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분류 없음/2002~2003

왜 나를 찾느냐? 2723

LNCK 2010. 11. 3. 14:03

◈왜 나를 찾느냐?           요6:22-27              02.09.08.설교스크랩, 정리



꽤 길지만 읽어두면 유익한 서론


책을 읽을 때나 영화를 볼 때, 제가 항상 주의 깊게 살피는 것은 시작장면입니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책이나 영화가 진짜 말하려고 했던 게 뭐냐하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시작부분에서 별 감흥을 못 느끼면 그 스토리에 빠져들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작가나 영화감독들은 시작부분에 꽤 정성을 들입니다.


그런데 요즘 제가 새삼 느끼는 것은

시작이 재미없더라도 끝까지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왜냐하면 시작이 재미없다고 덮어버리면,

정말 중요하고 재미있는 얘기들은 접해 볼 기회가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핵심이 되는 얘기는 중간이나 끝머리에 있더라고요.


요즘 우리 집 사람이 톨스토이의 ‘안나 까레니나’라는 소설을 읽고 있는데,

두 권으로 되어있는 아주 두꺼운 책입니다.


제가 그 책이 재미있냐고 집사람에게 물어봤습니다. 그런데 재미없대요.

그러면 왜 읽냐 그랬더니 집사람 얘기가 “책을 재미로 읽나요?” 그러더라고요.

 

 

제가 한참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오래 전에 어떤 문학평론가가 한 얘기가 생각이 나더라고요.

 

 

▶그가 소설가 이 청준 씨를 거론하면서 뭐라고 얘기를 했냐하면

“그 작가의 작품은 참 재미없다. 그러나 읽지 않으면 그 읽지 않은 분량만큼 손해다”

그렇게 썼더라고요.


또 제가 한 때 음악을 열심히 들었던 때가 있었는데,

그때 가장 듣기 어려웠던 곡들이 브람스의 곡이었습니다. 참 난해하더라고요.

그래서 듣다가 말다가 그랬는데, ‘객석’이란 잡지에서

어떤 마니아가 비슷한 얘기를 썼더라고요.


“브람스가 어렵다고 안 들으면, 음악의 한 봉우리는 언제나 처녀봉으로 남는 것이다.

거기에 있는, 다른 세계에서 볼 수 없는 아름다움을 당신은 영원히 놓치게 되는 것이다”


알맹이를 알려면, 끝까지는 아니더라도, 웬만큼 가봐야 알 것 같습니다

재미가 없더라도 가면 가는 것만큼, 새 세계를 접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음악이든, 문학이든 청중이나 독자를 배려해 주는 것은 꼭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닙니다.

때로는 작가 자신이 하고 싶은 얘기를, 자기 자신의 방법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겁니다.


우리가 성숙한 독자나 청중이라면 그것까지 소화해 낼 수 있어야 될 겁니다.

또 그것을 이해하려고 하면 그만큼 우리에게도 유익이 될 것입니다.



성경을 한 권의 책으로만 본다면,

사실 성경만큼 읽는 사람들을 배려하지 않은 책도 없습니다.

그 분량으로 보나, 내용으로 보나, 표현양식으로 보나.. 읽어내기가 참 곤란한 책입니다.

독자를 별로 의식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저자가 자기 할 말만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성경의 ‘직설적 표현’ 가운데, 

인간의 마음을 그대로 들추어서, 마치 내 마음을 발가벗기는 듯한 표현도

성경에는 서슴지 않고 나오는데요...

(주님의 말씀으로 우리가 받으면, 다 영혼에 약이 되는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도 그런 경우입니다.

여러분이나 저나 가장 민망할 때가 언제입니까?

자기 마음을 들켰을 때일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런 부분을 많이 들추어냅니다.

우리가 스스로 잘 알고 있는 사실도, 남이 뭐라고 얘기하면 우리는 반발하게 되지요.


내가 못 생긴 걸, 잘 알고 있는데 “당신 참 못 났습니다.” 그러면 어떻습니까?

사실이지만 싫지요?


아마도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가지고 있었던 마음이 그런 것일 겁니다.

