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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 (또는 환란) - 관점 바꾸기 2660

LNCK 2010. 9. 24. 15:49

◈평안 (또는 환란) - 관점 바꾸기                                막4:35-41                             출처 보기


 

인생길에 피할 수 없는 풍랑,

관점을 바꾸어 보세요. 그래야 참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성경 전체에 이런 흐름이 있는데,

환난을 피해서가 아니라, 환란을 통과하면서 평안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통과합니다.)

 


▲생명과 평안의 종교


크리스마스를 맞아 모처럼 고교 동창들끼리 모여 파티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던 친구들이 갑자기 화제를 종교문제로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종교학과를 다니는 영자가 순자에게 물었습니다.

“예수님과 부처님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니?”


한참을 진지하게 생각하던 순자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응, 그건 무엇보다도 헤어스타일 아니겠니?”


여러분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차이점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부활하시고 지금도 살아계신 예수님을 믿습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게 살아 역사하시는 성령님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은 살아 역사하는 힘이 있습니다. 생명이 있습니다.


다른 종교는 철학 혹은 도덕은 될 수 있을지언정.. 거기엔 생명이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생명’입니다.

그리고 생명이 있는 곳에는, ‘평안’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인 우리는, 오늘날,

그 ‘생명과 평안’을 날마다 느끼고/누리고/체험하며 살고 있습니까?

본문을 통해서, 그 문제를 한 번 생각해 봅시다.



◑1. 풍랑을 만나 두려워 떨고 있는 사람들


▲‘씨앗의 비유’ 다음에 예수님이 풍랑의 사건을 통해서

씨앗의 신비, 믿음의 신비를, 체험적으로 제자들에게 지금 가르치고 계십니다.


막4장은 ‘씨 뿌리는 비유’ 그리고 ‘겨자씨의 비유’에 대한 예수님의 설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비유를 설교하시고 나서, (막4:1~34)

바로 그날 저물 때에 갈릴리 건너편으로 가자고 하셨습니다. (막4:35-41)


그 밤에 큰 광풍이 일어나 물결이 커지더니, 물결이 배에까지 들어왔습니다.

제자들은 곤히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웠고,

예수님께서는 바람과 풍랑을 잔잔케 하셨다고 하는 사건입니다.


갈릴리 바다엔 일기예보가 없습니다. 게릴라성 예측 불허의 풍랑이 일어납니다. 주1)

이것이 인생과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의 바다엔 일기예보가 안 통합니다. 

인생의 바다에도, 예측 불허의 풍랑이 일어납니다.


▲1. 풍파에는, 노련한 전문가라도 아무 소용없습니다.

본문의 제자들이 풍랑을 만나 곤혹을 치루고 있는 것은

배를 젓는 저들이 애송이, 초보자라서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노련한 뱃사람들이었습니다.

갈릴리는 자신들의 고향이고, 직장이고,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그런데 뱃사람들이었던 제자들이 “우리가 죽게 되었나이다”라고 하소연합니다. 4:38


인생의 바람은 인생항해가 서툰 사람에게만 오는 것이 아니지요.

건강에 자신 있던 사람도, 갑자기 질병으로 쓰러집니다.

노련한 경영가도 사업에 실패를 겪을 수가 있습니다.

능숙한 신앙인들도, 시험을 만나고 유혹에 부딪힐 수가 있습니다.


▲2. 예수님과 동행해도 풍랑이 일어날 때가 있습니다.

본문의 제자들, 요나처럼 불순종하여 도망하다가 풍랑을 만난 게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 풍랑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를 모시고 가던 제자들에겐, 일어났던 풍랑마저도 멈춰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예수님을 모시고 가는 배 한가운데서, 지금 풍랑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이, 풍랑에, 즉각 응답해 주시지 않으실 때가 많습니다.

제자들이 이해할 수 없었던 사실이 또 하나 있었습니다.

이 난리 풍랑 속에서, 예수님은 고요히 주무시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때로 인생의 바다에서 당신의 자녀들이 파산을 겪습니다. 실패를 경험합니다.

