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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진 하나님 2733

LNCK 2010. 11. 8. 20:29

 

◈숨겨진 하나님               욥16:9-17                  설교스크랩, 출처, 정리



‘숨겨진 하나님’이란 말은 하나님이 모습을 감추셔서,

곧 내 상식과, 경험과, 이성으로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 하나님입니다.

욥기의 하나님은.. '숨겨진 하나님'인데요..



▶도입 일화

개척교회를 열심히 섬기던 한 목사님에게 청천벽력 같은 일이 생겼습니다.

첫 돐도 안 지난 딸아이가 황달끼가 있더니,

때를 넘겨서 찾아간 의사로부터 정신박약아가 되었다는 선고를 받았습니다.


교회를 위해 정신없이 뛰던 목사님과 사모님은 망연자실했습니다.

사모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 좋으신 하나님이 어떻게 이러실 수 가 있을까?,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가 있을까?"

‘좋으신 하나님’께서 모든 일에 좋은 일만 주시리라고 하던 믿음이 무너졌습니다.


아이를 안고 밤을 새워 기도했지만. 아이는 치료되지 않았습니다.

교회를 찾아오던 성도들이 하나씩 나오지 않습니다.

담임목사님이 저주를 받아서 아이가 바보가 되었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좋으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을까?’

이 부부는 의문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탄식을 했습니다.

                              (이 설교문 말미에, 일화가 계속 이어집니다.)


▶‘좋으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이라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을 찾기만 하면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항상 좋은 것으로 주신다는 믿음입니다.

물론 영적인 축복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항상 좋은 것으로 주신다는 생각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좋으신 하나님’을 알고, 감사하고, 그분을 좇는데서 시작됩니다.


이 ‘좋으신’이라는 한 단어만으로도.. 하나님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좋으신’ 이라는 말이 내 위주로 이해될 때

우리는 이 ‘좋으신’ 이라는 말을 남용하게 됩니다.


‘내가 보기에 좋으신’, ‘나의 이익에 부합하는 좋으신’ 하나님이라고

생각할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좋으시니까’, 영적인 축복만이 아니라

언제나 1등해야 하고, 승진만 해야 하고, 좋은 대학 나와야 하고, 취직도 잘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니까 실패는 있을 수 없고, 병도 안 들고,

돈은 많이 벌고, 이 모든 것이 주어지면

하나님은 내가 이해할만한 ‘좋으신 하나님’입니다.



◑숨겨진 하나님


▶‘숨겨진 하나님’

그러나 도입 일화처럼 큰 어려움을 당하면.. 이 ‘좋으신’ 이라는 말이 문제가 됩니다.

내가 세상적으로 순조롭지 않을 때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1등하지 못하고, 돈이 잘 벌리지 않고,

배우자를 쉽게 못 구하고, 병들면..

그러면 나에게 하나님은 ‘저주의 하나님’이 됩니까? (물론 아니죠)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닥쳤을까?’ 라고 생각하며 갈등을 겪을 때,

때로 실패하게 하시고, 넘어지게 하시고, 고난 받게 하시는 하나님을 만났을 때

우리는 이 하나님을 ‘숨겨진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하나님 입장에서는 ‘좋으신’이나 ‘숨겨진’이나 구별 없이

일관성 있는 계획을 가지고 역사하시지만,


인간의 입장에서는

잘 이해되고 인간의 상식에 맞게 순조롭게 발견되는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

잘 이해되지 않고, 절규하며, 탄식하는 가운데 발견되는 하나님은.. 숨겨진 하나님

이라고 구분해서 이해되는 것입니다.


▶적처럼 욥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

오늘 욥기를 읽어 보면, 이 숨겨진 하나님 때문에    ←설교제목

어찌 할 바를 알지 못하는 욥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의 진노는 나를 찢고, 나를 적으로 대하며 그는 나를 향하여 이를 간다.

나의 적인 신은, 나를 향해 그의 눈을 부릅뜬다.

내가 무사히 살고 있을 때 그는 나를 짓밟는다. 그는 나를 과녁으로 삼는다.


