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 기도의 선결 조건 막11:25 -출처보기, 정리-
▶문맥이 생뚱맞은(안 어울리는)본문
본문 막11:25절은, 선행하는 구절에 잇대어 읽기에 다소 엉뚱하게 느껴진다.
11:25절의 ‘용서’라는 주제가, 선행 23~24절과 흐름이 매끄럽지 못하다.
잠깐 직접 본문을 읽어보시라.
막11:23,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24,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25,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이렇게 25절이, 선행 구절과 전혀 엉뚱하게 배치된 것은,
그래서 문맥이 매끄럽지 못한 것은
후대에 성경을 누가 편집해서, 25절을 삽입했다고 주장하는 신학자도 있다. 주1)
그러나 지금은, ‘편집 비평설’을 논하는 자리는 아니고,
25절이 후대에 편집되어 삽입되었건, 안 되었건..
왜 25절이 23~24절에 곧바로 이어 배치되었는가?
이렇게 배치시킨 저자 마가의 의도는 과연 무엇인가? ←문제 제기
이 점을 살펴보려고 한다.
▶성전에서 기도할 때는, 용서가 기도의 선결조건이었다.
이것은 ‘너는 그 제물을 제단 앞에 놓아두고 먼저 가서 네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제물을 드려라.’ 마5:23-24
는 구절을 볼 때에도, 이런 기도의 신학이 잘 드러난다.
본문 막11:25절도 ‘서서 기도할 때에’로 시작하는데,
여기서 ‘서서’는, 성전에서 서서 기도하는 유대인의 기도법을 뜻한다.
그러므로 막11:25절, ‘서서 기도할 때 누구에게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는
결국 마5:23~24절과 병행구절이요, 같은 맥락의 가르침이다.
(위 막11:25절과 마5:23절은, 한글 번역이 번역본에 따라서 각각 다를지 모르나
원어로는 같은 뜻이다.
'혐의, 원한'을 품었다는 것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향하여 모종의 적대감이나
풀리지 않은 찜찜한 원한의 마음을 품고 있는 상태를 뜻한다.) 주2)
그것은 기도나 제물 봉헌에 나선 신자의 정직한 신앙심을 훼손하는 장애물이며,
그 장애물은, 기도나 봉헌에 앞서 반드시 제거되어야 마땅한데,
만약 적대감/원한을 품고, 성전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은,
그 경건이 결과적으로 위선적인 작태로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만큼 하나님은, 형제우애를 중요시 하신다는 뜻이다.)
▶막11:23~24절은, 산을 옮기는 믿음의 기도를 말씀하는데,
이어지는 25절은, 생뚱맞게, 용서의 기도를 말씀하고 있다. 무슨 뜻인가?, 무슨 관계인가?
그런데 이 ‘용서의 기도’(25절)가,
‘기적을 일으키는 기도의 능력’(23~24절)과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용서의 기도’는
‘산을 뽑아 바다에 빠지게 하는 능력의 기도’와 주제가 맞지 않는다.
둘이 연속적으로 연계되기에는 너무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래서 25절을, 일부 신학자들은 후대에 삽입/편집되었다고 주장하는데,)
어쨌거나
막11:25절이, 선행하는 23~24절 뒤에 연결해서 배치한, 저자의 의도는 무엇인가?
저자 나름대로의 신중한 의도가 반영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 신중한 의도란 게 과연 무엇일까?
그 대답은 이렇다고 본다.↙
▶산을 옮길만한 능력 있는 기도는.. 기도자의 겅건(용서)이 동반될 때 가능하다.
마가복음은 다른 복음서와 달리 특별히 기도와,
그 기도에서 나오는 능력을 강조한다고 설교자는 주장했다.
그 기도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 그 하이라이트는
기도로 산을 옮길 만큼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반드시
기도자의 경건(용서)이 동반될 때에만
그런 놀라운 ‘기도 능력’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하고 싶어서,
막11:23~24절에 연이어, 25절을
마가복음의 저자가 배치했다고 본다.
