론자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섭리하심을 믿는 섭리론자입니다.

섭리론자는 운명론자처럼 아무 것도 안하거나 게으름을 피우는 우를 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셨더라도

부지런히 내 할 일을 감당하는 섭리 신앙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께 달렸으므로 우리는 거기에 신경 쓰지 말고

하루 한 시간을 살더라도 내가 살아가는 목적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14 :8)고 고백했습니다.

 

살아도 죽어도 내 자신과 돈과 명예를 위하여 사는 사람은 참된 주권자를 모르는 인생입니다.

하나님께서 생사화복의 주권자이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는 주의 것이라는 인생관을 가지고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분입니다.

이와 같은 인생관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현세와 내세에도 복된 인생을 누리는 줄로 믿습니다.

 

 

◑2. 하나님은 자연세계를 주관하는 주권자이시다.

 

하나님께서 15년의 생명을 약속하시자 히스기야는 징조를 구했습니다.

열왕기하 20"장 8~12절에 보면 이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었습니다.

 

히스기야가 징조를 구하자 이사야 선지자는 해 그림자가 앞으로 10도,

혹은 뒤로 10도 움직이는 이적 중 하나를 택하라고 말합니다.

 

해 그림자는 360도이므로 10도에 해당하는 시간은 20분입니다.

시간이 앞으로 가는 것은 쉽지만 뒤로 가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까?

 

그래서 히스기야는 해 그림자가 뒤로 10도 물러가기를 선택했고

하나님께서는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연계의 주권자이시기 때문에 자연계에 일어난 일에도 결코 우연은 없습니다.

역사를 살펴보다가 저는 아주 중요한 사건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1588년에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영국을 침공한 사건입니다.

그 당시 영국을 다스리던 왕은 엘리자베스 여왕이었습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1559년에 즉위해서 1603년까지 영국을 통치했는데,

그녀의 통치 기간에 영국은 개신교 국가로서의 면모를 확립했습니다.

 

그런데 스페인은 가톨릭 국가였기 때문에 스페인과 영국 사이에 갈등이 생겨났고,

결국 무적함대라고 불리던 알마다가 영국을 침공한 것입니다.

 

스페인의 병력은 함대 130척과 군인 3만 명이었고,

영국의 병력은 쓰러져 가는 배 몇 대에 불과했습니다.

병력상으로는 상대가 안 되는 전쟁이었습니다.

 

그런데 무적함대 130척이 도버 해협에 진입했을 때 북해의 찬바람이 불어왔습니다.

따뜻한 지중해 기후 속에 살던 스페인 사람들은 찬바람을 맞자

견디지 못하고 모두 감기에 걸렸습니다.

 

모두 죽게 된 판국에 함대와 대포와 3만 명의 군인들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결국 3만 명의 스페인 군대와 무적함대는 도보 해협에서 전멸당하고 영국이 승리했습니다.

 

만약 이 전쟁에서 영국이 졌다면 아마도 지금 개신교는 망하고

가톨릭이 흥왕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북해의 바람을 명하여 도버 해협으로 불게 하시고

무적함대를 망하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애에도 바람과 폭풍과 비가 여러분을 돕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이시다

 

바벨론은 본래 앗수르의 속국이었으나 므로닥발라단이라는 왕이 앗수르와 싸워

독립을 이룬 신흥 독립국가였습니다.

그런데 히스기야 왕이 죽을병에서 낫고 앗수르를 물리쳤다는 소식이 바벨론에 들리자

바벨론 왕은 히스기야에게 사절단을 보냈습니다.

 

예물을 가지고 온 사절단이 어떻게 죽을병에서 살아났는지,

어떻게 앗수르 같은 강대국을 물리쳤는지 물으면서 아첨을 떨었습니다.

 

그때 히스기야는 이렇게 말해야 했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우리의 능력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무슨 약이나 의사의 능력으로 제 병이 나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무화과를 붙이라고 명하셔서 붙였더니 제 병이 낫고,

제 생명이 15년 연장되었습니다.

우리가 앗수르를 물리친 것도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 때문입니다.

우리의 보물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산성이요, 반석이요, 능력이십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바벨론의 사절단이 아첨을 떨자 판단력이 흐려져서

보물고와 무기고를 모두 보여주는 우를 범하였습니다.

 

바벨론 사람들이 보기에 유다의 보물과 무기가 아무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나중에 안심하고 유다를 침공해서 멸망시킨 것입니다.

 

사람은 아첨에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워터게이트 사건에 연루되서 감옥형을 받고 그 곳에서 예수님을 믿은 찰스 콜슨은

자신의 저서 「갈등 가운데 있는 왕국」(kingdom in conflict)이라는 책에서

미국 행정부를 지배하는 아주 사악한 악 가운데 하나가 '아첨'이라고 말했습니다.

