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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락, 징계, 회복의 아골 골짜기 2580

LNCK 2010. 8. 2. 21:17

◈타락, 징계, 회복의 아골 골짜기               호2:1~23              -설교스크랩, 출처-



아골 골짜기는,

여호수아 시대에 아간이 범죄해서 돌에 맞아 죽은 저주의 골짜기입니다.

그런데 호세아서 2장에서,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태를 상징한 모습이 바로 아골 골짜기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아골 골짜기에서 일어났던 비슷한 사건이, 지금 재현되고 있다고 예언합니다.

그때는 금이나 은이나 아름다운 외투를 보고 탐냈지마는,

거의 비슷한 이유로, 웃시아, 여로보암2세 시대에,

아간으로 비유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타락의 골짜기를 방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은, 이 타락의 아골 골짜기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의 골짜기로 변한다는 것이, 호세아서 2장의 메시지입니다.

“거기서 비로소 저의 포도원을 저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라” 2:15

호2장에 나타나는 모든 이야기를, 한 마디로 '아골 골짜기'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1. 타락의 아골 골짜기


▶유목문화에서 농경문화로 변화되는 과정에서, 농신農神 바알을 숭배하다.  

이스라엘이 왜 타락했는가요? 그 시대의 타락의 원인은 어디에 있었는가요?

본문 호세아 2장 처음 부분에, 계속해서 나오는 단어가 무엇입니까?

2절에 “음란, 음행”, 4절에도 “음란” 5절에도 “행음”이 나옵니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육체적/도덕적인 음란, 범죄라기보다는,

   ‘영적인 음란함/우상숭배’로 보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나 종종 ‘영적인 음란’과 ‘육체적 음란’은 상호연관성이 있다고 봅니다.


   영적으로 순결한 사람은, 육체적 음란도 피하며,

   영적으로 우상숭배하는 사람은, 육체적 음란도 범하기 쉽다는 것이죠.

   실제로 바알종교 등 고대근동의 대부분 우상숭배는

   육체적 음란과 깊은 연관성이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집니다.

   진실로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성도는,

   육체적 음란도 피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음란도 사랑한다는 것은.. 말이 성립 안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본래 농사짓는 민족이 아닙니다. 유목 민족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 농사를 지을 필요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농사를 지을 줄 몰라요. 누구한테 농사를 배웠을까요?

가나안 원주민들에게 농사를 배웠을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가나안 원주민들을 가만히 보니까

그들은 농사만 짓는 것이 아니라, 농사가 잘 되게 해 달라고

바알 신에게 제사를 드리고, 바알 신에게 기도를 하고..

바알 신이 본래 농신農神 이예요. 농사를 잘되게 하는 풍요의 신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민족들이 우상숭배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에

우상숭배에 빠지게 된 원인인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이스라엘이 타락하기 시작합니다...


▶1. 타락의 첫째 단계 - 축복의 근원을 혼동 (2:5절)


“저희의 어미는 행음하였고, 저희를 배었던 자가 부끄러운 일을 행하였나니,

대저 저가 이르기를, 나는 나를 연애하는 자들을 따르리니

저희가 내 떡과 내 물과 내 양털과 내 삼과 내 기름과 내 술들을 내게 주노라” 2:5


떡, 물, 양털, 삼(베), 기름, 술들을.. 누가 준다고요?

5절에서 고멜은,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가 (바알 신이)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다 준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고멜의 모든 육신적 필요를 충족하겠다고 유혹하는 남자가 나타나자마자,

고멜은 집밖으로 뛰쳐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민족이 뭐예요? 가만히 보니까

하나님을 믿는 민족이라고 하지만, 가나안 땅에 도착하는 그동안에도

40년 광야 생활 속에서 얼마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생을 많이 했어요?


근데 이 가나안 땅에서 농사를 잘 짓고 풍요하게 사는 가나안의 백성들이

‘바알 신이 우리들에게 이 풍요를 제공해 준다.’고 합니다.

이 소리를 듣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알의 신들을 향해서 경배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알이 그들에게 떡과, 물과, 양털과, 삼과, 기름과, 술들을

제공해 준다고 믿기 시작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축복의 근원을 혼동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이 타락의 첫 번째 단계예요.


어느 날 갑자기 우리에게도 이런 회의가 올 수 있어요.

누가 나에게 축복의 근원일 수 있는가? 

