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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와 예언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2732

LNCK 2010. 11. 8. 15:58

 

◈모세와 예언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눅16:19-31                    출처보기, 정리


 


오늘 설교의 중심주제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에 관한 이야기가

오늘의 우리들에게 가르치려는 중심적 교훈은 무엇인가?> 라는 문제입니다. 

이 물음에 대해서 많은 성서 해석가들은 여러 가지 관점에서

또 여러 가지 모양으로 대답해 보려고 하였습니다. 주1)


오늘 본문의 줄거리는 대강 다음과 같습니다.


▶부자의 현명한 탄원   

이렇게 죽음 이후의 저 세계에 드러난 뒤바꿔진 운명 앞에서

부자는, 상류층의 지식인답게, 섬광처럼 번쩍이는 예지를 가지고,

천상의 아브라함을 향하여 다음과 같은 매우 인간적인 요청을 드려 봅니다.


아브라함 조상님, 제발 소원입니다. 

저 나사로를 제 아버지의 집으로 보내주십시오. 

제게는 5형제가 있는데 저 나사로를 그들에게 보내어,

즉 내세를 다녀 온 자의 생생한 증언을 들려주는 그런 센세이셔널한 방법을 통하여

아직도 지상에 남아 있는 저 나의 유가족들만이라도

이런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도록 경고하여 주십시오.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 되겠습니까? 

아브라함 할아버지, 이것은 저의 최후의 소원입니다.


실로, 이 부자의 호소는 매우 인간적이면서도, 의리도 있고,

사후 내세에서도 ‘복음전파를 위해서’ 뭔가 최선을 다하는, 다분히 감동적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부자의 탄원에 대해서 오히려 이렇게 대답합니다.

    부자여, 그런 문제는 걱정하지 말라! 

    네 형제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지 않느냐? 

    그러니, 그들은 저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들으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부자는 남다른 센스를 가진 상류층 지성인이므로

아브라함의 말에 대하여 당장 반론을 펴고 재청원을 올리며 다음과 같이 아룁니다.


아브라함 조상님,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요즈음 세상에 모세의 가르침(구약성경)과 예언자들의 가르침 정도로

회개하고 인간변화를 일으킬 지성인이 도대체 어디 있습니까?  

훈계니 설교니 하는 그런 것 가지고서는 어림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가르침을 받고 뉘우치며 회개하는 일 따위는

정말 하기 싫어합니다.  그것이 인간 실존의 본질입니다.

(지옥에 온 저를 보십시오. 제가 산 증인 아닙니까!)


이러한 상황은 상류층의 지성인 사회일수록 더욱 그러해서,

모세의 말(성경)과 예언자(설교자)들의 경고 따위로써

인간변화를 시도하려는 것은,

너무 순진하고 너무 세상을 모르는 매우 나이브한 발상입니다.  


제발, 다시 말씀 드리오니, 제 탄원을 들어 주소서. 

세상에 남아 있는 저들은 정말 너무 완고해서,

모세의 말과 예언자들의 경고 따위로서는 끄떡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 난 사람’      

즉 이 ‘부활한 사람’이 찾아가는 그런 엄청난 충격적 사건을 통해서라야만

비로소 믿음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부활논리를 끌어들인 부자

참으로 충격적인 반론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이 부자는 놀랍게도 기독교 신앙 최대의 쟁점인

‘부활신앙’을 걸고 아브라함과 시비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신앙!  그것은 기독교 신앙의 기본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의 부활 사건이라면,

능히, 부자들 사회의 의식구조를 변화시키는 일 쯤은 이룩할 수 있다는 생각,

즉 “죽은 자의 부활” 사건이라면,


능히 고질적인 지식인 사회의 “이기주의”라는 의식 구조 쯤이야

자신 있게 변화 시킬 수 있으리라는 이 부자의 신념이야 말로 

바로 우리네의 기독교적 신앙이 갖고 있는 세계 선교의

가장 자신있는 대안(代案)이기도 한 것이 아닙니까? 


죽은 자의 부활사건, 그것은 기독교적 복음의 최후 보루라고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은 아닐 것입니다. 