그의 화살은 나를 향해 집중되며,

그는 무참히 내 허리를 빠개고, 내 내장을 땅위에 쏟아 놓는다.

그는 나를 꺾고 또 꺾는다. 그는 용사처럼 나를 향해 달려든다. ※얍복강이 생각납니다.

내 눈은 울음으로 붉었으며 내 눈꺼풀에는 슬픔이 깊이 깃들었다.

내 손에는 불의가 없고 내 기도는 순수한데 어쩜인가?" 욥16:9-17정리


욥은 고난이 처음 닥쳤을 때, 놀라운 신앙고백을 합니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니 여호와께서 찬송을 받으시올지라.’ 1:21


그런데 16장 본문에서는,

온 재산과 가족을 잃고 마침내 악창으로 고생하는 욥이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는 이야기를 보면

어떻게 믿음 좋은 욥이, 이런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기 힘듭니다.


하나님은 욥을 마치 원수를 대하듯이 고통 받게 한다고 말하고,

욥을 향해 눈을 부릅 뜨고, 욥의 허리를 꺾고.

욥에게 불의는 없고 기도를 순수하게 하는데 이 일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욥이 보기에 하나님은 적처럼 공격적으로 다가옵니다.


숨겨진 하나님은 전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정말 적이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허용하신 고난 때문에 겪는 일들이

욥을 그렇게 생각하게 만든다는 말입니다.


▶‘숨겨진 하나님’은, 내 이성으로는 이해되지 않습니다.

욥이 당황하고 있는 이유는, 숨겨진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숨겨진 하나님이란 말은, 하나님이 모습을 감추셔서,

곧 우리의 상식과 경험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하나님입니다.


숨겨진 하나님을 말할 때는,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하나님,

우리의 이성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하나님입니다.


‘왜 나에게 이런 어려움을 주셨는가?

왜 저 의로운 사람이 죽음을 당해야 하는가?

왜 저 착한 사람은 항상 가난해야 하는가?

저 악한 사람은 당장 벼락을 맞지 않고 샘나도록 잘 살고 있을까?’


인간의 제한된 면으로 볼 때 어떤 면은 이해가 되고,

어떤 면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는 사건의 이면에는..

숨겨진 하나님(사실은 내 믿음이 약해서 아직 깨닫지 못하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분은 짧게는 몇 일, 또는 몇 년 동안 숨기셨다가 밝히시고

때로는 몇 세대를 지낸 후에 그 뜻을 인간에게 전하시는 분입니다.

해답을 보지 않은 인간들은 절망하기 일쑤입니다.


욥이 절망했던 이유가 바로 숨겨진 하나님의 모습 때문입니다.

자신의 죄 때문도 아닌데, 그에게 닥친 고난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물론 하나님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면서.. 이해되지 않는 하나님 때문에 탄식합니다.

하나님과 따지려고 합니다...



◑왜 하나님은 ‘숨겨진’ 모습으로 다가 오십니까?  주1)


▶도입 일화 계속

개척교회 김일권 목사님은 하나님의 역사를 이해하기까지 7년이 걸렸습니다.

그 이해할 수 없는 ‘숨겨진 하나님’ 때문에,

골방에서 기도하고 눈물 흘려도.. 아이는 여전히 정신박약아입니다.


목사님은, 정신박약에 관한 세계의 모든 책을 가져다가 읽으면서,

직접 아이를 고치기 시작 했습니다.

자연을 가까이 하게 하고, 시냇가의 조약돌을 밟게 하고,

시를 짓게 하고, 이렇게 7년간 노력하다가

마침내 아이는 1년 늦게, 정상 아이가 다니는 학교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지식으로 김일권 목사님은 어떤 전문가를 능가하는 뇌성마비 전문가가 되어 있었고

지금은 이 사역을 천직으로 알고 계속 이 일을 맡고 있습니다.

시험을 성공적으로 견딘 자에게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역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욥기의 결론은.. (숨겨진) 하나님과의 만남


▶그러면 욥은 과연 어떻게 숨겨진 하나님을 맞이했습니까?

