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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평케 하는 자의 복 2797

LNCK 2010. 12. 17. 12:41

 

◈화평케 하는 자의 복                     마5:9                    99.05.16. 설교스크랩, 출처보기 


 

이러한 재미있는 얘기가 있습니다.

어떤 날, 숲속에 토끼 한 마리가 오솔길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늑대가 나타나서 길을 가로막았습니다. 깜짝 놀란 토끼는 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겁을 먹은 토끼가, 벌벌 떨면서 제발 살려달라고 부탁을 드렸습니다.

이 늑대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문제를 하나 낼 텐데, 이 문제를 맞추면 살려주고, 못 맞추면 죽이겠다."

그리고 문제를 냈는데, "내가 네게 어떻게 할 거 같으냐?"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토끼가 하는 말이, "잡아먹을 거 같습니다."

자 이제 늑대는 소위 말하는 논리적 모순에 빠졌습니다.

잡아먹자니 자기가 한 말이 있지 않습니까? ‘문제를 맞추면 살려준다고’


반대로 ‘너는 틀렸다. 나는 너를 잡아먹지 않을 것이다!’

자기가 이렇게 말 해놓고, 토끼를 냉큼 잡아먹을 수는 없습니다.


어쨌든 일단 이 말싸움에서는 토끼가 이겼습니다.

토끼는 안심을 하고 나무에서 내려왔습니다. 의기양양하게 걸어가는데

늑대가 뒤에서 토끼의 목을 물었습니다.


"거~ 말이 틀리지 않습니까? 분명히 내가 알아 맞췄는데요."

그러니깐 그때 늑대가 하는 말이 "널 잡아먹고 안 잡아먹고는 내 마음대로지."

이렇게 대답을 하더랍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철학적 이치를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는 계약의 논리입니다, 혹은 진실의 논리가 있고.

또 하나는 힘의 논리입니다. 강자의 논리입니다.


뭐 복잡한 말로 설명하지만.. 세상은 결국 대부분 힘의 논리입니다.

강자의 말이 언제나 옳은 거예요.

그러나 바로 이것 때문에.. 세상이 어수선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 강자의 논리에 의해,

세상이 잠시 평화로울 것 같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참 평화가 아니란 말입니다.

 

 

아메리칸 인디안을 전문적으로 연구해서 유명한 에반 코넬 박사가

<Son of the Morning Star> 라는 책을 썼는데요,

이 책에는 아메리칸 인디언에 대해서

뒤에 신대륙을 찾아온 소위 개척자들이 어떻게 대했는가에 대해서 연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두 모델을 설명하는데, 캐나다 개척자와 미국 개척자입니다.


캐나다 사람들은 아메리칸 인디언, 그 토착민들에게 어떻게 했느냐 하면,

"어쨌든 인디언을 정직하게 대하고,

평화를 염원하는 우리의 뜻을 저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자."

하는 것이 정책의 기본 철학입니다.


그런데 미국사람들은 어떻게 대했느냐?

"너희 태도에 따라 우리의 태도는 결정된다. 너희가 평화를 원하면 나도 평화할 것이고,

너희가 싸우자고 하면 끝까지 싸울 것이다. 너희의 태도대로 내 태도가 정해진다."

이게 미국의 정책입니다 지금까지도..


알고 보면 이것은 힘의 논리입니다.

힘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아메리칸 인디언은 조용합니다.

‘이것이 참 평화입니까?’ 하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적 평화 개념 - 샬롬

오늘 성경말씀에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마5:9

'화평'이라고 하는 말은 헬라어엔 '에이레네', 히브리말어로 '샬롬'입니다.

샬롬이라고 하는 이 개념은 히브리적인 사상이며

또 성경이 말씀하는 평화의 기본 개념입니다.


이것은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요 그 다음에는 나 자신의 문제입니다.

영적 문제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의 화평, 그 다음에 내 속에 있는 영적 상태

거기에 진정한 평화, 나 자신과의 관계에서의 평화,


그 다음에 이것이 그 결과로 이어지면서 이웃과의 관계,

가정과의 관계, 경제와의 관계,

심지어는 정치적인 문제까지 정치적인 번영까지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정의, 자유, 평등, 번영 모든 것을 다 합쳐서

그런데 뿌리는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내 영적인 상태' 이것이 기본입니다.

이러한 화평을 샬롬이라고 말합니다.


요약하면, 사람과 평화하기 이전에 ‘하나님과 먼저 평화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와 내 공동체의 평화는.. 하나님이 나서서 해결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세상적 평화개념 - 힘의 논리에 의한 평화

그런데 또 하나의 평화의 개념은

로마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팍스 로마나’가 있습니다.

