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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니엘을 마주 대하는 가정 2729

LNCK 2010. 11. 6. 14:20

 

◈브니엘을 마주 대하는 가정                  창33:10                                 출처보기



가정에, 형제간에 서로 화목하려면,

형제간에 서로를 ‘하나님의 얼굴(브니엘)’로 마주 대해야..



야곱이, 형 에서의 장자권을 가로채고, 형의 보복과 죽음이 두려워 도망가서 살다가

형 에서를 다시 만나는 장면이 창33장의 이야기이다.


창32장은, 이제 내일이면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형 에서를

만나게 될 것을 두려워하여 잠 못 이루는 야곱의 모습을 보여준다.


야곱은 홀로 깊은 시름에 잠긴다.

장막을 떠나 얍복강 마루터에 앉아 밤을 지새운다.


그 때, 천사가 나타나 야곱과 씨름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동이 터오자 떠나려는 천사를 붙잡고 자신을 축복해 달라는 야곱에게

천사는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붙여준다.


야곱은 천사와 헤어진 뒤에야 그가 하나님(또는 전권 대사)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그곳의 이름을 ‘브니엘’이라고 부른다. 이 말은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창32:30


 


하나님의 얼굴, ‘브니엘’을 보았던 야곱은

창33장에서 자기를 보면 죽일 것이라고 알았던 형 에서를 만난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가!

형제간의 살인으로 피로 물들여질 현장은.. 정작 형제간의 눈물의 장이 된다.

둘은 서로 껴안고 입을 맞추고 펑펑 운다.


자신의 죽음을 면하기 위해 미리 형에게 보냈던 온갖 재물이

자신을 죽음으로부터 구해 준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반목과 불신과 미움은

끊을 수 없는 형제간의 핏줄로 인해 모두 사라진다.


그런데 야곱이 형을 보고 하는 말을 보라.

성서가 전하고자 하는 핵심이다.

창33:10절에서 야곱은 형 에서를 껴안고

“형님, 형님의 얼굴을 뵈오니,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것 같으오”라고 말한다.


형 에서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봄으로써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다.

미움이 사랑으로 변하고, 싸움이 평안으로 변한다.


‘하나님의 얼굴’과 관련한 이스라엘의 신앙전승을

구약성서 전체의 맥락을 통해 살펴보면,

야곱이 천사를 만나 ‘브니엘’(하나님의 얼굴)이라고 이름 짓는 것과,


형 에서를 만나서 형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브니엘)을 보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의 중요성을 구약성서 전체 맥락에 비추어 볼 필요가 있다. 


야곱은 형 에서를 만나면 죽을 것이라고 알았고 두려워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셨다.

하나님의 얼굴을 마주 대했던 야곱은

(이스라엘의 전승에 따라) 하나님의 얼굴을 보면 죽을 줄 알았던 자신이 죽지 않았음을 알고 놀란다.


그리고 죽음이 생명으로 바뀐 그 자리를 ‘브니엘’(하나님의 얼굴)이라고 이름 지은 것이다.

이어서 이와 동일한 사건이, 형 에서를 만나면서 재현된 것이다.


1) 형 에서의 얼굴을 보는 날이.. 죽는 날인 줄만 알았던 야곱은,

'죽을 상황에서도 어쩌면 살아남을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던 것이다.

 

2) 또는 '(하나님 얼굴을 뵈었으므로) 이미 죽었을 목숨이 살았으니,

이제 덤으로 산다고 생각하니, 죽음을 초월해 버린 것이다. 

 

3)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얼굴/임재/만남에서 오는 성령충만, 담대함, 은혜가 너무 커서

형 에서가 주는 두려움을 압도해 버린 것이다.

 

그 결과, 야곱은 에서를 만나서,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었다.

죽음이 아니라, 화해였고, 뜨거운 형제간의 사랑이었다.


그래서 형 에서의 얼굴을 보고,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어제 밤에, 얍복강에서, 자기와 씨름할 때, 자기를 죽일듯이 덤벼든 그 어떤 존재가

나중에 알고보니 '하나님'이요, 자신을 축복해준 하나님의 천사임을 경험했는데,

 

아마 에서의 얼굴이, (상상이지만) 그 씨름한 천사와 닮은 점이 있었던 것 같다.

