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성령사역 개관 행2:22 10.09.12.설교녹취
<성령론>에 관한 훌륭한 강의안입니다.
특별히 선교지 신학교에서 꼭 가르쳐져야 할 내용입니다.
▲서론 : 말씀전파만 하면, 절뚝거릴 수 있다.
예수님의 성령사역(기사와 이적을 동반한 말씀전파)은, 예수님 지상사역의 핵심이었다.
그리고 사도행전과 서신서에도 보면,
예수님께서 감당하신 성령사역을, 사도들이 그대로 이어서 감당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기독교를 거저 말씀사역만 하는 것을 정상적으로 생각한다.
주일날 예배드리고, 말씀 듣고 감동 받으면, 그것을 정상적인 기독교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이런 경향은, 여러 교단들 중에, 특히 칼빈의 장로교가 강하다.)
당연히 철저하게 말씀 중심적인 신앙생활을 해야하지만,
그 말씀에는, 성령의 역사가 동반되어야, 온전한 말씀사역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말씀드리는 성령사역은, 말씀사역을 도외시하고, 그것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말씀사역을 우선하지만, 그것과 동반되는 성령사역을 말씀드리는 것이다.
제자들이 나가 두루 (말씀을) 전파할쌔,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 눅16:20
그래서 이 중요한 예수님의 성령사역을 아래 4대지로 나누어 개관해 보고자 한다.
그 이유는, 오늘날 우리도 당연히 성령사역을 감당해야 한다는 뜻이다.
성령사역이 따르지 않는 말씀사역은.. 성경에서 벗어난 것이라는 뜻이다.
▲특별히 아래 대지가 중요합니다.
아래 대지는, 예수님의 성령사역의 개관을 잘 설명하고 있어서,
그 대지만 읽어도 무슨 뜻인지, 내용을 금방 파악하실 것이다.
이 대지를 통해서, 나무를 보는 것보다, 먼저 숲을 보게 되시기 바란다.
◑1. 예수님의 성령사역은 예수님의 구세주 되심을 증거 하는 표적이었다.
◑2. 예수님이 행하신 성령사역은, 예수님을 통한 복음전파를 뒷받침하기 위한 것.
◑3. 예수님을 통한 성령사역은 하나님 나라가 임한 증거
◑4. 예수님의 성령사역은 하나님의 긍휼의 표현이었다.
◑1. 예수님의 성령사역은 예수님의 구세주 되심을 증거 하는 표적이었다.
표적이란 말은 영어로 sign(증표)이다.
예수님이 감당하신 성령사역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드러내는,
즉 그 분이 구세주 되심을 나타내고 증거 하는 표적이었다.
▲이 사실을, 특히 요한복음이 강조하고 있다.
요한복음에 예수께서 행하신 일들을 다 기록하려면,
이 땅을 채우고도 남을 정도로 그 기사와 이적이 많았다고 말한다. 요21:25
그런데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이 감당하신 성령의 역사 중에 7가지만 기록한다. (7은 완전수)
그 이유는,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20:31
라고 밝힌다.
예를 들면,
요6장에는, 5병2어의 기적을 베푸신 것을 보여주는데,
이 사건은 예수님이 '생명의 떡'이었음을 증거 한다. 주1)
5천명을 먹이신 기적의 목적이, 거저 배고픈 사람 도와준 것 훨씬 이상이었다.
요9장에는,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치유하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이 기적은, '예수님이 영적으로 눈먼 자들의 눈을 뜨게 하심'을 보여주는 기적이다.
단순히 소경 한 명 눈 뜨게 하는 목적이 아니었던 것이다.
요11장에는, 죽은 지 4일된 나사로를 살리신다.
이 사건은,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신 것을 증거'하는 표적이었다.
그러니까 요한복음의 7가지 표적/성령사역은, 다 그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그 의미의 공통점은, 예수님이 그리스도 되심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본문 행2:22절은, 표적과 기사/성령사역의 목적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밝혀준다.
행2:22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 하셨느니라.
이렇게 말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행하신 모든 표적과 기사들은
예수님을 증거 하는 표적이었던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은사중지설의 입장
자 그런데, 오늘날 일부 신자들은,
예수님이 감당하신 성령사역이, 예수님을 증거 하는 표적이었기 때문에,
신약성경에 완성되기 전에는 그것이 필요했지만,
신약성경이 완성된 다음 (성경이 예수님이 누구신지 잘 증거함으로)
오늘날에는 더 이상 그 표적이 필요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 모든 표적들은,
초대교회 혹은 성경이 기록된 시대로 끝났다고 주장한다.