우리는 열심히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하나님을 경배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가끔씩 ‘정말 하나님이 내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는가?’

내 기도가 응답된다는 것이 실감이 나질 않고..

신앙의 실제성이 의심되는 어느 한 순간이 있을 수가 있어요.


그 순간 우리는, 하나님을 망각하고,

풍수지리나 역학에 기웃거려 보고 싶어지기도 하고,

아니면 자신의 능력/노력/수단/자기계발을 신뢰한다든지,

그 순간 그 인생의 초점은 하나님으로부터

자기가 기웃거리는 그 무엇으로 옮겨지기 시작합니다.


그 순간부터 그 모든 것이 우리의 우상이 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축복의 근원을 혼동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타락의 첫 단계입니다. 타락의 시작입니다.


▶2. 타락의 두 번째 단계 - 하나님이 주신 것을 알지 못한다. (8절)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저에게 준 것이요

저희가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저에게 더하여 준 것이어늘 저가 알지 못하도다.” 2:8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저가 알지 못한다’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내가 저에게 준 것이요’ 주께서 이 말씀을 하시면서 안타까워하는

하나님의 가슴과 하나님의 슬픔을 느낄 수 가 있어요.


자, 곡식과 새포도주와 기름 심지어 바알들을 위해서 쓰고 있는 것,

우리의 육신의 쾌락을 위해서 우리가 쓰고 있는 모든 것,

심지어는 우리가 타락을 위해서 사용하는 모든 것, 모든 물질도

실상은 누가 주신 것입니까?


하나님이 우리 성도에게

주신 육신의 건강, 모든 물질적 자원,

그것을 가지고 우리는 우리의 타락을 위해서 소모하면서도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축복의 근원을 혼동하기 시작하자

우리는 축복의 근원을 점점 잊어버리기 시작합니다.


      물론 사탄도, 자기 자녀에게 물질의 복을 준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 주는 것이지요. 영원히 주는 복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물질의 복은, 받아도 안전합니다.

      종종 하나님은, 우리에게 안전할 만큼만 주십니다. 꼭 필요한 만큼만요.


▶3. 타락의 세 번째 단계 - 축복의 근원을 잊어버린다. (13절)


“저가 귀고리와 패물로 장식하고, 그 연애하는 자를 따라가서 나를 잊어버리고

향을 살라 바알들을 섬긴 시일을 따라, 내가 저에게 벌을 주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13


여기서 13절 중간에 보면 “연애하는 자를 따라가서 나를 잊어버린다.”

이쯤 되면 여기서 완전 잊어버렸다는 거예요. 미쳤어요.


남편을 완전히 잊어버렸어요. 외간 남자에게 환장을 해갖고

완전히 남편을 잊어버린 타락한 아내의 모습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은 지금,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하나님을 아예 망각했습니다. “나를 잊어버렸다”

이것이 타락의 세 번째 단계예요.


사랑하는 남편을 떠나서 불의한 사랑을 따라 떠나간 고멜의 타락의 비극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비극이었을 뿐 아니라, 오늘 우리의 비극입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영적인 신랑이요, 축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망각하고

하나님 아닌 다른데서 우리의 필요를 채우거나

하나님이 아닌 다른데서 우리의 허영과 탐욕을 공급받으려는

이 시대의 현대인들에 타락의 모습과, 똑같지 않습니까?



◑2. 징계의 아골 골짜기


아골 골짜기는 타락의 골짜기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두 번째로 이 골짜기는 징계의 골짜기였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자를 붙들고 그를 흔들기 시작합니다. 호소합니다. 설득합니다.

매를 칩니다. 여기 하나님의 사랑의 징계가 임하기 시작합니다.


히12장은 징계의 장이라고 불리죠?

유명한 징계의 장에 보면 “사생아에게는 징계가 없다.”고 나와 있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 징계가 있거든, 하나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나를 망각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아직도 나에게 기대를 걸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1. 징계의 첫째 단계 - 장애물 설치 (6절)


“그러므로 내가 가시로 그 길을 막으며, 담을 쌓아 저로 그 길을 찾지 못하게 하리니”


자기의 필요를 채워 준다고 하니까, 자기의 허영도 채워 준다고 하니까

고멜이 그를 쫒아 간다고 할 때

남편 호세아 또는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가시로 그 길을 막아요’ 그래서 우리는 가시밭길의 찔림을 당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인생의 길에서 어느 날 갑자기 경험하는 가시입니다.