부자는 여기서 바로 이 복음주의 최대의 무기인 부활논리를 끌어 들여서

아브라함의 논리를 반박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을 갖게 되는 역사는, 의외로 단순합니다. 거창하지 않습니다. 말씀사역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결론부에서

아브라함은 매우 단호한 어조로서 저 부자의 항변에 대해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부자여, 그렇지 않다! 만일 저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서 말한다고 해도.. 저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


말하자면, 오늘 우리가 읽은 신약성서는

부활신앙의 충격보다도 오히려

모세와 예언자의 말씀, 즉 성서의 말씀을 믿고 실천하는 그 일이

우리를 보다 더 확실하게 구원의 길로 가게 하는 역할을 한다

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입”을 빌려서 말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만일 저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이 구절의 ‘듣는다’는, 그저 귀로 듣는다는 뜻과 아울러

그 들은 말씀을 실천한다는 뜻이 함께 포괄적으로 담겨 있습니다.

행함이 없으면 ‘들은 게’ 아닌 것입니다.

성경 전체가 아마 그럴 것입니다.


놀라운 사실입니다.  진실로 충격적인 사실입니다. 

부활 사건의 기적보다도,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씀,

그리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그것이

인간변화와 인간구원에 보다 더 근원적이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주장은,

실로 매우 혁명적인 주장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이 말씀사역의 중요성이, 본문에 2번이나 강조되어 나옵니다.

본문은 결론부에서, 아브라함의 입을 통하여 증언했던 그 말씀을

2번이나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눅16:29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31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성경과 설교)이 우리 가운데 있는데,

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죽은 자의 부활사건의 기적을 가지고 설득시킨다고 해도

복음은 진정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씀으로만 일관되게 대답하고 있을 뿐입니다.



▶정리하면,

(1) 사람의 변화, 회개, 구원 등의 인간 구원의 사역은, 

부활 사건과 같은 그런 엄청난 사건을 통해서도 결코 이루어지기가 쉽지 않은

‘지극히 어려운 사건’이라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는 점이고


(2) 인간 구원 사역은,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서 말하는 것과 같은 그런 엄청난 가시적인 기적의 효과,

어쩌면 성령 사역과 같은 것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그런 것이 아니고,


단지! 모세의 말과 예언자들의 말을 듣고

실천하는 그 곳에서, (어쩌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말씀 사역을 통해서)

그야말로 말씀에 의하여, 그 말씀을 들어서(순종해서)

점차적으로 점진적으로 인격적 변화가 조금씩 조금씩 일어나는 그 곳에서,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인간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렇습니다. 회개를 통한 인간변화, 그것은 이루어지기가 지극히 어려운 일입니다. 

하나님조차도 그의 아들의 죽음이라는 엄청난 희생의 대가를 치루면서까지도

이루어내기 힘들어 하셨던.. 그런 어려운 사건이 바로 인간변화요, 구원입니다. 


성서는  회개하기가 쉽지 않는 이러한 인간현실을

“목이 곧다!” “음란한 세대다!” “무지하다!”

“어린 아이가 장터에 앉아서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아니하고

애곡을 하여도 함께 가슴을 치며 울어 주지 않는 현실!” 등의 말로 묘사하였듯이


실로 이 세상과 이 세상의 인간 현실은

회개를 통한 인간구원의 가능성은 전혀 보이지 않는 그런 암울한 현실이라고 하겠습니다. 


본문은 이것을 가리켜서 ‘죽은 자의 부활을 통해서도

인간변화와 구원은 이루어 내기가 어렵다’라는 말로서 요약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 선교는 이 사실을 솔직하고도 명확하게 인식하고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적용

(1) 그러나 죽은 자의 부활 사건을 통하여조차도

인간변화의 구원은 이루어 내기가 어렵지만,

그 어려운 일이

오직 모세의 말과 예언자(성경과 설교자)의 말을 듣고 실천하는 그 일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는 이 선언은,

자칫 말씀사역에 흥미를 잃은 우리들이, 귀담아 들어야 하는 메시지입니다.

