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지대는 어디에 시46:1~11 10.10.03.설교스크랩
▶이 세상에 안전지대는 없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인간의 욕구 중에 가장 큰 욕구는 안전과 안정입니다.
이것은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가장 소중한 가치입니다.
보통 ‘안전’은 신체적인 면에 사용되고. ‘안정’은 심리적 측면에서 사용됩니다.
그래도 둘 다 같이 쓰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안전하지 않은데 안정될 수 없고, 안정 되지 않은데 안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두 말은 어느 한 쪽만 쓰더라도 서로 통합니다.
알고 보면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도
바로 이것(안전과 안정)을 보장받기 위해서입니다.
▶오래전 과거에 한때 우리나라에도, 안전에 대한 불안이 있어서
해외로 이민 가는 것을 동경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여건이 안 되어서 못 나갔지, 아마 여건이 되었다면 더 많이 이민 갔을 것입니다.
하지만 외국이라고 안전할까요?
그 동안 세계에서 가장 안전하다고 하는 나라는 미국이었습니다.
그러나 9.11 테러 이후에 미국은 가장 위험한 나라 중의 하나로 분류되었고,
그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미국은 지금도 전역에서 총기사고가 끊이질 않고 있습니다.
그 당시 얘길 들어보니, 어떤 한국인 부부는 한반도에서의 전쟁 위험을 피해
미국으로 이민 가서 슈퍼마켓을 했는데,
어느 날 남편이 강도의 총을 맞고 죽었답니다.
한국에 사는 것이 불안해서, 안전한 나라로 찾아갔는데,
오히려 거기가 더 위험한 곳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먼저 기억할 것은, ‘세상 어디에도 안전지대는 없다’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정말 이 세상에는,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안전지대는 없는 것일까요?
우리는 늘 불안하고 위험에 빠진 채로, 하루하루 전전긍긍하며 살아야 할까요?
또 있다면 어느 곳, 어떤 모습, 어떤 상황이 안전지대일까요?
답을 먼저 말씀 드리면,
안전지대는 분명히 존재하고, 우리는 그곳을 찾아 충분히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과 그것을 함께 찾아 나서고자 합니다.
◑본문 설명
▶칼빈과 루터가 발견한 안전지대
오늘 본문 시편 46편은, 말씀 자체만으로도 아름답고 강력하지만
교회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시편입니다.
칼빈 선생이 성경 원문을 처음으로 프랑스어로 번역하면서
제일 먼저 번역한 게 이 시편 46편이었고,
마르틴 루터 역시 이 46편을 읽다가 큰 영감을 받아
그 유명한 찬송가 “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만들었습니다.
두 사람 다 종교개혁자로서 당시 가톨릭의 시퍼런 서슬을 피해
하루하루 연명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당시 이들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은
그 어떤 세력이나 위험으로부터도 자신을 지켜주고 보호해 줄 안전지대였을 겁니다.
그런데 그들이 처음으로 발견한 안전지대는 다른 곳이 아니라,
오늘 본문 서두에 나온 것처럼.. 바로 하나님의 품 안이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말씀 드리지만 세상 어디에도 안전한 곳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안전지대입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들께 우리의 안전지대가 어디인지,
또 어떤 태도를 갖출 때인지 몇 가지를 말씀 드리려고 하는데,
첫 번째 안전지대는 두 말 할 것 없이 하나님의 품 안입니다.
▶1. 하나님이 나의 피난처(안전지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란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라. 아멘! 46:1~3
이 말씀을 곱씹어 보면 2, 3절은 보통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땅이 변한다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는 경우는, 흔히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또한 해일이 일어날 수는 있지만,
그게 산까지 덮을 만큼 거대하게 밀려오는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그래서 어찌 보면 오늘의 말씀은 좀 과장되지 않았나 싶을 겁니다.
하지만 오늘 이 시편이 쓰여진 배경을 알면
그 표현이 조금도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이 시편은 고라 자손의 시이고, 인도자를 따라 알라못에 맞춘 노래라고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알라못은 여성 성가대를 말합니다.)
주전 701년 앗수르와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완전 포위합니다.
당시 인구 8만 밖에 안 되는 도시를, 18만 5천명 대군이 뺑뺑 둘러 싼 것입니다.
그야말로 개미 한 마리도 빠져 나가지 못할 만큼, 철저히 포위한 것이지요.
(마치 영화 ‘킹덤 오브 헤븐’, 예루살렘이 엄청난 아랍군에 포위된 장면이 생각나는군요.)
유다의 운명은 이제 바람 앞에 등불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이런 경우에 유다 족속이 살아날 확률은 0.1%도 안 됩니다.
우리 역시 살다 보면 그럴 때가 있지요?
능력으로 보나 환경으로 보다 헤어 나올 방법이 전무全無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기적적으로 유다가 살아납니다.
어찌된 일인지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대군들이 모두 시체가 되어 있는 겁니다.
이 장면을 열왕기 기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진영에서 군사 18만 5천 명을 친지라.
