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은 반드시 분별되어져야 한다 고전14:29 10.09.26.설교일부녹취
◑신앙의 기준은 오직 성경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이, 우리 신앙생활에 필요하지만,
그러나 그것이 우리 신앙생활에 기준은 아니다. 기준은 오직 ‘성경’뿐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딤전3:16~17
우리 신앙의 기준은, 오직 성경이다.
예언이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신앙생활에 (성경 말씀의 적용적 차원에서) 필요하지만,
기준은 아니다.
모든 예언, 하나님의 음성은, 성경말씀의 기준에 의해
반드시 분별되어져야 한다.
예언이나 하나님의 음성듣기가 필요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너무 주관적’인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령을 소멸치 말고, 예언을 멸시치 말라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살전5:19~20
이 두 구절이 연결되어 있다. 한 문장이다.
한 문장이란 뜻은, 다시 말해서
예언을 멸시하는 일은.. 성령을 소멸하는 일이고,
예언을 존중하는 일은.. 성령을 소멸치 않는 일이다.
데살로니가 교회에 예언을 멸시하는 분위기가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하면서,
‘예언을 멸시치 말라’고 편지한 것이다.
그것은 ‘성령을 소멸하는’ 결과를 낳기 쉽기 때문이다.
예언을 멸시하지 말아야 하지만,
동시에 예언은 반드시 분별되어져야 한다.
◑예언은 반드시 분별되어져야 한다.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변할 것이요. 고전14:29
마7장은 예언자(선지자)를 분별하라고 했지만,
고전14장에서는 예언을 분별하라고 했다. ※분변, 분별은 같은 말
예언을 멸시하지 말아야 하지만,
모든 예언은 반드시 분별되어져야 한다.
우리는 양극단으로 빠져서는 절대 안 된다.
예언을 멸시하여, 예언을 모조리 믿지 않는 극단과,
반대로 예언을 분별없이 모두 다 받아들이는 극단이다.
간혹 예언자들 가운데,
‘까불고 있어, 내 예언을 무시하다니..’
이렇게 오만방자한 사람이 있는데.. 그의 예언은 99% 잘못된 것이다.
(경험상 그렇다.) 그의 예언은 절대 물리쳐야 한다.
모든 예언은 다 분별하라고 했는데,
자기 예언의 분별을 받지 않겠다고 나오는 것은.. 교만한 태도이며,
무엇보다 성경적이지 않다.
올바른 예언/예언자의 특징은 겸손이다. *관련글 : 참된 계시의 분별 척도 - 겸손 (강추)
◑예언을 어떻게 분별할 것인가?
▲1. 성경에 기초해서 분별해야 한다.
성경이 기준이니까, 그의 예언 내용이 성경과 일치하느냐?
이것을 분별해야 한다.
예언의 내용이, 성경적 가치관에 합한가?
성경이 말하는 신앙과 동일한가?
성경이 말하는 기준과 일치하는가, 배척하는가?
아무리 놀라운 예언이 나타나도,
그 예언이 성경에 나오는 기준에 합하지 않으면.. 가짜이다.
하나님께로 온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자기가 ‘남편과 이혼하라’는 예언을 주님께 받았다면,
‘이혼하지 말라, 분방하지 말라’는 성경의 일반적 기준과 배치되는 것이다.
이런 예언은, 99% 잘못된 것이다.
(1% 남편이 아내를 진짜 죽이려고 하는 경우.. 남편을 피해야 하겠지만..)
혹자는, 자기가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는다고 그럴 때
자기가 듣는 하나님의 음성만 믿는다.
자기가 미래를 잘 맞춘다고, 자기 예언만 신뢰한다.
그래서 자기가 하나님께 예언을 받았다고 하면서,
지도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은, 잘못된 예언을 받았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영적으로 성숙한 지도자들의 분별은.. 반드시 필요하다.
(물론 간혹 지도자들의 분별이 틀리는 경우도 있다.)
여러분, 성경으로 예언을 분별하려면,
평소에 미친 듯이 성경을 읽으셔야 한다. 특히 기억력 좋은 젊은 시절에!
그런데 신학교에 가거나, 외국유학을 가면,
학교에 리포트 내고, 수업 듣다보면, 성경을 읽을 시간이 줄어든다.
그러므로 성경은, 아예 중고등학생 때부터 미친 듯이 읽어야 한다.
그러면 모든 예언, 모든 지식이.. 성경으로 필터링 된다. 걸러진다.
