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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보여 주옵소서 2697

LNCK 2010. 10. 18. 18:38

◈주여 보여 주옵소서                         요14:7∼11                설교스크랩 및 편집 10.08.22. 설교 등

 


▶이론은 아는데, 실제로 해 보니까 안 되는 현실

1년 전에 뉴스위크에 난, 다소 재미있는 기사를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의 저자로 유명한 스티븐 코비 박사가

이 책을 써서 세계적으로 유명인사가 되었고, 절정의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습니다.


이 책이 얼마나 유명한고 하니,

17년 동안 연속해서 베스트셀러에 올랐으며,

1백 개 나라의 언어로 전 세계에 번역되었으며,

3천 5백만 부 이상 전 세계에 팔렸으며,

그 인기의 여파를 몰아서 <... 8번째 습관>이라는 책도 또 출간한 바 있습니다.


물론 작가가 돈도 많이 벌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한 사업가의 유혹에 빠져서, 그 분이 어떤 사업에 손을 대게 됩니다.


아이러니 한 것은,

정작 본인 스티븐 코비 박사가 사업에 뛰어들었는데,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을 썼으니,

본인은 당연히 사업에 성공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2년 만에, 그 사업이 홀랑 망해버렸다고 합니다.


더 재미있는 사실은,

이 분이 자기가 책에서 이렇게 하면 성공한다는 비결을 말했는데,

그 방법대로  안 했다는 것입니다.


저/설교자는 <뉴스위크>의 그 기사를 읽으면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도대체 지식이란 것이 무엇인가?’ (이론적 지식은, 쓸모없는 것은 아닌가?)

이런 회의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남을 가르치긴 했는데, 자기를 가르치진 못했고,

남에겐 이렇게 하면 성공한다고 해서,

실제로 그 책을 읽고, 그 지침대로 따라서, 성공한 사람도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자기는 그렇게 살지 않았고, 자기는 사업에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설교자는,

머리로만 아는 지식이 있고, 감정적으로 아는 지식이 있고,

몸(체험)으로 아는 지식, 또한 감각적 지식이 있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러니까 ‘지식’을

그저 ‘머리로만 아는 지식’만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지식을 배우고자 할 때,

그 이론적 지식은,

‘몸으로 아는 지식’ 또한 ‘감각적 지식’까지 나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기독교 신앙은,

‘머리로만 아는 지식’만 갖고는 안 됩니다.

반드시 ‘체험으로 아는 지식’, ‘감각적 지식’에 까지 나가야 하는데요...



◑온전한 지식이 되려면, 4가지 방면을 다 알아야 합니다.


물론 세상 지식을 논하는 것이기 보다는,

기독교 지식, 신앙 지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4가지 종류의 지식이 존재합니다.

  

▶1. 논리적 지식 / 이론적 지식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성의 기능을 통해서

맑은 이성, 투명한 이성일 경우에, 이성을 통해서 하나님을 봅니다.

이성을 통해서, 온 세계를 똑바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성이 병들면 이것이 문제가 달라지지만,

맑은 이성인 경우, 이것을 통해서 비판, 추리, 분석, 통합하면서

우리는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생각으로 봅니다.

왜요?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유명한 과학자 아인슈타인은 "이 만물의 근원이 무엇일까?

그것은 '보이지 않는 힘energy'이다.

그런데 그 힘이 물질이냐, 인격이냐? ... 여기에 문제가 있다"고 했습니다.

(물질이 아니라, 인격이라는 뜻이지요.)


참 멋있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늘 그분의 이 말을 참 소중하게 여깁니다.

여러분, 물질로부터 물질이 나온 것이 아닙니다.

인격적 생명체로부터 물질이 온 것입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는 과학적 지식에 의한 하나님을 설명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론적 지식, 이성적 지식도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유명한 신학자 칼 바르트는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지식의 대상이 아니라 지식의 주체이다!"

그가 우리를 창조하셨고, 그가 우리에게 계시하시는 것만큼..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알려주심으로써, 우리가 아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맑은 이성으로 그 능력을 따라,

그 기능을 따라서 논리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또 여러 가지 진리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이론적/논리적 지식에는 많은 한계가 있습니다.

