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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는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 2712

LNCK 2010. 10. 27. 12:19

◈성도는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                     삼상25장                        -출처보기-



◑1. 신앙인과 종교인


(전략) 그럼 뭐가 신앙인이고 또 뭐가 종교인일까요?

저는 다윗과 사울의 모습에서 좋은 예를 찾아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울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최우선의 목적으로 잡지 않았습니다.

사울은 자신의 왕의 자리를 유지하는 것, 즉 자신의 정치적인 입지를

굳건하게 유지하는 것을 최우선의 목적으로 잡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삼상15:1

백성들에게 전리품을 나누어 주어서, 왕의 자리를 더욱 굳히려 했던 것입니다.  삼상15:15

결국 사울은 하나님을 따른다고는 했지만, 실상은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려고 했던종교인’이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이런 점에서 정말 사울과 대조됩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을 왕으로 삼기 위해서 기름 부었다는 사실을 알고도,

다윗이 사울을 죽일 수 있었을 때,

자신의 칼을 2번이나 도로 집어넣었습니다. 삼상24:26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는 일에, 수단과 방법을 가릴 줄 알았고, 미련할 정도로 태연히 기다렸습니다.

 

다윗도 사울과 같이, 사울을 죽이고, 또한 남들을 희생시켜서

자신의 목적(기름 부은바 대로 왕 되기)을 달성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어떤 일이 만나더라도, 자신의 목적을 최우선으로 두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철저하게 하나님과의 관계만을 최우선적인 목적으로 삼았고,

항상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했습니다.


심지어 다윗이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나서 도망가는 중에서 조차,

다윗은 자신의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자기가 왕이 안 되어도 좋다는 각오입니다.

그래서 법궤(그에 따른 종교적 지지 세력, 제사장들)도 자기를 따르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참으로 ‘자기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았습니다. 삼하15:25~26


우리가 조금만 더 신경을 써서 성서를 읽게 된다면,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겨갈 때, 지금 감람산에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고,

놀랍게도 1천년 후에 예수께서 감람산에서, 즉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했던 것과

같은 내용이라는 점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삼하15:26, '그러나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기뻐하지 아니한다 하시면

     종이 여기 있사오니 선히 여기시는 대로 내게 행하시옵소서 하리라'

     이 다윗의 기도가, 예수님의 ‘내 뜻대로 마옵시고’ 기도와 같다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정말로 다윗은 우리에게 신앙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줍니다.

바로 여러분이 다윗과 같은 신앙인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종교인


이렇게 신앙인종교인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차이를 보여주지만,

사람을 대하는 모습에서도 차이를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서, 종교인은 사람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용되는 ‘수단’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울은 자신의 목적에 맞지 않으면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죽입니다.

여러 번 그런 일이 있었지만 삼상14:29,

특별히 사울은 다윗에게 떡을 주었다고, 놉의 제사장들을 85명이나 죽입니다. 삼상22:18

종교인 사울에게 사람이란, 단지 자신의 성공을 위한 수단이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인 다윗은 어떠했을까요?

다윗은 사울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다윗은 사람을 수단으로 보지 않습니다.

다윗은, 주변 사람을, 하나님의 뜻 안에서 서로 연합해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나가는 공동체로 생각합니다.

(설교문 제목처럼, 하나의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로 이해했습니다.)


즉, 다윗은 자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이 미리 자리를 정해주신 것으로 여겼다는 겁니다. 이것은 굉장한 생각입니다.

사실 고대사회에서 아직 인간의 가치가 오늘날처럼 높아지지 않았을 시절에

다윗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은 혁신과도 같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당시는, 어쩌면 사울과 같이 사람을 다루는 일이 보편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부분에서 신앙인의 힘을 다시 느끼게 됩니다.

그런 예를 특별히 ‘다윗과 아비가일’의 관계에서 찾아보려고 합니다.

 

  

◑2. 다윗과 아비가일


▶본문 배경

본문 삼상25장은, 다윗과 아비가일, 그의 남편 나발과 관련된 내용이고요,

전후 문맥인 24장과 26장의 내용은 같은 내용입니다.

즉, 다윗이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을 2번이나 살려준 것입니다.

24장에서 1번, 26장에서 1번, 모두 2번입니다. 그만큼 다윗이 위기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삼상25:1절은 새로운 상황을 보여 줍니다.


사무엘이 죽으매 온 이스라엘 무리가 모여 그를 애곡하며

라마 그의 집에서 그를 장사한지라 다윗이 일어나 바란 광야로 내려가니라. 25:1


사실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냥 읽는다면,

1절, 사무엘의 죽음은 24, 25, 26장에서 전혀 상관이 없는 내용이 되고 맙니다.

뭐하러 하필 여기에 기록하고 있을까요?