아침에 일어나 보니 다 송장이 되었더라” 왕하19:35
하나님의 사자(천사)가, 하루 밤 사이에 적들을 쳐서 몰살시켰다는 겁니다.
이 사건을 두고 역사가인 헤로도투스는, 그 당시 페스트가
그들의 진영에 창궐하는 바람에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페스트로 쳤는지, 아니면 자연재해로 쳤는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적들이 모두 죽어서 다 시체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유다 족속들에겐 얼마나 엄청난 기적이었겠습니까?
바로 이 사건 후에, 고라자손에 의해 써진 찬양시가 시편 46편입니다.
그리고 가장 아름다운 여성찬양대 알라못에 의해서, 이 노래가 불려진 것이지요.
만약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나면
우리 역시 어떤 모양으로라도 하나님을 맘껏 찬양하지 않겠습니까?
이 일로 그들이 경험한 게 뭐였겠습니까?
이 기적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리는 일보다
오히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못하지 않은 기적이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그들에게는 정말 하나님만이 피난처이고, 힘이고,
환란 중의 안전지대라는 것을 노래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모르긴 해도 여러분들도 다들 크든 작든 이런 일들을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지금까지의 인생을 파노라마로 돌려 보세요.
나로서는 도저히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때에
주님이 친히 나타나셔서 해결해 주신 일이 있었을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 그 누구도 자기를 돌아보지 않을 때에
주님께서 그 큰 팔로 보호해 주셨던 때가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런 게 아니라면 아마 여러분은 지금 이 자리에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안전지대란 없습니다. 하나님의 품 밖에는요.
그곳은 포근합니다. 따뜻합니다. 그리고 모든 게 다 있습니다.
피난처고 힘이고 환란 중에 만날 큰 도움입니다.
그러므로 그 안전한 주님의 품 안으로 들어오셔서,
그곳에서 안식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을 기억하시고 언제나 하나님과 연결되는 끈을
든든히 붙잡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지금 내가 있는 곳이, 안전지대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실 때, 그렇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라. :11
그렇다면 둘째로, 우리의 안전지대는 어디일까요?
(첫 번째는, 하나님의 품안이었고요)
지금 내가 있는 그곳이 안전지대입니다.
‘즉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곳이 바로 안전지대’라는 겁니다. :11
이 말씀은 뜻이 깊은 말씀입니다.
서두에 말씀 드린 대로 제 아무리 견고하고 완벽한 장소를 마련해 두었더라도
인간이 만든 안전지대는 항상 ‘패닉 룸’이 될 수 있는 법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디에 있든 그곳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바로 그곳이 안전지대라는 것입니다.
바로 여러분이 발 딛고 서 있는 그곳!
거기가 여러분의 안전지대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야곱이 하란으로 가는 길에서 돌베개를 배고 자고 있었는데,
꿈에 하늘에 닿은 사닥다리가 보이고
거기를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봤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하나님이신 여호와가 나타나셔서
평생 자기와 함께 할 것을 약속하시지요.
그래서 일어나서 그곳에다 장차 하나님의 전을 세울 것을 서원하고는
계속 길을 떠납니다.
그 동안 야곱이 잊고 있었고, 모르고 있었던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자기 조상의 하나님이 자기와 늘 동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깨닫고 그 하나님을 믿게 되니까,
무슨 일이 일어나든 하나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 벧엘 사건 뒤로 야곱이 하란까지 가는 길은 한 달 가까이 걸렸는데,
그 짧지 않은 여행 가운데,
더 이상 힘 빠지고 공포에 젖은 야곱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즉 하나님이 동행 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니 발걸음도 가벼워졌던 겁니다.
제자들이 바다 저편으로 가는 배에, 갑자기 풍랑이 불어 닥쳤습니다.
어부 출신들이었지만, 이리 저리 손을 써 봐도,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황망한 중에도 예수님은 배 뒷전 에서 쿨쿨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결국 배가 좌초되기 직전까지 가게 되자, 제자들은 비로소 예수님을 깨웁니다.
그 짧은 시간에 제자들이 겪었던 공포와 두려움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속상하셨던 것은,
당신을 늦게 깨우거나, 자기를 최후수단으로 사용하신 것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왜 나와 함께 있는데도 두려워하느냐?’ 그겁니다.
자신이 함께 있는 한 그곳은 어디라도 안전한 것인데,
왜 그런 곳에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망각하고 부화뇌동(附和雷同)하느냐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우리와 임마누엘 하시는 한 그곳은 어디든 안전지대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고아처럼, 사생아처럼 버려두시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믿는 게,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시절 크리소스톰이라는 감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로마 황후 유독시아의 모함을 받고 귀양살이를 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유배지로 떠나면서 이 분이 남겼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좀 길지만 전문을 다 인용해 보겠습니다.
‘여러분! 저는 지금 예수의 이름으로 고난의 길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주님과 함께 가는 길인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죽음입니까?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내 생명인 걸요.
