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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손으로 사역하신 분들 2687

LNCK 2010. 10. 12. 13:22

◈빈손으로 사역하신 분들                    출17:9                     설교스크랩, 편집


    이런 예가 적절할지 모르지만,

    무협영화나, 또는 가족영화를 보면,

    주로 주인공은 맨손(모세로 치면 지팡이)으로 싸웁니다.

    악당들은 호화판 무기를 총동원하지만요...

 

    모세뿐만 아니라, 예수님, 사도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빈손으로 싸우셨습니다.

    장비나 자원이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당연히 필요하지요.

    그러나 기독교 사역에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자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자기에게 자원resources이 부족해서, 사역이 안 되는 줄로 압니다만...



◑‘모세의 지팡이’가 과연 무엇일까요?


출애굽기 17장은, 르비딤에서 일어난 2가지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①물이 없어 불평하다가, 모세가 지팡이로 반석을 치자, 물이 솟아난 사건과,  :1~7

②르비딤 광야에서 아말렉과 싸울 때, 모세가 손을 들자 이긴 사건입니다. :8~16


▶일찍 일찍 마실 물을 주셨으면 좋았을 것을...

출17장을 읽다가, 잠시 멈추고 생각해 봅니다.

뭐 백성들이 마실 물이 없어서, 갈증이 나서.. 당연하지요.

광야에서 땡볕에 행진하는데.. 아마 성급한 한국인 기질이었으면, 폭발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아무 대책도 없이, 백성들을 광야로 내모시는 건가요?

물론 그런 상상은 넌센스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물을 마시게 할 계획이 있으셨습니다.


이왕 그렇다면, 목마르기도 전에,

백성들이 불평하고,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 시험’ 하기도 전에,      :7

여호와이레의 하나님처럼, 좀 일찍 일찍 물을 주시면.. 다 좋았을 것 아닙니까?


왜 꼭 목마르다고 불평하고, ‘하나님이 계신가/안 계신가?’하며 애 터지게 해 놓고,

그 다음에 비로소 물을 주시느냐... 하는 의문입니다.

뭔가 하나님의 고의적인 목적, 뭔가 교훈을 가르치고자 하심이라는 추측을 하게 됩니다.


▶지팡이를 사용하라

그런 고의적인 목적이 무엇인가 생각해 볼 때,

(백성들이 물이 없어도 하나님을 신뢰하는가? 하는 믿음을 보기 위해서겠지요. 그러나)

본문을 읽다가, 이런 이유도 있겠다는 것을 생각해 봅니다.

바로 '지팡이를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모세의 지팡이는, 출애굽기 시작부터 매우 중요한 도구로 등장합니다.

 

출4:17,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찌니라


4:20 모세가 그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


10가지 재앙 중 상당수도, 지팡이를 손에 잡고 기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지팡이 없이 이룬 기적도 있지만, 아마 성경에 기록을 안 해서 그렇지,

그 때도 모세는 지팡이를 손에 쥐고 있었을 것입니다.


홍해를 가를 때에도, 어김없이 지팡이가 사용되었습니다. 출14:16

 

그런데 르비딤에서는, 지팡이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없다가

결국 반석을 쳐서 물을 낼 즈음에, 하나님은 또 지팡이를 사용하라고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장로들을 데리고 하수를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17:5


▶아말렉과의 전쟁의 승리를 확신케 한 지팡이

이제 출애굽 백성들이, 1~2달이 지난 후에, 대강 전열을 갖추고,   주1)  

공식적인 전쟁을 처음으로 맞이하게 되는데,

대상은 아멜렉이었습니다.


이 전쟁의 승리 이유는 ‘모세의 손’이라고,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아론과 훌이, 돌을 가져다 그 위에 모세를 앉히고는, 좌우에서 팔을 붙들었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팔이 내려오지 않도록 했습니다. 17:11~12


그런데 그때 모세의 손에는, 어김없이 지팡이가 쥐어져 있었습니다.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내 손에 잡고 산꼭대기에 서리라.’  17:9, 


▶두 사건을 연속적으로 연결해서 생각해 볼때,

르비딤에서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물을 일찍 일찍 주시지 않고,

애를 태우게 만드신 것은,

어쩌면 곧 다가올 ‘아말렉과의 전쟁’을 준비하게 하심이었습니다.