당연이 이 주장은 틀린다.
오늘날에도 성령의 표적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오늘날의 성령사역이, 마귀사역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오늘날 일각에서, 그들이 우려하는 대로, 마귀사역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성령사역을 마귀사역이라고 보는 것은,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다.)
▲사도들도 예수님의 전통을 이어서, 성령사역을 계속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그 엄청난 표적과 기사를 통해서 예수님 자신을 증거 했는데,
또한 사도들을 통해서 엄청난 표적과 기사가 똑같이 나타났다.
그러면 사도들을 통해서 나타난 표적과 기사는,
그 표적과 기사가 나타난 그 사도들을 증거 하기 위한 것이었는가?
물론 아니다.
아주 중요한 내용이다.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난 표적과 기사는,
예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증거 하는 것이었는데,
사도들을 통해서 나타난 그 엄청난 표적과 기사 역시도,
사도들이 어떠한 사람인가를 증거 하는 것이 당연히 아니었다.
사도들을 통해서 나타난 엄청난 표적과 기사도,
예수님이 어떠한 분이심을 증거 하기 위함이었다.
왜냐하면 그 표적과 기사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해졌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 사도들을 통해서
자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오늘날 표적이 나타날 때, 그 사람을 주목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
이 사실이 아주 중요하다.
이와 관련해서 중요한 성경구절이 있는데,
행3장에, 날 때부터 앉은뱅이된 사람을, 베드로와 요한이 일으켜 세운다.
그러니까 그 당시 성전에서 모여있던 사람들은,
그 앉은뱅이가 펄쩍펄쩍 뛰니까 놀랬다.
(참 신기하다. 오늘날 누가 다리를 약 1년만 못 써도, '재활치료/걷는 연습'을 해야 한다.
오래도록 안 쓰던 다리가, 하루아침에 펄쩍펄쩍 뛰어 다닐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경의 기적은, 재활치료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냥 초자연적 기적이었다.)
사도행전에 보면, 예루살렘 성전 근처에 솔로몬 행각이 있었는데,
거기서 초대교회가 매일 모여서 기도하고 예배드렸던 것으로 보인다.
앉은뱅이가 일어난 기적을 보고, 군중들이 그 행각으로 일제히 몰려왔다.
행3:12,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사람들은 놀라서 몰려와 있는데,
베드로는, 당연한 일인데, 뭐 그리 놀라느냐고 반문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기 때문에, 당연하다는 식으로 말한다.
그 다음 말이 중요한 말이다.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오늘날 우리는, 이런 표적이 나타나면, 꼭 표적 행한 사람을 쳐다본다.
그 사람이 기도를 많이 했더니
그 사람이 금식을 많이 하니까
그 사람 정도의 경건이 되니까, 하나님이 그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셨다는 것이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지만,
본문 베드로의 증거, 또한 성경의 일관된 증거는,
표적은, 사람을 증거 하기 위함이 아니요, 그리스도를 증거 함이 목적이다.
그래서, 특별히 그 사람에게 가서 기도를 받아야 나을 것 같고
(물론 은사자가 있겠지만)
예수님보다 너무 사람을 의지하는 경향은.. 잘못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을 쳐다보지 말고,
표적과 기사를 행하시는, 그리스도를 쳐다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사람들도 그랬다는 것이다.
베드로와 요한, 즉 사람을 주목했다는 것이다.
이때 베드로가 단호히 말한다.
'왜 우리 개인의 능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이 낫게 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여기서 중요한 말은, 이것은 우리 능력으로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의 경건 때문에 되었다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경건한 삶을 사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의 경건함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서 이 앉은뱅이를 치료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표적이 나타났을 때,
교인들이 '그 사람'을 너무 우러러 봐서도 안 되고,
'그 사람' 자신도, 자기 스스로를 특별하게 생각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우러러보고, 주목할 분은.. 오직 그리스도시다.↙
행3:13,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2. 예수님이 행하신 성령사역은, 예수님을 통한 복음전파를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었다.
▲말씀 + 표적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의 뜻을 따라
성령이 나누어주신 것(표적)으로써, 그들(표적)과 함께 (복음을) 증언하셨느니라. 히2:3~4
▲4복음서에, 복음전파 + 성령사역으로 인해,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4복음서를 보면, 예수께서 말씀을 전하시고, 성령사역을 감당하시니까
이 2개의 조화로 인해서,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특별히 마가복음이 이것을 강조한다.