실제로 위선자요, 사기꾼일지라도.. 남들이 그렇게 부르면 반발하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본문 설명


“너희는 왜 나를 찾느냐?”  요6:26참조

주님이 당시 사람에게 물으신 이 질문을,

똑같이 오늘 나에게 물으시는 질문으로 받아보세요.


그리고 정직한 대답을 고백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특하고 열심히 예수님을 찾는 무리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을 찾아 열심히 헤매는 한 떼의 무리를 볼 수 있습니다.

이 본문의 앞뒤를 뚝 떼어놓고 이 본문 자체로만 본다면

이 사람들은 참 바람직한 사람들입니다.


성경을 보면 일생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그 은혜를 갚아야만 했을 사람들이 그냥 떠나버린 경우가 참 많습니다.


문둥병자들이 기적적으로 고침을 받고도 대부분 주님을 떠났고,

이런 예는 수도 없이 많이 들을 수 있는데, 어쨌든 다들 떠났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무리들은, 예수님을 열심히 찾아다닌 겁니다.

한 번 5병2어의 기적을 맛보고도, 주님을 떠나지 않고, 계속 좇았던 것입니다.


그 전날 제자들만 호수 건너편으로 간 것을 봤기 때문에,

예수님은 어제 있던 자리에 계신 줄 알았어요. 그런데 와 보니까 안 계시는 거예요.

그래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서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건너 편 가버나움 마을에 계신 것을 알아내고

자기들도 배를 타고 그 마을로 와서 드디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요6:22~25


25절에 보면, 무리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얼마나 반가워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랍비여! 어느 때에 여기 오셨나이까?”

“선생님! 우리가 선생님을 얼마나 찾아 다녔는지 아세요?

정말 이렇게 만나게 되니 너무 반갑습니다” 그럽니다.


▶냉정하신 예수님

그런데 이상합니다.

평소에 그렇게 자상하시던 예수님이, 평소와는 다르게 아주 냉정하게 대하십니다.

“너희는 왜 나를 찾았느냐?”


예수님은 이 질문을 그들의 가슴속에 던져 놓고,

그 답을 당신 스스로 하십니다.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요6:26  주1)


그들의 감춰진 속마음을 확 벌거벗겨 버리십니다.

아마 애써 주님을 찾아왔던 무리들의 얼굴이, 순간 화끈 달아올랐을 것입니다.


▶배고픈 사람이 먹을 것 찾아다니는 것이, 뭐가 그리 큰 잘못인가요?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는 기아와 질병으로 허덕이는 많은 종족들이 있습니다.

그 실상을 알고 나면, 참으로 안타깝고 이해가 안 되는 부분도 많습니다.

10분 동안만 수술을 하면 눈을 볼 수 있는 시각 장애 환자들이 널려 있고,

우리 돈 1만원만 있으면, 한 가족이 1주일을 먹고 살 수 있는 나라도 있습니다.


르완다나 소말리아를 포함한 제3세계에서,

하루 동안 기아와 질병으로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뉴스를 접할 때,

지금이 21세기인데도 이런 일이 있다니... 기가 차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 시대는 지금부터 2000년 전입니다.

그때의 삶은 어땠을까요?

식량이 지금보다 풍족했을까요? 의료기술이 지금보다 발달했을까요?

일할 수 있는 일자리가 많았을까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비참했습니다. 거의 전국이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로마 식민지에 세금으로, 수확의 1/4~1/3을 강탈당했으니,

팔레스타인의 ‘먹고 사는 문제’는.. 정말 심각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 때에 한 선지자가 나타나서

5천 명이나 되는 백성들에게, 간단히 식사 한 끼를 해결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이었을까요?


무리가 예수님을 뒤따라 다닐만 했겠지요?

제가 그 당시에 살았더라도, 반드시 따라다녔을 것입니다.

세상에 배고픈 상태에서, 말씀도 듣고, 떡도 먹고.. 왜 안 따라다니겠습니까!


요즘도 경제문제를 해결해 줄 사람을, 선거로 지도자로 뽑는데,

그런데 양식을 줄 사람이 나타났으니.. 이거야말로 구세주였던 겁니다.