모세는, 출애굽 과정에서, ‘하나님의 지팡이’로 많은 기적을 연출하면서,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그러나 르비딤에서, 그 지팡이의 임재와 능력을 잊어 버렸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 지팡이는, 아무나 부러진 나무를 주워서 만들 수 있는,

평범한 지팡이(사실은 막대기)였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이 말씀하기 전까지, 그는 지팡이를 사용하지 않은 듯 여겨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다시 지팡이를 사용했을 때,

반석에서 물이 흘러나와서, 온 백성이 다시 살게 되는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바로 그 지역(르비딤)에서, 아말렉과 전쟁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모세가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내 손에 잡고 산꼭대기에 서리라.’  17:9, 


    모세가 하나님께 물어서,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꼭대기에 선 것이 아닙니다.

    이번에는 아주 자발적으로, 자기 스스로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꼭대기로 올라간 것입니다.

    (모세 오경에, 모세는,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것은 수 십~수 백 번 분명히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아말렉과 전쟁에 있어서는, 

     모세가 하나님께 '지팡이 붙잡고 나가라'고 명령 받았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아마 하나님께 구체적인 명령을 받았다면, 그 내용을 반드시 기록했을 것입니다.)

  
앞서 지팡이로 반석을 쳐서 물을 낼 때, 모세는 지팡이의 능력을 새삼 실감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어진 아말렉과의 전쟁에 있어서도, 홍해를 가른 것처럼, 지팡이를 잡고 나가면

승리할 것이라는 확신이 왔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아론과 훌의 도움을 받아, 자기 양 손을 들고 기도했는데,

그 손에는 다름 아닌, 지팡이가 쥐어져 있었습니다.



▶제 질문은 이것입니다. 도대체 지팡이가 무엇이기에?

뭐 금지팡이도 아니고, 하늘에서 뚝 떨어진 지팡이도 아니고,

그냥 길가에 굴러다니는 것을, 어쩌다가 주운 것이 아닙니까.


(십계 영화에 나오는, 지팡이는 크고 아름답지만, 그건 각색이라고 합니다.

사실 이스라엘 광야에는, 그런 지팡이를 만들 만한 나무가 흔하지 않습니다.

오아시스 주변에만 제대로 된 나무가 있거든요.

그리고 모세가 광야에서 양을 칠 때,

뭐하러 그런 무거운 영화 속의 지팡이를 질질 끌고 다녔겠습니까,

그냥 간편하게 들고 다니기 쉬운 지팡이사실은 막대기를 가지고 다녔을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질문합니다. ‘도대체 지팡이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리고 많은 분들이 대답합니다. ‘지금 네가 가진 것이니라!’


    지팡이란.. 모세 손에 지금 잡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다른 것(무기, 물질, 권력 등)을 붙잡지 않았습니다. 지팡이만 붙잡았습니다.

    지팡이는 다른 말로 하면, 빈손, 맨손입니다. 하나님만 의지하는 기도의 손입니다.

    하나님 외에는 다른 어떤 도움도 받지 않겠다는 빈손, 맨손입니다.


오늘 많은 사역자들이 ‘자기는 아직 주의 일을 못한답니다.’

왜냐하면 손에 무기가 없다는 것입니다.

뭐도 없고, 뭐도 준비가 안 되었고, 뭐도 아직 부족하고, 뭐도 갖춰지지 않아서...


그런데 모세는 자기 손에 있는 ‘지팡이’ 하나만 붙잡고 일을 처리해 나갔습니다.

모세인들 (오늘날 우리가 원하는 것들을) 필요하지 않았겠습니까? (필요했겠지요.)

그러나 그는, 그냥 자기 손에 있는 그것 하나(아무 쓸데없는 작대기)들고 나갔습니다.

거기에 금박을 입히거나, 깎아서 기이한 장식을 달고 다녔을리도 만무합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는 누구에게나 ‘지팡이’가 다 있습니다.

    지팡이(하나님만 의지하는 빈손, 맨손)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모세처럼, 거기에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지 않는 것이지요...


    아래는, 사도바울이 사용한 ‘지팡이’입니다.

    편지는 누구라도 쓸 수 있잖아요!

    그의 편지는, 그의 ‘지팡이’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르비딤 사건 이후로, 시내산에 이르러 율법을 받은 후로는,

모세의 '지팡이'가 거의 안 나옵니다.