분변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적어도, 하나님께 말씀으로 쓰임 받을 주의 종이라면,
젊어서(시간이 많을 때) 성경을 미친 듯이 읽어야 한다.
나이가 들수록, 개인시간이 줄어든다. 그래서 성경 읽을 시간이 줄어든다...
해외여행가고.. 이런데 신경 쓰지 말고,
성경을 미친 듯이 읽는 젊은이들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의 ‘미래’다.
▲2. 자신과 하나님과 관계에서 분별한다.
어떤 사람은 여기가서 기도 받고,
저기가서 또 기도 받고..
그 결과가 둘 다 일치하면.. 하나님의 뜻이라고 분별한다.
그렇게 분별했더라면, 사도바울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않았을 것이다.
가이사랴에 갔더니 선지자 아가보가 내려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행21:11
라고 하면서,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강력히 예언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예언을 분변>했다.
바울은 자신과 하나님과의 평소 관계에서, 분변했다.
‘지금 나에게 내려진 아가보의 예언이 과연 옳은 것인가?’
그런데 바울이 가만히 ‘자기와 하나님과 평소 관계’를 생각해 보니,
주님이 여러 차례 그동안 자기에게 말씀하시기를
‘환란과 결박이 너를 기다리지만, 너는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밀레도의 작별 때, 바울의 말)
행20:22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23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4 (복음 전파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그래서 바울은 생각했다.
‘아가보의 예언은 맞다. 결박과 핍박이 나를 기다린다’
그리고 실제로, 뚜껑을 열고 보니, 아가보의 예언도 맞았다.
그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자마자, 그는 붙잡힌 것이다.
그러나 평소에 사도바울은, 평소에 자기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결박과 환란이 나를 기다리나, 나는 그것을 피하지 말고, 복음을 전해야 한다.’
라는 그런 예언의 음성을 분별하고 있었다. 행20:23↑
그래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행21:13,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예수를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바울은, 아가보의 예언을, 자기와 하나님과의 평소 관계에서 분변한 것이다.
이렇게 매듭지어 졌다.
저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행21:14
그래서 예루살렘에 올라갔더니, 예수님이 밤에 직접 나타나셔서, 바울에게 말씀하셨다.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행23:11
이 말은, ‘네가 여기 예루살렘에 온 것이 내 뜻이었느니라..’ 는 예수님의 확증이다.
정리하면, 예언은 반드시 분별되어져야 한다.
1. 하나님의 말씀으로 분별하고,
2. 평소에 자기와 하나님과 관계에서 분별해야 한다.
▲일화
제가 아는 어떤 분은 한의사인데,
어떤 목사님이 자기에게 예언해 주기를
‘병원을 크게 지으면, 앞으로 더욱 번창할 것이다.’ 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그래서 빚을 얻어서, 무리하게 큰 건물을 짓는 와중데,
갑자기 1998년도에 IMF가 터지면서,
한의원도 큰 불황을 겪었고, 건물 짓는 공사도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서 경제적으로 극심한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그 한의사는, 자기에게 예언해 준 목사님을 탓할지 모르나,
저는 그 한의사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예언은 반드시 분별되어져야 한다’는 원칙을 무시했던 것이다.
................................ 더 읽으실 분 ............................
▶사례 연구 이 단락 펀글
요셉이 바로의 관원장들의 꿈을 해석할 때,
떡 세 덩이가 3일을 뜻하고...
떡 세 덩이가 3일을 뜻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그것은 공식을 만들 수 없습니다.
3달이나 3년은 왜 안 됩니까? 그런 공식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이 꿈의 해석을 들으면서
‘참 희한하다 이런 것을 누가 해석할 수 있겠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꿈의 해석은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존해야 합니다.
‘나는 꿈을 해석할 수 있다.’ 이런 교만은 벌써 미혹된 겁니다.
벌써 실수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나는 꿈을 해석할 수 있다’는 교만을 먼저 버려야 합니다.
환상을 해석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이것을 해석할 수 있다.’ 그러면 선입견이 들어갑니다.
듣자마자 ‘아! 그거! 그거 무슨 뜻이야!’ 그것이 실수의 첫걸음입니다.
절대로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또 성경에 보면 뱀이 나오잖아요. 뱀은 사탄을 뜻하잖아요.
그런데 그 뱀이 또 예수님을 뜻하는 것이잖아요.
장대에 달린 놋뱀은 예수님을 뜻하는 겁니다.
