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관적 미래를 위하여 눅17:20 출처보기, 편집
◑20세기 초, 서구 제국주의가 한창일 때, 지나친 기독교 낙관주의가 팽배했습니다.
▶1910 에딘버러 국제선교대회 World Missionary Conference
지금부터 약 90년 전, (2001년경 설교임)
세계 기독교 역사에 중요한, 획기적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때가 1910년입니다.
(2010년에 에딘버러 선교대회 1백주년 기념행사가 세계적으로 있었음)
영국의 에딘버러에 전 세계의 교회 지도자들이 몰려들었고,
전 세계로 선교하러 나갔던 선교사/선교단체 대표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근대 역사상 세계최초의 <세계선교대회>가 열린 것입니다.
그 대회의 주제는 뭐냐 하면,
이 세계를 복음화하는데, 모두가 힘을 합치자는 것이었습니다.
1910년 에딘버러 선교대회,
이것은 근대 에큐메니컬 운동을 태동시킨 중요한 모임이었습니다.
‘온 세계선교를 위해서, 온 세계교회가 다함께 힘을 합치자’는 취지였습니다.
이 대회에서 주제강연을 했던 사람은 YMCA 창설자 존 모트 John R. Mott입니다.
이 사람의 강연 내용은 지금도 '고전'처럼 남아 있습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런 말입니다.
"여기에 모인 여러분들이 살아 있는 동안 전세계의 복음화는 가능합니다.
함께 일어나십시다. 여러분이 죽기 전에 이 세계 전체의 복음화는 가능합니다.
이제 남은 것은 중국입니다.
중국 대륙의 선교만 끝나면 전 세계는 완전 복음화됩니다.
지금 중국 선교가 불길처럼 일어나고 있으니, 중국은 곧 기독교적인 나라가 될 것입니다."
이때가 1910년이었습니다. 우리나라는 1910년이면 일본에 합방된 상태였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은 누구도 에딘버러에 쉽게 갈 수 없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윤치호 선생이 한국대표로 참석해서, '조선기독교의 선교현황과 문제점'에 대해 연설했습니다.
선교사 두 사람도 참석했는데, 언더우드 목사, 아펜젤러 목사였습니다.
하여간 1910년 에딘버러 대회는 전세계를 복음화하자고 외쳤습니다.
그것도 거기 모인 사람들이 살아있는 동안에(우리 세대에) 말입니다.
그런데 존 모트의 연설을,
조금 다른 각도로 보면, 이렇습니다.
▶서구의 제국/과학/문명의 힘을 너무 과신했던 것 같습니다.
1910년이면 서유럽에서는 모든 것이 잘 되어 갈 때입니다.
낙관주의가 창궐하던 시대입니다.
산업혁명의 여파로 모든 산업이 발전했습니다.
진보주의 사관이 판을 치고 있었습니다.
‘인류역사에는 진보만 있을 뿐 후퇴는 없다. 잘 되어 간다’고 확신했습니다.
교회들도 "우리가 노력한 결과, 이 세상은 하늘나라를 닮아가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소위 후천년설 입장)
당시에 제일 많이 외운 성서 구절과 기도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옵소서."였습니다.
이 기도가 제일 많이 드린 기도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로 비관적이었습니다.
1910년에 에딘버러의 세계선교대회는
5년 후에 다시 모여서 "세계선교협의회"라는 기구를 만들기를 결의하고 헤어졌습니다.
그런데 5년이 되기 전, 4년이 되었을 때, 1914년에,
바로 낙관주의와 진보사관과 인간의 이성과 능력에 대한 믿음이 최고조에 달했던 그 시기에,
유럽은 철퇴를 맞고 맙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다른 곳이 아닌, 바로 인간의 낙관적 진보사관이 지배하던
유럽 한복판에서 터졌습니다. 오스트리아에서 터진 전쟁이 유럽 대륙을 다 휘저었습니다.
이것은 인류의 정신사에 크나큰 충격이었습니다.
"우리가 죽기 전에" 이 세상을 몽땅 구원할 줄 알았는데,
처참한 전쟁 하나로 그 모든 꿈이 산산조각이 난 것입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곧이어 제2차세계대전까지 일어났습니다.
인류역사상 가장 비극적이고, 가장 광범위하며, 가장 많은 살상이 이루어진 전쟁이
공교롭게도 ‘가장 낙관적이던 세계 분위기’속에서 일어났던 것입니다.
5년 전 1910년에, 영국 에딘버러에서 소리 높여 외쳤던 꿈,
‘우리가 죽기 전에 세계복음화 이룰 수 있다."는 꿈은
불과 4년 만에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4년 동안 이루어진 세계의 급변입니다.
▶낙관주의를 가졌던 이유 - 서구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
물론 에딘버러에 모였던 사람들은 생각은 일리가 있어 보였습니다.