하나님은 또한 ‘담을 쌓습니다’ 또 내가 걷는 인생의 길에 우뚝 서서

내 갈 길을 막고 있는 벽이 있거든요.

갑자기 막혀버려요. 장애물입니다. “더 가면 안 돼!” 하나님의 경고가 세게 내려요.

나를 향한 사랑의 경고입니다.


내 인생의 길에, 주의 백성들이 걸어가는 길에,

내가 타락하고 방황하는 길로 나아갈 때에

갑자기 내 앞길에 가시가 나타나거든

그리고 내 행진을 가로 막는 담이 나타나거든.., 멈출 줄 알아야 합니다.


억지로 가시를 제거하고 나아가고,

억지로 담을 무너뜨리고 나아가려다가.. 종종 엄청난 파국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내 앞길에 갑자기 가시가 등장하거든, 그리고 벽이 우뚝 서거든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이 장애물은 사랑의 장애물입니다.

우리를 돌이키시려는 사랑의 장애물인 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자, 그때 비로소 뭘 깨닫게 되냐면요.. 남편으로 돌아갈 것을 깨달으면 됩니다.

(7절) “저가 그 연애하는 자를  따라 갈지라도 미치지 못하며

저희를 찾을지라도 만나지 못할 것이라.

그제야 저가 이르기를 내가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리니

그 때의 내 형편이 지금보다 나았음이라 하리라” 2:7

(이것은 하나님의 소원이었지, 실제로 고멜이 돌이킨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돌이킨 사람도 있어요. 탕자가 그랬어요.

‘돌아가는 것이 낫겠다. 이러고 사는 거 보다!’

탕자에게는 쥐엄열매가 ‘가시’요, ‘담’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탕자에게 쥐엄열매를 주신 것입니다.

그 앞에서 그는 아버지 집으로 돌이켰습니다. 그 시점에서는 탕자는 잘 한 것이죠.

돌이킬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피하고 떠나는 인생의 길에 반드시 장애물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장애물이 오거든 주님을 찬양하십시오. 빨리 깨달으십시오. 돌이키시기 바랍니다.

본 남편에게로, 여호와께로 달음질치고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2. 징계의 두 번째 단계 - 빼앗김 (9절)

안타깝게도 고멜은, 가시와 담의 장애를 만났을 때,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더 강도가 높은 고난을 주시는데.. 그것은 빼앗아버리는 것입니다.


(9절) “그러므로 그 시절에 내가 내 곡식을 도로 찾으며

그 시기에 내가 내 새 포도주를 도로 찾으며

또 저희 벌거벗은 몸을 가리울 내 양털과 내 삼을 빼앗으리라


오늘날로 말하면,

하나님이 주신 건강, 하나님이 주신 지혜, 하나님이 주신 삶의 축복들을 가지고

우리가 타락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풍요의 신을 좇았습니다.


주께서 어떻게 하시겠어요? 길은 하나밖에 없어요. “도로 내놔!”


하나씩 하나씩 없어지기 시작합니다. 상실의 체험.. 상실해서 없어지거든 찬양하세요.

“본 주인이 가져가는 구나!”

우리 진짜 남편이 가져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궁극적인 주인 되시는 하나님이 가져가시는 것입니다.


주시는 이도 여호와요. 취하여 가져가시는 자도 여호와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빼앗아 가시는 이유는, “참 복을 주시는 분이 누구인가를 깨달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삶의 자리에 제대로 서라.” 그리고 “나와의 관계를 회복하자.”

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3. 징계의 세 번째 단계 - 수치  (10절)


“이제 내가 그 수치를 그 연애 하는 자의 눈 앞에 드러내리니

저를 내손에서 건져낼 사람이 없으리라” 2:10


더 큰 징계는, 고멜을 부끄럽게 하십니다...


그게 IMF에요. (이 설교는 1998년초, IMF 직후 시점 설교)

온 세상 앞에 부끄럽게 하십니다.

괜히 어깨에 힘주고 온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타락하던 한국사람

동남아시아에 흥청거리던 유흥의 물결 죄악의 물결 부도덕의 물결,

상당한 기여를 한국 사람이 했습니다. 그리고도 우리는 자랑했습니다.

갑자기 한순간 이 나라는 무너지기 시작했고, 온 세계의 웃음거리가 되기 시작했어요.