이것은 힘의 원리입니다. 전쟁이 없는 상태, 그거면 평화입니다.

힘으로 전쟁억지력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게 진정한 평화일 수 있을까요? (진정한 평화는 하나님과 관계에 있습니다.)


미국의 뉴멕시코 주에, 원자탄을 개발한  '로스앨러모스' 연구소가 있습니다.

거기에 '브래드 버리'라는 과학박물관이 있고

그 정문에 이러한 큰 글이 쓰여져 있습니다.


원자탄이 터지는 큰 버섯 모양의 그림을 그려놓고, 이렇게 거기 명기됩니다.

"만약에 평화가 강대국간의 전면전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라면,

1945년 이후의 이 세상에는 평화가 있다. 이 평화는 원자탄이 주는 평화다."


그렇습니다. 지금 원자력이라고 하는 엄청난 무기를 만들어 놓고

강대국은 서로 싸울 수가 없습니다. 아직까지 세계에 전면전은 없습니다.

왜요? 일어났다 하면 다 죽으니까요. 결국은 원자탄이 주는 평화입니다.


이제 물어봅시다. 그래서 1945년 이후에 세계의 평화가 있습니까?

큰 전면전은 없어도,

세계 도처에 그 전보다도 더 많은 전쟁이 수 없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전쟁에 죽고 기아에 죽고 고통에서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게 진정한 평화입니까?


힘을 가지지 말자, 힘을 가질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자신을 지킬 수 있는 힘을 가져야죠.

그러나 힘의 논리로.. 진정한 평화를 결코 이룰 수 없다는 점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자신을 지킬 수 있는 힘의 논리와 아울러,

하나님과의 평화, 또한 여러 가지 긴장 해소의 노력이 동시에 필요하지 않을까요?) 



여러분 북한은 언제 가도 조용합니다. 데모도 없고 파업도 없습니다. 

그래서 평화입니까?

이러한 힘의 논리에 의한 평화, 이것을 평화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자유와 정의가 없는 곳에,

영적 평화가 없는 곳에.. 그것을 평화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지금 고민하고 있는 문제입니다.

지금 (1999년 상황) 한반도가 조용한 것 같습니다. 그래 전쟁이 없다고 평화입니까?



우리는 때때로 승리 지향적 평화(힘의 평화)를 생각합니다.

‘전쟁후의 고요함’

이긴 자는 이겼으니 조용하고, 진 자는 죽었으니 말이 없습니다.

이것이 조용함입니까?


곽선희 목사님 는 6.25전쟁 때 최일선에서 얼마동안 싸워보았습니다.

그 전쟁 때 보면, 포탄이 터지고 기관총 소리가 나고 할 때,

한참 교전 중에는 어렵습니다만, 그러나 어쩌면 그런 대로 견딜만 합니다.


그런데 제일 불안한 때가 언제인가 하니,

전쟁이 멎고 몇 시간동안, 어떤 때는 며칠 동안 조용할 때,

이 조용할 때.. 이게 불안합니다.


지금 안에서는 계속 뭔가 준비되고 있거든요.

뭔가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어떤 모양으로 어디서 터지려나

그때에 불안함이 더 큽니다. 조용하다고 평화가 아닙니다.


힘의 논리 안에 묻혀서 말없는 노예적 평화, 이것을 평화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참 평화의 개념이 뭡니까?


내가 이겼다고 평화가 아닙니다.

내가 이기는 순간 다른 사람은 졌으니까. 내가 빼앗았다고 좋아할 것이 못됩니다.

빼앗긴 자의 눈물이 저기에 있으니까 말입니다.


내가 성공했다고 기뻐할 것이 못됩니다.

많은 사람의 실패와, 어려움과 억울함이 저 앞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고로 생각해야합니다. Final triumph 마지막 승리라는 것은 화평(평화)일 뿐이요.

오직 화평인데, 문제는 나만의 승리여서는 안 됩니다.

Win-Lose는 절대로 승리일 수가 없어요. Win-Win 이어야 합니다.


내가 이기고 너도 이기고, 나도 기쁘고 너도 기쁘고.

이러한 평화만이 참 평화라 하는 말씀이올시다.


심리학적으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 성공이라고 하는 것은 3P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①첫째는 Patience. 얼마나 참느냐입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완전하게 참아낼 수 있느냐.

시기, 질투, 경쟁심. 그 많은 비난 잘 참고 끝까지 견디는 것.

그 인내. 거기에 승부가 걸려있습니다.