이 사람을 왕으로 세우기만 하면 적어도 굶지는 않겠구나 생각했던 겁니다.

이 사람들의 생각이 잘못 된 걸까요?


그런데 왜 예수님은, 그렇게 쌀쌀맞게 무리들을 대하신 것일까요?


무리들은 자기들의 속마음을 들켰습니다.

자기 속마음을 들킬 때 보다 민망한 때는 없습니다.

자기들이 예수님을 찾았던 진짜 목적이 발각된 겁니다.


아마도 그런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라도,

평소에 말씀도 더 열심히 들었을 것이고, 전도도 더 열심히 했을 겁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의 얄팍한 속마음은 들키고 말았습니다.


▶예수님도 가난의 설움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냉정히 생각해 보십시다.

이 사람들이 배고픔 때문에 예수님을 찾은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닙니다.


역사적 기록을 보더라도, 실제로 예수님 시대의 평민들은

평소에 하루 세 끼를 다 먹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굶는 것의 서러움이 어떤 것인지는, 당해보지 않으면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런 삶이 일상사처럼 일어나고 있는데,

어느 날 자기들의 끼니를 영원히 해결해 줄 사람이 나타났다면

그 분이야말로 구세주가 아니겠습니까?


이런 모든 상황들을 예수님이 모르셨을까요?

아셨을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30년 동안이나 평민으로 살아오셨기 때문입니다.

배를 곯아도 보시고, 가족들의 굶주림도 겪어 보셨을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좀 더 자상하게 이 불쌍한 사람들을 대해야 옳지 않았을까요?

예수님의 생각은 무엇이었을까요?


예수님이 왜 불쌍한 무리들에게 호통을 치셨을까요?

그들의 형편을 다 아셨습니다.

식민지 백성으로서 얼마나 착취를 당하는 지도 다 아셨고,

로마인이나, 귀족들에게 얼마나 멸시당하는 지도 아셨습니다.

필연적으로 배고플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를 다 아시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빵을 찾아 자신을 찾은 무리들에게 그렇게 냉담했을까요?


그 이유가 다음절에 나와 있습니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요6:27


이것이 진짜 이유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구절에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찌 보면 예수님은, 이 세상의 일들을 무시하는 것 같은 말씀을 하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뜻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허락된 노동은, 어떠한 것이라도 신성하고 고귀한 것입니다.

노동은 낙원에 있던 아담에게도 주어진 몫이었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30년 동안이나 목수로서 노동을 해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정말 꾸짖으려 하셨던 부분은, 노동(일)이 아니라,

사람들이 영혼은 소홀히 여기면서,

육체에만 지나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저 먹고 사는 것, 현세적 부귀영화에만 관심 있고, 영원을 무시하는 태도’

예수님은 그것을, 강한 어조로 책망하신 것입니다.


초대교회에 영지주의라는 기독교의 이단 종파가 있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무조건 악한 것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야말로 선하고 영원한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육체는 악한 것이고, 영혼은 선하다고 얘기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의 삶도 소중히 여기셨습니다.

돌 하나, 풀 한포기라도 함부로 하지 않으셨습니다.


물론 사람들의 그 모든 곤한 삶도 아시고 계셨습니다.

그들의 배고픔과 짓눌리는 삶의 무게를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렇지만 관심이 땅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싶었던 겁니다.


관심을 하늘나라에까지 넓혀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배를 채우는 정도의 아주 저급한 수준에 머물러 있기를 바라시지 않은 것입니다.

누구를 위해서 그렇습니까?

바로 그 무리들 자신을 위해 그래야 된다는 겁니다.


이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나그네처럼 왔다가 어느 날 홀연히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많은 사람 중에 가장 삶다운 삶을 살다가 죽은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영원한 가치를 최고로 알고 산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랬고, 요셉과 모세가 그런 삶을 살았고, 룻과 이사야가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사도 바울과 베드로가 영원한 것을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폴리갑과 어거스틴이 그렇게 살았고,

마르틴 루터와 칼뱅이 영원을 위해 살았습니다.