-하나님께 의심의 질문을 던졌지만, 신앙(신뢰)의 틀을 결코 떠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아직도 숨겨진 하나님의 모습 속에 담긴

좋으신 하나님을 깊이 있게 이해하지 못한다면

욥기를 더 자세히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욥의 특징은 어떤 사건이 와도, 아무런 생각 없이,

‘감사합니다’를 연발하는 감정 없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도 자신의 기준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이해되지 않는 하나님 때문에 절망하고,

울부짖고, 소리 쳤습니다. 차라리 죽고 싶다고 외쳤습니다.

자신의 속에서 일어나는 감정을 숨기지 아니하고 정확히 읽었습니다.


욥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향해 질문했습니다.

하나님 주님이 살아 계신다면 내 옆에 서셔서 나와 함께 논쟁을 해 보자고 외칩니다.

이러한 몸부림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욥이 기회만 있으면 신앙을 벗어 던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나는 다 모르지만.. 하나님이 어떤 뜻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내가 원하는 조건이 충족될 때만이 아니라,

내가 신앙인으로 서는 그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좋으신 하나님을 만나서 기뻐할 때뿐만 아니라,

숨겨진 하나님을 만나서 고통, 탄식 할 때라도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감과, 신앙고백의 틀 안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결과적으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7년이 걸릴 수도, 70년이 걸릴 수도, 다음 세대까지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절대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그 신뢰를 버려서는 안 됩니다.

아니, 자동적으로 우리도 욥기 42장처럼 고백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결국은 모두 선하시다’는 식으로요!


▶하나님은 우리 질문에 다 대답하시지는 않습니다.

(위 단락에서) 신앙이 좋다고 해서 질문이 없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떻게 응답하십니까?

욥기의 특징은, 욥이 하나님에게 던진 그 모든 질문에 대하여

하나님이 일일이 대답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욥이 질문할 때마다,

우리는 ‘그래 맞아 그 질문은 내가 하려고 했던 질문이야’ 하면서

하나님은 어떤 해답을 갖고 계실까하고 지켜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대답하지 않습니다.

그저 하나님은 모습을 드러내시고, 이 세상의 창조주임을 보여 주십니다.


▶그런데 욥의 모든 질문과 모든 문제는.. 하나님을 만날 때 다 해결됩니다.

 

 

42: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 회개하나이다."


눈으로 보고, 하나님을 만나니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렇다고 욥이 묻던 질문 하나하나가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이제는 그 질문을 해결할 수 있는 자리에 들어섰습니다.


나의 모든 문제는 하나님을 만날 때 해결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욥을 만남으로써.. 해답을 풀 수 있는 열쇠를 제시하십니다.


하나님을 만남으로써 해결된 것은 문제에 대한 해답이 아니라,

숨겨진 하나님을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호세야6:3절에 ‘우리가 힘써 여호와를 알자’고 했고,

사도바울도 엡1:17절에 ‘너희가 하나님을 알게 되기를’ 기도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하나님을/예수님을/성령님을 점점 깊이 알아가는’ 것입니다.

욥은.. 극심한 고난을 통해서, 그 경지에 이르른 것입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42:5


    이 사실을 오늘 나에게 당겨 와서 적용해 보면,

    하나님이 혹시 나에게 욥처럼 극심한 고난을 주시는 시기가 있습니다.

    그 목적과 섭리와 이유는

    ‘너희는 여호와를 알라, 힘써 여호와를 알라’ - 이것입니다.

   

    이것의 욥기식 표현은,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42:5

    입니다.


    우리가 정녕 하나님을 알 때/주님을 뵙게 될 때,

    비로소 이 땅에서,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믿음의 조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잘/깊이/친밀히 모르고는, 눈으로 뵙지 못하고는..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도리어 하나님 나라를 망치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마치는 말

‘하나님은 절대 그럴 리가 없어’하며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 때, 우리는 갈등하게 됩니다.

고난이 닥칠 때 우리는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또 다른 면에 대하여 알 수 있겠구나.’

그러면서 나의 믿음이, 부쩍 부쩍 자라가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들의 반열로!


우리는 예수님의 기도에서 숨겨진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우리가 숨겨진 하나님을 만날 때,

욥처럼 ‘왜 태어났을까,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 왜 이런 고난을 당해야 할까?’하고

고민하며 방황할 수도 있습니다.