적어도 자기를 죽이려 덤벼든다는 점에서는.. 닮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에서도, 서로 울며 껴안고 다시 쳐다보니,

자기를 축복해주는 사람으로 변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제 밤 사건이, 그대로 재현된 것이다.

그래서 야곱은, 에서의 얼굴에게서 '브니엘, 하나님의 얼굴'을 찾았던 것이다.

닮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적용하며

 

가정의 불화와 형제간의 갈등과 반목과 대립이 점점 더 심해져 가는 오늘날,

가정의 진정한 평화와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얼굴’이 나타나는 가정이다.


하나님의 얼굴이 나타나는 가정이란,

가족들이 서로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마주 대하는 것이다.

그럴 때에야 그 가정은,

야곱이 이름 지었던 ‘하나님의 얼굴’이 나타난 ‘브니엘’의 가정이라 불려질 것이다.

 

형제간에, 어쩌면 지킬박사와 하이드의 두 얼굴처럼,

'하나님의 얼굴'과 '죽이려는 얼굴' 두 개가 동시에 감추어져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형제에게서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럴려면, 내가 먼저 '하나님의 얼굴'을 뵈어야 하고,

내 얼굴에 먼저 '하나님의 얼굴'이 나타나야 할 것이다.


 

◑구약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얼굴(브니엘)


우리말에 ‘얼굴에 다 쓰여 있다’라는 말이 있다.

사람의 마음이 얼굴에 나타난다는 말이다.


상대의 환한 얼굴을 보면 자신의 마음이 환해지기도 하고,

또한 환한 얼굴은 상대의 노함을 가라앉히기도 한다.

그래서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라는 우리 속담도 있다.


옛 이스라엘 사람들도 얼굴은 모든 이의 마음의 표현이라고 여겼다.

잠15:13절은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라고 말한다.


특히 성서의 기자들은, 종종 하나님의 마음을 그의 얼굴로 표현한다.

하나님의 저주는 곧 그가 자신의 얼굴을 돌렸기 때문이며,

이와는 반대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은 하나님이 당신의 얼굴

당신의 백성들에게로 향하는 것으로 보았다.


신31:7절에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버리며

내 얼굴을 숨겨 그들에게 보이지 않게 할 것인즉

그들이 삼킴을 당하여 허다한 재앙과 환난이 그들에게 임할 그 때에

그들이 말하기를 이 재앙이 우리에게 임함은

우리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시지 않은 까닭이 아니뇨 할 것이라.”


욥은 고난 중에

“주께서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우시고, 나를 주의 대적으로 여기시나이까?”(욥 13:24)라고 외친다.


시13:1절엔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라고 울부짖는다.


이와는 반대로 민6:25~26절에 보면,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여호와께서 모세를 불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축복하라고 명한다.

 


하나님의 얼굴이 우리에게 비취기를 기도한다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뵌다는 말일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얼굴을 본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출33:20절에 모세가 하나님께 주의 영광을 뵙기를 청하자 하나님께서 이르시기를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라고 한다.


또한 모세가 하나님의 산에 오를 때

백성들은 하나님을 보면 죽을까 두려워 산 아래 머물게 하였다.

선지자 이사야가 소명을 받을 때에도

그가 하나님(얼굴)을 본 이유로 두려워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사야6:5절에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얼굴)을 본다는 것은 금기 사항이었다.

그것은 만일 그를 본 사람이 있다면,

무언가 하나님의 상(모습)을 그릴 수 있었기에 그렇다.


그러나 성서는 하나님의 상을 절대로 만들지 말라고 하셨다.


그런데 성서는 이상과는 다른 보도도 하고 있다.

인간이 하나님을 볼 수는 없지만, 하나님이 택하시면 그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삿6:22~23절에 보면, 하나님이 사사 기드온을 택하셨을 때,

기드온은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줄 알고, 그를 대면하여 본 것으로 인해 슬퍼하고 두려워한다.


그런데 그런 기드온을 향해 하나님은,

기드온을 안심시키고 그가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23


출24:11절에도, 모세가 하나님의 산 시내산에 오를 때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의 대표들이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보았고 하나님과 함께 먹고 마셨다고 나온다.


성서의 이런 상이한 보도들은, 하나님을 본다는 것이

그의 어떤 실제 모습을 보는 게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는 것임을 의미한다.                                ▣ 행복한 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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