위에서 스티븐 코비 박사의 에피소드로 설명을 드렸습니다만...  주1)

 

▶2. 감성적 지식

가슴으로 아는 지식입니다.

마치 어머니가 자신의 어린아이를 아는 것처럼.

어머니는 어린아이가 울 때에, 무엇이 필요한지 금방 압니다.

가슴과 가슴으로 압니다. 그 갓난아기가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도 어린아이의 사정을 충분히 어머니는 이해합니다. 마음으로 압니다.


자, 이제 보십시오. 사랑을 하게 되면 가슴이 열립니다. 그래서 알 수가 있습니다.

미워하게 되면 가슴이 닫힙니다. 아무것도 모르게 됩니다.

미워하는 마음이 있으면, 지식의 문이 꽉 닫히고 맙니다.


   청중이 설교자를 존경하지 않으면, 마음으로 미워하면,

   그가 아무리 진리를 외치고, 올바른 소리를 해도,

   전혀 자기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괜히 꼬투리, 말꼬리만 잡고 싶어집니다. (물론 이런 태도를 고쳐야 되겠지요)


제가 북한에 갈 때마다 참 답답하고 괴로운 것은,

그들은 아직도 그 옛날 생각을 하면서,

일본(놈) 미워하고, 미 제국주의 미워하고, 남한을 미워하고 있습니다.

옛날에 폭격을 해서 자기네들이 많이 죽었다고.. 그냥 50년 동안 계속 미워합니다.

아직도 계속 미워하니까, 아무것도 보이는 것도 없고, 들리는 것도 없습니다.


그 미움에서 벗어나야, 무엇인가가 생각이 나겠는데

무엇인가 들리기도 하고, 보이기도 하겠는데.. 아주 너무 답답합니다.

그 증오 아, 무섭습니다.

그 미운 마음 때문에, 마음의 문이 꽉 닫히고,

눈도 어두워지고, 귀도 어두워지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사람은 의심하게 되면 지식이 굴절작용을 하게 됩니다.

의심하게 되면 오해가 생깁니다.

의심이 이미 마음에 있기 때문에 무슨 말을 해도

이래도 오해하고, 저래도 오해합니다.

이것이 바로 감성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감성이 깨끗해야, 마음이 깨끗해야.. 모든 진리와 지식을 올바로 알 수 있고

하나님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3. 또 하나는 체험적 지식입니다.

몸으로 경험하면서 얻는 지식인데 소중한 것입니다마는  주2)

경험 자체만으로는 지식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 속에 이미 있는 지식이 그 경험 속에 작용해서

이미 있는 지식의 바탕에서 이해하고, 그 분량만큼 이해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아무리 무엇을 보았다 하더라도

그것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내가 무엇을 보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경험이라는 것은 이상하게도 사람을 스스로 위험에 빠뜨립니다.

성공한 경험 때문에 자기 고집이 생기고, 자기 우상화에 빠지는 것입니다.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은 Psychotherapy and Existentialism

(심리치료와 실존주의) 라고 하는 책에서

현대인의 고장 난 인간심리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①첫째는 삶에 대한 하루살이적 태도라는 것입니다.

순간, 하루살이처럼 하루만 생각합니다. 순간만 생각합니다.

그것이 미래를 향한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뭐 죽든 살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한 순간만 생각하고 마는 것이 얼마나 무섭습니까?


마치 마약환자가 한 번 주사를 맞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맞고 죽어도 좋습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 어떻게 되는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와 같이 한 순간만 생각하는 현대인의 모습이 병든 상태라고 말합니다.


②또 한 가지는 운명적 태도입니다. 일단 운명에 맡겨버립니다.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 긍정적인 것 같으나 이것은 생명력이 없습니다.


③또 한 가지는 자신의 자유와 책임에서 도피하려고 합니다.

아주 기피적인 것입니다. 기회주의적입니다. 집단주의로 향합니다.

그래서 집단적 역사에 편승해보려고 합니다.


자기 능력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남의 덕에 삽니다.

남에게 책임을 돌리며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신을 우상화하는 것입니다. 아주 무서운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우상화할 때에 광신주의에 빠집니다.