비록 일생 ‘가난’을 살았지만 극빈자들을 돌봄으로써      *영적+물질적+정신적 가난

마더 테레사는 가장 부유하게 산 사람이었고,

아프리카로 건너 간 슈바이처는 정글속이라도 일생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이 모든 사람들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훌륭하게, 빛으로 살았던 점 말고도 이 사람들 모두는

물질에 대해서 어떤 부족함도 느끼지 못하면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다니면서 마6:33절의 말씀을 귀가 아프게 들어 왔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 말씀을 아는 사람은 많지만, 이 말씀대로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요?

이 말씀을 실제로 체험한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본문에서 주님은 다시 한 번 이 말씀을 무리들에게 강조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일하라. 그러면 이 땅에서 소유의 문제는 간단히 넘을 것이다”

‘네게 있는 물질이 많든지/적든지, 너는 부족함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적용


▶1. 오늘 우리가 보고, 듣는 모든 것은 ‘먹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거기에 오염되고, 동화될 수 있습니다.


신문을 펴 보십시오.

TV연속극을 보십시오.

커피숍에서 사람들의 대화를 들어보십시오.


오늘 우리가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요6:27

이런 말씀을 묵상하지 않으면,

우리도 그 강물에 휩쓸려가기 십상입니다.

결국 ‘내 인생에 가장 중요한 영생을 놓친다’는 것입니다.


▶2. 풍부와 부요가 내 영혼을 좀 먹을 수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팔레스틴의 가난과 대조적으로/정 반대로

당시 로마제국은 흥청망청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주2)


여러분, 고난당하고, 짓밟히고, 가난하고, 괴로운 사람이

신앙을 떠나서 잘못될 가능성이 10%라면,

반대로 승승장구하고, 부유하고, 출세한 사람이

신앙을 떠나서 잘못될 가능성은 90%입니다.

이게 인정하기 싫지만, 우리 현실입니다.


주님은 그래서 ‘우리 가난을 불쌍히 여기시지만’

더 소중한 ‘우리 영혼을 위해서’

내가 원하는 대로, 내 소원을 다 허락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참된 기독교 신앙은,

많이 가져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얼마를 가지든지, ‘충분함/자족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많이 가져야 행복하다'는.. 세상의 미디어에 미혹되어서는 안 됩니다.


▶3. 오늘 내가 주님을 따르는 동기는 무엇인가요?

서두에 던졌던 질문,

“너희는 왜 나를 찾느냐?” 고 물으실 때,

우리는 어떻게 대답할 것입니까?


그런데 어떤 목회자들은

너희가 주님을 열심히 찾을 때 ‘먹고 배부르게 될 것이다’라고 가르칩니다.

(구약에 일부 성경에 그런 구절이 있기도 하지만.. 성경의 주제가 아닙니다.

성경은, 성공과 축복의 안내서가 아니라, 영생과 구원의 안내서 입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지금 주님이 경고하신 말씀에, 정반대로 살고 있습니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많은 사람들이 바로 그것을 위해서만 일하고 있습니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는 밤낮으로 일하고 있으면서도

불멸의 영혼을 위해서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본문의 무리들은, 얼핏 보면 예수님을 찾은 이유가

신앙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였지만

예수님은 그 은밀한 동기들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미혹되지 않으셨습니다.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적어도 육체를 위해 일하는 것만큼, 영혼을 위해서도 예수를 열심히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영원한 양식을 위해서도, 모든 수단들을 다 사용해서 일해야 됩니다.

때로는 숨겨진 보물을 찾아서 땅을 파는 사람처럼.. 그렇게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우리는 레슬링 하는 선수처럼, 열심히 기도의 씨름을 얍복강 야곱처럼 해야 됩니다.

자유를 위해 싸우는 독립투사처럼, 죄와 세상과 마귀와 대결해서 매일 이겨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썩는 양식을 구하는 노예가 되고 맙니다.


▶괴테의「파우스트」의 줄거리는 대충 이렇습니다.

주인공인 파우스트 박사가 사탄과 흥정을 합니다. 흥정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사탄은 앞으로 24년 동안 파우스트에게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게 하고,

24년이 지난 이후에는 사탄은 파우스트의 생명을 거두어 가는 것입니다. 

이게 계약의 내용입니다.