고민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나를 속이는 것이 됩니다.


내 속에 일어난 감정들을 모두 받아들이면 때로 탄식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탄식과 절규가 우리의 신앙의 마지막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고난을 함께 들고 해답을 찾아가야 합니다.


‘좋으신 하나님’은 단지 내가 편하고 쉬운 길로만 인도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좋으신 하나님’이기에 ‘숨겨진 하나님’의 모습으로,

내 생각에 이해되지 않는 모습으로 나타나십니다.


그래서 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들여다보게 하시고

뜨거운 용광로에서 정금같이 단련하여 성숙한 신앙을 만들기 원하십니다.


그 성숙한 신앙은

‘여호와를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뵙는 것입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구름과 뇌성 속에서 하나님을 뵈었듯이,

욥은 고난 중에서 하나님을 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조상의 반열에.. 비로소 오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시내 산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모세를.. 지도자 모세로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고난 중에 하나님을 뵙지 못한 욥이.. 믿음의 표상이 될 수 있었겠습니까?


    단지 우리에 남아 있는 것이 있다면 성급한 결론을 삼가면서,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견디면서

    나에게 일어나는 변화를 지켜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믿음의 조상의 반열에 세우시려는 의도가 만약 없으면

    욥같이 특별히 극심한 고난이 왜 필요했겠습니까?

    우리의 극심한 고난도 왜 허락하시겠습니까?

   

.........................................

 

 주1)  ◑왜 하나님은 ‘숨겨진’ 모습으로 다가 오십니까? 

 

1. (부정적인 측면에서) 사람의 교만에 대한 도전입니다.

욥은 사건이 끝나갈 무렵 42장에서 말합니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42:3


나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고, 이정도면 나도 문제없다고 생각하며 긴장을 풀 때.

자기도 이제 하나님 같이 됐다고 여겨질 때.


별 문제가 없는 것처럼 교만하기 시작 할 때.

은혜를 잃고 삭막한 생활을 할 때.

드러나는 죄는 짓지 않았지만 거룩하시고, 은혜로우신 하나님으로 가득 차 있지 않을 때.

하나님은 숨겨진 모습으로 도전하십니다.


사건은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역사 하신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은 정녕 하나님이시라는 엄숙한 진리를 깨닫게 하기 위해,

우리가 거룩함을 잊지 않고, 새로운 신앙을 시작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숨겨진 모습으로 다가 오십니다.


2, (긍정적인 측면에서)

우리의 신앙을 성장시키시고, 우리의 영혼을 정화시키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조금만 좋은 일이 있으면 펄쩍 펄쩍 뛰면서도

조금만 어려우면 시험당해서 시무룩한.. ‘냄비’같은 신앙은 아직 어린 신앙입니다.

              *냄비pot : 빨리 끓고, 빨리 식는다는 한국민족의 정신문화를 비유한 말


좋으면 삼키고, 싫으면 뱉는 신앙입니다.

하나님 중심의 신앙이 아니라, 조건중심적인 신앙입니다.

어려운 일이 있어도 "글세, 하나님이 무슨 계획이 있으실까?" 하면서 기다리고,

하나님을 향해 울부짖는 일이 있어도

그분을 향한 신뢰를 잃지 않는 진득한 신앙이 필요합니다.


나는 이런 어려움을 당할 만큼 죄짓지 않았다고,

내가 애매히 고난 받는다고 세상에 알리고 싶어 견디지 못하며

잠시라도 그대로 있을 수 가 없습니다.


기도를 해도 응답이 없습니다. 그 지루한 시간동안 참고 있어야 합니다.

그때, 기도는 부르짖는 것만이 아니라.. 듣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침묵 속에 계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견디는 법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고난의 용광로에 집어 넣고 가만히 있어 라고 말씀하십니다.


욥23:10,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불순물이 섞인 금을 용광로에 넣으면 뜨거운 불속에서 정화도기 순금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 과정은 뜨거운 불속에서 오랫동안 견디는 사이에

불순물이 빠져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의 신학, 영광의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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