여러분, 내 마음속에 우상이 무엇입니까?

요새 보니까 자존심이라고 하는 것, 그것 고칠 수 없는 병이더군요.


자존심 하나 때문에 망칩니다. 오늘과 내일을 다 망치는 그런 것을 볼 때에

자기 우상이라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병이올시다. 

 

▶4. 또한 감각적 지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운동선수들을 봅시다. 운동장에서 뛸 때에나 혹은 볼을 찰 때,

저기서 오는 볼을 보고 '가만있어보자, 이렇게 차면 어떻게 될까?'

이렇게 생각하고 하는 것입니까? 그러면 이미 늦습니다.


벌써 많은 시간 훈련이 되어서, 볼을 보자마자 벌써 감각적으로 반응하잖아요.

그래서 아나운서들도 '동물적 감각으로 잘 했다'고 칭찬하지 않습니까.


아주 자동적으로 반응합니다. 여기에 무슨 판단하고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아주 몸에 익숙해지는 것입니다. 완전히 익숙해진 감각적 지식,

그것은 참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감각화된 지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3)


 

본문 설명, 예수님을 아는 데는, 여러 방면의 지식이 필요합니다.


본문에는 예수님과 제자의 아주 신앙적이고 신학적인 중요한 대화가 나옵니다.

제자는 말합니다. "예수님 하나님을 보여주세요. 하나님을 보면 족하겠나이다."


예수님의 대답은

"벌써 보았느니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는데 아직도 하나님을 못 보았느냐?"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요14:9


오늘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를 들어보십시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 무슨 말입니까? 벌써 보았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나와 함께 하지 않았느냐?"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하나님을 보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느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벌써 깨달을 수 있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십니다.

이제 예수님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야 됩니다.


여러분, 얼마만큼 하나님을 보고 삽니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와 같이 다니면서 보지 않았느냐?

네 마음속으로는 나를 보면서 하나님을 벌써 만났어야 되는데 아직도 못 만났느냐?"


얼마나 중요한 교훈인지 모릅니다. 경험은 있으나 이해가 부족합니다.

"오늘 네가 하나님을 못 보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네게 보여주지 않아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계시가 불충분해서가 아니라, 네가 무엇인가 잘못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네 마음속에 오해가 있고 의심이 있고 정욕이 있고 욕심이 있고

무엇인가 가득 찬 잘못된 것이 있어서 아직도 하나님을 못 보았구나" 하는 말씀입니다.


"내게 듣는 자는 아버지의 말씀을 들었느니라."

여러분, 성경을 읽으면서 내게 주시는 말씀을 들어야 하고

그리스도인은 설교를 들으면서 영으로 내게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에 모든 사건을 통하여 우리는 주의 음성을 듣고, 주의 역사를 눈으로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역사의 음성을 듣고, 양심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순간 순간, 영이 깨끗한 자는 계속 보여 지고, 계속 들려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보여집니다. 충분하게 보여집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안소니 드 멜로'의 책 <일분지혜>에 나오는 한 편의 이야기입니다.

하루는 스승이 그 제자에게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을 찾지 말라. 그냥 바라보아라. 그러면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제자가 스승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겠습니까?"


스승은 대답했습니다.

"무엇을 바라볼 때마다, 거기 있는 그대로만 보고, 다른 것은 보지 마라.

그래야 올바로 보게 될 것이다." 라고... 말입니다.


제자가 당혹스러워하는 것을 보고 스승은 다시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예를 들면, 달을 바라볼 때에 달만 보고 다른 것은 보지 마라.

예컨대 배고픈 사람은 달을 보면서도 '저게 빵떡이 아닌가.'

빵을 생각하면서 보면, 달을 달로 볼 수가 없느니라.


또 사랑에 빠진 사람이 달빛을 쳐다보면,

달을 보면서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만 생각하니까, 또 달을 바로 볼 수 없느니라.


하나님을 볼 때에는 하나님만 보아라. 그래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 것"

이라고 말했습니다.


신자들이, 자기의 어떤 이기적 목적을 갖고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을 올바로 바라볼(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돌아오는 탕자를 생각해 보십시오. 탕자가 집을 나갔다가 돌아옵니다.