이 땅 어디에서 쫓겨나는 게 두렵겠습니까?
아닙니다. 땅과 그 가운데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요,
이 땅에서 쫓겨나면 하늘 땅이 나를 기다립니다.
나의 소유를 빼앗기는 게 두렵겠습니까?
내가 가져본 게 뭐가 있었을까요? 뺏겨봐야 모두 하늘에 쌓일 뿐입니다.
저들이 나를 산으로 몰아내면.. 나는 엘리야가 될 것입니다.
저들이 나를 구덩이에 던지면.. 나는 예레미야가 될 것입니다.
저들이 나를 바다로 던지면.. 요나가 될 것입니다.
저들이 나를 돌로 치면.. 스데반이 될 것이고,
저들이 나를 매로 치면.. 나는 사도 바울의 영광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크리소스톰에게 있었던 그 하나님이, 나에게도 이 시간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혹 안전지대에 있으면서도 불안해 떠는 모습이 나에게 있습니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안전한 곳을 찾아다니는 행동보다,
늘 동행하시는 주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더 이상 물리적 방법으로 안전지대를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늘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여러분이 서 계신 곳, 그곳이 진정한 안전지대입니다.
▶3. 마지막 안전지대는, 나의 경건한 삶에 달려있습니다.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존하신 이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그 성을 도우시리로다. :4~5
하나님이 계신 성소를 기쁘게 할 때, :4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니, 그 성이 흔들리지 않는 안전지대가 됩니다. :5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바로 우리들의 경건한 삶의 모습을 가리킵니다.
신약에도, 하나님이 우리 안에 성전 삼고 거하시는데,
우리가 우리 몸을 더럽히면, 성전(성소 holy place)을 더럽히는 것이요,
그럴 경우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신다고 했습니다. 고전6:19
바꾸어 말하면, 시냇물이 흐르듯이 기쁘게 찬양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본문에는 성소 holy place)을 기쁘게 하면,
당연히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매, 성이 요동치 않을 것입니다. :4~5
그렇습니다! 안전지대란,
사실은 우리들이 성령님과 동행하는 경건한 삶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여기서 성소는, 또한 교회로 볼 수도 있습니다.
즉 우리 각자의 경건한 삶은
스스로에게 안전지대가 될 뿐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를 굳건케 하고, 다른 이들(교회 공동체)에게까지
안전한 터를 제공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될 일은
새벽에 그 성을, 공동체를 도우시는 하나님을 끊임없이 찾고 구해야 합니다.
새벽이란 동트기 직전입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가장 깜깜할 때’라는 겁니다.
환란과 곤고와 두려움이 가장 깊어질 때, 그때 하나님이 도우시리라는 겁니다.
왜 하나님은 웬만할 때 도우시지,
꼭 막바지까지 가서야 도우시냐고, 푸념하실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문제 해결만이 아니라,
그 일을 통해서, 우리가 더 기도하고, 더 성숙해지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밤이 다 지나고, 새벽에 비로소 도우십니다.
얍복강의 야곱처럼 말입니다.
그저께 오후, 한 자매의 전화를 받고 정말 기분이 좋았습니다.
지난 주일 예배가 끝난 후에, 다음 날 국립음대에 시험을 치게 됐다고
기도부탁을 해서.. 간절한 마음으로 같이 기도를 드렸었습니다.
그리고는 수요일이 돼도 연락이 없길래, 안 됐나 했던 차에 뒤늦게 전화가 온 겁니다.
이제는 국립음대든 콘설바토리움(음악대학원)이든, 한국 학생이 너무 많아서
교수들 사이에서는 좋지 않은 기류가 흐르고 있다고 합니다.
더 이상 한국 학생을 뽑지 말자는 약속이 암묵적으로 시행되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 얼마나 어려웠겠어요?
그렇지 않아도 지원자가 무척 많았다는데요.
그런데 5명을 뽑는데, 자매가 그만 6등을 했답니다.
그래서 떨어졌답니다.
얼마나 가슴이 아팠겠습니까?
아마도 본인이든, 부모님이든 얘기를 안 해서 그렇지, 무척 낙담했을 겁니다.
그런데 금요일 오후에 학교 측에서 연락이 왔더래요.
합격자 중 한 명이 등록을 포기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차점자인 자매가 합격자가 된 겁니다.
하나님은 막판에 (새벽에) 응답하시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것입니다.
이 일을 두고 곰곰이 생각해 봤습니다.
물론 이 일은 우리 모두에게도 종종 일어나는 일입니다.
거의 포기했을 즈음에, 갑자기 우리가 바랬던 일이 빛처럼 닥치지요.
의미가 뭐겠습니까?
신앙적인 관점으로 보면, 끝까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말라는 겁니다.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
우리가 기도할 때 그 기도를 결코 허투루 듣지 않으시는 하나님!
가장 힘든 순간에 주셔서 기쁨을 배가시켜 주시고,
당신에 대한 신앙을 다시금 회복시키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절대 의지하라는 뜻이 아니겠어요?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