 

대통령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아첨을 떨면 나라가 어려워진다는 요지입니다.

 

사도행전 12장에서 야고보를 죽인 헤롯왕도 아첨 때문에 망한 인물입니다.

백성들 앞에서 번쩍거리는 옷을 입고 연설하자 사람들이 그를 신이라고 불렀고,

감언이설에 넘어가 자신이 신인 것처럼 행세하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충이 먹어서 죽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아첨은 인간의 판단력을 흐리게 합니다.

 

히스기야 왕이 아첨에 속아서 보물고와 무기고를 모두 보여주자

이사야 선지자가 와서 왕이 망령된 짓을 했기 때문에

유다의 모든 보물과 무기를 뺏기게 되고 왕의 자손들은 환관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그것은 미래의 일이기 때문에 알바 아니고

지금 평안하면 그것으로 됐다고 대답합니다.

 

“보라 날이 이르리니 네 집에 있는 모든 소유와 네 열조가 오늘까지 쌓아둔 것이

모두 바벨론으로 옮긴바 되고 남을 것이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또 네게서 날 자손 중에서 몇이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 하셨나이다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이르되 당신의 이른바 여호와의 말씀이 좋소이다

또 가로되 나의 생전에는 평안과 견고함이 있으리로다 하니라”(사 39:6-8).

 

이 사건은 주전 713년의 사건입니다. 바벨론에 의해 유다가 망한 해는 주전 587년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의 예언은 무려 126년 뒤에 일어날 사건이었습니다.

 

앗수르를 일어나게 하시는 분도, 바벨론을 강성케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역사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주관하십니다.

그래서 역사(History)는 그 분의 이야기(His story)입니다.

 

이번 주간은 6 2 5주간입니다.

지난 10년 동안 두 분의 대통령을 지나면서 6 2 5는 온데간데없고

6 1 5만 계속 들어왔습니다만,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관자로서

우리 민족에게 6 2 5라는 비극을 허락하셨다는 점에서

6 2 5를 상기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6 2 5를 흔히 민족상잔의 비극이라고 말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공산주의자들이 부추긴 일부 사람들이 전쟁을 일으켰고,

근본적으로 공산주의와 전쟁을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비극적인 6 2 5가 왜 발발했을까요?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두 가지를 깨닫게 해주시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1) 첫 번째로 공산주의가 악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공산주의는 악 중의 악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은 각각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받는다고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공산당의 역사가 진행되면서 공산당 간부들은 모두 잘 먹고 잘 살게 되었지만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더 가난하고 못 살게 되었습니다.

소련도 북한도 모두 그렇게 되었습니다.

 

김일성과 김정일 부자가 굶겨 죽인 인구도 몇 백만에 달합니다.

이처럼 공산주의는 역사의 주관자가 물질이라는 사악한 사상이며,

공산주의가 악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명확하게 알려준 것이 바로 6 2 5입니다.

 

공산주의는 기독교와 양립할 수 없습니다. 그런 성경과 대치되는 악한 사상을 따라서 살다가는

죽은 이후에 영원 형벌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2) 두 번째로 6 2 5를 통해 우리나라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우상숭배를 제거하시기 위해서입니다.

 

6 2 5를 통해 우리나라에 뿌리 깊게 박혀있는 유불선 3대 사상이 박살나고,

(무신론이니까 기독교 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를 말살시킨 것입니다)

우리는 히스기야처럼 벽을 향해 통곡하며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결과로 UN의 국가들이 우리에게 원조를 보내주고

국가의 경제가 번영하여 세계 10대 강국 안에 들지 않았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축복을 베푸시고 우리나라를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선교의 강국으로 삼아주셨습니다.

 

선교하고 복음을 전하면 대한민국은 삽니다.

태평양 한 가운데 돌 하나 던지는 것처럼 작은 일일지라도 조금씩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다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후손들에게 복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오늘 이 시간 6 2 5를 통해서 역사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심을 다시 한 번 깨닫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치는 말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단순히 영적인 체험을 얻기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너무 영적인 체험에만 매달리지 마십시오. 영적체험만 추구하는 사람들은

마치 마약중독자처럼 점점 더 큰 영적체험만 얻으려는 실수를 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관자이시며

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무능하시다면 우리는 기도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권자이시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합니다.

 

우리는 사나 죽으나 주를 위해 살아야 합니다.

나만을 위해 사는 이기심은 당장은 좋은 것 같아도

결국 죽고 나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 헛된 인생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해서 살면 다 버리는 것 같아도 남는 인생, 영원히 복된 인생이 됩니다.

 

우리는 개인과 국가의 장래가 모두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 믿음은 히스기야처럼 기도하는 삶으로 표현됩니다.

기도하면 이사야 38:장처럼 승리를 얻을 것이요,

기도하지 않으면 이사야 39:장처럼 패배를 맞이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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