그가 그만큼이라도 돌아올 수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모릅니다.

왜요? 자기 자신을 생각하면 돌아올 수가 없습니다.


자기 체면, 자기 자존심.. 이런 것 생각하면 못 돌아옵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를 생각했습니다.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를 생각했습니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를 생각했기에 그는 그만큼 소중했던 것입니다.

(그에게는 ‘아버지에 대한 바른 지식’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볼 때에 나는 소중해집니다.

나를 위하여 수고하신 분을 생각할 때에,

나를 위해 희생하신 분을 생각할 때에,

십자가를 생각할 때에 나는 소중해집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은 사람의 가치를 높게 소중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탕자는 생각합니다. 아버지가 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나를 맞이해 주십니다. 아버지가 나를 인하여 기뻐하십니다.

그럴 때에 나라고 하는 존재가 이렇게 소중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 자신으로 볼 때에는 버려진 것입니다.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마는

아버지의 밝은 얼굴을 생각하고 나를 생각하니 내가 너무 소중하더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십니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 십자가를 쳐다볼 때마다 나라고 하는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지요.

그것이 바로 예수를 믿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란 예수 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요

'예수 믿는다'란 십자가의 사랑 안에서 자기 존재를 재발견하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는.. 그저 ‘이론적 지식’으로 이해되는 것은 아닙니다.

반드시 ‘감성/체험/감각적 지식’의 수준까지 나가야 합니다.


▶마치는 말

하나님의 사람은 모든 사건, 사고를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습니다.

단지 이론적 지식뿐만 아니라, (이것도 필요하고요)

감정적/체험적/감각적 지식으로.. 하나님을 점점 알아 갑니다.


오래 전에 젊었을 때 읽은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이런 짤막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제가 기억하고 있습니다.

어떤 날 목사님께 찾아온 아주머니가

있는 대로 자기 근심 걱정을 다 털어놓는 것입니다.


남편에 대해서, 아이들에 대해서, 가정에 대해서, 직장에 대해서,

좌우간 숨도 쉬지 않고 자꾸만 주절주절 얘기합니다.


목사님이 한 시간을 듣다 듣다 못해서 말을 끊었습니다.

"이제 그만합시다. 그런데 하나만 물어보고 싶습니다.

혹시 그 모든 걱정을 하는 중에, 하나님을 생각해 보았습니까?"


아주머니가 말했습니다.

"그럼 나도 하나 묻겠습니다. 목사님은 하나님을 아십니까?"


거기에 대한 목사님의 대답은

"No, I don't, (But) I am surprised by God in every moment."


그 말을 저는 늘 기억합니다. "I am surprised by God in every moment;

"나는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서 놀라고 있을 뿐입니다.

매 순간, 하나님의 역사에 놀라고 있습니다.

 

매 순간 보면,

풀 한 포기에서부터 하늘의 별까지 어느 것 하나 하나

하나님의 역사 아닌 것이 없어서, 그것을 볼 때마다 깜짝 깜짝 놀라고 삽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아주 명답이올시다.


여러분, 신앙의 눈으로 볼 때는 하나님의 일 아닌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으로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풀 한 포기보다, 별 한 개보다 더 확실하고도 분명한

주님과 동행하면서도, 아직 하나님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아직 영적인 안목이 열리지 않아서 그럤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고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말씀하시고, 오늘도 우리와 함께 역사하십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우리는 이미 보았습니다. 지금도 보고 있습니다. 지금도 듣고 있습니다.

조용히 마음 문을 열고 주께서 역사하시는 것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의 음성이 강하게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건만

저희 마음 문이 닫혀서 주를 뵙지도 못하고,

주님 음성을 듣지도 못하는 저희들을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진정으로 회개하고 완악한 마음을 다 깨뜨리고 온유하고 겸손한 가운데

정결한 심령을 이루어 항상 주의 역사를 보며, 주의 역사를 몸으로 경험하며,

주의 음성을 가까이 들으며 살아가는 저희들 되게 하시고,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

남은 해는 밝고 명랑한 저 영원한 세계를 지향하며 살아가도록, 저희를 도우소서.