후에 므리바에서 다시 반석을 명하여 물을 낼 때, 한 번 사용된 것으로 나옵니다. 민20:8

그 다음부터는 차라리 '아론의 지팡이'가 성경에 더 자주 나옵니다. 연구해 볼 문제입니다만,

제 생각에는, 그 후로 (므리바 사건만 제외하곤) 지팡이를 사용할 만큼 '큰 일'이 거의 없었다는 것입니다. 

 

아말렉과의 전투 후에도, 출애굽 여정에서 아모리왕 시혼, 바산 왕 옥과의 전쟁이 있었는데,

그 때도 모세가 지팡이를 사용했다는 기록은, 성경에 없습니다. 그때는 칼로 쳐서 이겼습니다.

그렇다면 지팡이(맨손 기도)는, 출애굽 처음에 (시내산 도달 이전 3달 동안)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시점은, '하나님의 은혜, 또는 기적'이 간절히 필요한 시점이었습니다. 처음이었으니까요.

 

사실적으로 분별하면, 은사가 나타나는 교회도, 그 은사가 계속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초기에 3년, 5년, 아마 10년 이상 계속 은사가 지속되는 경우는.. 찾기 힘듭니다.

사도행전도, 가장 많은 은사가 나타난 것은, 초기 였습니다.

그 뒤로 은사가 나타났지만, 초기 예루살렘 교회처럼 폭발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았습니다...



◑바울은 편지를 썼습니다.


편지를 쓰듯이, 그냥 자연스럽게 자기가 가진 생각들을 글로 표현했습니다.

편지 쓸 때는, 무슨 거창한 작품 쓰려고 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대단한 논문을 쓰는 게 아니고, 책을 쓰는 것이 아니잖아요.


편지는 아주 실용적인 글입니다.

어떤 용건을 가지고 해야 될 말이 있기 때문에 쓰는 실용적인 글입니다.

그런데 그런 편지가 성경이 된 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왜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학술적인 논문이나 수사학적인 책을 쓰게 하시지 않고

바울이 자연스럽게 쓴 편지들이, 성경이 되게 하셨는가요?


바울의 편지뿐만이 아닙니다.

베드로전후서, 요한서신서, 야고보서, 유다서는 모두가 편지 형식입니다.

신약성경의 3분의 2 이상이 편지로 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한 편지입니다.

사도행전도 편지입니다. (누가복음의 후속편)


신약성경의 대부분은 편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학문적 깊이는 뽐내기 위한 작품이 아닙니다.

학문이나, 저작이나, 강연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편지가 성경이 됐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편지가 성경이 됐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잖아요.

바울, 베드로, 요한, 야고보, 유다가 썼던 편지가 성경이 되었습니다.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쓸 수 있는 편지,

그 편지가 성경이 되었다니까요?

그러니까 ‘편지’는, 사도바울이 가진 ‘모세의 막대기’였단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 우리도, 바울처럼, 모세처럼, 막대기를 갖고 있다는 말입니다.

    다만 그 막대기에, 그 편지에.. 능력이 안 임해서 그렇지요.. 그 차이입니다.

    절대 물질의 차이, 학벌의 차이, 다른 차이를 따지지 마십시오. 본질이 아닙니다.


    ※참고로, 바울의 편지처럼, 기독교는 실용적/실제적이라야 합니다. 주2)



◑예수님도 막대기 들고 (다시 말해 빈손으로) 사역하고, 설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과 얘기하신 것입니다.

배에 올라가서도, 산에 올라가서도 앉아서 이야기하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길 가다가도 물어보면 그것 대답해주시는 것이... 설교입니다.

얼마나 실제적입니까? 또한 얼마나 일상적입니까?


바울 서신을 보세요. 각 교회들에게 무슨 교리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무슨 성경 강해하는 것이 아니라

각 교회들 형편대로 그 교회 문제에 대해서,

그 교회의 실제적인 것에 대해서 그냥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설교는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무슨 거창한 테마를 들고 나와서,

    웅변과, 수사학(말의 치장, 꾸밈)과, 학문적 깊이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평소의 내 삶과 생활이 설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삶에서 경험한 것, 느낀 것들을.. 자연스럽게 나누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자랑하고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자랑은 안 됩니다.)


예수님도 뭐 짜드라 큰 건물이 있으셨던 것도 아닙니다.

가룟 유다가 회계를 보기는 했지만, 뭐 통장 잔고가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회계account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너희에게 떡이 몇 개가 있느냐?’ 물어보셨고,  마15:34

베드로도 ‘은과 금은 내게 없어도, 내게 있는 것으로 내게 주노니...’ 했잖아요. 행3:6

사람은, 자기에게 있는 것을 줄 수 있지, 없는 것으로는 못 줍니다...