25:1절은, 문맥의 흐름에서 벗어난 불필요한 구절처럼 여겨집니다. 마치 저자의 실수 같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지금 사울에게 쫓기는 상황 속에서 1절을 읽게 된다면,

왜 25장에서 사무엘이 죽은 것이 기록되고 있는지를 이해하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사무엘이 죽고 나서, 그 빈 공백에 아비가일이 채워졌다는 겁니다.

다윗과 사무엘이 서로 맞물려 돌아가다가, 이제는 다윗과 아비가일이 맞물려 돌아간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사무엘 사후에, 아비가일을 예비해 두셨다는 해석입니다. 대단한 통찰력이군요!)


사무엘은 다윗의 후원자였습니다.

즉, 하나님의 뜻 안에서 다윗이 움직이도록 직/간접적으로 공동체가 되어서

함께 일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다윗도 그렇게 사무엘을 생각했기 때문에,

사무엘의 죽음은 다윗에게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움직였던 중요 인물이 빠져버린 것입니다.

톱니바퀴들이 세밀하게 움직이다가, 핵심적인 톱니바퀴 하나가 쑥 빠져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25장은 사울의 위협을 말하는 24장과 26장 사이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 가를, 잘 보여주는 중요한 본문이 되는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은 어떻게 일하실까요?


이 아비가일이라는 여자가 사무엘이 죽은 다음에

그 빈자리를 채워주는 역할을 맡았음을 여러분들에게 설명할 것입니다.


▶본문 설명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서 이리저리 도망 다니게 되자, 먹을 것이 떨어졌습니다.

비록 다윗은 도망자 신세였지만, 도적떼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도망을 다니면서도 주변의 사람들의 물건을 빼앗거나하는

그 어떠한 민폐도 끼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유목생활을 했던 사람들의 양떼를 지켜주고 보살펴줄 정도로

친절을 베풀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다윗이 보호해주었던 나발의 양 무리를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기 부하들을 보내서

사정이 이리저리하니, 우리에게 먹을 것을 좀 달라고 부탁합니다.  25:5~8


우리는 이 본문을 읽으면서, 소위 오늘날의 깡패조직을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조직원들이 소위 ‘보호비’라는 명목으로 돈을 뜯어내는 것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시대착오적인 것입니다.

고대사회에서 이러한 것은 일종의 사회질서였으며,

가장 합리적이면서도,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관계였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성서 본문 자체가 매우 자세하게 지적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25:6절에, ‘평강하라’라는 말이 3번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같이 그 부하게 사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평강하라. 네 집도 평강하라.

네 소유의 모든 것도 평강하라.

이것은 다윗이 나발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참고로, 히브리어 문법에는, 비교법, 최상급이 없습니다.

대신에 같은 말을, 2번 쓰면 비교법, 3번 반복해서 쓰면 최상급 식의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비슷한 표현을 3번 반복해서 쓴 것은, 최상급적 강조를 뜻합니다.)


그러나 나발은 어리석은 길을 선택합니다.

나발의 특징은 무엇이냐면, 자기가 지금 누리고 있는 삶을

전적으로 자신의 노력의 결과로만 이해하는 사람입니다.

바로 그것이 히브리어 원어로 잘 드러납니다.


25:11절에서 나발은 세 번이나 자신의 소유를 분명하게 말합니다.

‘내 떡’ ‘내 물’ ‘내 고기’

       내가 어찌 내 떡(내) 물과 내 양털 깎는 자를 위하여 잡은 (내) 고기 가지고,

       어디로서인지 알지도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느냐 한지라


다윗이 3번이나 ‘평안하라’라고 한 것에 대해서

나발이 3번이나 ‘내 것’이므로 도와주지 못하겠다고 나옵니다.


나발, 즉 미련한 사람은 자신의 삶을

하나님도 없고, 또한 이웃도 없는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심지어 나발의 하인조차도 나발을 싫어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주인은 불량한 사람이라 더불어 말할 수 없나이다.’ :17  


13절에 다윗의 말에서, 성경이 얼마나 놀랍게 기록하고 있는지를 보게 됩니다.

나발이 3번이나 다윗을 부정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다윗 역시 3번이나 ‘칼을 차라’라는 말을 통해서.. 공평한 심판을 다짐합니다.

 

다윗이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칼을 차라.

각기 칼을 차매 다윗도 자기 칼을 차고

4백 명 가량은 데리고 올라가고, 2백 명은 소유물 곁에 있게 하니라


그러자 지혜로운 여자, 아비가일이 등장합니다.

그 이름의 뜻이 ‘내 아버지가 기뻐하신다’입니다.

그 이름의 뜻과 같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아비가일이 합니다.


그녀는 다윗이 없어서는 안 될 친절한 이웃이었음을 듣게 됩니다.

자기들이 지금 이렇게 살 수 있게 된 일이, 자기들이 잘나서 된 것이 아니라,

다윗과 같은 이웃 덕분이었음을 인정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25:15~16


이에 아비가일은 칼을 들고 쳐들어오고 있는 다윗에게 찾아가 꿇어 엎드립니다.