또 사자를 보세요. 사자가 사탄을 뜻하는 것이잖아요. ‘울부짖는 사자’
또 사자가 예수님을 뜻하자는 것도 됩니다. ‘유다의 사자’
그러므로 ‘나는 꿈/예언을 해석할 수 있다’고 방정 떨면, 그러면 실수합니다.
요셉처럼 ‘오직 해석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면서, 기도하며 겸손해야 합니다.
그래서 꿈 해석을 제대로 하려면 요셉 같은 겸손이 필요합니다.
또한 주의할 것은,
자신의 머리로 해석하면 안 됩니다. 계시는 머리로 해석하는 것이 아닙니다.
머리로 해석하려 하다가는.. 꿈보다 해몽이 더 좋을 수 있습니다.(틀린 해석이란 뜻)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께 귀를 기울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지식의 말씀’을 주시든지, ‘지혜의 말씀’을 주시든지,
번개처럼 불현듯 깨닫게 해 주시든지..
위의 현상들이 나타나면, 자기 마음에 강력한 확신이 생깁니다.
그런 강력한 확신이 생기기 전까지, 함부로 해석을 유보하십시오.
그런데 이렇게 강력한 확신으로 주어지는 해석은,
듣는 사람이 들으면서 (성령은 한 성령이기 때문에) 공감을 일으킵니다.
모두에게 성령이 계시기 때문에, 이것이 서로 공명이 됩니다.
그래서 듣는 사람이 무릎을 치지 않는 해석은 (대부분) .. 이거 다시 해야 됩니다.
그러나 성령에서 우러나오는 해석을 하면
듣는 사람이 고개를 끄떡끄떡합니다.
그리고 듣는 사람이 이 꿈이 그런 의미라는 것을 그냥 압니다. 확신해버립니다.
이게 올바른 꿈 해석입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모든 것은 ‘겸손’에서 시작하고, ‘겸손’으로 마칩니다.
‘자기가 잘 맞춘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잘 안 맞게 됩니다.
‘자기가 예언이 정확하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예언이 틀려집니다.
그러므로 늘 어린아이와 같이 사는 것입니다.
자기가 뭘 신령하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보통 사람으로 사는 사람이,
성령의 은사로서 예언, 분별, 해석.. 이런 것들을 잘 할 수 있습니다.
교만하지 않으니까요. 교만할 줄 모르니까요.
제대로 은사를 받았으면 사람들이 그냥 인정하게 되어있습니다.
악령이 역사하는 사람들은, 가만히 안 있고 자꾸 설치려고 그러잖아요.
자꾸 설치고, 자꾸 나서려그러고
그게 벌써 속에서 귀신이 격동시킨 것입니다.
자꾸 설치고, 자꾸 나서려 그러고, 자꾸 말하려 그러고,
그게 악령 들린 초기증상입니다.
그렇게 인정을 받는 게 아닙니다.
자기가 드러내고 나서고 해서 인정받는 게 아닙니다.
정말 바른 꿈과 환상과 예언은 그냥 이루어지기 때문에
저절로 인정을 받습니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냥 환상을 자주 보고 그러면 신령한 줄 압니다.
본인 스스로가 착각합니다.
그 함정에 빠져 있습니다. 아니요. 그거 신령한 게 아닙니다.
성령의 은사를 주시는 목적은, 자기(은사자)를 높이는데 있지 않습니다.
교회의 덕을 세우고, 그리스도의 몸을 온전히 이루어 가는데 있습니다.
이런 목적으로 환상을 자주 보는 사람들은,
먼저 조용히 기도합니다. 자꾸 자기를 스스로 드러내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교만한 은사자’는 다 잘못된 것입니다.
참된 은사자는 ‘겸손’합니다.
자기 은사를 사용하되, 조용하고 겸손하게, 교회의 몸을 세웁니다.
은사로 자기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정리하면, 성령의 여러 신비한 은사를 받으십시오,
그러나 겸손한 은사자가 되십시오.
‘해석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니..’ 라고 겸손했던 요셉을 본받읍시다.
내 교만으로 인해, 내 은사가, 나 자신과 공동체에 독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 ▣ 선지자론
'분류 없음 > 2010'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십자가는 안전지대 2720 (0) | 2010.11.01 |
---|---|
안전지대는 어디에 (0) | 2010.10.31 |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은 비성경적인가? (0) | 2010.10.28 |
성도는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 2712 (0) | 2010.10.27 |
피곤하여 지치신 예수 2711 (0) | 2010.10.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