말씀사역이 기독교 사역의 근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말씀을 읽고, 연구하는 삶으로 돌아갑시다.

오늘날 여간 애쓰지 발버둥치지 않으면,

말씀연구 매일 1시간 하는 것이 정말 어렵습니다.

영혼이 병들어 있기 때문에, ‘식욕’을 상실한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습니다.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 행13:22


그런데 ‘마음에 합했다’는 것이 과연 무엇을 뜻하는지.. 궁금합니다.

하나님께 아부를 잘했다는 뜻인지요? 물론 아니지요.


그런데 해석의 단서clue를 솔로몬에게서 찾게 됩니다.

왕상3:9,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10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맞은지라


솔로몬이 지혜(말씀을 통해 얻은 지혜)로운 마음으로

백성을 잘 섬긴 것이, 주의 마음에 합한(맞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윗도 말씀으로 주의백성들을 잘 섬겼다/먹였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것이었습니다.


시78:70, 또 그 종 다윗을 택하시되 양의 우리에서 취하시며

:71 젖 양을 지키시는 중에서 저희를 이끄사 그 백성인 야곱, 그 기업인 이스라엘을 기르게(먹이게) 하셨더니

72 이에 저가 그 마음의 성실함으로 기르고(말씀을 먹이고) 그 손의 공교함으로 지도하였도다.


말씀을 잘 먹여서,

다윗처럼,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양떼들을, 다윗처럼, 잘 기르고 먹여야 하겠다는, 남다른 열정과 기도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2) 그러려면, 나/전파자 자신이 먼저

오늘 말씀을 듣고, 그 의미를 하나 하나 실천해 나가는 노력을 통해서만,

내가 증거 하는 그 ‘말씀’이 공허한 메아리가 아니라,

청중의 삶에 ‘구원/변화/회개의 메시지’로 날선 검처럼 역사할 것입니다.


(물론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씀은 간 곳 없고,

제도적 교회의 종교형식에만 집착하는, 공허한 메시지 사역을 옹호하는 것은 아닙니다.)


구약성서 신명기 30:11-14도 분명히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이 명령은, 네게 결코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 니다!

그것은 결코 하늘에 있는 것은 아니니, 그러므로 네가 말하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 할 것이 아니라... 

오직 그 말씀은 네게 심히 가까워서 바로 네 입에 있으며 바로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능히 이를 실천할 수 있느니라.


기독교 사역의 본질은, 대형 이벤트를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필요하다 하더라도)

큰 어떤 업적을 성취하는 것도 아닙니다.(필요하다 하더라도)

그건 그런 은사나 사명을 받은 일부 사람만 하는 것이고요..

또 그런 것 늘 바라보면, 날마다 얼마나 스트레스를 많이 받겠습니까.


그런데 아니고,

하루에 한 절 말씀이라도,

내가 연구하고/묵상하고/한 번 그대로 살아보고...

그렇게 매일 사는 것..

그것이 기독교 사역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담될 것도 없고, 욕심 부릴 것도 없고, 그저 일상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무슨 큰 업적 성취하라고 부른 것이 아니라,

‘매일 하나님과 교제하고, 순종하라’고 부르셨습니다.

그 ‘작은’일을 매일 계속 해 나가다보면.. 큰 역사도 일어날 줄 믿습니다.

안 일어나도 큰 상관없지만요..



........................................


주1)

그러나 혹자는 우리의 본문을 통하여

오히려 현세와 내세 사이에서 일어나는 삶의 가치의 뒤바뀜의 의미

만을 읽어내려고 할지도 모릅니다. 


즉 현세에서 부유하고 사치스러운 삶을 산 자들은

내세에서는 고통스럽고 소외된 삶을 살게 되고

또 현세에서 천대받고 가난한 고통의 삶을 산 자들은

내세에서는 부족함이 없는 위안을 받는 평화의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을 가르치려는 것이

오늘 본문이 가르치려는 교훈의 중심이라고 주장할수도 있습니다. 


그런 교훈이 있다 하더라도, 본문의 핵심적 주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본문의 핵심적 주제는, 위에서 제/설교자가 설명했습니다.                       ▣ 말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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