우리는 이 부끄러움의 원인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면

우리가 경험하는 이 상실과 부끄러움의 체험은

아직도 이 민족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증거예요.


우리가 죄를 짓는대도 그냥 잘 나간다...

그럼 그건 저주예요. 아예 희망이 없어요. 그냥 놓아두신 거예요.

주님의 최대의 저주, 최대의 심판은 무엇인 줄 아십니까?

하나님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최대의 심판의 방법은 그대로 버려두시는 거예요.

포기는 최대의 저주예요. 최대의 심판입니다. (롬1:24, 26, 28)

“내어버려두사” 는 최대의 저주예요.


죄를 범하는데 잘 된다 이건 최고의 저주예요.

죄를 범했는데 갑자기 내 인생 속에 장애물이 생기고 어려움이 생겨요.

잃어버려져요. 그건 바로 “하나님이 간섭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는 나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내 인생 속에 간섭하십니다. 채찍으로 다가오십니다.


나를 향한 주의 사랑이 포기 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그 하나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우리민족을 하나님이 버리지 않으셨다고 믿습니다. (1998년 IMF 상황임)

이 민족은 회복될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하나님이 간섭하시는 거예요.

분명한 사실입니다.


제가 지나간 두 주, 목사님들을 만나고 오는데

하여튼 금년 초처럼 한국 땅에 교회가 잘되는 것이 최근 삼, 사년 동안에 없대요.


교회마다 첫째 주, 둘째 주가 초만원이래요.

우리 교회도 400명 이상 새로 왔는데, 

사람들의 마음 속에 어떤 굶주림이 있어요.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다시 열리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부흥의 싸인이라 믿습니다.

수치, 부끄러움, 우리는 이 골짜기에서 이루어지는 회복의 드라마를 보십시오.


(잠시 중간정리 하면)

아골 골짜기는 첫째로 타락의 골짜기였습니다.

두 번째로 징계의 골짜기였습니다.

그러나 이 골짜기는 세 번째로 회복의 골짜기입니다.

회복의 골짜기에서 이루어지는 회복의 드라마를 보십시오.



◑3. 회복의 단계                 ............... 설교가 너무 길면, 중간에 쉬어가는 지점............


회복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이것도 세 단계로 이루어지는데

우선 첫째로 하나님은 광야에서 우리를 설득하십니다.


▶1. 회복의 첫 단계 - 광야의 설득 (14절)


14절 “그러므로 내가 저를 개유하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거친들, 조용한 들판 다른 것에 장애를 받지 않을 수 없는 아주 조용한 곳에서

단둘이 만나 설득하기 시작합니다.

‘고멜아, 다시 돌아오지. 그래 난 아직도 너를 사랑한단 말이야.’


조용히 설득 합니다. 내가 저를 ‘개유하여’.. 타이른다는 말입니다.

안타까운 가슴으로 타이르는 거예요. 공갈하는 게 아니예요.

거친 들로 가서.. 고요하고 황량한 들판은 일대일로 만나기에 좋은 곳입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이 회복되도록 이스라엘 민족이 진정한 깨우침을 위해서

그들을 먼 들로 끌고 가셨습니다. 그게 바벨론입니다.

거기 까지 끌고 가셨어요.


놀라운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흩어지고 나서

그 먼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와서, 하나님을 열심히 경외하고 회복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먼저 광야의 체험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회복하기 전에 우리에게 광야로 데려가세요.

적막한 광야.. 그러나 이 고독한 광야에서 들려오는 음성을 가만히 들어 보십시오.

“나는 너를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너를 아직도 사랑한다.”

이 하나님의 애절한 설득의 목소리를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광야의 설득입니다.


▶2. 회복의 둘째 단계 - 첫 사랑의 교제의 회복 (15~16절)


(15절) “거기서 비로소 저의 포도원을 저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저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


두 번째로 첫사랑의 데이트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첫사랑의 교제를 회복하십니다.


“저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처럼” 젊었을 때처럼 이 말입니다.

이게 ‘아주 어리다’는 뜻보다는, ‘젊었을 때’가 더 가까운 해석입니다.

애굽 땅에서 올 때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이 나타나고, 그들을 자유케 하시고,

그들을 굳은 손으로 붙잡아 주시던 그 격렬한 사랑의 체험이 일어나던

그 첫사랑의 순간 첫사랑의 드라마 그것은 얼마나 흥분이었습니까?