②또 하나는 Practice 입니다. 행동으로 옮길 수 있어야 합니다.

생각만 하고 말만하고 그래선 안 됩니다.

구체화하고 행동으로 실천해 나갈 수 있을 때, 밀고 나가면서 승리가 오는 것이지요.

책상에 앉아 가지고 승리가 오는 것은 아니에요.

실천, 구체화하는 능력이 있어야 됩니다.


③또 하나는 Peace입니다. 윈윈입니다. 참 평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나도 평안하고 주위사람도 평안하고 모두가 평안해야 합니다.

그것이 승리올시다.

그 누구하나의 원망을 듣는 승리.. 그건 진정한 평안/승리일 수 없습니다.

 

   

로마서12:18절에,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할 수 있는 대로 최선을 다해서, 평화를 도모할 것이요.


히브리 12:14절에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참 평화가 없이는 주를 볼 수가 없어요. 내가 아무리 성공했다고 떠들어도

그것 가지고는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어요.

모두가 평화할 수 있을 때만이 우리의 기도가 응답될 수 있어요.


특별히 예수님께서 이 문제에 결론을 내립니다.

여러분 잘 아는 마5:24절에 보면,

‘너희가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누가 너를 원망하는 일이 생각나거든

제물을 제단 앞에 두고 돌아가서 - 그 사람이 누구든 무슨 일로 걸렸던 상관없어요.

- 무조건 평화하고, 속히 화해하고 그리고 와서 제물을 드리라.’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하고,

하나님 앞에 찬송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마는

그 누군가가 여러분을 원망하고 있는 동안,

여러분을 생각하며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는 동안은

여러분의 기도는 응답될 수가 없어요.

되는 일이 없어요. 절대로 복될 수가 없어요.


평화가 우선이요. 화평이 먼저 있고야

비로소 모든 일에 축복이 되고, 형통함이 임한다.. 하는 말씀입니다.


또한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주십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그랬습니다.

'에이레네 포에오에' 라고 하는 말은, '포에오에' 라고 하는 말은 실천한다는 뜻입니다.

원문대로는 평화를 실천하는 사람, 평화를 행하는 사람 그런 뜻입니다.


그래 이걸 영어로 의역할 때에는 'Peace Maker' 이렇게 번역합니다마는

어째든 평화를 사랑하는 것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화평을 기다리는 것만 가지고도 안 돼요.

문제는 화평을 실천해야 돼요.


적극적으로 내가 화평을 만들어야 되요. 거기에 복이 있다는 말입니다.

내 마음속에 먼저 화평이 있거든요. 내 이웃과의 관계에 참 화평이 있어야

비로소 복된 자가 될 수 있다 하는 말입니다.


우리 사회는 서로 불화하고 있습니다. (1999년 설교)

이제 화평케 하는 자, 피스메이커가 필요합니다. 이런 중보적 역할이 필요합니다.

극과 극이 만나는데, 도저히 화해할 수가 없는데

내가 거기에서 화목둥이가 되어야 돼요.

나로 인해서 극과 극을 만나게 하고 화평을 만들어야 돼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화평케 하는 자는 적고, 트러블메이커(Trouble Maker)가 많아요.

평화로운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트러블메이커가 많아 문제죠.


그런데 화평케 한다는 말, 그런 화평케 하는 피스메이커가 되려면

먼저는 자기 자신이 아주 겸손해야 되고, 사심이 없어야 되고, 마음을 비워야 됩니다.


내 욕심을 챙기고 내게 돌아오는 이권을 생각하고 있는 동안은

절대로 화평케 하는 자가 될 수가 없습니다. 완전히 내 욕심은 버려야만 됩니다.


그 뿐 아니라 좀 더 생각하면은 온유한 가운데 있어야 됩니다. 온유 겸손했어요.

성경에 ‘유순한 대답은 노를 쉬게 한다’고 말합니다.

저쪽에서는 펄펄 뛰지마는 나는 온유합니다. 온유한 자만이 화평케 할 수 있어요.


또 하나는 긴 인내가 필요합니다. 서둘러 가지고는 안 됩니다.

조급한 자는 화평케 하는 자가 될 수가 없어요.

때때로 우리는 급하게 화평을 만들려고 이리 만나고 저리 만나고 뛰어다닙니다마는

일은 점점 더 커집니다. 기다리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관용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넓은 사랑이 있어야 하고,

때로 값을 지불해야 될 때는 그 값을 내가 지불해야 됩니다.

내 편에서 지불할 때만이 화평은 이루어질 수가 있습니다.