 

    모세의 막대기는... 지금 현재 자기 손에 잡혀 있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그런 막대기가 다 있습니다. 다만 거기에 성령의 능력이 부족할 따름입니다.
    우리도 모세, 예수님, 바울처럼, 막대기만 들고, 다시 말해서 빈손으로

    하나님의 귀중한 사명을 감당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


주1)

하나님은 원래 출애굽할 때, ‘블레셋 해변 길’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길이 가장 편하고 좋은 길이었지만,

오합지졸인 출애굽 백성들이, 전열을 갖추기도 전에, 전쟁을 경험했다가,

기가 질려서, 애굽으로 되돌아 갈 것을 염려하셨기 때문입니다.   

 

출13:17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오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보면 뉘우쳐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18 그러므로 하나님이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백성을 인도하시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항오를 지어 나올 때에...



주2)

하나님의 말씀은, 말은 말 그대로 실제적인 것입니다.

대화,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고 싶은 말, 꼭 해야 할 말을 하는 것입니다.

꼭 필요한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설교입니다. 


바울 서신은 현실과 동떨어진 얘기가 아니고, 바로 그 교회 얘기입니다.

에베소서는, 에베소 교회에 대한 실제적 얘기입니다.

빌립보서는, 빌립보 교회에 대한 실제적인 얘기입니다.

그들을 가르치고, 권하고, 권면하며, 책망하는 것입니다.


일부 사람들은, 요즘, 설교를 무슨 작품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설교가 작품이 되면 안 되고, 설교는 도구고,

설교를 통해서, 듣는 청중을 작품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빚기 원하시는 모습으로, 설교를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설교는 실제적인 것입니다. 설교 잘하는 사람은 찰스 피니였습니다.

설교 듣는 사람들이 “저 사람이 내게 얘기를 하고 있구나.” 그랬잖아요.

너무나 자기에게 생생하게 들린 것입니다. (노골적인 표현을 했다는 뜻이 아니라,

성령이 실제적으로 말씀하게 했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 설교 시간에 많이 좁니다.

실제적인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작품을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실과 동떨어진 강연, 연설, 웅변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웅변에 관심 있습니까?

웅변은, 그냥 운동장에 나오라니까 듣는 것이지.

사람들이 형식적인 웅변은 안 듣습니다.


그러나 커피숍에서 얘기하는 것 보세요.

아줌마들이 앉아서 얘기하면 다섯 시간도 좋습니다.


설교도 5시간, 6시간 해도 좋아야 합니다.

어떻게 설교가 아줌마들 수다보다 못합니까?

설교는 1시간만 지나면 주리를 틉니다.


무슨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습니까?

이건 설교 패턴이 잘못되어서 그렇습니다.

설교는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설교는 관심입니다.

생활에 실제적인 관심사를 이야기 식으로 하니까, 수긍하면서 듣는 것입니다.


설교는 성경을 잘 해석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성경을 잘 설명하는 것으로 끝나서도 안 됩니다.

설교는 먹을 것을 떠 먹여주는 것입니다. 설교는 치료해주는 것입니다.

설교는 만져주는 것입니다. 설교는 길을 인도해주는 것입니다.


설교는 성경만 알아서 되는 것이 아니고, 설교를 하려면 시대를 읽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시대에 맞는 메시지를 전할 수 있습니다.

설교를 하려면 성령이 주시는 마음의 눈을 통해서

성도들의 영의 상태를 알아야 합니다.


    그 편지로 된, 어쩌면 간략하고 현실적인 성경을

    2천년 이상 지난 오늘날에 올바로 해석, 설명하기 위해,

    때로는 신학자들이 철학과 신학을 동원하고

    논리학, 해석학, 역사학(역사적 배경), 문화학(사회문화적 배경), 언어학 등을

    도입할 수는 있겠지만,


    그 학문 자체가 숭상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성경을 잘 해석, 설명하기 위한 액세서리입니다.

    그 학문 자체에 빠져서, 그 학문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학문을 통해서, 성경을 설명하고,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신학도, 실제적이고, 실용적이어야 합니다.

    철학적, 형이상학적, 사변적 횡설수설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신학은, 결코 그런 (철학적) 길로 빠지지 않습니다.

    알아들을 듯, 말 듯한 모호한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 리더쉽, 목회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