마가복음에는 군중crowd이란 용어가 자주 나온다.
어떤 때는 식사할 시간도 없었다. 막3:30, 6:31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막6:31
너무 사역이 바빠서, 먹을 시간도 없었던 것이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말씀사역에, 성령사역이 함께 동반되었기 때문이었다.
▲사도행전에 사도들의 사역도 마찬가지였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수많은 표적과 기사들은,
그 표적과 기사들이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복음전파와 연결되어 있다.
그러니까 아까 사도행전 3장에서, 날 때부터 앉은뱅이를 일으킨 사건만 하더라도,
그 직후에 5천명이 예수께 돌아왔다고 그랬다. 행4:4 주2)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주일날 교회에 안 빠지고 다니지만, 나는 어차피 세상에 사는 것이니까
돈 열심히 벌어서, 주일날 예배 안 빠지고 와서, 나름대로 봉사 좀 하고,
헌금 좀 드리면, 자기 할 일 다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성령사역은.. 목사님이나, 특별한 지도자들이나 하는 것이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이 삶은 우리 모두가 살아야 하는 삶이다.
이것은 모든 기독교인들의 정상적인 삶이 되어야 한다.
▲질문) 복음에 능력이 있다고 그랬는데, 또 따로 성령사역이 필요한가?
이처럼, 그 예수님을 통해 나타난 성령의 사역은,
복음전파를 뒷받침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면 어떤 분은, '표적과 기사를 통해서, 복음전파가 뒷받침되어야 한다면,
그럼 복음 자체에는 능력이 없다는 말인가?' ... 이렇게 반발할 수도 있다.
'그것은 복음 자체의 능력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냐?
복음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들어있다고 했는데...' 이렇게 의문을 가질 것이다.
여러분, 기억하실 것은, 표적과 기사가 사람을 구원하지 못한다.
구원하는 능력은, 복음(말씀) 안에 있다.
복음에는 우리를 구원할 능력이 있다.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복음 안에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이 말하는 대로,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우리의 관절과 골수와 영과 혼을 찔러 쪼개기까지 할 만큼 능력이 있다.
맞다. 그런데 제 말 뜻은, 지난 주 말씀사역과 성령사역은 같이 간다 에서 살펴보았지만
예수님은, 누구보다 말씀을 잘 아셨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목적과 의도를 그대로 잘 아셨다.
말씀은 본질인데, 그 말씀을 잘 증거하기 위해서
따르는 표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말씀을 잘 증거하면, 따르는 표적이 저절로 동반된다는 것이다.
성령의 능력을 통해, 말씀사역을 뒷받침하셨다.
바울도 마찬가지였다. 누구보다도 설교를 잘 했지만
설교만 하신 것이 아니라,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사역을 뒷받침했다는 것이다.
.......................................... 길면 쉬어가는 곳 ...........................................
◑3. 예수님을 통한 성령사역은 하나님 나라가 임한 증거
▲구약성경에 보면, 오래 전부터 선지자들은 하나님 나라가 임할 것을 예언했다.
이스라엘은 오래 동안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열망했다.
그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과 아울러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처음부터 이렇게 외치셨다.
막1:15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임하셔서 왕으로 다스리시고,
그 능력으로 운행하시며, 하나님의 생명과 능력이 넘치게 하시고
어둠의 세력들을 멸하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였다.
(구약성도들이 진짜 칼과 창을 가진 강한 '다윗 왕국'으로 약간 오해하기는 했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나라가 아직 임하지는 않았지만,
앞으로 다가올 하나의 그림자, 모델이 있었다.
그 중 하나는, 모세 시대에 모세가 행한 여러 가지 기적이었다.
10재앙 등 모세의 표적과 기사는, 하나님의 통치(나라)가 임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능력으로 임하셔서, 이스라엘을 억압 가운데 붙들고 있는
그 배후의 어둠의 세력들을 멸하고, 그곳에서 그들을 건져내어서
(10재앙의 대상은, 애굽의 신들이었다.)
하나님의 백성을 삼으시고, 그들을 심고자 하신 곳에 옮기신 것인데,
이렇게 하나님이 능력으로 임하셔서, 어둠의 세력을 멸하시고,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그림자였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과 아울러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 임하였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을
말씀으로만 전할뿐만 아니라,
바로 이 성령 사역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임한 것을 실제로 나타내 보이셨다. demonstration 하셨다.