파우스트 박사는 이 작품에서 24년 동안

온갖 명예와 부와 권력과 존경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그렇게 짧을 수가 없었습니다. 24년이 쏜살같이 지나갔습니다.


24년이 되던 밤 12시에서 1시 사이에 사탄의 명령이 떨어집니다.

약속대로 파우스트의 생명을 가져오라! 사탄이 파송한 부하가 있습니다.

그 이름이 메피스토펠레스입니다.


메피스토펠레스가 와서 파우스트 박사에게 말합니다.

12시에서 1시 사이에 나는 그대 생명을 거두어 가겠다.

이 작품의 대부분은, 12시~1시 사이의 긴장과 갈등과 회한에 관한 것입니다.


동네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파우스트 박사 집에서 뭔가가 생겨납니다.

이제 마지막 인생이 결판나는 순간입니다.


그 집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는데, 동네사람들이 들어보니

마치 세상에 있는 모든 뱀들이 몽땅 모여서 또아리를 틀면서

서로 얽히고 부딪히고 울부짖는 소리 같습니다.


지금 파우스트 박사를 데리고 가는 그 마지막 장면을 연출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한참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는데

이 소리가 1시가 가까워오면서 거의 절정에 이르다가

1시가 다 되자 소리가 점점 약해지면서

그 속에서 파우스트 박사의 비명이 울립니다. "사람 살려 주시오."


괴테가 보기에 우리 인생은 24년만을 보장받은 사람들입니다.

24년이 지나면 우글거리는 뱀들이 와서, 우리의 생명을 가져갈 것입니다.

살려달라는 절규를 세상 곳곳에서 듣습니다.

절규하는 소리가 잦아들면 우리의 생은 끝이 납니다.


인간의 기막힌 고뇌를 이 작품 속에 묘사했는데.. 우리가 한 번 깊이 곱씹어봐야 합니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파우스트의 길을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1)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요6:26

여기서 ‘표적’은 좋은 의미로 쓰였음.

즉 표적(기적)을 보고 나를 그리스도로 믿게 된 것이 아니요.. 라는 뜻 


주2)

반면에 로마제국의 영화(榮華)는 참 대단했습니다.

막강한 군대와 찬란한 문화는, 지금까지도 유럽전체를 하나로 묶고 있을 정도입니다.

지금도 슬로바키아 국경부근의 하인브룩이나 뫼들링 외곽에 가면

5, 6층 높이로 계속 이어진 빨간 벽돌의 수로를 보실 수 있을 겁니다.

그게 뭐냐하면 로마시대의 상수도관이었답니다. 그 관이 로마까지 연결됐었다는 겁니다.


그 옛날에 로마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서 얼마나 대단한 일을 했나,

또 기술적으로 그게 가능했다는 게 참 놀랍습니다.


주후 50년대에 이르러서 로마제국의 사치는 아주 극에 달했다고 합니다.

귀족들의 관심은 오직 먹고 즐기는 데 있었다고 합니다.

공작새의 골과 나이팅게일의 혓바닥 요리로 잔치를 베풀고,

한 벌에 현 싯가 50만불 정도나 되는 웨딩드레스를 입고 결혼을 한 흔적도 있다고 합니다.


잔치 자리에서 더 이상 먹을 수 없을 만큼 배가 부르면

구토를 해서 다 토해내고 나서, 다시 또 먹었다고 합니다.

종들은 그 탁자 밑에서, 잔치 시간 내내 구토물을 닦아내고 있었다고 하네요.

 

그때의 로마사람들의 관심은 오직 하나, 세상의 좋은 것들을 다 즐겨보는 것이었습니다.

관심이 모두 쾌락에 있다 보니, 죽는 것도 모두 거기에 관련된 병이나 사건으로 죽고

결국 로마제국은 안으로부터 망해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 물질과 성공   


 

'분류 없음 > 2002~2003'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   (0) 2011.06.25
모세의 위대성  (0) 2011.06.19
옥합을 깨뜨리는 마음 2669  (0) 2010.09.30
듣는 귀, 듣는 마음 2577  (0) 2010.07.31
이스라엘, 모세 그리고 우리 2499  (0) 2010.0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