질병으로 신음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도무지 무관심한 듯 보일 때가 있습니다.


당신의 자녀들이 울부짖습니다. 부르짖어 기도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응답이 들려오지 않습니다.


이때 흔히 사람들이 말합니다. ‘야! 정말, 인생 모르겠다.’

저희들이 어릴 때, 어른들에게 인생에 관하여 물으면,

어른들은 이렇게 대답하곤 했습니다. ‘네가 크면 알게 될 거라고...’

그러나 크면 클수록 더욱 모르겠는게 인생 아니었습니까? 


   중세기 어느 수도원에 신부복을 입은 어느 낯선 구도자 한 사람이 찾아와

   수도원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러자 수도원을 지키고 있던 사람이 나와서 구도자에게 물었습니다.

   "누구를 찾으십니까?" 낯선 구도자는 대답했습니다. "저는 평화를 찾습니다."

   바로 이 구도자가 저 유명한 '신곡'을 쓴 단테였습니다.


   "평화를 찾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60억이 넘는 사람들이, 한결 같이 찾고 있는 것은 평화입니다.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은.. 지식을 얻으면 평화로울 것이라고 기대하기 때문에

   밤잠을 안자고 열심히 공부합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은.. 돈을 많이 벌면 평안할 것을 믿기 때문에

   이윤의 추구를 위해서 전력을 기울입니다.

   높은 자리에 오르면 평안하리라 생각하기 때문에

   물불을 가리지 않고, 승진하기 위해 눈에 불을 켭니다.


   그러나 인생 한가운데서 누구도 진정한 평안을 찾지 못합니다.

   자신의 힘으로 평안을 찾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자기가 혼자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실존주의자들이 본 인간입니다.


   신안 앞바다에서 나오는 천일염은 유익한, 유명한 소금입니다.

   염전을 하시는 장로님의 얘기를 들으니

   소금 가마니를 바닷물에 넣으면, 넣는 순간 녹아버린 답니다.

   그러나 민물엔, 소금가마니를 넣어도, 건재해 거의 그대로 있답니다.

   왜 그럴까요? 소금의 고향이 바다이기에

   소금은 바다엔 너무나 쉽게 녹아 버린다는 거지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천국이 고향인 사람, 영적인 사람은

   영적인 바다에서 잘 녹습니다. 예배에 빠져듭니다.

   말씀에 사로잡힙니다. 기도의 자리에서 행복해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세상의 바다가 고향인 사람은, 유혹에 쉽게 넘어집니다.

   사소한 문제에 짓눌려 평안을 잃어버립니다. 부정적인 일에 쉽게 현혹 됩니다. 

   이제껏 받은 은혜도, 세상에 한번 빠져 버리면, 너무나 쉽게 잃어버리고 맙니다.

   당신의 고향은 천국의 바다입니까? 아니면 세상의 바다입니까?


예수님은 풍랑 한복판에서도 편히 주무실 수 있었습니다.

세상이 그의 평안을 '녹일 수' 없었습니다.

세상이 그의 기쁨을 앗아갈 수 없었습니다.



◑2. 풍랑 속에서 편안히 주무시는 예수님


1. 본문 메시지의 관점을 바꿔보세요.

제자들이 이렇게 두려워 떨고 있는 시간에 예수님은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38

라고 본문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깨워서 비로소 일어나신 예수님, 바람을 꾸짖어 잔잔케 하시고, 제자들을 나무라십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이때 제자들의 반응이 마지막 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전통적으로 우리는,

‘풍랑을 잔잔케 하시는 능력’ - 이것에 초점을 두고 본문을 해석해 왔습니다.

'주무시는 예수님을 빨리 깨워라' - 이것을 본문의 주제로 잡았습니다.

 

그러나 관점을 바꾸어 봅시다.

‘풍랑 속에서 주무시는 예수님’ - 이것에 본문의 메시지(말하고자 하는 내용)가

담겨 있지 않을까요?


이것은 ‘믿음이 없는 제자들을 꾸짖으신’ 내용과도, 일맥상통 합니다.