증명해 보여주셨다.
바꾸어 말하면, 성령사역이 아니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지 않은 것이 된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역의 핵심이 '하나님의 나라'인데,
그것은 성령사역(표적)을 통해서, 실제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사역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마12:28절에,
'내가...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 성령사역이 하나님 나라를 임하게 한다는 결정적 증거가 되는 말씀이다.
그러니까 구약성도들 때부터 간절히 바란 하나님의 나라는
반드시 성령사역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성령사역이 아니면, 하나님 나라가 임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사역은, 하나님 나라의 사역이었는데,
그 하나님 나라의 사역은,
(말씀사역과 더불어)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
그 증거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지 앨든 레드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 책에서 말하기를,
예수님의 성령사역은,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한 것을 나타내 보여주신 사건이었다.
라고 명백하게 강조하였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지금 이 땅에서 확장되는 방법도 뭐냐,
성령사역을 통해서이다...
◑4. 예수님의 성령사역은 하나님의 긍휼의 표현이다.
▲예수님이 성령사역을 베풀어주신 이유 중 한 가지는,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인을 고쳐 주시니라. 마14:14
이렇게 예수님이 불쌍히 여기사, 고쳐주셨다는 구절이 성경에 많이 나온다.
표적과 기사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긍휼이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도 마찬가지다.
그 긍휼의 마음이 내 속에서 강하게 역사할 때
오늘날 나에게도, 성령사역이 나타나는 것이다.
긍휼이란 말은 헬라어로 ‘스플랑크논’인데.
이 단어는 배, 창자, 여자의 자궁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불쌍한' 감정을 표현할 때,
여인이 자기 태속에 아기에게 가지는 긍휼의 마음,
(또는 같은 의미로 뱃속, 창자 속의 깊은 곳에서부터 나오는 긍휼)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긍휼이다.
▲그런데 어떤 외국 성경에는, 이 단어를 '분노'라고 표현했다.
왜냐면 이 단어 속에는 '분노'도 함께 들어있기 때문이다. 주3)
하나님의 백성들을 억압하고, 저들에게서 생명을 빼앗아가기 때문에,
그 어둠에 세력에 대한 분노, 그 질병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
긍휼에는 이런 감정도 같이 담고 있다.
예수님도, 사람들이 길을 잃고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방황하는 것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또한 (마귀에 대해서) 분노하셨다.
잃은 영혼을 향한 긍휼, 질병과 마귀에 압제당하는 자들을 향한 긍휼
방황하는 자들을 향한 긍휼,
이런 사람들에 대해 긍휼한 마음을 가질 때,
동시에 마귀에 대한 분노가 일어나면서,
온전한 성령사역이 일어나는 것이다.
▲사도들의 삶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성령사역 근거에는 긍휼이 있었다.
이 부분 설명은 각자가 성경을 찾아보세요...
▲참고로,
우리가 기도하기만 하면, 모든 병자가 낫는다는 말은 아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했지만, 아직 온전히 임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already, not yet
앞으로 재림 때는 온전히 임할 것이다. 그 때는 모든 질병이 다 낫게 될 것이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에, 아직 하나님 나라가 100% 임한 것은 아니라서,
우리가 기도할 때, 모든 병이 다 낫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성령사역을 통해서,
(성령사역을 안 하던) 과거보다 훨씬 더 많은 병자들이 낫게 될 것이다.
지난 주간에, 어떤 선교사의 간증에 의하면,
그가 장이 안 좋아서, 하루에 화장실을 7~8번씩 다녔는데,
그래서 심할 때는, 일을 제대로 할 수가 없어서,
아예 화장실에 노트북 컴퓨터를 갖고 가서, 거기 앉아서 일하기도 했는데,
성령사역을 통해서, 그가 자기 몸에 신유를 체험하였다.
그래서 이제는 하루에 한 번만 화장실에 간다고 간증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치유 받은 것이다.
▲마치는 말
위 4가지가
예수님의 성령사역이었고,
사도들이 감당했었고,
우리가 감당해야 할 성령사역의 근간이다.
‘초대교회로 표적이 끝났다’는 은사중지설 이론이 틀린 이유는,
예수님이 행하신 성령사역이 단순히 표적을 보여주심만이 아니었다.
표적만으로 끝나지 않았고, 다른 중요한 이유들이 있었다. (위 ◑3 과 ◑4)
그래서 성령사역은, 오늘날에도 계속 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말씀사역만 갖고는 안 된다.