종교개혁, 문예부흥, 산업혁명, 시민혁명(민주주의 발전) 등의 여파로,
17, 18, 19세기의 서구는 괄목할만한 진보와 발전을 이루게 됩니다.
그래서 동양을 비롯한 세계 곳곳을 식민지화 할만큼
힘을 갖게 되었습니다.
일례로, 1840~42년까지 영국은 중국과 아편전쟁을 벌였습니다.
영국은 인도를 식민지로 만들고서, 인도에서 나오는 목화와 아편을 중국에 수출했고,
거기서 얻은 이익금을 다시 인도의 식민지 통치자금으로 썼습니다.
중국, 당시 청나라는 반발했습니다. 아편 판매를 금지시켰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청나라와 영국의 전쟁이 벌어지고,
그 결과 청나라는 졌습니다.
이렇게 되면서 중국은 수세에 몰리다가,
우리가 아는 대로 홍콩은 영국 손에, 마카오는 포르투갈 손에 빼앗깁니다.
이때가 1910년 에딘버러 총회를 하기 10여 년 전의 일입니다.
서구 사람들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세계는 바야흐로 기독교 문명(서구 사회)이 지배할 때가 되었다.
이제 곧 복음화를 끝내자. 곧 끝날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때 1차세계대전이 발생한 것입니다.
▶기독교는 있었지만, 껍데기뿐이었고, 속 알맹이가 없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하드웨어는 있었는데, 소프트웨어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전 세계가, 발전된 과학기술로 인한 근대식 군대와 무기를 앞세워
다 정복되는 줄 알았습니다.
전 세계에 식민지가 날로 확장되어 갔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정신문명, 기독교 복음의 본질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식민지 확장과 아울러 기독교 신앙도 널리 전파되고,
교회 건물도 예쁘게 지었겠지만,
서구인들의 마음속은, 타락한 아담의 죄성이 대세였던 것입니다.
복음의 겉껍질은 있었지만, 그 속알맹이는 대체로 부족했습니다.
극단적인 예이긴 하지만, 독일이 십자가 붙이고, 전쟁을 수행한 것입니다.
친위대는 철십자 훈장을 달고 다녔고,
독일 공군기는 몸통에 십자가 문장을 선명하게 그려 넣고서 전투에 임했습니다.
그들의 십자가는, 껍데기뿐인 십자가였습니다. 알맹이가 없었습니다.
물론 그 속에 알맹이가 있었지만, 소수자였고, 대세는.. 껍데기뿐이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집니다. 기대는 낙관적인데, 현실은 비관적입니다.
제/설교자가 2주 전에 에딘버러에 갔을 때,
1910년 선교대회가 열렸던 그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거기서 90년 전에 세계 교회의 대표들이 모여서 엄청난 꿈을 꾸었던,
낙관적 세계관이 창궐하던 그 당시를 다시 한 번 호흡해 보았습니다.
"중국 선교가 끝나면, 세계의 복음화는 끝날 것이다!"
그러나 그 뒤로 끔직한 세계대전이 두 번이나 발생했고,
지금도 테러를 응징한다는 명분으로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2001년 상황)
그 교회 문을 나오면서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영국의 전형적인 날씨답게 하늘은 잿빛이고, 비는 죽죽 내리고 있었습니다.
에딘버러의 고색창연한 도심(都心)은 너무나 어두웠습니다.
어둡고 침체되고 비에 젖은 그곳에서, 저는 여러 상념에 잠겼습니다.
‘또다시 전쟁인가? 이곳에서 부풀었던 그 꿈은 어디 갔나?’하고 말입니다.
1989년에, 70년 만에, 냉전이 종식되었습니다.
동구권과 소련이 해체된 것입니다.
이제 온 세계 사람들은 ‘팍스 아메리카나’를 노래했습니다.
아무도, 누구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평화 세상이 온 것입니다.
그런데 불과 10여년 만에, 2001년에 911이 일어나서,
뒤이은 ‘대테러전쟁, 이라크 전쟁’으로, 세상은 다시 위험천지로 변했습니다.
그래서 비행기 탈 때, 신발도 벗고, 허리띠까지 풀어서 검사하는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참고로, 격랑 가운데,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전쟁 가운데, 사람들이 각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세상의 위기가 닥칠 때,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게 되고,
또한 동시에 자신의 인생과 영혼에 대해, 깊은 성찰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기독교 사상가 C. S. 루이스는
‘전쟁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는,
방종과 죄악가운데 죽어갈 수많은 젊은이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고,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는 계기가 된다.
이것이 전쟁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다’ 라는 식으로 말했습니다.
‘젊은이들이 평화로운 세상에서, 제 멋대로 편하게 방종하며 살다가.. 지옥에 가느니,
차라리 끔찍한 일을 겪더라도, 천국에 가는 것이 더 유익하지 않겠느냐?..’