안 그러면, 제자들을 꾸짖으실 이유가 없지요.

풍랑이 일어나는 것도, 당연한 자연재해요,

풍랑에 두려워 떠는 것도, 당연한 인간의 반응입니다. (나무랄 일 아닙니다.)


지금 그 광풍 속에서 고요히 주무시는 예수님의 믿음!

풍랑, 비바람 가운데에서도 편히 쉬시고 주무시는.. 예수님의 그 믿음과 평안에

우리가 놀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예수님이, 하나님이 흔들어 주시는 요람/그네를 타고 계셨다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주무셨다(καθεύδω)는, ‘죽은 듯이 잔다’는 뜻도 있습니다.


신구약 성경에 하나님께서 주무신다는 기록은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주무셨다καθεύδω는 기록도 이 사건에만 나타납니다.

물론 인성을 가지신 예수님, 밤이 되면 주무셨겠지요.

그런데 성경 기록은, 이 사건에서만 예수님께서 ‘주무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무셨다'는 뜻에 특별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는 뜻입니다.


풍랑속에서, 질풍노도 한 가운데서 예수님이 편히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이 본문의 주무신 사건은 의미심장한 사건이요,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시고자 하는 커다란 메시지가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주무신 것은 상당히 의도적 행동이었습니다.


진정한 기적은 풍랑을 잔잔케 하신 사건이 아니고,

풍랑 속에서도 예수님께서 주무시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이것이 본문의 진정한 의도라고 생각합니다.


풍랑을 잔잔케 하든/ 더욱 거센 풍랑을 일으키시든.. 그것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은 산을 세우기도 하시고/ 산을 무너뜨리기도 하십니다.

다만 우리는 그분을 신뢰하고 풍랑 속에서도 평안할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것을 우리에게 기대하십니다.


(주기철 목사님처럼, 비슷한 시기에)

주남선 목사님도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잡혀가 고문을 받으셨습니다.

일본 경찰의 고문은 잔인하여 말로 다 형용하기 힘들었습니다...


(자세한 내용 생략) 이러한 고문을 한 차례 가한 일경은

"잘 생각해 보고 마음을 돌이켜!"라고 주 목사님에게 말했습니다.


"백번 생각해 봐도 마찬가지요. 참 신은 하나님뿐, 다른 신은 있을 수 없소!"

또 다시 몽둥이가 사정없이 날아듭니다.

주 목사님은 시멘트 바닥에 쓰러져 기절하였습니다.


얼마 후, 의식을 되찾았고 사방은 조용하였습니다.

목사님은 그 자리에 엎드려 이 시련을 이기게 해 달라고

주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한참 기도하다가 우연히 시멘트 바닥을 만져보니

추운 겨울에, 물에 젖은 시멘트 바닥이, 불 땐 온돌방처럼 따뜻했습니다.

목사님의 온몸은 포근한 담요에 싸여 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눈이 사르르 저절로 감겨, 그는 깊은 잠에 잠겼습니다.


주남선 목사님은 후에 이 일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포근한 담요는 우리 주님 자신이었어요.

나는 주의 품에서 평안히 지낼 수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구해야 할 일은 “환경을 잠잠케 해 주시옵소서, 풍랑을 꾸짖어 주십시오”

라고만 기도할 것이 아니라,

“어떤 환경 속에서도 안식할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어떤 풍랑 한 가운데서도, 평안을 누릴 수 있도록, 주여! 제게 믿음을 주시옵소서!”

우리가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편23편에서 다윗이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다윗이 진짜 부족함이 없었습니까?


많은 신학자들은 사울에게 쫒겨 다닐 때, 이 시가 쓰여졌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다윗은 자기가 푸른 초장에 누워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다윗에게는 처한 환경보다, 함께 하시는 이가 누구인지가 중요했습니다.

풍랑속에서, 예수님처럼, 주무시는 것입니다. 푸른 풀밭위에서,


2. 꾸짖으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먼저 풍랑을 꾸짖으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나무라시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인생의 풍랑을 잠재울 때, 내 마음의 풍랑도 함께 잠재워야 한다는 것이지요.  주2)


아무튼 결론은 “믿음의 문제이지, 환경의 문제가 아니다”하는 것입니다.