위 ◑3 과 ◑4를 위해서라도 말이다.
.................................
주1)
▲‘너희가 나를 찾는 까닭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먹고 배부른 까닭이다.’ 요6:26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너희가 나를 찾는 까닭은, 5병2어의 표적을 보고,
내가 곧 생명의 길인 것을 너희가 깨닫고
나를 먹음으로써 살기 위해, 나로 인하여 살기 위해.. 내게 나와야 되는데,
너희는 이렇게 표적을 보고 나를 발견하고 내게 오는 것이 아니라,
표적 그 자체, 즉 먹고 배부른데 만족했구나, 그래서 나를 찾아왔구나.
그들의 초점이 표적 자체에 있다는 것을 지적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초점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
그 교훈을 주시기 위해서 5병2어의 기적을 베푸셨는데,
사람들은, 먹고 배부른데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 이 부분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으나
정확히 말하면
'표적을 보고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알게 된 까닭이 아니요' - 이렇게 풀어써야 이해가 잘 된다.
주2)
마이클 그린 박사는, 특별히 초대교회에 대해 대가로 알려진 분인데,
<Evangelism in the Early Church 초대교회 복음> 이란 책을 썼는데,
그의 책 170쪽에 보면, 처음 4세기동안 교회가 폭발적 성장과 부흥을 가져왔는데,
그 폭발적인 성장과 부흥을 가져온, 주된 요인 3가지를 이렇게 꼽고 있다.
①설득력 있는 변증과, 기독교 비판가들보다 우월한 사고의 능력.
그냥 무조건 믿어라가 아니라, 말씀을 설득력 있게 정확히 제시했다는 것이다.
②신자들의 변화된 성품과 성경적 동정심
그들의 삶이 변하고, 예수님을 닮아서 주님의 긍휼과 사랑으로 섬겼다는 것이다.
③성령의 힘입어 치유, 축귀, 예언의 능력들을 발휘함으로써,
하나님의 권능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이것들이 초대교회 엄청난 교회 성장과 부흥을 가져온 3대 이유 이었다고 말한다.
주3)
http://www.blueletterbible.org/lang/lexicon/lexicon.cfm?Strongs=G4698&t=KJV
※ 더 연구할 문제)
그런데 출17장 르비딤 사건 이후로, 시내산에 이르러 율법을 받은 후로는,
모세의 '지팡이'가 거의 안 나옵니다.
후에 므리바에서 다시 반석을 명하여 물을 낼 때, 한 번 사용된 것으로 나옵니다. 민20:8
그 다음부터는 차라리 '아론의 지팡이'가 성경에 더 자주 나옵니다. 연구해 볼 문제입니다만,
제 생각에는, 그 후로 (므리바 사건만 제외하곤) 지팡이를 사용할 만큼 '큰 일'이 거의 없었다는 것입니다.
아말렉과의 전투 후에도, 출애굽 여정에서 아모리왕 시혼, 바산 왕 옥과의 전쟁이 있었는데,
그 때도 모세가 지팡이를 사용했다는 기록은, 성경에 없습니다. 그때는 칼로 쳐서 이겼습니다.
그렇다면 지팡이 기적은, 출애굽 처음에 (시내산 도달 이전 3달 동안)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시점은, '하나님의 은혜, 또는 기적'이 간절히 필요한 시점이었습니다. 처음이었으니까요.
물론 그 이후로, 불기둥과 구름 기둥의 인도, 만나와 메추라기들은 계속되었습니다만
모세(사람)를 통한 이적은.. 뚜렷하게 기억이 안 납니다. 성경을 더 찾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사실적으로 분별하면, 은사가 나타나는 교회도, 그 은사가 계속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초기에 3년, 5년, 아마 10년 이상 계속 은사가 지속되는 경우는.. 찾기 힘듭니다.
사도행전도, 가장 많은 은사가 나타난 것은, 초기 였습니다.
그 뒤로 은사가 나타났지만, 초기 예루살렘 교회처럼 폭발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았습니다... ▣ 성령론
'분류 없음 > 2010'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여 보여 주옵소서 2697 (0) | 2010.10.18 |
---|---|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2694 (0) | 2010.10.16 |
영적인 라인 강의 기적 (0) | 2010.10.14 |
풍랑을 만났을 때 2691 (0) | 2010.10.14 |
천국의 복을 얻는 법 2688 (0) | 2010.10.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