(문맥의 흐름이 생뚱맞음에도 불구하고)
따라서 다른 사람들과의 맺힌 것들을 풀고, 막힌 것들을 뚫으며,
억눌린 것들을 풀어주는 용서야말로
기도자가 하나님의 능력을 실현하며
기도를 상달시켜 기적을 실현하는 조건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당시에 유행하던 <주술적 기도>와 차별되었다.
이와 같이 ‘용서와 기도’는
마가의 기도 신학을
당시 주술적 대중종교의 기도와 구별 짓는 의미심장한 요소였다.
예수님 당시에는, 치유 기적을 통해 대중을 선동하고
이로부터 종교적 부대 이익을 챙기는 자들이 많았다. (지금도 그렇겠지만)
그런 카리스마를 통해 신인(神人)으로 일컬어진 주술사들은,
예배자(의뢰인)의 아무런 경건성을 요구하지 않고,
그저 돈만 받고, 기도(주문 낭독)해 주고, 병을 고치거나 기적을 행하려 하였다.
당시 대중들은, 치유를 위해
온갖 주술적 방식을 실행에 옮겼고,
의뢰인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축복을 빌었으며,
의뢰인이 증오하는 이들을 저주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 그리스-로마 사회문화적 분위기 속에서
예수의 (제자들의) 치유기도/기적도
그것에 열광하는 주변의 대중들에게
시중의 주술사 중의 하나로, 또는 비슷한 신인神人으로 인식될 수 있었다.
그 결과, 예수가 물려준 기도의 유산이
후대의 기도은사자들이, 자기의 사사로운 이익만을 위해
남용될 우려 또한 없지 않았다.
이에 본문은
기독교의 기도와 치유를
당시의 주술적 대중 종교와 다른
변별된 위상을 안겨 주었다.
아울러 저자는 하나님의 능력을 행사하는 크리스천의 치유 기도가
기도자의 경건성과 무관하게 오용되는 것을 경계하고자 한 것이다.
이로써 마가복음에서 압도적으로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치유 기적을
기도의 능력과 결부시키되,
거기에는 먼저 <기도자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요구되었는데,
그것을 한 마디로 말하면 <이웃 용서>이었다.
※‘이웃 용서’가 신자의 경건성을 대표할 만큼 왜 그렇게 중요한지는
...............
주1)
일단 자료 비평의 관점에서 보면
이 구절은 구전으로 유통되던 예수의 어록 가운데 하나가
마치 파편처럼 본문에 배치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 배치를 가능케 한 외형상의 매개는 물론 ‘기도’라는 공통 분모였을 것이다.
편집 비평적인 관점에서 제기할 만한 또 다른 가능성은,
마가복음의 후대 편집자가, 마태복음과의 비교를 통해
일부 구절(마 5:23-24, 6:13-14)을 짜깁기하여
기도자의 윤리적 자세를 보충했다는 식의 설명이다.
어떻게 그 짜깁기가 이루어질 수 있었는지를 파악하기 위해
세 지문을 차례대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너희가 서서 기도할 때에 어떤 사람과 서로 등진 일이 있으면 용서하여라.
그래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너희의 잘못을 용서해주실 것이다.(막11:25)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제물을 드리려고 하다가
네 형제가 어떤 원한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나거든
너는 그 제물을 제단 앞에 놓아두고 먼저 가서 네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제물을 드려라(마5:23-24).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해주면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해주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남을 용서해주지 않으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해주지 않으실 것이다(마6:13-14).
주2)
형제에 대한 ‘원한, 혐의, 잘못’으로 번역되는 헬라어(ta paraptomata)는
사회 경제적 관계에서 발생하는 빚, 채무debt를 뜻한다.
그러므로 ‘용서’란
단순히 상대방의 인간적 실수에 대한 용서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채무의 탕감을 통해
일그러진 인간관계가 총체적으로 회복되는 것을 가리킨다고 하겠다. ▣ 기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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