뭐 그런 식의 논리입니다. 성경에도 나오잖아요?
‘온전한 몸으로 지옥 가느니, 차라리 불구자로 천국 가는 게 더 낫다고요’
▶이런 양차대전의 혼란의 와중에서, 기독교 신앙도 점점 실제적으로 변했습니다.
그 이전에 서구 기독교는 ‘사변적/철학적 기독교’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존재하시고, 사람들이 그 분을 믿지만,
내 현실과는 멀리 동떨어진, 그런 사변적, 철학적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사람들은 ‘그 하나님이 지금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하면서
(비꼬는 것이 아니라, 건설적인 질문임. 소위 실존주의)
하나님을 더 깊이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 하나님 앞에, 내가 벌거벗고 서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즉, 하나님에 대해서, 또한 자기 자신에 대해서,
보다 진지한 질문과 신앙을 갖기 시작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겉은 낙관적이지만, 속은 비관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내 인생에 대해,
진지한 질문을 던지지 않으면,
껍데기는 있는데, 속알맹이는 비게 됩니다.
하드웨어는 있는데, 소프트웨어가 없게 됩니다.
뭐가 되는 것 같은데, 실제로는 하나도 되지 않습니다.
낙관적으로 잘 되어가는 것 같은데, 실제로 뚜껑을 열고 보니 비관적입니다.
1차세계대전 직전, 1910년 에딘버러 대회 상황이, 오늘날에도 그대로 재현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이 지금 세계화니, 컴퓨터니, 정보전쟁이니 하면서
물질문명의 최첨단을 달리고 있습니다만,
그 가운데 내가 편안하게 살기는커녕, 사람들은 점점 더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지금 안전한 장소는 어디에 있습니까?
이 세상에 없다면,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그런 곳이 있습니까?
하나님께 안전과 평안이 있다고 하는데, 정말 그것을 느끼고 사십니까?
우리 공동체는, 성도들에게, 정말 그 안전과 평안을 전달해 주고 있습니까?
소득이 5만불이 되면.. 안전해 지겠습니까?
북한 핵문제가 해결된다고.. 우리가 평안해 지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안전해지고, 평안해지리라고 낙관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맞습니다. 겉으론 그렇게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절대 세상을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세상의 안전과 평안은 오직 ‘임마누엘’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임재하셔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에 있습니다.
임마누엘!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먼데 계신, 공허한 철학적/사변적 하나님이 아니고,
오늘 내 현장에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입니다.
(여기에 대해선, 다음 편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고요... )
▶마치는 말/ 낙관적 미래를 원한다면?
복음화를 외치는데, 전세계를 복음화하자고 외치는데, 복음이 없을 수 있습니다.
한국 땅이 교회로 뒤덮인 듯한데, 진정한 교회가 없을 수 있습니다.
신앙을 소리 높여 말하는데, ‘임마누엘 하나님’이 없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1910년 존 모트가 역설했던 그 낙관론을, 우리 현실에서 곱씹어보아야 합니다.
‘지금보다 예산이 10배로 많아지면, 국내/세계 복음화가 이루어지겠습니까?’
‘지금보다 소득이 10배로 많아지면, 하나님 나라가 내게/내 가정에/세상에 임하겠습니까?’
그런 것도 필요하지만, 하드웨어로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 것만 보면서, 미래를 낙관적으로 기대한다면.. 큰 코 다치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내 인생의/가정의/사회의/세상의 낙관적 미래를 위해서는
하드웨어가 필요하지만, 적어도 교회까지도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 내 인생의/가정의/사회의/세상의 낙관적 미래는
소프트웨어.. 복음의 본질, 속알맹이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만 놓고 보더라도, 사도바울도 마찬가지고,
복음의 하드웨어를 전파하신 것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소프트웨어만을 전파하셨습니다. (하드웨어적 관점으로는 실패한 사역자입니다.)
오늘날 내 인생의/가정의/사회의/세상의 낙관적 미래는
복음의 소프트웨어에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그걸 내 삶으로 살아내는데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삶을, 10년, 20년, 30년, 내가 직접 살아내는데 있습니다...
지금 서구의 크고 웅장한 교회 빌딩들을 보십시오.
오늘 우리는 존 모트처럼, 순진하게 미래를 낙관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소프트웨어가 빠진(부족한), 하드웨어의 힘을.. 너무 과신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 해외 선교
'분류 없음 > 2000~2001 그 이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집 과 잠 (0) | 2011.04.06 |
---|---|
화평케 하는 자의 복 2797 (0) | 2010.12.17 |
왜 40년인가? (0) | 2010.10.29 |
타락, 징계, 회복의 아골 골짜기 2580 (0) | 2010.08.02 |
복음의 소망을 가집시다 2576 (0) | 2010.07.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