그 흥분의 시절로 다시 우리를 돌이켜 끌고 가시는 하나님!


‘다시 시작하자! 다시 그 사랑에 빠지자!

우리 어렸을 때 사랑을 처음 알았을 때

맹목처럼 그 로맨스의 불붙어 오르던 그 가슴에 계절로 다시 돌아가잔 말이야!’

라면서 첫사랑을 회복하자고 요구하시는 하나님.

그 첫 사랑의 경험은 얼마나 가슴 설레는 환희였습니까? 


(16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


호세아 1장 마지막 절을 생각해 보세요.

1장에 마지막 부분에서 쭉 무슨 이야기를 했어요?

고멜이 누구를 낳습니까? 맨 처음 ‘이스르엘’,

그 다음은 ‘로루하마’를 낳습니다. 뜻은 “내가 너를 긍휼히 여기지 않는다.”

그 다음에 ‘로암미’를 낳습니다. 그 뜻은 “내 백성이 아니다.”


이것을 호세아와 고멜의 관계에 적용하면 어떤 얘기예요?

이렇게 선언 했었어요. “너는 절대로 내 아내가 아니다!” (1장, 로루하마, 로암미)


그러나 지금 뭐라고 얘기해요? 비교해 보세요.

16절에 “여호와께서 그날에 네가 나를..”

그러니까 이 여인도 도무지 그를 내 남편이라고 부를 수가 없었어요.

그녀의 시선은 남편으로부터 도피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거친 들에서 만나줄 때,

나를 설득하는 남편 품에 안겨 울면서 뭐라고 말합니까? “여보. 당신은 내 남편이야.”

첫사랑의 교제를 회복하는 선언이예요.


▶3. 회복의 셋째 단계 - 완전한 관계의 회복 (18~23절)


드디어 새로운 관계가 완전히 회복됩니다.

그 회복의 선언이 (18절)입니다.

“그날에는 내가 저희를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우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 하고, 저희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


여기서 제일 중요한 단어는 언약입니다. “새로운 언약을 맺자. 새로운 약속을 맺자.

내가 이 땅에 평안을 주고 그리고 이 땅을 복되게 하겠다.”

하나님이 새로운 언약을 선포하십니다.


(19절)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20절)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과거에 그들은 이미 부부였어요. 그렇죠?

그러나 이것은 새로운 부부관계의 회복을 선언한 것이예요.

새로운 언약을 통한 회복, 새로운 언약의 책이 바로 뭐예요? 신약입니다.


‘나는 당신에게 새롭게 결혼하겠다’고 우리의 남편 되신 여호와 하나님이

그 하나님을 버리고 나간 고멜처럼 음탕 우리를 향하여

하나님이 나를 쫒아 와서 내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너에게 새로운 장가를 들겠다. 우리 다 새로 시작 합시다.”라고 선언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런 선언을 하십니다.

(22절)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에 응하고, 또 이것들은 이스르엘에 응하리라”

‘이스르엘’의 뜻은 ‘흩어놓으신다’는 뜻도 되지만

또 하나는 ‘하나님이 심으신다’는 뜻도 되요.


처음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스르엘이었어요. 하나님이 흩어놓으신다.

범죄 때문에 주께서 흩을 수밖에 없었던 이 백성들,

그러나 이제 그들이 회개하고 주님과의 새로운 언약의 관계를 설정하자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너는 이스르엘’ 이제는 뭐예요? ‘내가 새롭게 심겠다.’입니다.

 

20절에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 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그 분이 어떤 분인가를, 얼마나 그분이 긍휼에 있어서 풍성하시고,

얼마나 나를 포기 할 수 없는 사랑으로 나를 눈동자처럼 사랑하시고,

추적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신가를 우리는 새롭게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호세아서 2장을 공부하면 재미있는 것이

2:1절하고 2장 끝절이 같은 내용이예요.


그래서 2장 전체 내용을 확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2:1절이 뭘로 시작했습니까?

“너희 형제에게는 암미라 하고, 너희 자매에게는 루하마라 하라” 뜻이 뭡니까?

암미는 “내 백성”,

루하마, “내가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입니다.


자, 마지막절이 어떻게 끝납니까?

(23절) “내가 나를 위하여 저를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루하마)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암미)

저희는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1절과 끝절이 똑같죠? 강조법입니다.