풍랑이 문제가 아니라, 믿음 없음이 문제더란 말입니다.


인생의 문제는, 내 환경 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내 생각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기도를 바꿉시다.

“환경을 꾸짖어 주세요” 하기 전에 “내 믿음 없음을 꾸짖어 주세요”


심리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인간에게 일어나는 사건은 단 10%만이 사실fact이고

나머지 90퍼센트는 사건에 대한 반응느낌, 기분, 감정, 안달이라고 합니다.

10퍼센트의 사실보다는, 90%의 반응이 그의 인생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내게 중요한 것은 '사실'이 아니라, '사실에 어떻게 반응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아무리 큰 어려움이 있다 하더라도

10%의 사실을, 90%의 반응을 통해서 다 뒤집는 사람들입니다.

 

반대로 믿음 없는 사람은,

고작 10%의 사실에, 안달하여 90% 확대 반응하여,

스스로 자멸하고 마는 것입니다.



◑3. 예수님과 함께 평안을 누리시라


어리석은 사람들은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시련에 부딪힐 때마다,

고난 한 가운데 서 있을 때 마다,

‘왜 내가 이 어려움을 당해야 하는가?’ 이유를 캐묻고 다닙니다.


그러나 본문은 ‘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 한 가운데서 그와 같은 고생을 해야 했는가?’

이에 대해, 성경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 대신에,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습니다.


▲1. 그 시련, 풍랑의 자리에 예수님께서 함께 동행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시련을 당할 때, 고독한 인생길을 걸어 갈 때,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으시고, 늘 동행하시고, 우리 인생 항로에 동승하십니다.


2. 예수님, 내 인생의 선장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와 함께 여행을 하는 인생 바다라 하면, 풍랑이 쳐도, 우리는 평안합니다.

마지막에 배가 뒤집혀져 죽으면 제자들만 죽습니까?

예수님이 그 안에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이 선장 되십니다. 


어떤 한 소설가가 여객선을 타고 여행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바다 한 가운데서 풍랑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무섭게 바람이 몰아쳐 옵니다.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어 갑판위로 뛰어 올라가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린아이 하나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깡총깡총 뛰어놀며 재미있게 갑판을 오가지 않겠습니까?

“얘야, 너는 저 풍랑이 무섭지 않니?”

“아저씨, 우리 아빠가 선장이예요.

그런데 우리 아빠의 얼굴을 쳐다보니, 아빠의 얼굴이 편안했어요,” 


여러분 두려우십니까? 불안하십니까? 아빠 되신 예수님의 얼굴을 보시기를 바랍니다.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 보라♬

주님의 얼굴이 평안하시거든 여러분 평안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아무 일 없다 말씀하시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 하나님의 사람들은 풍랑 한 복판에서도 평안합니다. 환경이 아니라, 내 마음의 풍랑을 다스립시다.  

- 인생 풍랑을 만나면, 그 풍랑을 통해서, 주님을 더 깊이 신뢰하게 되고, 그 가운데 평안을 누려야 하겠습니다!



주1)

아시다시피, 이런 예측불허의 풍랑은,

갈릴리 수면의 따뜻한 공기와, 헐먼 산의 높은 곳에서 내려오는 찬 공기가

서로 부딪혀서 일어난다고 합니다.


주2)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꾸짖으셨다고 했는데

여기서 ‘꾸짖는 사건’이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조금 다르게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먼저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꾸짖으시고  마8:26

그 다음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본문 마가복음은 풍랑을 먼저 꾸짖으시고, 제자들을 꾸짖으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막4:39~40


꾸짖으신 순서가 바뀌더라도, 환경의 풍랑보다, 내 마음의 풍랑을 잠재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

메시지는 그대로 변함 없습니다.

 

또한 “꾸짖다”라는 이 단어는

귀신을 꾸짖으실 때 “꾸짖다”라는 단어와 동일한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고난의 신학, 영광의 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