주의 음성에 진실하게 응답하며 사는 저희들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덧붙여서 (이 단락 삽글)

위에서 4가지 지식의 분야를 설명 드렸습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은사가 다르듯이,

이론적 지식이 발달한 사람, 감성적 지식이 발달한 사람,

체험적 지식이 뛰어난 사람, 감각적 지식이 뛰어난 사람.. 사람마다 각기 다릅니다.


그리고 그 지식들은, 각 분야가 다 필요하고, 각 분야의 전문가가 다 필요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사람들은

자기가 잘 하는 분야의 지식을 잣대로, 상대가 약한 분야의 지식을 판단하기 쉬우며,

스스로 우월감에 도취될 수도 있습니다.


일례로, 이론적 지식이 많은 사람이, 이론적 지식이 약한 사람(그러나 경험이 많은 사람)을

깔 볼 수도 있습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고요.


내 강점을 갖고서, 상대의 약점과 비교해서 판단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기의 약점을 갖고서, 상대의 장점과 비교해서.. 겸손해 집니다.


그래서 공동체에서,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가진 전문가들이

서로 협력하고, 서로 존경하고, 서로 각자의 한계를 인정해야 하겠습니다.


.................................


주1)

대개 보니까, 부잣집 아이들은 자전거를 못 탑니다.

부모들이 아이의 무르팍이 깨질까봐, 자전거를 붙잡고 있고, 손을 놓질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는 자전거를 못 배웁니다.


다 넘어지고, 부러지고, 깨지고 하면서, 자전거 타는 법을 배웁니다.

그걸 머리로 배우는가? 몇 십 년을 공부해야 자전거를 타겠습니까?

머리로 배우는 게 아닙니다. 몸으로 배우는 것이지요.


자동차 운전도 마찬가지입니다.

결코 머리로 운전을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몸으로 배우고, 사고도 내면서 배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운전을 처음 배우는 사람은, 중고차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습니다.


여러분, 자동차 사고 안 내고 운전배운 사람이 있으신가요?

이게 머리로 배우는 것인가요, 감정으로 배우는 것인가요?

차에 올라타서 모험을 해야 합니다. 운전은 몸으로/체험으로 배우는 것입니다.


요새 젊은이들은, 모든 것을 컴퓨터로 배우려 합니다.

저는 이게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컴퓨터로 배우는 것, 머리로만 배우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도 대부분은 , 머리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배우는 것입니다.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2)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인생을 모른다’는 말은

참 말입니다.


사람이 배도 고파 봐야 합니다.

그 체험적 지식이, 많은 것을 가르쳐 줍니다.

배고픈 것- 그거 이론적으로 공부해서, 절대 알 수 없거든요.


우리 세대는 다 625를 경험해서, 피난민 생활을 할 때

며칠 굶고 나니.. 정말 배고픔이 무엇인지 절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한번은 며칠 굶고 나서,

길에서 파는 군고구마 냄새가 너무 향기로워서,

주머니에 돈은 없고, 하는 수 없이 아주 귀한 시계였지만, 시계를 벗어주었습니다.

그리고는 군고구마 4개를 받아쥐었습니다.


그리고 먹기 전에,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리는데,

정말 눈에서 눈물이, 군고구마 위로, 두두둑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먹은 고구마 맛, 또한 배고픔의 괴로움.. 평생 잊지 못합니다.

이건 배고파본 사람만 아는 지식인 것입니다.


이걸 배우면, 적어도 밥투정은 안 합니다.

음식이 좀 짜면.. 물 좀 타서 먹고,

싱거우면.. 소금 좀 쳐서 먹고,

먹는 게 감사한 것이지, 뭐가 밥투정입니까?

반찬이 있고, 없고 투정하는 것도.. 아직 굶어보지 않아서 그런 겁니다.


   굶는 게 다 좋다는 게 아니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풍부에도/비천에도 처할 줄 아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성도가 되어야 된다...’ 이런 뜻입니다. 빌4:13

 

주3)

감각적 지식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아래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 삶의 통찰력 

http://blog.daum.net/rfcdrfcd/128771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