이것은 단순하게 아비가일이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미봉책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비가일은 하나님이 하실 일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자 나발이, 10절에서와 같이, 다윗을 모른다고 했지만,

아비가일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비가일은 하나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다는 것을 알고 믿었던 것입니다.


아비가일은 지혜로운 여인일 뿐만 아니라, 신앙인이었던 것입니다.

아비가일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자신도 하나의 톱니바퀴로 움직이도록,

자신을 내어드린 여자였기 때문입니다.

아비가일이 하나님의 섭리를 얼마나 신뢰했는지

한 번 그녀의 말을 들어 봅시다.


주의 여종의 허물을 사하여 주옵소서.

여호와께서 반드시 내 주를 위하여 든든한 집을 세우시리니

이는 내 주께서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심이요.

내 주의 일생에 내 주에게서 악한 일을 찾을 수 없음이니이다.


사람이 일어나서 내 주를 쫓아 내 주의 생명을 찾을지라도

내 주의 생명은 내 주의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 생명 싸개 속에 싸였을 것이요,

내 주의 원수들의 생명은 물매로 던지듯 여호와께서 그것을 던지시리이다. 25:28~29


그렇습니다. 결국 나발은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다윗이 칼을 내리치지 않았지만, 나발은 죽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칼을 내리쳤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나발이 끝까지 어리석었다고 말합니다. 나발의 결과를 보십시오.

36절에 자신이 스스로 모든 것을 이루었다고 왕처럼 잔치를 열었지만,

37절에 다음날 아침 돌과 같이 되어서 죽었다고 말합니다.

감사할 수 있었던 지혜로운 아비가일은 다윗의 아내가 됩니다. :42



◑3. 나와 이웃


우리는 이 본문 말씀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합니다.

즉, 신앙인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대로 살겠다는 도전을 가져야 합니다.


다윗과 계속된 아비가일을 통해서 깨닫는 신앙인의 모습이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에게 주신 모든 사람이나 환경을 두고서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다 주님이 내게 허락하신 동역자니까요.

부정적인 사람도, 요셉처럼 악을 선으로 바꿀 수 있음을 믿어야 하고,

바울도 빌립보서에서, 자기를 대적하는 자들을 두고서

'저들은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한다, 그래서 나는 기쁘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주변 사람들을 하나님이 보내주신 하나님의 톱니바퀴로 믿고,

그 주변 사람들에게도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이것은 매우 쉽지만,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되는 중요한 깨달음입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만

감사와 사랑과 같은 신앙적 요소들을 쌓아나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서는 우리에게 전인격적인 신앙을 가르쳐줍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뿐만 아니라,

나와 나의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감사와 사랑을 발견하고

그것을 나타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이라는 톱니바퀴 대신에

하나님은 아비가일이라는 톱니바퀴를 집어 넣어주신 것을 보면,

우리의 삶이 어떠해야 할지를 깨닫게 됩니다.



◑나가면서


지금까지 저는, 종교인이 아니라,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드렸고,

신앙인의 특징은,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독특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신앙인은 만나는 사람들을, 자신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신앙인은, 자기와 만나는 사람들을, 협력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없으면 안 되는 그런 공동체로 생각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의 감사가 그 폭이 더욱 넓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신앙인으로서 우리의 감사가 단지 하나님에게 드려질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공동체 안에서 감사하는 것으로 확대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앞에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이것이 신앙인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당연시 여겨서는 안 됩니다.

특별히 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 안에서, 공동체 한사람 각각에게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른 새벽, 예배를 위해서 차량 운행을 해주시는 분들에게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새벽마다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는 분들을 위해서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이른 아침부터 아이들을 위해서 헌신하는 교사들을 위해서 감사해야 합니다.

힘들게 연습을 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찬양대를 위해서 감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위해서

우리가 하나의 작은 톱니바퀴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당신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당신이 움직였기 때문에 내가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에게 감사합니다.

이것은 결국 우리 모두에게 감사하는 것이고,

결국 우리 하나님에게 감사하는 것이 됩니다. 할렐루야!


로마서는 아시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를 마무리하는 16장은 바울의 감사로 끝을 맺습니다.

바울은 단지 자신을 도와주었기 때문에 감사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역사에 그들 모두가

하나의 작은 톱니바퀴처럼 역할을 충실히 담당했기 때문에, 감사했던 것입니다.


바울의 감사는 결국 하나님께 대한 감사였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우리가 계속되는 롬 16장을 쓰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교회를 통해서 위대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실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신앙공동체 안에서 서로에게 감사할 수 있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기뻐하실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오늘과 내일이 바로 롬16:28절이 될 것입니다.


(※로마서는 16:27절로 끝납니다.

롬16:28절부터는 오늘날 우리의 동역자들의 이름이 씌어져야 한다는 뜻)                          ▣ 리더쉽, 목회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