▶평화를 실천한 피스메이커들

①출애굽기 32장에 모세의 화평케 하는 역사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 범죄했습니다. 지금 금송아지 우상을 섬기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크게 진노하셨습니다. 이 백성을 다 진멸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정히 그러시려거든 내 생명을 먼저 취해 주십시오.

나는 이 백성 망하는 것을 보면서 살고 싶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기를 "너는, 너와 네 가정은 내가 구원하겠다."고 말합니다마는

"아닙니다. 내 생명을 바칩니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그 민족을 하나님의 진노의 손에서 구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②다윗은 사무엘하 24장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고난은 내가 당하겠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 후로 민족에게 향하는 큰 환난을 면하게 하는 것을 볼 수 있고요.


③아브라함은 소돔 고모라와 그 롯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중보의 기도를 드립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아브라함을 보아서 그 조카 롯을 구원했다."고

이렇게 화평케 하는 자의 중보적 역할이 꼭 필요합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쳐 줍니다.

"그러므로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마5:9


④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화평을 위해 오셨고 피스메이커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에베소 2:13절 이하에 보면, 주께서 십자가를 지시므로 원수된 관계를 화해케 했습니다.


주님 자신의 역할이 그것이었습니다.

화평케하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다고 했는데,

하나님의 아들 자신이, 먼저 화목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⑤그래서 고린도후서 5장에 보면, ‘화평케 하는 직책을 너희에게 주었다.’

우리 모두가 화목케 하는 직책을 맡았습니다.

나 자신이 화목할 뿐만 아니라 우리는 모든 사람 사이에 서서

불화한 관계, 원수된 관계, 서로 시기 질투하는 세상에 나가서

나 하나의 사랑과 희생과 온유와 인내로 인해서 화평을 이루는

거룩한 역사를 이루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지혜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의 희생의 재물이요

하나의 행동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런 재미있는 얘기가 있어요. 중국의 옛날에 두 나라가 서로 싸우는데,

가만히 보니까 더 싸우다간 두 나라가 다 망하게 생겼어요.

이것을 알고 지혜로운 사람 하나가 중간에 나타나 가지고

이쪽 나라에 가서 왕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비유해 말하면 당신 네는 만월 같고 저쪽 나라는 초생달 같은데

뭐 큰 나라가 요 쪼그만 나라를 뭘 치려고 하십니까?"


그러니까 그 왕이 기분이 좋아 가지고 "아 그러면 그만 두지 뭐 까짓거."

그래 기분이 좋았어요. 그리고 전쟁을 그만 두게 되는데,


이쪽 나라에 오니까 이쪽 나라 사람들이 하는 말이,

"아니 그 나라는 만월이고 우리는 초생달이라고?

이 사람 우리를 이렇게 무시하누만"


그러니깐 "그게 무슨 말입니까? 만월은 이제부터 기울 것이고

초생달은 이제부터 커질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깐 당신을 절대로 무시한 게 아닙니다."


"오, 그거 괜찮구먼!" 그래서 안 싸웠대요.


글쎄올시다. 우리의 말 한마디로 인해서

이렇게 쉽게 화해가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실제 일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참으로 많은 희생을 요구합니다.


어떤 부부가 사이가 너무 나빠져서 오래 동안 티격태격 싸우다가

결국은 이혼을 결정을 합니다. 이혼하기로 하고 그 다음에 물건을 나누게 됩니다.

이것은 남편의 옷이요 이것은 아내의 옷이요,

이것은 남편의 구두요 이것 아내의 구두...


다 살림을 둘로 나누는데 마지막에 딱 남은 게 하나 있어요.

그것은 몇 년 전에 죽은 아들이 있는데, 불행하게 죽었는데

이 죽은 아들의 것을 다 없앴는 줄 알았는데

여기에 아들의 일기장이 하나 있어요.


아버지는 ‘이건 내가 가져가겠다’고 그러니까

엄마는 "아니요, 그건 내 아들이니까 내가 갖겠습니다."

서로 다투다가 그 일기장을 열어 보았습니다.


일기장에는 "아빠 사랑해요, 엄마 사랑해요. 아빠, 엄마 싸우지 마세요."


이혼하지 말아 달라고 하는 간절한 얘기들이 거기 써 있어요.

그리고 이 아이는 죽었어요.


이 일기장을 보다가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이 아이의 소원을 이루어줍시다."

다시 화해했다는 얘기가 아닙니까?


피스메이커! 나로 인해서 동서가 합치고, 남북이 합치고,

나 하나의 희생으로 인하여 서로가 하나되는 역사가 있을 때

바로 거기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고

바로 그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게 될 것입니다.              ▣ 크리스천 인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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