이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을 경험한 백성들은 하나님을 향해서 뭐라고 고백합니까?

“주는 과연 하나님이십니다” 정말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을 향해서 이 사랑을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마치는 말


▶호세아서의 ‘아골 골짜기’는 십자가의 상징

여러분, 이 아골 골짜기가 뭐의 상징일까요? 그게 바로 십자가예요.

십자가! 십자가는 뭡니까? 하나님의 저주의 십자가예요.


그 십자가의 인류의 모든 죄가 다 매달려 있습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를 담당하신 바로 그분.

허물과 죄 일체의 죄를 증오하시고 진노하시는 하나님 앞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노하심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십자가는 저주입니다. 십자가는 심판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우리가 받아야할 그 저주를 대신 감당하시고

자신의 몸을 깨주셨기 때문에 그 사랑을 깨닫고

그 예수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의지하는 자마다

십자가에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희망의 문이 열리는 것을 발견합니다.

이 아골 골짜기에 세워진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새로운 인생은 비로소 시작될 수가 있습니다.


우리말에는 우리말 성경에는 그 부분이 아주 선명하게 나타나 있지는 않습니다만은

15절을 다시 읽어보면

“거기서 비로소 저의 포도원을 저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그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 2:15

 

어떤 성서학자들은 '응대'를 ‘응답’이라는 말로 할 수도 있지만

“노래하리니” 라고 번역합니다. (히브리어는 원래 한 단어에 뜻이 여러 개 많습니다.)

그러면 ‘저가 거기서 노래하리니’로 번역됩니다. 

하나님이 노래하면서 우리에게 응답하며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회복하시고, 우리를 그 사랑의 장소로 인도하십니다.

우리도 또한 그분 앞에서 노래를 시작합니다.

저주의 십자가, 내 죄가 그렇게 심판 될 수밖에 없는 십자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었던 십자가,


그러나 이 십자가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포기하지 않았던, 포기 할 수 없었던 그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용서받고 새로워진 우리를 향해서 하나님은 노래를 시작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속에도 새로운 노래가 회복됩니다.

그리고 우리 인생은 새로운 노래를 부르면서 인생의 새로운 드라마를 시작합니다.

아골 골짜기에 피어나는 사랑의 이야기, 그리고 사랑의 노래 그것이

바로 여러분과 저에게 임한 하나님의 사랑의 노래인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 복음 관련  



................................ 더 읽으실 분 ................................


▶설교문의 서두에 생략된 부분

2장이 열리면서 2절에서 호세아서의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어미와 쟁론하고 쟁론하라” “저는 더 이상 내 아내가 아니다” 2:2


지금 누가 누구한테 하는 소리입니까? 호세아가 누구한테 하는 소리입니까?

'너희 어미와 쟁론하라' 이 말을 다시 말하면 ‘어머니를 고발하라’ 이런 말입니다. 

“니 어머니가 음행에 빠져 있다. 바람나 있다.” 이 말입니다.


“네 어머니와 쟁론을 해서라도 네 어머니의 자리를 찾도록 회복시키도록

너희 자녀들이 도전하라!” 이런 말입니다.

여기서 <어머니>는 '이스라엘 민족'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자녀>는 누구를 상징한다고 봐야 합니까?

   (※2절에 '자녀'라는 말이 직접적으로 안 나오지만,

   '네 어미와 쟁론하라'는 말은.. '자녀'라는 말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 <자녀>는 성서학자들은 '남은 자'들의 상징이다,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아직도 순결을 지키고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남은 자들,

그 남은 자들에게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좀 더 노력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회복시켜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라'는 메시지입니다.


그러나 이 어미를 돌이키게 하는 것 그것은

궁극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남은 자들의 사역이라기보다는

궁극적으로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회복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2절은, '남은 자'들에게 주시는 도전이 아니라면, 무슨 뜻입니까?

-바로 안타까운 하나님의 마음이 담긴 말씀입니다.


“네 어머니를 좀 설득하라. 도전하라.

지금 네 어머니는 삶의 자리를 떠나서 방황하는 가운데 있다.

다시 나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돌이키게 하라.”


이렇게 안타까운 하나님의 가슴이

결국 하나님의 가슴 속에서 있었던 하나님의 사랑이

이스라엘 민족을 다시 회복시키는 회복의 스토리가

아름다운 상징의 언어로 오늘 이 호세아서 2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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